(조선문학 통권 282호, 2014.10. 01. 보정본)

(한맥문학 통권 231호, 2009.11. 25)

   주근옥(Gueune-ok JOUH)

1898년, 이승만신체시 “고목가”로부터 출발한 한국의 현대문학(Contemporary Korean Literature)이 110년을 넘어서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문학은 아직도 “자유시(Free verse)”를 현대시(modern poem)의 절대조건으로 믿고 있는 것이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이 되고 있다.

그러나 자유시는 Elegiac Stanza, Ballad Stanza, Short Metre, Long Metre, Ode, Rondeau, Villannell, Triolet, Sonnet, Blank verse 등과 같은 시형식 중의 일종에 불과할 뿐이며, 또한 이것은 현대에 불쑥 나타난 것이 아니라, 엘리자베스 조(The Age of Elizabeth, 1558~1603; 셰익스피어 활동시기)의 서정시와 트루바두르(troubadour)의 서정소곡과 그리스의 합창곡, 그리고 시편(The Book of Psalms)에서 찾아볼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 고정관념부터 깨지 않으면 안 된다. 모더니티(modernity)는 시형식의 전환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사고방식의 전환을 의미하는 것이다.

따라서 아방가르드(Abant-garde)를 자처하는 사람들이 비-인식론적인 선전(propagender)과 선동(agitation), 은유와 같은 수사의 방식으로 모더니티에 대해 외쳐대고 있지만, 그들의 외침은 2가지 관점에서 비판을 면치 못한다. 첫째, 정치적으로는 민족주의의 자폐성이 그것이다. 자폐성은 주변의 관점을 살피지 않고 자신의 생각만을 관철하려고 한다. 다시 말해서 민족문학의 우월성을 주장하지만, 이것은 칼날의 양면성과 같은 것이어서, 요리를 하거나 방어의 수단으로 사용될 때는 유용하지만, 타인이나 타민족을 공격하는데 사용되면 살인 무기가 된다. 나치즘, 파시즘, 군국주의, 시오니즘, 테러리즘 등이 그것의 예가 될 것이다. 이러한 극단적 민족주의가 아니더라도 1789년의 프랑스 대혁명, 차알스 부르봉의 복고왕조를 쓰러뜨린 1830년의 7월 혁명, 선거권 확대의 요구를 관철시키며 루이 필리프(Louis Philippe)의 정권을 무너뜨린 1848년의 2월 혁명, 1871년의 파리 코뮌, 1905년의 실패한 러시아 혁명, 1917년의 러시아의 볼셰비키 혁명(쿠데타라고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등을 통해 생산된, 이데올로기가 직접적으로 표출된, 양단논법의 문학작품이 모더니티를 보유하지 못했던 것을 한국문학은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Maksim Gorky의 작품 “밑바닥” 등은 볼셰비키·레닌·스탈린주의가 아니라 제1극화의 마르크스주의 리얼리즘의 작품. 정치적으로는 Lenin 그리고 원래 멘셰비키였으나 레닌의 쿠데타에 동조했던 Trotsky와도 다르게 분파한 Stalin·Zhdanov와 동조하고 있다). 물론 몽타주 기법을 채용한 세르게이 아이젠쉬타인(Sergei M. Eisenstein, 1898~1948)의 영화 “전함 포템킨”이 있긴 하지만, 이는 몽타주의 인위성에도 불구하고 이데올로기의 발설을 억제하고 객관성을 실현하면서도 그 제1극화의 마르크스주의 리얼리즘을 능가하는 제2극화의 맥락을 보여줬기 때문에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둔 예외가 될 것이다.

둘째, 예술에서의 로맨티시즘, 미래주의, 다다이즘, 초현실주의의 환상과 파괴성을 아방가르드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로맨티시즘의 경우 흄(T. E. Hulme)에 의해 이미 부정되었고, 1910년대~1920년대 초까지 성행했던 후자의 경우, 다시 1950년대에 포스트모더니즘이라고 하는 명목으로 성행한 바 있지만, 이는 전자의 반복 또는 퇴행에 지나지 않은 것이며, 특히 그레마스(Algirdas Julien Greimas)에 의해 정신분열 증세라고 하는 비판을 받은 바 있다.

칸트(I. kant), 헤겔(G. W. F. Hegel), 후설(E. Husser)로 이어지는 인식론은 불확실성을 추구하는 현대과학, 초월논리학, 르네 통(René Thom)의 파국이론(catastrophe theory)과 조지 불(George Boole)의 수리논리학의 기호체계인 Boolean algebra(불 대수) 이론 등의 현대수학을 포섭하면서 트라이앵글과 같은 최고 정점의 상위어로 작용한다. 따라서 이것의 하위어로는 모더니즘과 기호학(semiotics; semiology는 전자의 하위개념이다)으로 분할된다.

먼저 모더니즘의 경우, 이미지즘과 포스트모더니즘으로 분할되고, 이미지즘은 "Amygism(Amy Lowell)"과 "Vorticism(Ezra Pound)"으로 분할된다. 시각적 요소와 청각적 요소 둘 다 중요시했던 에즈라 파운드(Ezra Pound)는 이미지즘이 에이미 로우얼(Amy Lowell)의 경제적 지원을 받으며 차츰 정적인 로맨티시즘의 복귀로 흐르게 되자, 이러한 현상을 “에이미지즘(Amygism)”이라고 비난하며 이미지즘운동과 결별해 버렸다.

에즈라 파운드의 경우, “시는 산문처럼 문법에 맞게 정확하게 쓰여야만 한다. 그 언어는 고조된 긴장(단순성)에 의해 절약된 파롤로부터 조금이라도 일탈해서는 안 되는 그래서 정제된 언어여만 한다. 거기에는 독서로 배워 발음이 잘 안 되는 말이 있어서는 안 되며, 완곡법이 있어서도 안 되고, 전도가 있어서도 안 된다. 그것은 모파상의 훌륭한 산문처럼 단순하여야 하며, 스탕달처럼 견고하여야만 한다. 거기에는 감탄사적인 것이 있어서는 안 된다. 벗어나 달아나는 말은 아무것도 없다. 부여된 말은 어리짐작의 빗댐으로 완성할 수 없으며, 이것은 말의 1차 개념(intention)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한다. 그러나 산문처럼 단순해야 한다고 해서 운율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하는 것으로 착각해서는 안 된다. 키타가와 후유히코(北川冬彦, 1900~1990)의 경우 이 언급을 오해하여 실제로 산문이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한국의 경우도 이에 동조하는 문인·학자들이 있다. 에즈라 파운드는 계속해서 “거기에는 상투적인 문구, 관용어구, 스테레오타입의 신문기사 투가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 “두 다리 걸친 형용사(“ddled mosses dank; 축축한 혼탁한 이끼”와 같은)”를 사용해서는 안 된다는 것, 다시 말해서 이미지즘은 “객관적인 것(미끄러짐이 없는 것, 직접적이고 명백한 것), 형용사의 고도한 사용이 없는 것, 실험을 허락하지 않는 은유가 없는 것, 솔직히 말하는 것”이라고 하고, “리듬에 있어서는 박절기(拍節器)의 시퀀스가 아닌, 음악적인 프레이즈(phrase, 화성에서 두 아티큘레이션을 이음줄로 이은 것)의 시퀀스를 조직하는 것”이라고 하며, “상징주의자들의 상징은 산술의 숫자처럼 1, 2, 그리고 7처럼, 고착된 가치를 가지고 있다. 이미지스트의 이미지는 부호 a, b, 그리고 대수의 x와 같이 변화무쌍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언급한다.

그 후 이미지즘이 현실을 외면하고 예술을 위한 예술운동에 그치고 말았다고 비판하며 등장한 것이 포스트모더니즘이다. 이는 다시 패러디와 매직리얼리즘, 그리고 미니멀리즘으로 분할된다. 패러디(parody)의 경우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Jorge Luis Borges)와 같은 작가가 있기는 하지만, 필자는 그 작가와 작품의 창의성에 깊은 우려를 갖고 있는 편에 속한다. 매직리얼리즘(magicrealism)의 경우, 권 택영에 의하면, “포스트모더니즘은 모더니즘의 고급화된 예술양식, 개인 감흥의 절제와 달련, 그리고 아직도 소설이 무언가 진지한 도덕(moral, 증거는 없지만 확실히 존재하는 것, 즉 방향범주가 아닐까? ―필자 주)을 전달하려 한다는 것에 대한 도전이었다”고 하며, 따라서 “긴즈버그와 친구였던 윌리엄 버로우는 「발가벗은 점심(The Naked Lunch), 1959」에서 섹스와 마약 등 환상적이고 에로틱한 세계를 저속한 어휘로 적나라하게 표출했다”고 언급한다. 그러나 이 또한 초현실주의와 다른 것이 있는가? 문예사조는 유행과 같은 반복이나 퇴행이 아닐 것이다.

이제 미니멀리즘(Minimalism)울리포(OuLiPo)만 남게 되었다. 전자는 현대시의 시발점 보들레르(Charles Baudelaire)에게 많은 영향을 끼친 포우(Edgar Allen Poe), 그리고 체호프(Anton Chekhov), 조이스(James Joyce), 사뮈엘 베케트(Samuel Beckett), 헤밍웨이(Ernest Hemingway), 해롤드 핀터(Harold Pinter)와 같은 다양한 작가들로부터 추적될 수 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체호프가 포우의 효과의 원리와 공통된 이야기의 결말 또는 의도의 의미를 갖고 있는 것으로 나타냈던 말, “연극의 무대와 같은 단편소설은 무대의 약속과 같은 규칙을 가지고 있다. 나의 직관은, 소설 또는 이야기의 결말에, 독자를 위하여 전체 작품의 인상을 교묘히 농축하여야만 한다.”고 한 그 말에 이어서, 1932년, 헤밍웨이는 이러한 소견이 성공적인 소설의 방법과 구성과 관련되고 있음을 피력했다.

 

만약 산문의 작가가 그 자신이 쓰고 있는 것에 대해, 그가 알고 있는 것을 생략할는지 모르는 것에 대해, 그리고 독자에 대해 충분히 알고 있다면, 만약 작가가 진실로 충분히 알고 있다면, 작가가 충분히 진술했던 것만큼 강하게 이러한 것의 감정을 갖게 될 것이다. 빙산 운동의 장엄함은 물 위에 존재하는 것의 1/8이 아니라 물 아래의 8에 기인한다(이것은 수의 개념이 아니라 시각의 개념-역자주).

 

헤밍웨이가 여기서 토로하고 있는 “빙산의 일각(tip of iceberg)”의 효과, 그 갈등적 정서 상태와 의사소통하는 방식보다 더 많이 느끼는 그 기법에 대해, 에이미 헴펠(Amy Hempel)은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당신의 작품 안에 보고되지 않은 많은 경험이 실제적으로 페이지 위에 나타난 것보다 더 중요하다. 흔히 이야기의 정서적 초점은 기술되지 않은, 또는 이야기 안에 귀착되어 있는, 다시 말해서 그 밑에 깔려있는 어떤 사건이다.” 그리고 신디아 휘트니 할렛(Cynthia Whitney Hallett) 또한 여기에 덧붙여 언급한다. “요컨대, 작가는 독자가 적어도 생략되었지만 실제적으로는 주어져있는 것으로부터 추측하고 있는 어렴풋한 하나의 가능성을 갖도록 조심스러우면서도 충분하게 그 빈 공간의 틀을 어떻게 해서든지 짜 맞추지 않으면 안 된다. 언급된 모든 것 안에는 적어도 반영 또는 함축(비유적 어떤 형식)으로도 언급되지 못한 모든 것을 담아야 한다. 흔히 독자에게는 하찮은 일 또는 사건 같은 것으로서의 사실적인 보고로 여겨지는 것 같은 것으로 주어진다. 비록 최후의 변형이 외부의 실재성을 닮았을지라도, 그 표상적 방법은 단지 외면적으로 언급된 세부묘사만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보다 더 많은 이야기가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일반적으로 미니멀리즘(Minimalism) 또는 단편소설의 장인들은, 때로는 부연하고, 때로는 사라지게 하고, 때로는 변형시킬 줄 아는 창조적 재능을 공유한다. 그들은 외견상으로는 긴장 없이 의식적으로 확실한 직조법을 성취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헤밍웨이의 “흰 코끼리 같은 언덕(Hills Like White Elephants),레이몬드 카버(Raymond Carver)의 “부탁이니 제발 조용히 해줘(Will You Please Be Quiet, Please?),” 그리고 “사랑에 대해 말할 때 우리들이 하는 이야기(What We Talk About When We Talk About Love)”와, 에이미 헴펠(Amy Hempel)의 “알 졸슨(Al Jolson)이 묻힌 묘지에서(in the Cemetery Where Al Jolson is Buried)”와 “욕조 속에서(In a Tub),” 메어리 로비슨(Mary Robison)의 “연과 그림물감(Kite and Paint)과 같은 단편소설, 코진스키(Jerzy N. Kosinski)의 중편 "Being There," 그리고 사뮈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En attendant Godot),” 숨소리(Breath)”와 해롤드 핀터의 “일터에서의 고충(The trouble in the Works)” 등의 희곡에서 이것을 확인할 수 있다.

프랑스의 미니멀리즘(Minimalism)이라고 할 수 있는 울리포(OuLiPo)의 경우, 1960년 11월 24일, 초형이상학(Pataphysique)의 조합(組合, the Collège)과 실험문학연구소(Séminaire de littérature expérimentale)의 타이틀을 단 분과위원회로 발족되었다. 그러나 두 번째 모임에서, 이 최초의 명칭은 슈미트(Albert-Marie Schmidt)의 제안에 의해 오늘날의 모습, “잠세적인(가능성의) 문학의 공동 작업실(Ouvroir de Littérature Potentielle),” 또는 "OuLiPo"로 바뀌었다. 그러나 그 아이디어는 소그룹이 9월에 국제문화센터 스리지-라-살(Cerisy-la-Salle)에서 레이몽 크노(Raymond Queneau) 작품의 토론을 위한 세미나에서 만났던 그때, 첫 번째 모임의 대략 두 달 전의 그때 나왔던 것이었다. 이 세미나가 개최되고 있는 동안, 레이몽 크노프랑스와 르 리요네(François Le Lionnais)는 그 단체를 구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후 10년 동안, 울리포(OuLiPo)는 그룹으로서의 활동이 아주 미약했다. 분과위원회로서의 그들은 1961년에 그들의 작품을 초형이상학의 조합에 보고했다. 게다가 탕 멜레(Temps Mêlés, 프랑스인)는 1964년 울리포(OuLiPo)에 수익금을 기부했고, 벨기에 라디오는 울리포(OuLiPo)의 모임을 보도했다. 그러나 그 멤버들은 이 몇 해 동안 개인적으로 활동했었던 것이며, 전체로서의 그 그룹은 표현 일부의 선집인 잠세적인(가능성의) 문학(La Littérature Potentielle)의 출간과 함께 드러나기 시작했다.

이들에게서 주목되는 것은 그들 회원이 문인은 물론 수학자, 과학자, 엔지니어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로 인하여 문학과 수학의 접목을 실험하는 사람들이라는 명칭이 붙기도 하였다. 따라서 창립 멤버 중의 한 사람인 장 레스퀴르(Jean Lescure)가 고안한 울리포의 기법 “N+7(프랑스어로는 “S+7”)”에 대해, 다음과 같은 오해를 일으키기도 한다. “두 번째 방법은 이른바 <자동 전환 방법>으로서, “S+7”라고 명명한다. 이 방법은 어느 텍스트를 선정하여 그 텍스트의 명사들을 사전에 나오는 일곱 번째의 명사로 대체하여 전혀 다른 시 텍스트를 만드는 것이다(허정아, 불어불문학연구 제55집, 프랑스 현대시와 매체의 활용, P. 707).” 이 언급은 다음과 같은 자크 쥐웨(Jacques Jouet)의 언급과도 상당히 다르다.

 

“나는 시, 즉 기술적인 시를 쓰기 위하여, 첨부된 질문(만약 그것을 이행하는데 동의한다면)을 사용할 것이다. 그것은 내가 만들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비정적인(객관적인) 것이 될 것이다. 즉 내 임의로 판단하지 않고, 평가하지 않을 것이다.”

 

이와 같이 오직 객관적으로만 기술할 것이라고 한다. 즉, “빙산의 일각(tip of iceberg)”과 같은 방식이라고 볼 수 있다. 물론 이러한 관점은 에즈라 파운드가 언급한 객관성과 맥락을 같이 하는 것이며, 수학과의 접목이 아니라 르네 통(René Thom, 1958년에 수학에 있어서의 노벨상이라고 하는 필즈상을 수상했다)의 파국이론(catastrophe theory), 조지 불(George Boole)의 불 대수(Boolean algebra), 쿠르트 괴델(Kurt Gödel)의 “형식적 공리계는 그 공리 자체와 그것의 부정 어느 것도 증명될 수 없다는 하나의 명제를 포함하고 있어야 한다”는 그 정리와 같은 현대 수학과 논리, 과학에서의 바로 그 초수학·초월논리·불확실성과 같은 변수와 역설을 문학에서의 기법과 같은 맥락으로 보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에즈라 파운드는 vorticism에서 시에 대하여, "나는 내가 의미하는 것을 수학으로 가장 잘 설명할 수 있다."고 언급하고 있다).

이러한 맥락을 착각하고, 쿠르트 괴델(Kurt Gödel)의 정리를 앨런 매디슨 튜링(Alan Mathison Turing)은 컴퓨터 영역으로 확장시켜, 튜링 기계(Turing machine)라고 하는 이론적인 자동기계(이것은 초현실주의의 자동기술과도 다르다)를 발명했는데, 그 방법이 “N+7 machine”인 것이다.

컴퓨터는 칸트의 “무제약의 자유의지·이율배반·가상세계”가 지향적으로 구성해가는 관점, 즉 물자체가 수동적으로 표상(경험론적; variation) 되지만 다시 연역적(합리론; invariant)으로 구성해가는 구성설(構成說)의 관점, 헤겔의 변증법적 운동의 관점, 그리고 후설의 판단중지와 동시에 구성해가는 묘기의 지향적(자발적), 다시 말해서 빈사(술어)적인 환원의 관점, 그레마스의 방향적(芳香的) 범주(thymic category)를 결코 표현할 수 없다는 것을, 앨런 매디슨 튜링은 미처 이해하지 못했던 것 같다.

 

 

그리고 “S+7”의 “7(seventh)”이라고 하는 것은 화성학(harmonics) 제7음·이끎음(leading note)을 의미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다음의 음으로 이끌어가는 작용을 하는 음을 말하며 도음(導音)이라고도 한다. 으뜸음의 반음 아래에 있어서 으뜸음을 이끌어내는 음이기도 하다. 특히 음계 중에서 중심이 되는 음을 향하여 위로 끌어가는 음을 상행이끎음(aufwärtsführendwe leitton)이라 한다. 그 음정은 일반적으로 반음이고, 서양의 장음계에서는 제7음을 일컫는다. 다시 말해서, 7은 사전의 일곱 번째의 의미가 아니며, 컴퓨터가 결정하는 것도(See. The N+7 Machine) 아니고, 으뜸음을 이끄는 온음계의 일곱 번째 음조의 단계인 것이다(그레마스는 제5음·딸림음[dominant]을 제7음과 같은 방식으로 인용하고 있다). 즉, 자연언어의 변형(variation)·길항작용(拮抗作用, antagonism)·2치화(二値化, binarization)·사위(斜位, phoria)의 의미를 말한다. 따라서 날자 변경선 상에서 양팔을 벌리고 서면 어제와 오늘이 하나의 몸체인 것과 같은 중명사(中名辭, mean)이면서도 대척점(對蹠點) 또는 N과 S 양극단의 한 극으로만 표출되는, 그러면서도 교류발전처럼 교류하는, 연동하는, 양끝이 접속되어 있다는 점에서는 분명히 닫혀 있는 데도 사실은 열려 있는 클라인의 항아리(Klein's bottle)와 같은, 뫼비우스의 띠(Möbius strip)처럼 깜짝 놀라게 하는, 귀납법과 연역법의 종합인 그레마스의 기호학·위의 도표를 한 마디로 요약하면, 확실하면서도 불확실한(또는 二律背反의) 명제를 다루는 학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괄호가 쳐지지 않은 명제 “소크라테스는 죽는다.”는 진리이고 확실하고 그렇기 때문에 리얼리티가 있는 것이며, 리얼리즘의 문학은 바로 이러한 명제를 충실히 추종하는 것일 것이다. 그러나 괄호가 처진 명제 “소크라테스는 (죽는다).”는 불확실하면서도 확실하다. 왜냐하면 비록 주사(主辭) “소크라테스는”만 발화되고 ”빈사(賓辭) “(죽는다)”는 괄호가 치어져 발화가 안 되어 있을지라도, 대전제와 소전제에 의해 그것의 추론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Semiology" 차원의 이러한 외소여와 내소여의 2중 결합(dual syntagme; 이것은 사회적·제약의 제1극화이다)과 그 위에 방향범주(thymic category)를 더한 3중 결합(triple syntagme; 이것은 개인적·무제약의 제2극화이다)을 인식론 차원의 "Semiotics"라고 한다. 이러한 결합의 논리가 작품으로 표출될 때, 그리고 Vorticism이 놓쳤던 부조리의 현실을 정확하게 포착할 때, 포스트모더니즘이 되는 것이며, 이것을 대표하는 것이 미니멀리즘과 울리포인 것이다.

따라서 미니멀리즘(Minimalism)울리포(OuLiPo)는 동정(同定) 되는 것으로서, 결국 그레마스(Algirdas Julien Greimas, 1917~1992)의 기호학(Semiotics)에 기초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이제 우리는 로널드 슐라이퍼(Ronald Schleifer)가 “프레드릭 제임슨(Fredric Jameson)의 「언어의 감옥(Prison-House of Language)」은 사실상 그레마스로 시작해서 그로 끝을 맺고, 조나단 컬러(Jonathan Culler)의 「구조주의 시학(Structuralist Poetics)」은 주요한 장을 모두 의미론으로 충당한다.”고 한 언급과, “그레마스는 뜻대로 주물럭거릴 수 없는 매우 중요한 구조주의 이론가 중의 한 사람으로 남게 되었다.”고 한 언급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하여 그의 「구조의미론(Structural Semantics: An Attempt at a Method)」, 「의미론선집(On Meaning-Selected Writings in Semiotic Theory)」, 「정념의 기호학(The Semiotics of Passions)」 등의 기호학이, 한국문학과 언어학은 물론 모든 예술과 학문의 장르에 걸쳐 판단중지(Epoche)의 토대가 될 것이라는 것을 나는 믿어 의심치 않는다.

 

 A. J. Greimas, "The relationship between structural linguistics and poetics(구조언어학과 시학의 관계)" pp. 8∼16: international social science journal Volume XIX, No. 1, 1967. 참조하라.

 

참고자료

  SUR LES ROUES/Gueune-Ok JOUH

구조의미론(Structural Semantics); A.J.Greimas/주근옥 역

의미론선집(On Meaning); A.J.Greimas/주근옥 역

정념의 기호학(The Semiotics of Passions); A.J.Greimas, Jacques Fontanille/주근옥 역

미니멀리즘; C.W. 할렛, 워런 모트/주근옥 역

주근옥의 미니멀리즘 시선집

 

한국시 변동과정의 모더니티에 관한 연구_주근옥

  한국 현대시사에 대한 철학적 고찰의 빛나는 성과_장수익(한남대 국문과 교수)

 

http://www.poemspace.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