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e texte est traduit avec la langue Coréenne. This text is translated with the Korean language.)


  

-레이몬드 카버(Raymond Carver), 에이미 헴펠(Amy Hempel), 그리고 메어리 로비슨(Mary Robison)


C. W. 할렛(Cynthia Whitney Hallett)1) / 주근옥 역

 

2. 미니멀리즘의 기원을 찾아서

   (조선문학 통권 176호, 2005. 12. 1, 통권 177호, 2006. 1. 1)

 

충분히 계발된 형식으로서의 미니멀리즘은 비교적 최근에 만들어진 문학양식이다. 그러므로 그 기원에 대한 고찰은, 특히 미니멀리즘이라고 하는 것이 레이몬드 카버 또는 다른 단편소설 작가의 펜에서 자연적으로, 즉 자연발생의 결과로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에, 그것이 갖고 있는 어떤 영향력의 계기(繼起)를 들추어내야만 할 것이다. 끊임없이 단편소설 미학의 구성요소를 그리고 점진적으로 혼합(hybrid) 문학예술형식으로 발전시켜 미니멀리즘이 형성된 것은 최근이다. 그 발전은 포우, 체호프, 크레인(Stephen Crane), 조이스, 헤밍웨이, 그리고 사뮈엘 베케트(그의 초기 작품)와 같은 작가에 의해 혁신적으로 도입된 단편소설의 이러한 양상의 어떤 것에 깊이 뿌리가 박혀있다. 이러한 각각의 작가들이 비록 그들 연대의 예술가들 사이에서의 선각자이기는 하지만, 그 각각의 작가들은 그만이 가지고 있는 그 순간 그 계기의 특별한 문학적 기반 안에서 발전했으며, 그 기반의 환경은 그 시대의 기본적인 문학운동을 포함했을 것이다. 포우의 경우에 그 기반은 로맨티시즘일 것이며, 체호프의 경우에는 리얼리즘일 것이며, 크레인의 경우에는 자연주의일 것이며, 조이스, 헤밍웨이, 그리고 사뮈엘 베케트의 경우에는 실존주의의 개인적 변형일 것이다. 모든 각양각색의 문학운동의 이론적 경향은 이러한 전술 작가들과 함께 함으로써 그 활동기 동안에 생산된 모든 문학의 형식과 중심에 어떤 방식으로든지 영향을 끼쳤다. 그러나 이러한 작가들의 모든 것은 독특하다. 이러한 작가들은 대체적으로 다음 관찰이 암시하는 것보다 더 복잡하다. 그리고 이러한 텍스트 안에서는 그들의 복잡한 예술에 대해 주제넘게 정확히 처리하는 체할 것이라곤 아무 것도 없다. 비록 이러한 작가들이 미니멀리스트의 기교에 기여했던 것이 오직 하나만이 아니라고 할지라도, 나의 의도는 그들의 개인적 미학과 문학작품의 어떤 관련된 양상을 면밀히 조사하는 것이며, 오늘날의 어떤 단편소설 작가에 의해 실행됨으로써 미니멀리스트의 스타일로 드디어 발전된 문학적 발생의 특별한 변형으로 대부분 기여했던 것으로 나타나는 이러한 구성요소에만 초점을 맞추는 것이다.

미국의 단편소설은 어빙(Washington Irving), 포우, 그리고 호손(Nathaniel Hawthorne)의 작품과 이념에서 특히 19세기 전반에 정의를 요구했으며, 그들의 각각은 단편소설을 썼을 뿐만 아니라 그들이 선택한 매개체의 기능을 정의하려고 했다. 포우에 의해 제안된 3가지, 즉 조화(unity), 간결(brevity), 배제(exclusion)는 대부분 미니멀리즘과 단편소설의 특별한 변형의 발생을 초래했던 것 같다. 1842년에 포우는 길이로 처음 단편소설을 정의했다. 즉 “즉석에서 읽혀질 수 있고, 또는 총체성으로부터 추론할 수 있는 막강한 힘을 자제할 수 있는” 그리고 나서 신중성에 의해, 즉 “어떤 단일한 또는 단순한 효과가 성립된(950)” 단편소설을 정의했다. “이렇게 예상된 효과를 확립함으로써, 최적의 원조로 그러한 사건을 결합하는” 과정의 인위성은, 내 견해로는, 혼합체계(hybrid system)가 바로 미니멀리즘의 핵심이라는 것이다(950).

거의 50년 후에, 러시아에서, 체호프가 “단편소설은 너무 많이 언급하는 것보다 충분하지 않게 언급하는 것이 더 좋다(106).”고 단언했다. 또한 그는 포우의 효과의 원리와 공통된 이야기의 결말 또는 의도의 의미를 갖고 있는 것으로 나타낸다. 즉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연극의 무대와 같은 단편소설은 무대의 약속과 같은 규칙을 가지고 있다. 나의 직관은, 소설 또는 이야기의 결말에, 독자를 위하여 전체 작품의 인상을 교묘히 농축하여야만 한다고 나 자신에게 언급한다.” 1932년, 헤밍웨이는 이러한 소견이 성공적인 소설의 방법과 구성과 관련되고 있음을 피력했다. 즉 그의 생각은 포우와 체호프의 그리고 미니멀리즘의 이것을 배경으로 하고 확장한다.

 

만약 산문의 작가가 그 자신이 쓰고 있는 것에 대해, 그가 알고 있는 것을 생략할는지 모르는 것에 대해, 그리고 독자에 대해 충분히 알고 있다면, 만약 작가가 진실로 충분히 알고 있다면, 작가가 충분히 진술했던 것만큼 강하게 이러한 것의 감정을 갖게 될 것이다. 빙산 운동의 장엄함은 물 위에 존재하는 것의 1/8이 아니라 물 아래의 8에 기인한다.

 

포우, 체호프, 그리고 헤밍웨이의 실질적인 기여에 부가해서, 크레인에 의해 묘사됨으로써 자연주의의 개념은 레이몬드 카버, 에이미 헴펠, 그리고 메어리 로비슨의 작품 속에 명시된 미니멀리즘의 최후의 착상에 약간 영향을 끼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관찰될 수 있는 어떤 성격-유형, 문체론적 착상, 그리고 다음에 상술된 조이스사뮈엘 베케트의 작품 속에서 탁월한 철학을 추가한다.

조이스는 플롯에 대한 전통적인 생각(완전한 의미를 제공하는 발단, 중재, 결말)을 거절했으며, 행위의 고전적 구조를 표면상 정적인 에피소드와 단지 리얼리티의 “박편(slice)”인 것을 포섭하는 “총체(wholeness)”의 구조로 대체했다. 사뮈엘 베케트의 방식은 플롯을 은유적 착상, 단원(單元)과 상징으로 응축된 장치로 환원했으며, 휴머니티의 최소의 형식(종속을 정의하는 이러한 최소의 공통단자[共通單子, common denominator]로 환원된 인류의 의미)으로 그의 주제를 위축시켰다. 게다가 개성이 애매성을 두드러지게 하는 성격으로 그들의 작품에 생명을 불어넣은 양 작가들은 흔히 마비상태의 특별한 형식을 이끌어내며, 그것은 그들이 삶과 환경 안에 존재하고 있는 것으로부터 끌어낸 무기력을 암시한다.

이렇게 유명한 저자의 말과 작품을 따라가면, 즉 레이몬드 카버의 단편소설, 특히 그의 초기 작품, “부탁이니 제발 조용히 해줘(Will You Please Be Quiet, Please?),” 그리고 “사랑에 대해 말할 때 우리들이 하는 이야기(What We Talk About When We Talk About Love)”는 미니멀리즘 문학의 주목할 만한 모델로 잔존하고 있다. 비록 단편소설에 있어서 레이몬드 카버의 초기 산문 스타일이 그의 문학적 천성의 기질만큼 똑같이 그의 환경의 성향(예를 들면, 그의 알코올 중독, 이혼, 그리고 다양한 육체노동 직업)에 귀속되었을 지라도, 그의 종합적인 스타일, 즉 주제 내용의 선택과 지속적인 철학 양쪽에 강력하게 영향을 끼쳤다.

미니멀리스트 단편소설의 다양한 특징에 대해 가장 잘 증명할 수 있는 동일성은 다음과 같이 뭉뚱그려 포함시킬 수 있다. ① 언뜻 겉으로 보기에 짧고 무뚝뚝한, 깡마르고 구부러진, 그러면서 불완전한 산문 ② 개성적이며 멋있는 착상이 먼저 평범한 사건이 나타나는 것으로부터 세계적 관련사건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으로 확장하는 하나의 수사어구의 복합 양식을 초래하고 있는 간결체 산문 ③ 작가의 강요, 그리고 약간, 내레이터적인 강요가 있으면서도 명백하지 못한 그 설명보다 더 설명적인 대화 ④ 일상적인 사람들이 일상적인 것들을 행하고 있는 것을 닮은 비 영웅적인 성격 ⑤ 모든 “연기(action)”가 조금 전에 발생했던 것으로 나타나든지, 또는 이야기 시작 이전의 바로 그 순간에 발생했든지, 또는 “무대 밖(off-stage)”의 뒤에서 발생하든지 하여간 어디서든지 나타나는 의미 ⑥ “실재적(real)” 커뮤니케이션 안에서 세계의 성립이 불가능한, 흔히 부조리한 실존의 함축, 그리고 무익함-항변이 사물의 생기를 약화시키고 있는 행동, 즉 투쟁은 사물의 에너지를 약화시킨다. 다시 말해서 “아무것도 언급하지 않는 것이 그리고 한결같이 그리 중요하지 않은 것을 행하는 것이 보다 더 좋다.” ⑦ 가장 좋은 것은 말을 취소하는 것이기 때문에, 말이라고 하는 것은 아무 짝에도 쓸모없다는 인식 ⑧ 시간은 저항 없이 지나간다고 하는 지각, 또는 등장인물은 그들 자신의 세계와 삶 속에서 관여자로서보다 차라리 청중으로 존재하며, 그 이유는 특히 그들이 행하거나 언급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것 그 자체가 차이를 만들고 있는 것 같기 때문일 것이다. ⑨ 아무 것도 없는 것 안에 나타나는 세계는 본질적으로 중요하고, 그러므로 모든 가치는 개인적 가치에 의해 결정되며 인위적으로 증여받는다.

비록 이러한 특성이 포우에 의해 승낙된 미학을 본질적으로 적게 소유하고 있을지라도, 미니멀리즘의 발전에 있어서 그가 가지고 있는 주요한 기능은 초기 미국문학에 있어서 종합, 즉 “통합된 미학(unified aesthetic)/형이상학적 철학(metaphysical philosophy)”을 확립하는데 처음으로 기여했던 그의 단편소설에 대한 정의와 직접적으로 관련된다(May Poe 10). 미니멀리스트가 가지고 있는 문학적 기교의 기본적인 것은 조화와 효과이며, 그 두 가지 수사학적 기교의 원리를 포우는 그의 이론 속에서 활발하게 강화하고, 그의 소설과 시에서 드러낸다. 그 각각의 원리는 배제의 미학을 통하여 달성된다. 즉 “직접적 또는 간접적 경향의 전체의 구성 속에 기록된 단어는 없고, 하나의 예정된 착상”도 없다(Poe 950). 과잉의 의식적인 생략과 마찬가지로 의식적인 배제에 의해 선택된 포섭의 이러한 경제적 양식과 닮은 미니멀리스트의 산문은 그 중추적 기능으로서의 조화 상에 크게 의지한다. 복합적(갈등적)이고 계획적인 이미저리의 착상 안의 이 본질적인 조화는 포우가 역설하는 단순하고 단일한 효과를 정밀하게 산출하는 미니멀리스트적인 기능에 힘을 부여한다. 로맨틱 시대의 지배적인 문학적 특성은 직관적이며 감정적인 것의 조력으로 이성적이며 합리적인 것과 지적인 것의 거절을 포함한다. 비록 그의 철학적이며 비판적인 이론이 대단히 지적이고 교육적일지라도, 포우는 교훈적이고 지적인 기본요소가 문학적 교묘한 솜씨 안에 위치를 잡지 못했음을 강조했으며, 예술의 주체적인 사건이 감정을 다루어야만 할 뿐만 아니라, 가장 위대한 예술은 감정상에 직접적인 효과를 가지고 있어야만 한다고 주장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예술가들은 이성적이며 합리적인 의미를 통해서 이러한 감정(획책된 최후의 효과)에 도착한다. 포우는 그의 탐정과 의사-과학적 이야기의 착상이 지극히 합리적이며 이성적인 의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그의 시와 단편소설들은 골칫거리(위협)의 기록되지 않은 진짜의미를 담고 있으며, 그들의 감정에 의해 지배를 받는 주요 등장인물의 특징을 이루고 있고, 따라서 그것은 파괴된 의미이다. 이러한 후자의 기본요소는 주요 등장인물의 사적인 악행으로부터 투영된 환영적인 악마임을 매우 흔하게 증명하는 환경을 협박하고 있는, 즉 어둠을 창조하는 것으로 결합한다. 주인공의 이러한 사적인 지옥은 독자에게 친숙해지는 것을 필요로 하는데, 그 이유는 포우가 어떤 이야기 안에는 마지막 효과, 즉 독자에 의해 알려지고 느껴진 효과의 구성과 무관계한 것이 아무 것도 없기 때문이라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약 독자가 결코 살해되지 않았다고 한다면, 생명이 결코 매장되지 않았다고 한다면, 또는 포우의 많은 등장인물이 경험하는 어떤 기괴한 상황 안에 능동적으로(또는 수동적으로) 포함되었다고 한다면, 그러한 친숙함이 어떻게 가능할 수 있는가, 더 나아가 독자가 어떻게 “예, 압니다.” 또는 “예, 거기에 있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이러한 효과를 갖게 된 것은, “그의 교묘한 솜씨와 물질적 세계의 모든 이미지를 영혼의 표출로 전환하려고 하는 그의 필요와 함께,” 포우는, “아마 우리들 각각의 영혼 속으로 잠복하는 사건(또는 사건의 공포)을 실행하려고 하는 욕망을 우리에게 말할 수 있었던” 것이 가능했기 때문일 것이다(Hoffman 319, 318). 다시 말해서, 모든 휴머니티 안에는 어둠, 유령적인 애매성과 영혼적이며 감정적인 “리지아(Ligeia)”의 흡혈귀와 마찬가지로 “포도주통(Cask of Amontillado)”의 복수심에 불타는 살인자와 참회자, “수다쟁이 마음(The Tell-Tale Heart)”의 살인자와 미치광이를 잠복시킨다.

아마 이 세 가지 이야기 중의 하나인 “수다쟁이 마음(The Tell-Tale Heart)”은 “그의 거의 완벽한 이야기 가운데 하나임이 틀림없을 것이다. 그것은 단지 4페이지에 불과하지만, 예술의 경제성에 대한 위업이다. 그 사건들은 작고 간결한 행동이다(Hoffman 222).”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우의 가장 짧은 내러티브 중의 그 하나는 휴머니티의 편집(과대망상) 성향의 심원한 조사보고이다. 포우의 많은 1인칭 내레이터(가장 정교한 것이라고 해도, 다시 말해서 기껏해야, 이성적이며 합리적인 것이 의심스러운)와 같은 이러한 내레이터는 스스로 제 정신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믿고, 이러한 젠체하는 태도로부터, 그가 미친 것임을 증명하는 것 같은, 그의 불합리한 행동을 합리화하려고 시도한다. 분명 아이러니하게도, “그가 미친 것과 동시에, 이러한 내레이터는 신경과민의 주인공이다. 그의 과장된 의미는 천국과 지옥 양 쪽을 가깝게 불러들인다.” 비록 내레이터가 살해할 동기가 없었다고 할지라도, “나는 노인을 사랑했다.”고 주장한다. 그는 다음과 같이 이유를 댄다.

 

나는 그의 눈을 생각한다! 그래, 이거였어! 그의 눈 하나는 독수리와 닮았어(얇은 껍질로 덮인 창백하고 푸른 눈. 그 눈이 나를 바라볼 때마다 내 피는 얼어붙었어. 그래 점점 매우 천천히). 나는 그 노인의 삶을 빼앗기로 했어, 그리고 영원히 그 눈을 제거했어.

 

“독수리 눈”의 의미는 인간존재의 1세기 동안의 신화적 공포였다. 유사한 신화적 원형의 뿌리는 노인과 눈이다. 초로의 남성으로서의 노인은 모든 지식(all-knowing)의 아버지다운 지혜를 이미지화하는 하나의 격상(格象, figure)이다. 그 눈은 일견 이원성을 상징한다. 게다가 그 눈은 영혼에 대한, “실재성”의 외부와 마찬가지로 내부의 반영에 대한, 지식의 매개물에 대한, 그리고 미래의 매개물에 대한 창과 동일시된다. 포우의 이야기에서의 눈은 숨겨지며, 그래서 그 광경은 왜곡되고, 마치 “독수리 눈”이 위협하고 있는 것과 같은 상징이 된다. 관측/이해, 전방/관측, 무지(無知), 그리고 숨겨진 광경을 갖고 있어야만 하는 최고의 직유, 은유, 그리고 암시는 이러한 추이에 적용될 수 있다. 즉 포우의 이야기에 있는 약간의 이러한 문장을 보면, 상징적 구조가 매우 조밀해서 이러한 탐구의 프레임으로서의 완벽한 분석도 불가능하고 미니멀리즘의 입장에서의 이러한 검토도 불가능하다. 이러한 짧은 예가 제공하는 것은, 그가 만들어내는 솜씨와 마찬가지로, 압축된 독자-시각 안에 담긴 최대량의 정보를 통해 뿌리 깊은 곳으로부터 초래되고 있는 단 하나의 포우의 콘셉트에 대한 절대적인 성공의 증거이다. 짧지만 짧은 그대로의 “수다쟁이 마음(The Tell-Tale Heart)”에서, 포우는 많은 독자들이 인식할 수 있는 매우 사실적인 범죄행위의 결과를 묘사한다. 포우는 하나의 복합체, 즉 현재 미니멀리스트의 소설에서 발견될 수 있는 격상적 지시와 명확한 이미저리의 응축된 양식을 통해서 이러한 효과를 성취했다.

또한 미니멀리즘의 기원은 관찰 속에 그리고 체호프의 효과 속에 강력하고 깊이 있게 뿌리를 내리고 있는데, 그의 작품들은 플롯 또는 행동에 의해 증대되지 않은 리얼리즘에 가장 적합하게 성격이 만들어진다. 어떤 비평가는 그것을 백 년 전 미국에서 성행했던 자연주의의 형식으로 본다. 어떤 의미에서, 자연주의의 어떤 형식은 로맨티시즘의 필법으로 조절된 리얼리즘으로 지각될 수 있는데, 왜냐하면 소설의 최초의 전제는 인식될 수 있는 것으로, 또는 적어도 이야기 안에서 인식으로서의 그러나 무기력한 힘으로서의 진상(眞相, nature)의 반어적 의미에 의해 압도된 또는 통제된 그래서 친숙한 사람들, 장소들, 사건들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따라서 먼저 사실적으로 나타났던 그것은 심오하게 격상적인 것이 되며, 로맨티시즘의 흔적은 의인법으로 또는 더 나아가 특히 진상의 신격화로 나타나게 된다. 미국문학에서, 크레인의 단편소설은 문학 분석가들이 자연주의의 우수한 예라고 하는 그 조건을 갖추고 있다. 소설에서의 자연주의에 대한 크레인의 관점의 조절된 원리는 그 세계 안에서 진상의 의인화된 역할의 바로 그 특별한 관점에 뒤얽혀 한정되며, 그것은 실존주의와 동일시되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콘셉트는 크레인이 쓴 다음의 시 속에서 명백하다.

 

한 사내가 세계에게 말했네.

“나는 존재한다.”

“그러나,”라고 세계는 답하며,

“나는 그 진상을 창조하지 않았네,

책임의식을 가지고,“

 

어떤 무관심한 중립세계(indifferent universe)의 냉랭한 관념은 네 사람이 너른 바다의 조각배 안에서 살아남기 위하여 싸우고 있는 크레인의 단편소설 “조각배(The Open boat)”에서 나타난다. 호된 시련을 겪음으로써, 그 사람들은 세계가 적개심과 불길함을 갖든지 또는 아름다움과 평온을 갖든지 하여간 어떻든지 간에 그러한 소신(감정)을 갖게 되는데, 그러나 끝에 가서, 그들은 진상이 그들을 위해 주목하는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배우게 된다. 왜냐하면 진상은 원래 그들을 전혀 주목할 수 없기 때문이며, 그리고 그들이 안중에도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 단편소설이 비록 은유를 풍부하게 소유하고 있을지라도, 크레인은 하여튼 의인화된 진상을 명백하게 하지 못한다. 그 대신에 그는 그것이 진상이 아니라 차라리 인류의 감상벽(感傷癖), 인간의 감정과 요구라는 것을 예증(例證)하며, 사실상 의지, 목표, 아름다움의 관념을 산출한다. 또한 가장 우수한 미니멀리스트의 단편소설과는 달리, 이러한 이야기는 플롯, 등장인물, 장치, 주제 그리고 상징의 우수한 예를 한 편의 단편소설 안에 동시에 작용시키고 있다. 따라서 단편소설의 기교라고 하는 영역에서 볼 때, 크레인의 작품은 미니멀리스트의 스타일에 크게 공헌했다고 언급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기에는 결국 미니멀리즘 안에 자연주의의 어렴풋한 재치의 번득임, 즉 러셀 뱅크스(Russell Banks)의 논설로 연료가 확실하게 적재된 재치의 번득임, 다시 말해서 러셀 뱅크스의 논설 안의 “레이몬드 카버와 크레인”에게서는 “잔인성, 즉 불가피한 결정론과 함께 괴로운 논거의 극화에 의해 강화된 작품을 증거 없이 내세우는 것이” 존재하며, 드디어 그것이 그들의 등장인물을 무력케 할 때, 비극으로 접근한다(101). 최근 20세기의 미니멀리스트가 쓴 이야기의 신실존주의자의 세계는 미니멀리즘에 대한 자연주의의 철학적 공헌의 예리한 예인 크레인의 소설의 무관심한 중립세계와 유사한다.

메이(Charles E. May)체호프 작품의 특징을 고조(高調)된 리얼리즘으로, 형편에 따라서는 리얼리즘의 과장된 변형으로 보며, 그것은 “상징적 투영이든지 또는 사실적 묘사라기보다 차라리 분위기(mood)로서의 성격”을 만든다(Chekhov 199). ―외관적으로 사실적인 세부묘사로서의 형식은 그들이 묘사하고 있는 것보다 더, 다시 말해서 상징적인 것보다 더, 그보다 더 나아가 실물크기, 사진과 같은 확대, 그들이 과장해서 전체가 된 과장보다 더 큰 것으로 앙양된다. 일종의 리얼리즘과 같은 체호프의 작품을 연구하는 것이 중요한데, 그 이유는 그것이 정선(精選)되고, 구체적이며, 표면적으로 세부 묘사된 것으로서의 표상에 의해 성격의 복합(갈등)적인 내면상태가 된 표현과 관련된 현대 단편소설의 기본적인 특징 중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체호프의 작품이 가지고 있는 미학에 있어서의 사실성은 객관적인 것과 마찬가지로 내면상태로 나타난다. 그의 예술철학의 결과는 사실적으로 기술한 것이지만, 그저 표면적인, 때때로 피상적인, 속세의 사실성으로 기술될 뿐이지만, 단순하지가 않고, 바로 그 성격에 의해 그것은 프로이트적인 어떤 꿈(텍스트 안에서 그들의 지위와 기능에 의해 결정된 함축적 은유로의 변형) 못지않게 은유적인 것이 된다. 그런 식으로 단편소설은 소설이 떠받고 있는 성격과 사건의 점증적 발전을 초상화처럼 그리도록 요구된 일상적 시간과 조화될 수 없다. 그러므로 하나의 장르로서 단편소설은 “평범한 사실성의 리듬의 계시적인 해체 상에 초점을 맞추며,” 그리고 체호프적인 단편소설은 “특별한 분위기로 만들어지고 조화의 원리로 플롯보다 어조(tone) 상에 더 의존하는 경험”에 초점을 맞춘다(200). 따라서 체호프의 착상은 삶의 변화과정보다 차라리 삶의 단순한 에피소드로 특징이 이루어진다. 그리고 그것은 그것에 대한 에피소드든지 또는 내레이터의 지각이든지 하여간 어떤 것으로든지 존재하며, “종잡을 수 없게(착란적으로) 이해된(discursively understood)” 것보다 차라리 “현상학적으로 조우된(phenomenologically encountered)” 그 경험은 체호프에 의해 인위적인 것이 된 것으로서의 현대 단편소설의 중심으로 존재한다(201). 그래서 체호프는 이러한 조우에 대한 내러티브적인 초점을 교묘히 다룸으로써, 그의 “타당한 세부묘사의 영민한 선택”에 의해, 그는 구체적으로 다음처럼 표현한다.

 

…내면상태의 복잡성. 뒤에 엘리엇(T. S. Eliot)은 그러한 기법을 “객관적 상관물(objective correlative)”이라고 지시했다. 즉 그 객관적 상관물이란 세부 묘사된 사건, 기술, 또는 추구된 감정(emotion)을 위한 일종의 객관화 또는 형식으로 기여된 특성 짓기를 말한다.

 

주관적 상태를 묘사하고 있는 객관적 묘사의 사용은 체호프의 소설에 잘 예증되어 있으며, “불행(misery),” 그것은 근본적으로 슬픔의 성격에 대한 것이다. 이야기는 그 자체 스스로 언급하고 있는 것 같은데, 왜냐하면 포타포프(Iona Potapov)가 세 시간을 그의 아들의 죽음에 대한 세부묘사를 공유하려는 것과 그리고 그 자신의 슬픔과 고독의 깊이로 표현하려고 하기 때문이며, 그러나 어떤 사람이 그를 구원하도록 허락한다. 오직 그 말(horse)만이 그의 존재의 불행이 움직임 없이, 분명히 듣고 있음을 공유하며, 반면에 포타포프는 그의 이야기를 언급한다. 눈, 추위, 빈곤의 곧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냉혹한 상태를, 그리고 포타포프의 일상 존재를 정의하는 불행을 설치함으로써, 그 이야기는 명백한 해석을 제공하지 않는 내러티브적 목소리로 보고된 구체적인 세부묘사와 함께 단순하게 언급된다. 체호프의 기교는 포타포프의 시기를 놓친, 애처롭게 익살스러운, 청자를 발견하는데 철저히 무익한 것의 은밀한 동기로 인하여 매우 효과적이며, 그 독자는 슬픔, 고독, 그리고 노인의 절망과 슬픔의 의사소통이 안 되는 성격이 보편적이라는 것을 추리하고 있음을 파악할 수 있다.

이러한 종류의 이야기는 플롯이 거의 없으며, 만약 전혀 정적인 것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만약 뚜렷한 결말로 진전하는 것 대신에 어떤 명백한 진전이 약간 있다고 하더라도, 그 이야기는 끝까지 이끌어가지 못하거나 간단히 끝나고 말 것이다. 체호프에 의해 최초로 형성된 이러한 소설-디자인은 혼동하기 쉬운 기분전환을 포함하거나 시적 정의의 어떤 감각에 적합한 또는 해피엔딩을 위하여 독자의 욕망을 충족시키는 사건을 만들어낸다. 이러한 이야기는 현상(現像)이 부족하거나 불완전한데, 그 이유는 그 이야기에 있어서의 허구와 장치가 부족하게 만들어져 있기 때문인 것 같으며, 그 헐거운 결말이 단호하게 처리하지 못하거나 경사진(그러나 이러한 이유 때문에 분명히 그들은 조작된 경험의 효과를 만들어낸다. 그들은 마치 어떤 사람이 무의식적으로 문을 조금 열어 두었거나 전화선이 어떤 일시적 연결로 교차된 것처럼 중간에서 시작하고 중간에서 끝나는 것 같다. 독자는 갑자기 타인의 삶을 그들에 대한 사전 지식 없이 내밀히 관여하고, 이상하게도 엿보고 엿듣도록 강제된다), 훔쳐보는 취미의 역할에 저항 없이 초래된 끝머리를 과감하게 처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 다음에 갑자기 그 문은 닫히고, 그 연결은 단절된다. 즉 훔쳐보는 취미처럼 그렇게 강제된 위치로부터 어떤 것을 해방한다. 그러나 마음은 눈감아줄 수 없다. 이것은 체호프가 창작했던 이야기 방식의 효과이다.

체호프의 기교의 중요한 특징은 네 가지이다. ① 플롯이 없는 디자인은 단순 경험상에 초점을 맞춘다. ② 어조의 우아한 그러나 얽히고설킨 양식과 정밀한 세부묘사는 서정적 조직으로 짜진다. ③ 객관적 표현은 내러티브적 목소리와 매우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독자는 그 이야기와 함께 닫힌 연상(聯想) 속으로 말려든다. ④ 평범한, 세속적인, 그리고 주체로서의 중간분류체는 설명, 비평, 또는 변명 없이 표현되며, 또 왜곡 없이 복합(갈등)적인 시적 형식으로 주조되며, 그러나 미학적 분위기에 의해 강조된다. 체호프의 작품은 깜짝 놀라게 하는 기략이 풍부하고 재주가 많은 것을 예증하는데 기여하고 있다. 그는 소설의 경제성에 있어서 터무니없다. 그의 시대에 있어서 가장 우수한 다른 작가들의 줄거리는 훌륭하다고 생각되는 소설의 페이지를 채우기 위하여 충분히 포괄적인 것으로 판단했으나, 체호프는 약간의 페이지로 처리했다. 이렇게 강력하게 경제적인 기교의 예를 들면, 그의 소설 “반카(Vanka)”가 있는데, 그것은 아홉 살짜리 소년의 유년시절의 에피소드에 불과하다. 그러나 이렇게 단순한 사건의 디자인은 과거의 사건과 장차 일어날 불길한 시사(示唆)를 언급하고 있는 몸짓 안에 삶 전체의 비극을 불러일으킨다. ―즉 삶 전체가 4~5 페이지의 공간으로 수축된 짧은 길이(span)이다.

체호프의 등장인물들은 “그들이 분위기를 구상화한 것보다 사실주의적인 격상을 충분히 에워싸지 못한 것으로” 흔히 인식된다(May "Chekhov" 201). 그러나 그의 소설 “개를 데리고 다니는 부인(Lady with Dog)”을 읽었던 사람은, 사랑에 의해 예기치 않게 융합된 독특한 열정, 고통에 찬 선택과는 반대로 맹렬한 연인인, 안나(Anna Sergeyevna)와 구로프를 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체호프는 고상함과 그들의 진실한 사랑의 비극적인 성격을 일련의 고정관념에 반하여 초월할 수 있는 시련으로, 그리고 헛된 일련의 부서지기 쉬운 예상으로 발전시킨다. 안나는 구로프가 전에 사랑했던 다른 모든 부인들과는 다르게 반응하며, 그리고 구로프는 다른 부인들의 반응을 처리하는 것에 익숙했던 방식으로 그의 감정(feeling)을 다룰 수 없다는 것을 스스로 발견한다. 또한 마지막 장면은 안나가 그의 삶의 은밀한 핵심으로 남아있지 못할 것이라고 하는 것을 강력하게 암시할 뿐만 아니라 그들이 실행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그들은 결코 완벽하게 행복하거나 자유롭지도 못할 것이다. 이 소설을 나보코프(Vladimir Nabokov)가 고찰한 바에 의하면, “이야기하고 있는 소설의 전통적인 규칙은 20페이지 정도의 놀랄만한 그의 소설 안에서 깨져버렸다. 거기에는 아무 문제도 없으며, 완전한 클라이맥스도 없으며, 끝내는 포인트도 없다. 그러면서도 그것은 일찍이 쓰였던 가장 우수한 소설 가운데 하나이다.” 체호프의 소설은 은밀한 충격을 예측하며, 오직 표면 이미저리만을 사용하고 있는 심층의 감정(emotion)을 반영하고, 요술지팡이나 거울처럼 세밀하게 구체화한다. 체호프의 예술가적 천성의 충격은 20세기 내내 반향을 일으키고 있고, 조이스, 맨스필드(Katherine Mansfield), 앤더슨(Sherwood Anderson), 헤밍웨이, 그리고 레이몬드 카버와 같이 저명한 단편소설작가의 작품 속에서 증명된다.

논픽션의 약간의 비형식적인 경우에, 조이스는 그의 예술가적 신조의 관념을, 편집자가, “당신은 내가 여기 저기 단어를 지우도록 요구했던 것을 조금만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그러한 말소가 사활을 결정할는지 모른다고 하는 입장에서 단편소설을 당신은 명확하게 관찰하지 못하고 있습니다(Geddes 364).”라고 제안했던 수정에 반응해서 쓴 편지로부터 조금씩 수집된 관찰 쪽으로, 들추어냈다. 포우의 외연적 관찰과 체호프의 명백한 석명(釋明)과는 달리, 대부분 소설의 기교 상에서의 조이스의 신념은 그의 작품의 구조 속으로 짜여 들어갔다. 그것의 가장 주목할 만하고 널리 스며서 영향력을 미치는 것은 조이스의 등장인물에 기인한 미학이며, 히로우(Stephen Hero), “본질의 돌연한 현현(epiphany)으로서의 그는 파롤의 또는 몸짓의 비속성이든지, 또는 마음 그 자체의 기억할 만한 단계로든지, 하여간 어떤 것으로든지 갑작스런 정신적 표출을 의미했다. 그는 그것이 지극히 조심하며 이러한 현현을 기록하는 그 편지를 쓴 사람을 위하여 존재했다고 믿었다…” 단편소설이 특히 현현 상에 추축(樞軸)된다고 하는 생각은 미니멀리스트의 소설에 직접적으로 활력을 불어넣는 것으로 나타나지는 않는다. ―즉 그것은 저항 받고 있는 것에 의해 일종의 동역학적 힘으로 존재(exist)할는지 모르기 때문에 “직접적으로(directly)”가 아니다. 단편소설에 대한 대부분의 미니멀리스트의 변형 때문에, 현현은 사회의 불합리 상의 초점에 의해 거부되고 재배치된다. 그러나 단편소설의 조이스의 작품, “더블린사람들(Dubliners)”에는 그의 단지 현현으로서의 관념보다 더 많은 것이 존재한다. 그리고 이렇게 다른 형식 안에는 문학에 통달한 미니멀리스트의 기교 상에 조이스의 강력한 영향력이 위치하고 있다. 조이스는 명백히 정적인, 리얼리티의 에피소드인 “삶의 박편”에 찬성하여 고도로 플롯이 만들어진 소설의 전통을 포기했다. 구체적 사건 그리고 1차적(직선적), 즉 원인과 결과의 간단한 관념으로서의 1차적 내레이션에 도전했던 잠재적으로 의미가 꽉 찬 사태를 유발시키고 있는 대상 상에 그가 초점을 맞춤으로써, 그 어떤 것이 방금 발생하고 있는 어떤 무엇으로 나타나며, 모든 이러한 사건은 드디어 결말의 특별한 부류 안에 안주하기 위하여 동시에 모여든다. 문학비평가 레빈(Harry Levin)은 조이스의 단편소설을 오 헨리(O. Henry)에 의해 사용된 “낡은” 기교와 비교한다. 단편소설의 이러한 유형에서, 작가는 “경악의 부도덕한 조작에 의해 보다 더 파란만장한 일상적 삶을 만들려고 시도했으며, 반면에 동시 발생적 조이스는 체호프와 마찬가지로 그러한 책략을 버렸으며,” 대신에 “경험의 흐름에 불쑥 적응하는, 열린 구조”를 사용하려고 시도한다(18). 레빈이 체호프의 디자인과 같다고 생각하는 조이스의 소설의 이렇게 플롯 없는 양상은 미니멀리스트 소설의 기본적인 구성요소와 동일시 될 수 있다.

게다가 경험의 전망보다 차라리 흘끗 봄(glimpses)을 제공함으로써, 조이스의 소설에 있어서 그가 선택한 등장인물들은 체호프의 등장인물들을 닮고 있다. 체호프의 이러한 것과 같은 조이스의 격상들은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의미에서의 고전적 영웅도 아니고, 신화적 또는 로맨틱한 영웅도 또는 인류의 지도자도 아니며, 프라이(Northrop Fry)의 방정식에 의하면, 그들은 다른 사람들 또는 그들의 환경과 대비하여 하나의 의미 또는 종류 또는 단계의 초월로 존재한다. 그들은 융(Carl Gustav Jung)적 의미 또는 고정관념으로서의, 용어의 현대적 사용으로서의 원형(archetypes)이 아니다. 평범한 조이스의 소설의 등장인물은 “일상생활”의 일반의미로서의 보통사람일 뿐만 아니라 일반적으로 억압받고 때때로 그들의 사태(물리적 고정이 아니더라도 행동이 따르지 않는 또는 감정적 무기력을 흔히 이끌어내는 마음과 경제적 상태)에 의해 풀이 죽게 된 서민으로서의 사회집단의 일원이다. 조이스의 단편소설집 중의 “더블린사람들(Dubliners)”에 나오는 등장인물들에게 재앙으로 나타나는 행동의 모호함과 무능력은 체호프의 단편소설에 나오는 등장인물을 괴롭히는 수동적인 저항과 명료한 문제들의 형식보다 더 가혹하다. 혀와 수족의 무감각은 조이스의 어둡고 더러운, 그리고 특히 오늘날 미니멀리스트 소설의 등장인물을 괴롭히는 언어와 그 혼란의 문제와 관련되어 질식할 것 같은 것으로 나타나는 것으로서의 수많은 시민들을 괴롭힌다. 그것을 기술적으로 대비해 보면, 조이스와 어떤 미니멀리즘 작가의 풍부한 언어가 외관상으로는 무언과 정지로서의 이러한 소설의 표층 아래에서 강력한 저류(底流)로 기여하고 있음을 관찰할 수 있다.

“더블린사람들(Dubliners)”에서 조이스는 그의 동시대의 사람들을 그리고 아일랜드의 “윤리적 역사”를 반영하는데 기여하고 있는 일련의 조심스럽게 그린 비네트(vignette)를 나타낸다. 그는 유년기, 청년기, 성숙한 삶과 공적인 삶의 이야기로 소설집을 분할한다. 소설 “대응물(Counterpart)”은 이러한 더블린사람들 각각을 한데 동여맨 윤리적 무기력의 강력한 초상화이다. 이 소설에서, 조이스는 화가 그 안에서 끓어오름으로써 좌절당하고 스스로 좌절하고 있는 패링톤(Farrington)의 무기력한 격노를 반복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격정적 경련은 순식간에 목을 꼭 쥐었다.” “큰 소리로 저주하기를, 그의 주먹은 폭력적으로 어떤 무엇을 파괴하기를 열망했다.” “그의 몸은 어떤 무엇을 실행할 것을, 돌진할 것을 그리고 폭력 행사를 간절히 바랬다.” “그의 가슴은 격정으로 부풀었으며… 그의 격정은 그를 거의 질식시켰다.” 따라서 굴복당하고 좌절당한, 근본적으로 그 자신의 바보임과 냉담함의 결과로, 패링톤은 오리무중에서, 밤의 암흑 속에서, 그리고 취중의 망각 속에서 탈출구룰 찾는다. 그러나 그의 오만은 취함으로써 얻게 된 기회의 그 자신을 유린하게 되는데, 그 이유는 그가 우연히 만난 알레인(Mr. Alleyne)의 왜곡된 이야기에 동정적으로 귀를 기울이며 술 마시는데 돈을 탕진했기 때문이다. 한층 더 격분된 패링톤이 귀가했을 때, 그는 “어둠을 뚫고” 그의 집을 응시하다가 그의 아들을 덥석 붙잡고, “등불을 켜라. 어둠 속에 위치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불빛과 패링톤의 침착한 제정신의 진기한 상태는 그가 순결한 소년을 통해 그의 갇힌 격정에 구멍을 뚫는 것에 기인한 자기폭로의 변화를 초래한다. 비록 그렇게 잘못 지시된 행동(behavior)이 연기(action)와 동등할지 모르지만, 그는 그의 불행의 실재적 가동자(시험자, 원조자, agent)와 대항해서 거의 연기하지 않았으며, 그러므로 환경의 영향을 받아서 움직이지도 않는다. 패링톤에 의해 반영된 그 유형과 비교해 보면, 현대 미니멀리즘 작가에 의해 창작된 등장인물은 똑똑히 말을 못하는 경향을 조이스의 “더블린사람들(Dubliners)”과 공유한다. 등장인물이 적어도 적당한 말(words)을 원하는 그 말의 결핍은, 적당하게 반작용하는 또는 하여간 연기 등을 하는, 환경이 현상(státus quó)으로든지 무엇이든지 간에 그로부터 움직이는, 무능력 안에 결과적으로 나타난다. 게다가 미니멀리스트 단편소설의 비판에 의해 아주 흔히 동일시된 숨이 막힐 것 같은 분위기는 조이스의 어두운 더블린으로서의, 어디든, 미니멀리스트의 환경(milieu) 안에서처럼, 이러한 정적과 반영된 무기력에 결과하고 있는 것과 보통 사람들의 상태를 폭로하는 것으로서의, 환각적 이미지를 불러일으킨다.

사뮈엘 베케트의 시각에서 보면, 인간의 진력(盡力)은 공허할 뿐만 아니라, 또한 출발부터 지긋지긋하다. 이러한 태도는, 이러한 등장인물과 그들의 창조자 양측이 현실화하여 나타나는 언어의 문제를 예증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가장 평범한 사람들과 가정 그리고 그들의 정적 경험으로서의 무관심한 중립세계를 극적으로 표현함으로써 신뢰할 수 있는 현대소설로서의 독특한 경향을 반영하는 부조리에 대한 사뮈엘 베케트의 미학과 결합한다. 사뮈엘 베케트는 휴머니티의 영웅적 형식보다 못한 형식과 함께 그의 기교를 내던져버린다. 그의 격상은 사회의 멀리 떨어진 변두리에서 솟아오르며, 흔히 휴머니티의 가장 낮은 단자로 존재한다. 그와 같이 유형적인 것은 은유로 행동하고 이야기하게 되는 그 모든 것이다. ―그러나 간신히 움직이고 매우 자주 불합리한 추론을 말한다. 사뮈엘 베케트의 등장인물에 의해 존재하게 된 세계는 때때로 “그러므로 격변은 아주 적게 되풀이될 수 있는 삶으로 고갈된다. 우리는 폭행의 부재에 근접하며… 인간의 혀는 공포로 말을 할 수 없다…(Hassan 8)사뮈엘 베케트의 등장인물의 유형에 있어서, 플롯이 없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으로서의 외관상으로는 디자인이 전혀 없는 플롯에 관한 관념은, 그리고 인간의 커뮤니케이션이 전혀 없는 것과 다름없는 언어의 표상은, 미니멀리스트의 소설 속에서 그들의 대응물과 매우 흡사하게 닮은 용모로 존재한다.

부조리로 생각되는 그의 터무니없는 능력의 아주 널리 퍼지는 효과를 정확히 판단할 사람은 아무도 없으나, 약간 부정할 수 있는 사람은 있을는지도 모른다. 핫산(Ihab Hassan)에 의하면, 인간 존재의 불합리에 대한 사뮈엘 베케트의 극적 표현은 “수학적 동어반복에, 환원(축소)하고 있는 문학에 근접하고 있다. 사뮈엘 베케트의 그 연역법은 그저 엔드게임(endgame)을 연출하고 있는 휴머니티와 함께 스스로 기진맥진한 역사를 떠맡는다. …언어는 공허하게 되고, 따라서 말은 그들의 공허를 드러낼 수 있을 뿐이다(30).” 또한 언어와 함께 사뮈엘 베케트의 투쟁에 어드레싱(addressing)함으로써, 모리악(Claude Mauriac)은 “따라서 언급할 수 없는 것에 반하여 그 자신을 함정에 빠뜨리고 있는 작가는, 말이 그의 의지에 반하여 그가 언급하도록 하는 것을 언급하지 못하도록 하는 대신에, 그들이 완전히 덮여 디자인된 바로 그 성격으로 표현하는, 그의 모든 교활한 솜씨, 즉 불명확성, 모순대당(矛盾對當), 생각할 수 없는 일을 사용하지 않으면 안 된다(81).” 커뮤니케이션을 위한, 특히 감정(emotion), 주체적 개념과 불가해한 질료(matter)를 전달하기 위한, 하나의 부적당한 도구라고 할 수 있는 언어의 개념은, 미니멀리즘 작가가 가지고 있는 감수성의 주요한 기본요소이다. 만약 언어가, 다시 말해서 커뮤니케이션의 주요한 도구가 부적당하다고 한다면, 그때는 전체 시스템이 불완전하다. 불완전한 교섭의 바로 이러한 시스템 안에서 창조하도록 떠맡겨진 미니멀리즘의 작가는 그들 기교의 명확한 디자인으로 언어의 부적당함을 사용한다. 그 주체적이고 불가해한 것은 부적당한 프레임―엘리엇(T. S. Eliot)의 “육체로 구현된(made flesh),” 적어도 문학적 골육으로 구현된 객관적 상관물과 같은 것이지만 폭로되어 나타나는 것으로 발생된다.

작품은 특별한 철학적 성질과 문학에서의 예술운동의 극히 주요한 예로 기여하는데, 그 둘은 미니멀리즘의 주요한 기본요소와 아주 많이 닮아있다. 이러한 관점에서의 조화(consistency)사뮈엘 베케트의 단편소설 가운데 어떤 것 한편에 대한 검토를 요구한다. 그러나 약간의 비평가들 그리고 더 나아가 독자들은 사뮈엘 베케트의 단편소설과 대부분 친숙한데, 그 이유는 그것이 그의 생애 중 아주 초기에 쓰였고 철학적 그리고 예술적 관념의 수수께끼 같은 미궁으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페더맨(Raymond Federman)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그들의 이단적 형식, 즉 소설의 성격에 본질적인 기본요소의 결핍, 언어의 현혹적 사용, 그들의 명백한 앞뒤가 맞지 않음에 의하면, 그들은 모순된 해석을 이끌어낸다(3).” 소설, 시, 또는 단편소설을 통하여 사뮈엘 베케트를 조우하는 것보다 차라리 거의 모든 사람들은 먼저 그의 무대연극 “고도를 기다리며(Waiting for Godot)”를 통하여 그를 경험한다. 이 연극은 사뮈엘 베케트의 예 적 디자인과 철학의 근본적인 예이기 때문에, 미니멀리스트,의 단편소설에 재등장하는 기술적 기본요소를 실험하는 가장 우수한 모델이다. ―무대에서 대화의 최초로 벌어지는 언쟁과 함께 시작하고 있는, 최초의 말은 외톨이 사내에 의해 아무렇게나 지껄여지는데, 뒤에 그는 묵묵히 그의 장화를 벗기 위하여 억지로 시도한다. 그의 명백한 불합리론적 추론은 “아무래도 안 되겠는걸.”하고 말하며 인간존재의 성격을 선언한다. 계속해서 두 번째 사내가 무대장면으로 들어가며, “내가 그 생각에 빠져들다니.”하고 말한다.

주요 등장인물은 어릿광대의 두 가지 다른 유형인 라우렐(Stan Laurel)과 하디(Oliver Hardy) 사이의 조롱 가운데 하나를 상기할는지도 모르는 두 사람의 부랑자이다. 별명인 디디(DiDi)와 고고(GoGo), 그 중 한사람 블라디미르(Vladmir)는 매우 유쾌하면서도 무능력하고, 또 다른 사람, 에스트라공(Estragon)은 대개의 경우 친구의 보호를 받는데 내던져진 세계의 무능력자이다. 나중에 두 명의 다른 사람, 포조(Pozzo)와 럭키(Lucky)가 도착하는데, 그들도 마찬가지로 근거 없이 나타나지만, 포조가 가져온 밧줄로 서로 묶고 럭키의 목을 매고 있는데, 우애롭다기보다 차라리 물리적이다. ―그들은 주종관계 같이 보인다. 이 연극에 대해 매우 자주 인용된 비평적 관찰은 메르시예(Vivian Mercier)에 의해 1952년에 이루어졌는데, 그는 “아무것도 없는 그 곳에서 두 번 발생하는” 두 가지 연기로 “고도를 기다리며(Waiting for Godot)”를 보았다. ―즉 재치, 그러나 유익하지도 않고 정확하지도 않은, 적어도 몇몇 사람들 때문에 메르시예가 “아무것도 없는 것”을 의미했을는지 모르는 것을 고찰하기 위하여 그녀가 흔해빠진 재치의 한계조차 넘을 수 없는, “아무래도 안 되겠는걸”에서처럼, 또는 헤밍웨이의 “깨끗하고 밝은 장소(Cean Well-Lighted place),” “나다(Nada)”에서 기다리는 사람의 기도를 넌지시 암시하는 것처럼, 미묘한 변화는 두 개의 막 사이에 반드시 존재한다. 두 번째 막에서, 일단 잎이 진 나무에는 헝겊조각이 걸려있다. 포조와 럭키 사이의 밧줄은 더 짧아지고, 이제 한 사람은 벙어리가 되고 다른 사람은 장님이 된다. 럭키는 웅변조의 독백을 뿜어낸다. 그 연기가 끝난다. 고도(Godot)는 결코 오지 않는다. 주제 “아무래도 안 되겠는걸”은 등장인물 속에서 체현되고, 대화 속에서 목소리가 되며, 여분의 장면 속에서 뇌리를 떠나지 않게 지시되며, 무대상에서 동작의 결핍으로 명시된다. 이러한 동기(motif)의 반향은 음성적 주장(assertion) 등에 대한 시각적 모순이며, 명령적 “가자(Let's go)”는 결코 출발로 이행되지 않는다. 연기는 “아무것도 없는 것에 대하여 너무 야단법석이다.” ―즉 아무것도 없는 것이 어떤 무엇을 너무 많이 발생시킨다. 의미 없는 회화와 의미 없는 연기는 등장인물의 의미 없는 삶을 반영한다. 그들은 아무데서도 오지 않았으며, 그들이 존재했던 곳에 대한 확신도 없고, 그저 아무데나 가고 있다. 그들은 정지된 애니메이션의 상태로, 기다리는―즉 “고도”라고 하는 어떤 무엇을 기다리는 상태로 체류한다. 사뮈엘 베케트는 인간의 조건을 “우리가 최후의 리얼리티에 대하여 대답을 하지 못하는, 우리가 그것에 대하여 물을 올바른 질문조차도 알지 못하는 것과 거의 마찬가지로서의 어떤 것으로” 나타낸다(Ulmer 17). 프랑스 비평가 제겔(Sylvain Zegel)은 파리에서의 첫 공연 이틀 후에 “고도를 기다리며(Waiting for Godot)”에 대한 첫 번째 논평을 썼다. 제겔(Sylvain Zegel)이 식별하고 있는 관찰은 사뮈엘 베케트 연극의 진수를 들추어냈다.

 

모든 휴머니티를 대표하는 이러한 두 방랑자는 우리들 중의 누군가가 발언할는지 모르는 소견을 발언한다. 이러한 두 사람은 말다툼하며, 그들 스스로 즐거워하며, 싫증내며, 서로 간의 이해 없이 말한다. 이 모든 것을 행하는 그들은 몹시 바쁘다. 시간을 보내며. 그들이 살고 있다고 하는 것을 생생히 하거나 그들 스스로 느끼며.

 

많은 세월이 지난 지금도, 현대 미니멀리스트 소설의 기술적 특징(특히 특성, 행동양식, 그리고 등장인물의 동기부여[비동기부여])은 거의 같은 말로 묘사될 수 있다.

나중에 미니멀리즘의 특징으로 표면화되고 있는 사뮈엘 베케트의 기본으로서의 주제적 디자인의 또 다른 의미작용적 특징은 시간의 애매한 성격이다. “고도를 기다리며(Waiting for Godot)”의 두 개의 막 사이에서, 시간의 해결할 수 없는 가치는 연극세계 안에 귀속되었다. 관객은 먼저 휑뎅그렁한 나무였던 곳에 이제 나뭇잎이 있게 되었기 때문에 그것이 어떤 밤이라기보다 오히려 낮에 존재했음을 알 수 있지만, 그들은 회화로 확실하게 언급할 수 없는데, 그 이유는 그 대화가 첫 번째 시퀀스에서 했던 바로 그것 같기 때문이다. 나무의 변화 이외에, 어떤 시간이 경과한 기호는 포조와 럭키 사이의 밧줄의 짧아진 길이이며, 그 터무니없음은 다른 둘의 명백한 동일성과는 완전히 다른 벙어리와 장님 이 둘로 변한다. 디디와 고고는 1차적이다. 즉 그들은 나날의 변화가 알아차릴 수 없을 만큼 미세한 매일 그만큼의 매일, 어디로든지 결코 갈 수 없는 것 같다. 이와는 현저히 달라서, 포조와 럭키의 시간은 완곡하다. 왜냐하면 그들은 계속 전진하지만, 재등장하기 때문이다. ―즉 주기적으로, 어디든지 그들은 존재했다. 그들의 변화는 그들의 부재의 공간 때문에 더 눈에 띤다. 그때 시간은 직선과 원형, 그리고 경과된 시간 ―또는 편승된, 투시도법(perspective)에 의지하는, ―즉 시각적으로 양측 양식에 명확하고 숨김이 없는 시간의 결과와 동시에 나타나게 된다. 철학적 변형과 시간 이동의 이렇게 눈에 보이는 표출은 미니멀리스트 소설의 중요한 구성요소이다.

만약 사뮈엘 베케트의 미학적 사이키(프시케)가 미니멀리즘을 위한 철학적 모체로 고찰될 수 있다면, 그와 마찬가지로 헤밍웨이의 미학적 형식 또한 현대 미니멀리즘의 산문, 특히 레이몬드 카버의 작품과 함께 시작하고 있는 문체론적 생식기관과 동일시될 수 있을 것이다. 이 깨끗하고 예리한 산문 스타일은 오늘날 헤밍웨이 소설의 등장인물로 알려진 지극히 평범한, 비영웅적 등장인물에 의해 언급된 대화로 채워진다. 헤밍웨이는 주장한다. 작가는 “그가 알고 있는 것을 생략할는지도 모르며, 만약 작가가 충분히 진실하게 쓰고 있다면, 독자는 작가가 체호프의 모범 소설, 즉 지나치게 많이 언급하는 것보다 충분히 언급하지 못한 것이 더 좋은 단편소설과 상관되고 있는 그들을 진술한 것처럼 이러한 것들에 대한 감정(feeling)을 갖게 될 것이다.”라고. 또한 결합은 헤밍웨이의 효과와 조이스의 “먼저 기본적으로 의사소통이 안 되는 그렇게 터무니없는 인간의 복잡성을 은유적으로 전달하면서도 그저 평범하게 눈에 보이는 리얼리티의 사실적 묘사로만 보이는 것을 만들고 있는 시도” 사이에 존재한다(May The Short Story 66). 이러한 연결은 미니멀리스트의 단편소설에서 유래된 미니멀리스트의 미학을 산출한 문학이론과 기교의 발전적 연속으로 연결되는 고리이다.

이러한 융합(coalescence) 스타일을 잘 예증하고 있는 것이 헤밍웨이의 단편소설 “흰 코끼리 같은 언덕(Hills Like White Elephants)”이다. 이 소설은 고전적으로 말수가 적은 헤밍웨이의 산문 스타일을 반영하며, 파탄의 위기에 가장 흔한 삶의 의미, 그리고 사회적으로 썩고 오염된 인간관계의 감정을 전한다. 헤밍웨이의 소설과 매우 공통적인 이러한 주제적 기본요소는, 더 나아가 당대적(contemporary)으로 적용하면, 오늘날 미니멀리스트 작가의 많은 소설 속에 흔히 나타난다. 이러한 소설에 나타나는 리얼리티의 헤밍웨이적인 양식은 리얼리즘의 체호프적인 모델, 즉 마음의 복합(갈등) 상태, 은유의 조이스적인 적용을 반영하는 구체적 세부묘사의 사용과 결합하며, 그 작가에 의해 만들어진 매개물은 주관적 세부묘사와 유사하게 커뮤니케이션이 될 수 있다. 이러한 커플은 출발역과 도착역 사이에 있는 교차점의 기차역에서 기다린다. 그 사실적 장치와 상태는 그들의 관계가 여행과 같은 모든 삶의 광범위한 상징을 환기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교차로에 있는 사실을 은유적으로 묘사한다. 4페이지보다 적은 분량의 이 소설은 폭로(exposition)의 짧은 한 단락을, 그리고 내러티브의 대부분을 떠맡으며 대화의 끈을 장식하고 있는 몇 가닥의 짧은 기술을 포함한다. 얄궂게도 이 소설이 비록 “미국인과 그와 함께 있는 소녀” 사이의 회화를 통하여 주로 폭로되고 있을지라도, 효과적인 커뮤니케이션은 그 둘 사이에서 좀처럼 드러나지 않는다. 사실, 가장 눈치 빠른 독자는 어느 쪽이든지 간에 그 커플이 실행하는 것보다 더 잘 이해할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 독자에게는 등장인물이 변화하는 말보다 더 많은 정보가 제공되지 못하는데, 그 이유는 그 약간의 밀담(密談)이 그 커플 스스로 이미 알고 있거나 발생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는 것하고만 객관적으로 관계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소설 안에 거의 존재하지 않는 내레이션은 사설적인 주석이나 평가 없이 제공된다. 그러면 어떻게 독자들은 그것을 이 작은 드라마 안의 참여자보다 더 잘 이해할 수 있는가? 내러티브적인 애티튜드(attitude)의 결과로서의 그 독자는 객관적 관찰자로 위치가 잡히며, 정의하면 그것은 편견에 치우치거나 편견에 치우치지 않은 통찰을 제공하는 투시도법인데, 그 이유는 그것이 항상 다른 사람들의 문제의 원인을 찾아내거나 “보는” 것보다 더 쉽게 보이기 때문인 것 같다. 어떤 독자들은 상태의 보편성에 의해 조성된다. 이렇게 무력한 축어(逐語)적 변화는 요컨대 그들 감정의 종류와 정도를 무엇이든 정확하게 표현하는 대중의 무능력을 암시한다. 그 이유는 그 커플 간 투쟁의 실제적 근원이 “그것(it, 즉 여러 가지 형식[그것, 유산; 그것, 아기; 그것, 문제]의 문제를 지시하고 있는)”으로 단순하게 그리고 아주 흔하게 지시되기 때문이며, 이러한 대명사의 애매함은 남녀 간의 관계를 복잡하게 하거나 오염되게 할는지 모르는 어떤 것이 만들어지는 투쟁을 허락한다.

은유적 결합에 부가해서, 어느 문학 연구자에 의해 이루어진 면밀한 분석은 시간의 문제와 함께 독자에게 내놓고 있는 이야기를 폭로한다. 그 이야기의 첫 순간에, 엄밀히 말해서 독자는 “40분 안에 바르셀로나(Barcelona)에 도착할 것이라고 하는 표현”을 듣게 된다. 그러나 비록 그것이 그 이야기를 읽는 시간의 가치를 거의 절반가량 얻게 될지라도, 끝내 “기차는 5분 안에 도착한다.” 35분은 기차역에서 지나갔다. 15분이나 그 밖의 시간들엔 무엇이 일어났는가?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 미니멀리즘은 어떤 것이 잃어버린 시간(침묵, 아무것도 말하지 못하는 동안의 시간. 흔히 투쟁이 있을 때, 변화 간 이러한 긴 휴지는 불유쾌한 침묵을 지시한다)만을 오직 떠맡을 수도 있다는 것을 이유로 모순(discrepancy)에 대해 주목하는 것을 중요시하며, 시간은 생각하는데 소비됐지만 생각하거나 느끼는 것이 실제 커뮤니케이션으로 이행되는 것은 아니다. 시간은 과거에 대해 소비하고 현재와 미래의 반향에 대해 고려하는데 소비한다. 시간은 말을 선택하는데 소비한다. 시간은 “그것(it)”을 어떻게 말할까 어림하려고(figure out) 시도하는데 소비한다. 시간은 “정의”를 선택하려고 시도하는 반면에 삶은 이러한 교차로에서 속을 태우게 된다. 모든 이러한 가능성은 출발과 도착(출생과 사망, 과거와 미래) 사이의 중간, 즉 어쩔 수 없이 선택하는 교차로에서 단기체재 하는 여행과 같은 삶의 은유적 장치로서의 개연성이 된다. 이 장소를 떠날지 안 떠날지 모르지만, 차라리 “내가 여기서 꼭 출발하해야만 하는 노정(路程)이다.”

헤밍웨이의 스타일은 아주 짧은 내러티브적 목소리 바로 그것이다. 그는 각각의 단편소설에서 초라한 내러티브적 세부묘사와 관련된 특별한 목소리를 창조한다. 따라서 그의 내레이터는 말하는 것과 말하지 않는 것을 선택한다. ―즉 명백히 폭로된 것을 병렬시키고 그것은 함축에 의해 폭로되거나 또는 생략에 의해 강조된다. 명사, 동사, 형용사, 부사 등 내레이터가 선택하는 모든 것은 소설-디자인의 의도적인 구성요소이며, 소설의 최종효과를 산출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세부묘사와 이야기를 서정적으로 만드는 통합양식으로서의 그들의 조직과 마침 그것이 의미와 동조(同調)할 때 사실적이고 자연적인 것 같은 것을 만드는 것”으로서의 내레이터의 선택이기 때문이다(May "Chekhov" 201). 헤밍웨이는 폭로와 기술을 거의 존재하지 않는 제3의 인물과의 대화를 통하여 그들 자신의 말로 그들 자신과 그들의 이야기를 폭로하는 그의 등장인물을 허락하는 것을 매우 자주 선택한다. 단순한 언어는 객관적 투시도법을 암시하고, 공적 보고서의 어조를 포기한다. 독자는 등장인물의 평가적 기술을 수용하고, 그것은 내레이터로부터 직접적으로라기보다 차라리 등장인물의 한 사람으로부터 오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 기교는 세상에 알려진 헤밍웨이의 소설 안에서 쉽게 식별될 수 있다. 이렇게 짧은 폭로와 함께 시작하는 “프란시스 마콤버의 짧고 행복한 삶(The Short Happy Life of Francis Macomber)”은, “지금은 점심시간이고 그들은 발생한 것이 아무것도 없는 것을 있는 체하고 있는 정찬(正餐) 텐트의 초록색 천막 입구의 자락 아래 모든 것을 설치하고 있었다.” 이러한 관찰은 세 명의 야영자 사이의 짧지만 긴장된 대화에 의해 곧 추적된다. 이렇게 퉁명스런 개시로부터 독자는 시간, 장치, 투쟁을 추론할 수 있다. 더 나아가 짧은 폭로와 대화의 혼합된 밀집(간결)은 과거, 현재의 위업을 환기시키고, 미래를 유발시킨다. 언어는 준비 없이 하는 리포터적인 어조를 성취하는 어떤 가위로 잘린 것 같은 리듬으로 방출되어, 성글고 부족하지만, 안달이 나서 긴장된 그리고 잠재적으로 폭발하기 쉬운 세계를 창조한다. 탐구자 각각의 시각적 특성과 역사적 배경을 제공함으로써, 내레이터는 마르고 마콤버(Margot Macomber)를 직접적으로 기술하는 것을 선택하는데, 그러나 그 경우 마르고 마콤버의 눈을 통하여, 즉 어떤 포착할 수 없는 작가적 권한과 함께 나타난다. 내레이터적인 투시도법 안에서의 이러한 변화는 독자가 그의 시점에서 명백한 변화의 감각을 가지고 있지 않은 것으로 매우 교묘하게 성취되며, 그래서 그것은 먼저 프란시스 마콤버(Francis Macomber)가 극적으로 표현된, 또는 특히 더 비겁자 정도로 행동함으로써 지각된, 그의 아내의 눈을 통하여 존재한다. 그 내레이터는 등장인물, 장치, 투쟁, 그리고 객관적으로 어떤 사건을 도입했지만, 전략적으로 프란시스 마콤버의 아내의 지각 안에서 만들어진 그의 비겁함의 보고서로 매복되었다. 그 다음의 대화는 객관적 성격묘사의, 남몰래 나타나는 주관적인 정보를 허락하는 기교의 핵심으로 재생된다. 등장인물들은 그들 자신의 말로, 생각으로, 연기로, 그리고 감응으로 그들 스스로를, 그리고 그들 상호간을 정의 하며, 그렇게 해서 외관상으로 언뜻 보기에 편견이 없는 것으로 체류하는 내레이터를 허락하고 있다.

이야기를 통해서, 헤밍웨이는 사태와 등장인물, 그리고 고요함, 신중함, 리포터-내레이터의 편안한 어조 모두를 형성하는 긴장 사이의 미묘한 균형을 유지한다. 이런 유형의 내러티브적 기교는 배제(exclusion)라고 하는 헤밍웨이의 미학에 엄격히 적용되는데, 그 이유는 그것과 함께 내레이터는 모든 것을 존재케 하지만 지워지며, 독자는 보다 더 직접적으로 이야기를 경험하는 것으로서의 감각과 함께 남아있기 때문이다. 다음에 그 이야기는 종결된 내레이터보다 차라리 독자 쪽에 의지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야기에 귀착하는 것과 함께, 헤밍웨이의 기교로 인하여 생긴 결과는 실제로 발생된 것을 초월하여 진전하고 있는 하나의 논쟁, 즉 프란시스 마콤버는 어떻게(그리고 왜) ―터무니없는 사고로 또는 계획된 살인으로 죽는가, 하는 논쟁으로 존재한다.

배제의 시학은 작가들이 어떤 이야기로부터 반드시 생략하여야만 하는 것을 제한하지 못한다. 이러한 기교의 논리는 내부에 남아있는 것이 필요한 것과 외부에 남게 될 수 있는 것을 선택하는 작가의 자각 상의 단언에 의해 “포괄(inclusion)”의 콘셉트에 역점을 두어 다룬다. 여기서 논의된 작가가 미니멀리스트 스타일의 발전에 대한 유일한 선구자 또는 기여자는 아니다. 그들은 배제의 미학, 또는 배제에 의한 포괄, 또는 이러한 용어의 어느 또 다른 결합의 미학을 암시하는 스타일에 무자맥질하는 유일한 작가도 아니다. 포우는 예견된 효과를 산출하기 위하여 조화, 텍스트적인 질료의 통제로 믿었다. 그들의 시대에, 크레인사뮈엘 베케트는 개인감정을 섞지 않은 장소로서의 세계를 극적으로 표현했으며, 그리고 특히 사뮈엘 베케트는 그러한 세계 안에 존재하려고 하는 어떤 부조리한 인간을 증명하는데 진력했다. 체호프와 헤밍웨이는 폭로되어야 하는 것과 언급되어서는 안 되는 것에 부여된 어떤 의식적 고찰과 함께 어떤 이야기를 분명하게 언급하는 것으로 믿었다. 미국의 단편소설이 발전하는데 있어서는 다변적 문학공정이 존재하고 있는데, 그것은 이들과 또 다른 많은 작가들의 예술적 감수성에 많은 빚을 지고 있다. 여기서 개개의 작가가 논의되지 못하는 것은 그들이 이러한 현상에 관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공간의 결핍 때문에 배제된 결과이다.

여기서 다루어진 작가는 단편소설의 기교에 기여했다고 하는 확신을 가지고 선택되었다. 문학적 미니멀리즘은 단편소설의 어떤 기본적 함수와 상관된 특징을 내포하는 것으로 나타나며, 그래서 이러한 작가들의 예술적 방법은 미니멀리즘의 발전에 어떤 영향력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확정될 수 있다. 헤밍웨이와 함께 이러한 영향력은 대개 그들의 초기 작품 안에 그리고 레이몬드 카버의 스타일 안에 정위(定位)될 수 있는 극점(極點)을 달성한다.

 

시문학 통권 392호, 2004. 3. 1.
  조선문학 통권 176호, 2005. 12. 1
  조선문학 통권 177호, 2006. 1. 1.

  PEN 문학 통권 87호, 2008. 6. 10.)
 

 

미니멀리즘_C.W.할렛, 워런 모트/주근옥 역

주근옥의 미니멀리즘 시선집

 SUR LES ROUES/Gueune-Ok JOU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