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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리언스 브룩스(Cleanth Brooks) / 이 경수 역

                                                                            

지금까지 논의된 열 편의 시들은 우연히도 어떤 공통의 주제를 드러내고 있다거나 어떤 특정한 스타일을 드러낸다거나 어떤 특정한 일련의 상징들을 공유하고 있어서 선정된 것은 아니었다. 사실상 그것들이 얼마나 많은 항목들을 공유하고 있는가를 보고 좀 놀라기도 했다. 예를 들면 「쾌활한 사람-사려 깊은 사람」과 「각성」 송가에서 구사된 빛의 상징이라든가, 혹은 「성도가 되다」와 「머리타래의 겁탈」에서의 성적 메타포로서의 죽음이라든가, 혹은 「각성」 송가와 「학교 어린이들 사이에서」에 있어서의 문제제기와 주제의 유사성 따위 등이 바로 그것들이다.

그러나 곰곰 생각해보면 이 열 편의 시들이 많은 것을 공유하고 있지 않다면 어쩌면 그것이 더욱 많은 놀라움의 근거가 될지도 모르겠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시들은 모두 대부분의 우리가 전통의 핵심적인 흐름에 가깝다고 느끼게 될 시들이기 때문이다. 사실상 이 점에 있어서 조금이라도 미심쩍은 점이 있다면, 그건 이 시리즈의 첫 번째와 마지막 시들의 경우에만 해당할 것인데, 그 시들과 전통과의 관계는 나중에 밝힐 몇 가지 이유 때문에 나로서는 기꺼이 단절시키고 싶다. 그 나머지 시들은 분명히 전통의 주류에 속한다는 게 당연하게 여겨질 것이다. 

사실상 이 책에서 논의된 몇 편의 시들은 나에 의해 선정되었다기보다는 나를 위해 선정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시들을 논하고 난 이 마당에 나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깨달았다. 즉 몇 편의 시들을 더 첨가했더라면 셰익스피어 이후의 어떤 중요한 시대도 심각할 정도로 무시하지 않는 연대기적 시리즈(비록 그것이 시대나 유형에 철저하다는 인상을 전혀 풍기지 않더라도)를 구성할 수 있었을 거라는 사실이었다. 그러한 틈을 메우기 위해 나는 당대에 애호를 받았고 현대에도 대부분의 비평가들이 찬양하는 시들을 선정하느라고 애를 썼다. 예를 들면 첫 번째로 예시한 시를 넘어서는 ‘형이상학적’ 시가 있어서도 안 되었고 마지막으로 예시한 시를 넘어서는 ‘현대시’가 있어서도 안 되었다. 그러나 그 사이에 끼어 드는 시들은 우리가 던2)의 시와 현대시인을 읽고 배운 대로 읽어야 할 게 아닌가. 이러한 접근방법에서는 서로 어떻게 상이한가를 살피기보다는 걸작들이 서로 공유한 것이 무엇인가를 살피고 특히 ‘형이상학파’와 현대시가 조금이라도 서로 공유한 게 있는가의 여부를 살피려고 애를 써야 했다.

이쯤 설명해 놓으면 독자로서는 자기의 독서가 충분한 지의 여부를 마음속에 결정하게될 것이다(내가 이 말을 쓰는 것은 충고하는 의미에서이다. 왜냐하면 독서란 것은 철저하다고 느낄 수가 없는 법이며, 또한 독서가 한두 가지의 세부에서 오류를 범하지 않을 가능성은 거의 희박한 게 사실이기 때문이다). 독자가 자기의 독서가 심각할 정도로 불충분하다고 느낀다면 그 경우가 제대로 판단된 경우이다. 왜냐하면 앞으로 전개될 일반화들은 그것들의 기초를 이루는 특수한 경우들을 잘못 취급했다가는 철저히 망쳐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독자가 자기의 독서가 충분하다고 느낀다면, 지금까지 취급한 시들이 공통적으로 지니고 있는 장점들은 우리가 흔히 말하는 의미에서의 ‘내용’이나 ‘주제’의 면에서가 아니라 오히려 구조의 면에서 언급되어야 한다는 사실이 쉽사리 명백해질 것이 틀림없다. 시의 ‘내용’은 다양하기 때문에 우리가 모든 시들이 공유하고 있는 내용상의 어떤 가치-‘시적’ 주제라든가 시어라든가 이미저리 따위-를 찾으려고 시도한다면 문제를 엉망으로 만드는 결과가 될 뿐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럴 경우 무엇이 시적이란 말인가? 예이츠3)의 시에 나오는 학교 교실은 시적인가 혹은 비시적인가? 셰익스피어의 ‘광풍을 걸터탄/갓난아기’는 시적인 반면에 그의 ‘인생이란 천치가 말한 이야기다’에 나오는 천치는 비시적인가? 헤릭4)의 ‘꽃봉오리 소년 소녀’가 시적이라면 신문의 사회면에 나오는 ‘사회의 꽃봉오리’라는 그 괴상망칙한 어휘는 왜 시적이 아니란 말인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은 물론 모든 소재들이 엄밀하게 동일한 가능성들을 지녔다고(마치 팔레트 위의 다양한 물감들이 동일한 가능성을 지니고 있어서, 그것들 중의 어느 것도 다른 것과 마찬가지로 특정한 그림에 적합하다는 식으로)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지금까지 말한 것은 반드시 말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우리가 조금이라도 나아지려면 어떤 특정한 항목 자체의 매력이나 아름다움과, 전반적으로 고찰된 시의 ‘아름다움’을 엄밀하게 구분해야 하기 때문이다. 후자의 총체적인 유형, 그러니까 본질적으로 아름답거나 추한 항목들, 혹은 매력적이거나 혐오스러운 항목들을 그 자체 속에 거머쥘 수 있는 유형의 결과이다. 우리가 유형의 중요성을 강조하지 않는다면 한 편의 시는 단지 본질적으로 아름다운 항목들로 이루어진 꽃다발이 되고 말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시를 설명하고자 할 때는 구조의 면에서 설명해야 하지만, ‘구조’라는 용어는 분명히 용어로서는 전적으로 만족스러운 용어는 아니다. 구조라고 할진대 그것은 이를테면 운율체계 혹은 이미지의 계보보다는 훨씬 내적인 그 어떤 것을 의미한다. 구조라고 하면 분명히 ‘내용’을 담고 있는 일종의 봉투로서 형식을 연상할 때처럼 전통적인 의미에 있어서의 ‘형식’은 아니다. 구조는 분명히 시 속에 함유된 소재의 속성에 의해 도처에서 좌우되게 마련이다. 소재의 속성은 문제를 해결하는데 있는데, 그러한 해결은 곧 소재의 배열이다.

포프의 『머리타래의 겁탈』은 좋은 예가 될 것이다. 그 구조는 영웅대구 자체 혹은 시가의 배열은 아니다. 그도 그럴 것이, 포프가 대구를 사용한 것은 총체적인 효과를 확보하는 수단으로서 중요하긴 하지만, 영웅대구는 매우 상이한 효과들을 확보하는 도구로서 이용될 수 있으며 또 그렇게 사용된 적이 많았다. 게다가 이 시의 구조는 의사서사시의 전통의 구조가 아니다. 물론 여기서의 ‘의사서사시’라는 용어는 태도의 함축들을 지니고 있는 용어이기에 지금 우리가 말하고 있는 일종의 구조에 더 가까운 용어이긴 하지만 말이다.  

구조란 말은 의미들, 평가들, 해석들의 구조이며, 그러한 구조를 드러내는 통일성의 원리는 함축, 태도, 의미들을 균형 짓고 조화시키는 원리인 듯하다. 그러나 여기서도 우리는 중요한 제한을 가할 필요가 있다. 즉 그러한 원리는 다양한 요소들을 동일한 유형들로 배열하는, 다시 말해서 유사한 것끼리 짝을 맞추는 그러한 원리5)는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상이한 것들을 결합시킨다.6) 그러나 그러한 원리가 상이한 것들을 결합시킴에 있어서, 다른 함축을 중화시키기 위해 다른 함축을 허용하는 단순한 과정에 의존하는 것도 아니거니와 서로 모순되는 태도들을 축소시켜 조화에 이르게 하는 삭감의 과정에 의존하는 것도 아니다. 그 결합은 대수의 적절한 삭감과 단순화에 의해 얻어지는 결합은 아니다. 그것은 소극적인 결합이 아니라 적극적인 결합이며, 여분이 아니라 획득된 조화이다.

구조를 이런 식으로 취급하려는 시도는 앞장들에서의 ‘애매성,’ ‘역설,’ ‘태도의 복잡성,’ 그리고-무엇보다도 가장  빈번하고 독자에게는 어쩌면 가장 당혹스러울지도 모를-‘아이러니’ 따위들과 같은 용어들의 빈번한 출현에 대한 설명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나로서는 그러한 용어들 자체를 조금도 옹호하지 않는다는 점을 서둘러 덧붙이고 싶다. 어쩌면 그것들은 불충분한지도 모른다. 이 경우에 있어서 우리가 희망해야 할 사실은 우리가 궁극적으로 그것들을 개선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충분한 용어들이라면-그것들이 어떤 것으로 판명되든지 간에-『머리타래의 겁탈』과 「눈물, 덧없는 눈물」처럼 다른 관점에서 볼 때는 너무도 다양한 시들의 공통적인 구조로서 드러나는 듯싶은 특수한 종류의 구조에 제대로 해당하는 용어들이어야 할 게 틀림이 없다.

관습적인 용어들은 불충분한 정도가 아니라 그보다도 훨씬 더 형편없는 경지에 놓여있다. 그것들은 시가 일종의 ‘진술,’ 즉 진실하거나 그릇된, 그러면서도 다소간 분명하거나 수사적이거나 아름답게 표현된 진술을 구성한다는 함축을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오해를 불러일으킬 여지가 상당하다. 시에 대한 이단(異端)의 대부분은 바로 이러한 공식에서 파생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 공식은 하나의 이원론을 도입하는 것으로 시작되는데, 그러한 이원론은 그 뒤로 좀처럼 극복되지 않았는데, 그것은 가장 정밀하면서도 볼품없는 한정에 의해서만 겨우 극복될 수 있을 뿐이다. 그것이 극복되지 않을 때 비평가로서는 흑백논리의 한 쪽에 의존하는 수밖에 없다.7) 즉 비평가는 시를 그것의 정치적, 과학적 혹은 철학적 진실에 의해 판단할 수밖에 없거나, 아니면 인간의 체험과는 동떨어진 외재적인 것으로 파악된 형식에 의해 시를 판단할 수밖에 없다. 최근의 유명한 저서에서 실례를 찾자면, 예컨대 알프레드 카진(Alfred Kazin)씨는 ‘새로운 형식주의자들’이-그가 이 용어를 택한 의도는 분명하다- 그 흑백논리 중에서 후자(외재적으로 파악된 형식, 편주)를 택했다고 비난하는데, 그 까닭은 그가 보기에는 그들이 전자(정치적, 과학적, 철학적 진실, 편주)를 거부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그들은 시를 메시지에 의해 평가하기를 거부했기 때문에 그로서는 그들이 시를 그것의 형식적인 장식들에 의해 평가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내가 믿기로는, 이러한 잘못된 흑백논리를 도처에서 목격할 수 있다는 사실이야말로, 어떤 훌륭한 시든지 그것을 해석하려는 온갖 시도에 대해 지니고 있는 반발이 앞장들에서 그토록 자주 언급되었다는 사실에 대한 설명도 될 것이다. 사실 시가 대체로 무엇에 ‘관한’ 것이며 시의 전반적인 효과가 무엇인가 하는 여러 가지 목적들을 우리가 충분할 정도로 완벽하게 묘사할 수 없다는 사실이 중요한 것이다. 예컨대 『머리타래 겁탈』은 18세기 미녀의 약점들에 ‘관한’ 것이며, 「코리나의 5월제」의 효과는 젊음의 덧없음을 통렬하게 자각함으로써 조성된 쾌활함의 효과이다. 우리는 우리의 작업을 제대로 의식하기만 한다면 이러한 해석들을 지침들과 요약들로서 매우 적절하게 이용할 수 있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우리의작업을 제대로 의식하는 일이며, 그러한 해석이 시의 본질을 구성하는 의미의 진정한 핵심이 아니라는 사실을 명백하게 인식하는 일이다.

왜냐하면 이미지와 리듬은 하나의 해석으로 해석될 수 있는 이러한 환상적인 의미의 핵심을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단순한 도구가 아니기 때문이다. 가장 단순한 시에 있어서조차 그것들의 역할이 적극적이거나 직접적인 것은 아니다. 사실상 우리가 시의 ‘의미’의 구체화로서 어떤 진술을 포착한다 하더라도 그 즉시 이미저리와 리듬은 그것과 갈등을 빚고, 그것을 뒤틀고, 그것을 한정시키고 수정시키는 것처럼 보인다. 이것은 던의 「성도가 되다」에 못지 않게 워즈워스의 「송가」에도 해당한다. 좀더 자세히 설명해보기로 하자. 즉 「송가」가 어린아이의 무의식적인 ‘천진성’을 찬양하고 있다고 우리가 말하더라도, 시 자체가 드러내는 바로는, 자연의 섭리에는 더욱 음흉한 국면이 있으며, 시적인 어린양이 추하고 늙은 양이 된다거나 초원 위를 달리는 어린아이가 우둔한 철학자가 되는 과정도 철저히 ‘자연스러운’과정이라는 것이다. 혹은 「송가」의 주제는 어린아이가 자연의 세계에 초자연적인 영광을 갖고 오는데, 그 영광은 세계와의 친화에 의해서 궁극적으로 일상의 빛 속에서 불가피하게 꺼져버린다는 내용이라고 우리가 말하더라도, 마지막 연에서는 그러한 주장에다 격렬한 제한을 가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송가」의 일몰의 연에서 너무도 깊어 눈물을 흘릴 수도 없는 사색들이 언급되어 있다는 사실과, 그것들이 어린아이의 사색이 아니라 어른들의 사색이라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머리타래의 겁탈』을 예로 든다 해도 우리는 어김없이 똑같은 문제에 부딪치게 된다. 시인은 벨린더가 여신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머리 속이 비어있는 계집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인가? 그 중의 어떤 것을 우리가 받아들인다 하더라도 거기에는 정밀한 제한들이 가해져야 한다. 게다가 위에 제시된 단순한 명제들이 너무도 직선적으로 단순해서 이 시의 의미에 어떤 서술로도 이 시를 손쉽게 해명할 수 없는 것처럼 느껴진다면, 독자 스스로 이 시의 ‘내용’을 밝혀줄 명제를 공식화하고자 노력해 보라. 독자의 명제가 완벽해질수록 그는 그 명제가 길이에 있어서 엄청나게 불어났을 뿐만 아니라 거기에다 무수한 유보들과 제한들이 가해지기 시작했음을 알게 될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중요한 사실은 공식의 작성자 자신이 이 시의 ‘내용’을 드러내려고 애쓰는 가운데 그 자신의 메타포에 의존하기 시작했음을 깨닫게 될 것이라는 사실이다. 요컨대 그의 명제가 완벽해질수록 그것은 명제가 아닌 것이다.

또 하나의 경우로서 「코리나의 5월제」를 고려해보자. 첫연을 통해서 코리나에게 행해진 설교는 진실한 것인가? 아니면 저주받아 마땅할 정도로 잘못된 것인가? 아니면 그것은 ‘해롭지 않은 어리석음’인가? 여기서 어쩌면 우리는 마지막 대안을 유일한 의미로서, 즉 이 시의 실질적인 의미로서 받아들이고 싶은 유혹을 느끼게 될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 책 제3장 말미에서의 이 시에 대한 나의 설명은 이러한 해석, 혹은 오해에 대해서 약점을 지니고 있는지도 모른다. 사정이 이쯤 되면 문제를 분명히 밝히기에는 너무 늦었는지도 모른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시가 서로 상반되는 극단들을 취급하고 있는 것은 오로지, 끝에 가서 그 극단들의 오류를 수정해줄 하나의 원리상의 중용을 부각시키기 위한 것이라고 우리가 생각한다면 문제를 크게 오해하고 있는 셈일 테니 말이다. 시인이 유달리 융화시키고 있는 이 극단들의 융화는 상반되는 지나친 강세들 사이의 차이를 조심스럽게 분리시켜놓은 융화이다.

그것은 워즈워스의 시에서도 그렇지 않거니와 키츠의 시나 포프의 시에서도 그렇지 않다. 그것은 헤릭의 이 시에 있어서조차 그렇지 않다. 우리가 이 시를 조심스럽게 살펴보면, 이 시는 기독교적인 관습의 우월성을 반영하고 있긴 하지만, 시 전체를 통해 힘을 쓰는 것은 이교도적인 호소이니 말이다. 그리고 이 시는 의미심장하게도 코리나에게 5월제에 가자는 호소의 반복으로 끝맺고 있는데, 그러한 호소는 기독교적인 관점에 의해 제한되긴 했지만 그래도 어떤 의미에서는 바로 그러한 제한 때문에 더욱 심화되고 절박해진 호소이니 말이다. 염두에 둬야 할 사실은, 5월제의 의식이 진정한 종교가 아니라 ‘해롭지 않은 어리석음’이라는 양보가 있은 후 이 마지막 연에서 상실과 부패의 이미저리가 나타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 모든 제한들을 이 시의 내용에 대한 우리의 공식화에 포함시켜야 한다 하더라도-그리고 그것들이 적절하더라도-헤릭의 시에 드러난 ‘진술’에 대한 우리의 공식화는 포프의 의사서사시에 대한 공식화와 다름없이 난해해질 것이다. 사실상 이와 같은 모든 공식화는 시의 핵심에 가까워지는 게 아니라 그것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이며, 시의 ‘산문적 의미’는 시의 소재를 떠받치고 있는 선반이 아니며 그것이 시의 ‘내적’ 구조, 혹은 ‘본질적’ 구조, 혹은 ‘실질적’ 구조를 대표하는 것도 아니다. 우리는 시의 부분들을 언급하는 다소간 편리한 방편으로서 그와 같은 공식들을 이용할 수 있으며, 또한 여러 가지 관련해서 이용해야만 한다. 그러나 그와 같은 공식들은 우리가 어떤 목적들을 위해서 건물 주변에 적절히 설치할 수 있는 발판일 뿐이다. 따라서 우리는 그것을 건물 자체의 내부적이고 본질적인 구조로 오해해서는 안 된다.

사실상 비평에 대한 대부분의 불만은 시에 ‘관해’ 우리가 말하는 특정한 언급들을-즉 시의 내용이나 혹은 거기에 담긴 진실이나 혹은 그것이 제시하는 공식 따위에 관한 진술들을- 시 자체의 본질적인 핵심으로 오해하려는 경향에서 파생한다는 말로써 요약될 수 있을는지도 모른다. 그러한 사실을 W. M. 어반(Urban)은 그의 저서 『언어와 현실(Language and Rerlity)』에서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직관과 표현의 불가분성의 일반적인 원리는 미학적 직관의 경우에 특별한 효력을 지닌다. 이 경우에 있어서는 형식과 내용, 혹은 내용과 수단이 불가분의 관계라는 의미이다. 예술가가 우선 그의 대상을 직관하고 그리고 나서 적절한 수단을 찾아내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의 대상을 직관하는 것은 그의 수단을 통해서이다.’ 그리고 창작의 과정이 그렇거니와 비평의 과정도 그렇다는 것이다. 즉 ‘직관적인 것으로부터 비직관적인 것으로의 이행은 상징의 기능과 의미를 부정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더욱 보편적이고 이상적인 관계들이 더욱 직관적인 것을 수단으로 해서 간접적으로 표현되는 것은, 엄밀히 말해서 그것들이 충분할 정도로 직접적으로 표현될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와 같은 오류가 가장 두드러진(그리고 바로 그 때문에 실질적인 위험이 가장 적은) 실례들은 시를 노골적으로 선전으로서 취급하는 이론들이다. 가장 미묘한(그리고 언어의 애매성에 가장 고집스럽게 뿌리박고 있는) 이론들은 시의 ‘해석적’ 요소들로 시작해서  결국에 가서는 시의 다른 요소들을 해석적인 요소들의 종속적인 역할로 격하시키는 이론들이다. (모든 요소들 사이의 관계는 분명히 유기적인 관계임에 틀림없다. 이 문제에 있어서는 어떠한 의문의 여지가 있을 수 없다. 그러나 해석적인 요소들이 우월한가의 여부에 대해서는 매우 심각한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윈터스(Winters) 씨의 입장은 어쩌면 해석의 이단(異端)의 가장 두드러진 경우를 보여줄 것이다. 그는 시의 ‘이성적 의미’를 우위에 놓고 있다. 그는 최근 저서에서 ‘시에 있어서의 이성적인 진술과 감정 사이의 관계는 따라서 작의와 정서 사이의 관계로 드러나기 마련’이라고 언급하고 있다. 그는 이어서 그의 요지를 예시하기 위해서 브라우닝의 다음과 같은 행들을 간략하고도 탁월하게 분석하고 있다.


   밤은 그렇게 이울었다, 동녘은 잿빛이었고,

넓적한 월년초는 하얗게 꽃피고…

   So wore night; the East was gray,

White the broad-faced hemlock flowers…


그는 계속해서 이렇게 말한다. ‘이울었다(wore)’라는 동사는 문자 그대로 밤이 지나갔다는 사실을 의미하지만, 그것은 주인공의 상황에 속하는 기진맥진과 소멸의 함축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잿빛은 우리가 그러한 상황과 결부시키는 색깔이다. 우리가 이 대목을 ‘그렇게 밤은 지나갔다’로 고쳐서 읽는다 해도 그 이성적 의미는 마찬가지이며 그 운율 역시 똑같이 고상하지만, 이 행이 지니고 있는 힘의 흔적은 전혀 남지를 않는다. 이울었다가 지닌 함축은 상실돼버릴 것이고, 잿빛이 지닌 함축은 힘을 쓰지 못할 상태에 머물러 있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울었다’가 무엇을 의미할 수 있든지 간에, 그리고 윈터스 자신의 탁월한 분석이 드러내는 바와 같이 ‘이울었다’가 ‘이성적’이건 ‘비이성적’이건 상당한 것을 ‘의미한다’ 하더라도, ‘이울었다’는 어휘는 ‘문자 그대로’ ‘밤이 지나갔다’는 사실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 문자 그대로 ‘밤은 이울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게다가 ‘밤은 이울었다’와 ‘그렇게 밤은 지나갔다’가 ‘똑같은 이성적 의미’를 지녔다고 말하려면 ‘이성적 의미’를 헐거운 해석의 의미와 동일시할 때만 비로소 가능하다. 그런데 헐거운 해석을 ‘작의와 정서’의 관계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그것이 문제되는 감정들의 ‘출처’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혹은 윈터스 씨라면 ‘이성적 진술’과 ‘이성적 의미’를 동일시할 리가 있겠는가?)

이 경우에는 어떤 궤변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이 깔려 있다. 윈터스가 이성을 중요시하는 관점에서 볼 때나 가치평가를 명백하게 드러내는 시들에 대한 그의 기호에서 볼 때나, 그리고-그런 관점들에서 볼 때는- 그렇지 못한 시들에 대한 그의 잦은 맹목성에서 볼 때, 중요한 것은 ‘밤은 이울었다’와 ‘그렇게 밤은 지나갔다’가 그것들의 ‘이상적인 의미’로 공유하고 있는 것이 실은 개개의 ‘이성적인 의미’가 아니라 그 양자의 최소 공통분모라는 사실을 인식하는 일이다. 시의 구조를 언급하면서 결국에 가서는 시를 해석한다는 것이 시의 외곽에 있는 어떤 것을 시의 구조로 언급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다시 되풀이하거니와, 비평에 있어서의 우리의 대부분의 난점은 해석의 이단에 뿌리박고 있다. 우리가 그것 때문에 오해에 이끌린다면, 우리는 시와 그것의 ‘진리’ 사이의 관계를 왜곡하고, 신념의 문제를 불완전하고 왜곡된 형태로 제기하고, 시를 그것의 ‘형식’과 ‘내용’으로 분리시키고, 시의 진술을 과학이나 철학이나 신학과의 무모한 경쟁으로 몰고 가는 꼴이 될 것이다. 요컨대 ‘시의 효용’에 관한 지난 25년간의 싸움을 재현시키는 형태로 시에 관한 문제를 제기하는 꼴이 될 것이다.8)

우리가 해석의 이단 때문에 오해에 이끌린다면, 시 자체의 내재적인 질서에 대해서는 그보다도 훨씬 심한 폭행을 가할 위험성이 있다. 그러한 해석을 우리의 기초로 삼는다면 메타포와 운율의 기능을 오해하게 될 것이다. 논리적인 일관성이 때로는 적절하지 못한 대목에서 그것을 요구하고, 상상력에 바탕을 둔 일관성이 꽤나 적절한 대목에서 그것을 못 보는 경우가 자주 있게 될 것이다. 해석의 이단에 담긴 함축의 일부가 너무도 고집스럽고 너무도 복잡해서 나로서는 그것들을 부록으로 묶는 게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관심이 있는 독자라면 거기서 이 문제에 대한 보다 깊은 논의를 읽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는 어렴풋이 윤곽만 드러낼 실증적인 이론에 대한 어떤 오해들에 대해서도 해답이 있을 것으로 나는 희망하고 싶다.

그러나 실증적인 이론이란 무엇일까? 우리가 논리적인 구조의 원리를 더욱 쉽사리 받아들이는 까닭은, 우리 중의 많은 사람들에게는 그렇게 하지 않으면 시의 의미가 절망적으로 허공에 떠버리지 않을까 하는 기우가 있기 때문이다. 그것과 반대되는 입장은 상아탑의 상대적인 안정마저 결여된 것처럼 보일 것이다. 즉 그러한 입장은 멋대로 떠도는 풍선에 몸을 맡기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왜냐하면 시의 ‘내용’을 어떤 진술로 꼬집어낼 가능성을 부정한다는 것은 시가 실제로 아무 것도 말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것처럼 보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과학적 혹은 철학적 척도로 평가된 시는 결코 ‘완벽한 시’가 아니라 시의 추상화이기 때문에, 우리로서는 결코 시를 그와 같은 척도로 잴 수 없다는 사실은 이미 앞장들에서 암시되었고 이 장에서는 하나의 제목으로 채택되었는데, 그와 같은 논의는 그와 같은 독자들에게는 일종의 논리의 불모나 명백한 회피로 보일 것이다.

그렇다면 시가 무엇이며 시가 하는 일이 무엇인가에 대한 어떤 실증적인 설명을 얻으려면, 적어도 여러 가지 전략에 대한 고려가 필요하다. 그리고 비록 나로서는 시가 무엇인가를 암시하는 것 이상을 할 수 있다고 약속할 수 없거니와, 나의 용어들이 결국 메타포 이상이 될 수도 없겠지만, 어떤 실증적인 설명은 얻어질 수 있을 것이다.9)

시의 본질적인 구조는(우리가 시에서 추상해낸 ‘진술’의 이성적 혹은 논리적 구조와 구분해 볼 때) 건축이나 회화의 구조를 닮았다. 즉 그것은 단호한 강조들의 유형이다. 혹은 현대예술을 고려함으로써 시에 더욱 접근하자면 시의 구조는 발레나 음악구성의 구조와 닮았다. 그것은 애초의 설계를 통해 진전된 해결책들과 균형들과 조화들의 유형이다.10)(각주도 필독할 것. 밑줄 편자)

혹은 시에 더욱 가까이 접근해 보면 시의 구조는 연극의 구조와 닮았다. 이 마지막 실례는 다시 한번 혼란스러운 요소를 불러들일 위험이 있다. 왜냐하면 연극도 역시 시와 마찬가지로 언어를 이용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대체로 우리는 연극에 대해서는 서정시에 대해서보다 대부분 ‘진술’의 개념을 덜 강요하기 마련이다. 왜냐하면 연극의 속성 자체는 그 어떤 것을-갈등을 통해 결론에 도달하는 그 어떤 것을- 다시 말해서 그 자체 속에 갈등을 구축하는 그 어떤 것을 ‘연기해 내는’ 데 있기 때문이다. 요컨대 연극이 지니고 있는 다이내믹한 속성은 우리로 하여금 그것을 연기를 위한 공식 혹은 연기에 관한 진술로서보다는 연기로서 간주하게 한다. 그러므로 바로 이 때문에 시의 구조를 암시하는 데 있어서 어쩌면 가장 도움이 되는 유추는 연극의 구조이며, 적어도 많은 독자들이 시에 접근하는 데 있어서 가장 덜 혼잡스러운 방법은 그것을 연극으로서 생각하는 일일 것이다.   

물론 시건 연극이건 간에 그 어느 것도 관념들을 전혀 이용하지 않는다거나, 혹은 그 두 가지가 모두 단순히 정서적-그것이 무엇이든지 간에-이라거나, 혹은 그것들이 그 구조 속에 흡수하는 지적인 소재들과 구조 속의 다른 요소들 사이에 가장 밀접하고 가장 중요한 관계가 없다거나 하는 따위들이 보편적인 요점은 아니다. 한 편의 시에 있어서의 지적인 요소들과 지적이 아닌 요소들 사이의 관계는 실제로는 전통적인 설명들이 항용 드러내는 이상으로 훨씬 긴밀하다. 그 양자 사이의 관계는 ‘정서 속에 감싸인’ 관념의 관계라거나 ‘감각적인 이미저리에 의해 장식된 산문적인 의미’의 관계는 아닌 것이다.

시가 움직이는 차원은 관념들을 배제하는 차원이 아니라, 여러 가지 태도들을 포괄하는 차원이다. 분명히 그 차원은 관념들을 포괄한다. 우리는 한 편의 시에서-가장 단순한 시에서조차- 항상 하나의 ‘관념’을 추출해낼 수 있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가장 단순하고 비지성적인 시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서풍이여, 그대는 어느 때 불며

   작은 빗방울은 어느 때 내릴 수 있을 것인가?

주여, 나의 사랑이 나의 품안에 있고

   그리고 다시 내가 내 침대에 있다면!

Western wind, when wilt thou blow

   That the small rain down can rain?

Christ that my love were in my arms

   And I in my bed again!


그러나 우리가 추상화하는 관념은-그 관념이 어떤 것인가에 대해 우리 모두가 동의할 수 있다고 가정하더라도- 늘 추상화될 뿐이다. 그것은 늘 하나의 선을 따르는 하나의 평면의 투사이거나 혹은 하나의 평면 위의 하나의 원추의 투사이기 마련이다.

이 마지막 유추가 분명하기보다는 오히려 혼란스러운 것으로 여겨진다면 연극과의 유추로 되돌아가 보기로 하자. 우리는 시 속에서 주장된 어떤 입장이든지 추상으로 받아들일 게 아니라, 어디까지나 시의 입장에서 정당화돼야 한다고, 설령 정당화되더라도 그것의 과학적 혹은 역사적 혹은 철학적 진리의 힘에 의해서가 아니라 연극의 속성과 유사한 원리를 바탕으로 해서 정당화돼야 한다고 논한 바 있다. 따라서 ‘아름다움은 진리이며 진리는 아름다움이다’라는 명제는 그 시의 전체적 맥락과의 관계에 의해 그것의 엄밀한 의미와 의의가 부여된다.

이러한 원리는 시 속에 명제(과학적․역사적․철학적. 편주)가 과도하게 주장되었을 때, 다시 말해서 그것이 시의 특수한 세부를 구성할 때를 살펴보면 충분히 손쉽게 드러난다. 그러나 독자는 당연히 이렇게 물을 수도 있다. 즉 시의 전체적인 의미를 충분히 드러낼 명제 혹은 진술을 구축하는 게 가능하지 않겠는가? 다시 말해서 시가 시로서 ‘말하는’ 바를 간략하면서도 명제의 형태로 ‘말해’ 줄 요약적인 명제, 즉 그것을 완벽하면서도  그 이상도 아니고 그 이하도 아니게 정확하게 말해 줄 명제를 구성하는 게 가능하지 않겠는가? 시인이 하려고 마음만 먹었으면 그와 같은 명제를 구축할 수 있지 않았겠는가? 우리는 독자로서 그리고 비평가로서 그 와 같은 명제를 구축할 수 없겠는가?

시인 자신은 분명히 그렇게 하지 않았다는 것이, 다시 말해서 그런 식으로라면 시인은 그의 시를 쓰려 하지 않았을 거라는 것이 그에 대한 답변이 될 게 틀림  없다. 우리는 독자로서 시를 이해하려는 노력 가운데서 그와 같은 명제를 구축하려는 시도를 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시의 이해에 도움이 될 수도 있다. 그와 같은 명제에 도달하려는 노력은 우리가 그것을 시의 내부에 있는 핵심으로 오해하지 않는 한, 다시 말해서 그것을 ‘시의 실질적인 내용’으로 오해하지 않는 한 틀림없이 아무런 해도 끼칠 리가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것을 본질적인 시를 대표하는 것으로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전체적인 맥락에 의해 구사된 제한들(연극의 속성과 유사한 원리를 바탕으로 한 명제. 편주)을 아무런 가치 없는 것으로 무시했거나, 혹은 압축된 산문의 진술 속에 전체적인 맥락의 효과를 재현할 수 있다고 가정한 꼴이 될 터이니 말이다.11)

그러나 시의 ‘실질적인 의미’에 대한 논리적 해석 속에 시의 통일성이 반영돼 있음을 부정한다고 해서 물론 시에 있어서의 통일성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그 통일성을 딴 데서 찾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한 편의 시의 특징을 이루는 통일성은(이러한 시적 통일성뿐만 아니라 우연히도 논리적 통일성까지 소유할 수도 있는 시들의 경우에 있어서조차) 하나의 총체적이고 통제적인 태도 속에 종속된 체계 속의 여러 태도들의 통일성에 있다. 통일화된 시 속에서 시인은 그의 체험과 ‘관계를 맺은’ 것이다. 시는 단순히 논리적인 결론으로 끝나는 게 아니다. 시의 결론은 여러 가지 긴장들이-그것들이 어떤 수단에 의해 설정되었든지 간에- 명제들과 메타포들, 상징들에 의해 해소되는 결과이다. 통일성은 논리적인 과정이 아니라 극적인 과정에 의해 성취되며, 그것은 하나의 공식이 아니라 여러 세력의 균형을 드러낸다. 그것은 연극의 결론이 밝혀지듯이 ‘밝혀’지는데, 그 까닭은 연극의 주제처럼 이미 수락된 갈등들을 해소하는 그 능력 때문이다.  

따라서 각 항목들과 전반적인 맥락과의 관계가 어째서 중요하며, 시의 효과적이고 본질적인 구조가 어째서 태도의 복합성과 관련을 맺음으로써 달성되는가를 살펴보기는 쉬운 일이다. 과학적인 명제는 독자적으로 존재할 수 있다. 그것이 진실하다면 진실한 것이다. 그러나 어떤 태도의 표현은 그것을 파생시킨 상황이나 포괄하는 환경과 분리되어 있을 때는 무의미하다. 예컨대 「각성」 송가의 마지막 두 행,


내겐 피어나는 가장 보잘것없는 꽃이라도

눈물 흘리기엔 너무 깊이 깔린 생각들을 줄 수 있노라,

To me the meanest flower that blows can give

Thoughts that do often lie too deep for tears,


을 따로 떼어놓고 보면-이 시의 맥락을 어렴풋이 나마 알고 있는 사람이 따로 떼어서 인용했다는 의미가 아니라- 화자와 관련해서 볼 때는 감상적인 진술이 될 것이고 보편적인 관련에서 볼 때는 무의미해지기 쉬운 진술이 될 것이다. 길거리에 있는 사람이라면(평범한 대학 신입생이라면 딱 좋다) 피어나는 가장 보잘것없는 꽃이 그에게는 눈물 흘리기엔 너무 깊이 깔린 생각들을 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가 그 문제에 대해 골똘히 생각해보더라도 그로서는 이와 같은 주장을 하는 사람이 매우 나약한 감상주의자라고 느끼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이미 ‘아름다움은 진리이며 진리는 아름다움이다’라는 진술이 유능한 비평가들의 손에서까지 전체 맥락으로부터 분리된 것을 보았으며 그러한 분리로부터 생겨나는 오해를 살펴본 바 있다. 한 가지 실례를 더 들어보자. 즉 헤릭의 「코리나」의 마지막 연을 따로 떼어놓고 보면 아마도 일반적인 독자에게는 감상적인 넌센스로서는 깊은 인상을 주지는 못할 것이다. 그렇지만 전체 맥락으로부터의 키츠의 「송가」로부터의 몇 행의 분리와 똑같은 결과를 빚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단순한 진술로 그친다면 평범하고 분명한 그 어떤 것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인생이 짧다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진술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러한 사실로부터 생겨나는 결론은 소신 있는 이교도에게는 너무도 자명한 말투가 될 것이고 그리고 소신 있는 기독교도에게도 비록 가증스러우면서도 역시 독같이 자명한 넌센스로 보일 것이다.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엄격한 일반화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에게 시인이 항상 딱 부러진 분간들을 흐리게 하고 타협들을 제시하고, 혹은 기껏해야 감질나게 하거나 불필요하게 꾸물거린 다음에 결론에 도달하는 것처럼 보일 수밖에 없는 이유가 될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러한 마지막 입장은 단지 해석의 이단의 변형에 불과하다. 즉 우리가 시의 목적으로 인정할 수 있는 것은 궁극적으로 하나의 명제, 즉 하나의 진술의 창조일 뿐이라는 이유 때문에 시의 꾸물거림을 부정적인 것으로 취급한다거나 혹은(곡선은 아름다운 선이라는 안이한 확신 때문에) 그것을 용서한다든지 하는 따위의 태도를 취한다는 것은 시의 목적을 오해하는 것이다.

그러나 훌륭한 시에 있어서의 꾸물거림은(그것은 시를 산문적으로 해석하는 입장에서 볼 때만 꾸물거림이지만) 부정적인 것이 아니며, 용서받아야 할 성질도 아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우리는 그것의 긍정적인 기능이 무엇인가를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것에다 긍정적인 가능을 부여할 수 없다면 ‘산문적인 노선의 주장’으로부터의 하나의 가치가 또다른 가치와 다른 이유를 설명하는데 어려움을 느낄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은 운율체계와 메타포가 불러들이는 명백한 모순들도 훌륭한 시에서는 우리가 전체적인 상황과의 관련에서 받아들여야 할 전체적인 태도를 수식하고 제한하고 발전시키는 기능을 발휘한다는 사실을 우리가 인식할 때, 그것들은 적절한 것으로 드러난다.(밑줄 편자)  

마지막 문장이 어떤 특수한 ‘시의 용도’-즉 시 자체가 계발해야 할 어떤 치유적인 가치-쪽으로의 위험한 전환처럼 느껴진다면 나로서는 시가 치유해야 할 어떤 특수한 질환도 염두에 두지 않았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시의 용도는 늘 발견되기 마련이며 또 틀림없이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러나 시의 구조에 대한 나의 논의는 이 시점에서는 미래에 시가 취할 것으로 기대되는 어떤 새롭고 특수한 역할 혹은 내가 부여할 어떤 새로운 기능에 의해 한정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지금까지 묘사된 구조-‘몸짓’ 혹은 태도의 구조-는 내가 보기에는 『오디세이(Odyssey)』와 『황무지(The Waste Land)』의 본질적인 구조를 모두 묘사해주는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이 책에서 고찰한 열 편의 시들이 공유하고 있는 종류의 구조인 것으로 보인다.

시의 구조가 지금까지 묘사한 질서의 구조라면, 그 사실이야말로 내가 앞장들에서 ‘아이러니’라든가 ‘역설’ 따위와 같은 용어들에 자주 의존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정당화시켜주지는 못하더라도) 설명해줄지도 모른다. 물론 아이러니라는 말을 사용하면 시를 간교하고 자의식적인 것으로 보이게 할 위험이 있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독자들이 보기에 아이러니라고 하면 풍자, 사회시 그리고 그밖의 ‘지적인’ 시들을 연상시키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와 같은 용어를 사용해야 할 필요성은 분명해질 것이다. 그리고 아이러니란 하나의 맥락 속에 담긴 다양한 요소들이 전체 맥락으로부터 받아들이는 제한의 종류를 지칭할 때 가장 보편적인 용어이다. 우리가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이런 종류의 제한은 어떤 시에서든지 굉장한 중요성을 지니고 있다. 게다가 아이러니는 부조화들에 대한 그러한 인식을 드러내는 데 있어서 가장 보편적인 용어인데, 이 부조화들도 역시 우리의 전통적인 비평이 지금까지 인정하려던 것보다는 훨씬 심할 정도로 모든 시에 스며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보편적인 의미에 있어서의 아이러니는 던의 「성도가 되다」에서와 마찬가지로 테니슨12)의 「눈물, 덧없는 눈물」에서도 드러나기 마련이다. 우리는 물론 포프의 『머리타래의 겁탈』에서 아이러니를 기대하도록 배웠지만, 키츠13)의 「그리스 항아리에 부치는 송가」에는 심오한 아이러니가 담겨 있으며 워즈워스14)의 「각성」 송가에도 매우 강력한 종류의 아이러니가 담겨 있다. 이 시에 담겨 있는 다양한 상징들에 의해 구사되는 추진력과 압력을 시인은 회피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들은 상호 견제작용을 하도록 계산된 것이다. 사실상 과학적인 관점에서 볼 때는 상징들이 거꾸로 사용돼 있다. 즉 가장 우수한 철학자는 어린아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빛이 생겨나는 것은 일종의 어둠-즉, ‘어렴풋한 그 어떤 것’-으로부터라는 것이다. 그리고 어른이 되는 성장은 감옥으로부터의 탈출이 아니라 그 속으로의 투옥이라는 관점으로 제시되고 있다.

그것이 왜 그럴 수밖에 없는가의 이유에 대해서는 하등의 신비가 있을 수 없다. 과학의 용어들은 맥락의 압력 밑에서도 변화하지 않는 추상적인 상징들이다. 그것들은 순수한(혹은 순수하고자 하는) 외연들이다. 그것들은 미리 규정되어 있다. 그것들은 새로운 의미 속으로 굴절돼서는 안 된다. 그러나 시의 언어들을 내포하는 사전이 어디 있는가? 시인이 꾸준히 언어를 개조할 수밖에 없는 것은 자명한 공리 때문이다. 엘리엇이 표현한 바와 같이 그의 임무는 언어를 ‘의미 속으로 이탈시키는’ 것이다. 그리고 과학적 어휘의 입장에서 볼 때는 그것이야말로 엄밀한 임무이다. 그도 그럴 것이 합리적으로 생각해 볼 때 이상적인 어휘라면 하나의 어휘가 하나의 의미를 지닐 것이며, 어휘와 의미 사이의 관계는 변함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시인이 구사하는 언어는 의미의 추상적인 분자가 아니라, 의미의 잠재력, 의미들의 관계 혹은 집단으로 파악돼야 한다.(밑줄 편자)

시인의 언어를 세부적으로 고찰했을 때 해당하는 진리는 시라는 좀더 큰 전체에도 그대로 해당하는 진리이다. 그래서 시를 대체로 합리적인 진술로서 접근하기를 고집한다면 그 진술들이 항상 아이러니컬한 형태로 우리 앞에 제시되는 것처럼 보여도 놀라서는 안 될 것이다. 우리가 시 속에 담겨 있는 진술을 고찰해보면 그것은 물 속에 담겨있는 막대기처럼 비틀리고 휘어진 모습으로 우리 앞에 나타난다.15) 사실상 그 진 이 어떤 것이든 간에 그것은 항상 적극적이고 노골적인 공식으로부터 벗어난 굴절로서 그 모습을 드러내기 마련이다.

그러나 던에 대한 관심이 다시 살아난 현시점에서 시의 본질적인 구조가 논리적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은 그릇된 것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하기야 던이 최근에 메타포의 거장으로서 호소력을 갖게 된 것은 셰익스피어의 소네트에 있어서의 이미지들의 배열이 서투르고 헐거운 반면에 던은 그의 이미지들에 경쾌한 논리를 부여하기 때문일 것이다. 던이 논리의 대단한 실례를 보여준다는 것은 나무랄 데 없는 사실이지만, 두 가지 사실이 언급돼야 할 필요가 있다. 첫째로 정밀하고 ‘논리적인’ 수사법은 던의 유일한 수사법 혹은 하다못해 그의 중요한 수사법도 아니다. 사실 ‘서로가 안식처가 된’과 같은 ‘압축된’ 수사법들은 연인들의 영혼을 컴퍼스의 두 다리에 비긴 눈부신 비유보다도 훨씬 자주 발견된다. 둘째로 ‘논리’를 이용할 때는 비논리적인 입장을 정당화하기 위해 사용하는 게 보통이다. 그는 관습적인 입장을 벗어 던지기 위해서 혹은 본질적으로 비논리적인 입장을 입증하기 위해서 그것을 채택하는 것이다.

던이 사용하는 논리는 거의 언제나, 일상의 논리로 볼 때는 그릇된 것이라고 우리가 판정한 관념이나 태도를 주장하기 위한 아이러니컬한 논리이다.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물론, 던이 그의 논리를 그런 식으로 사용하는 것이 옳지 않다거나, 혹은 그의 최선의 시들은 흔히 시들이 입증될 수 있는 의미에서만 ‘입증되지’ 않는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러나 그 입증은 논리적인 입증이 아니다. 연인들이 이 세상을 버림으로써 실제로는 더 좋은 세계를 획득한다는 「성도가 되다」의 논리는 무감각한 자연주의자에게는 거의 납득이 되지 않을 것이다. 또한 던의 연인들이 실제로 성도들이라고 이 시에서 이미 못박아 놓은 주장도 역시 교조주의적인 기독교인을 납득시키지는 못할 것이다.

논리를 사용함에 있어서 시인으로서의 던은 불을 든 악마와 싸우고 있는 셈이다. 로버트 펜 워렌(Robert Penn Warren)16)의 메타포를(다른 맥락에서 쓰인 그의 메타포를 들먹인다는 것은 좀 어색한 일이지만 이 경우에도 그대로 들어맞을 것이다) 쓰자면 이렇다. 즉 ‘시인은(성도보다는) 좀 덜 극적인 모습으로 그의 영상을 아이러니의 불길 속에-즉 구조의 드라마에- 바침으로써 그것을 입증한다. 그가 그렇게 하는 것은 그 불길이 영상을 단련시켜줄 것이라는 희망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시인은 그의 영상이 확립된 것을, 그리고 그것이 체험의 복잡성이나 모순에 대한 언급을 이겨낼 수가 있다는 것을 드러내기를 원하는 것이다.’

우리의 많은 위대한 시들에 담겨 있는 아이러니의 존재를 옹호하는 똑같은 원리는 그 중의 많은 시들이 역설을 둘러싸고 구축된 것처럼 보이는 사실에 대한 설명이 되기도 한다. 던에 대한 언급이 독자에게 편견을 불러일으킬지도 모르는 것과도 마찬가지로 여기서 다시 역설이라는 용어에 담긴 관습적인 영상들이 독자에게 편견을 불러일으킬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던은 어떤 유형의 독자들이 너무도 잘 알고 있듯이, 영리함으로써 독자에게 깊은 인상을 주기를 원하는 그룹에 속하는 시인이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두 던과 그의 추종자들에게 존슨 박사가 던진 비난을 잘 알고 있으며, 또한 아직도 그 비난에 담긴 엄격성과 그 적용의 철저함을 완화시켰을 뿐 하나의 원리로서는 포기하지 않은 채로 그것을 자신의 것으로 보유하고 있는 사람도 우리 중에 꽤 많을 것이다.

그렇지만 시인들이 차례로 평범하고 논리적인 단순성보다 애매성과 역설을 택하게 된 데는 그러한 수사학적 이유보다는 더 고상한 이유들이 있기 마련이다. 시인의 입장에서는 과학자처럼 그의 체험을 분석하여, 그것을 여러 조각들로 나누고, 그것들을 구분하고 다양한 조각들을 분류하는 것으로는 충분치 않다. 그의 업무는 궁극적으로 체험을 종합하는 데 있다. 그는 체험 자체의 통일성을 우리에게 되돌려주어 그 자신의 체험 속에 담긴 그것을 우리로 하여금 깨닫게 해야 한다. 시는, 그것이 진정한 시라면, 현실의 상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것은 하나의 ‘모방’이다. 즉 체험에 대한 단순한 진술이거나 체험으로부터의 단순한 추상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체험이 되기 때문이다.

테니슨은 추억 속에서 시인은 죽어 있는 동시에 살아 있다고 말하는 걸로 만족할 수는 없다. 즉 그는 그러한 죽음 속의 삶을 우리 앞에 극화시켜야 하며, 그의 극화는 필연적으로 아이러니컬한 충격과 놀라움을 내포하기 마련이다. 그러한 극화는 추억의 상반되는 국면들이 하나의 속성 속에 합체되기를 요구하는데, 그 하나의 속성은 진술의 차원에서 말하자면 하나의 역설이다. 즉 상반되는 것들의 결합의 주장이다. 키츠의 항아리는 삶과 그것의 영고성쇠를 넘어서는 삶을 표현해야 하지만, 그와 동시에 그것의 삶이 삶이라고는 할 수 없고 오히려 일종의 죽음이라는 사실마저 증언해야 할 입장이다. 그것을 다른 말로 바꾼다면 항아리는 역사가의 역할을 하는 가운데서 신화가 역사보다 더 진실하다는 주장을 해야 할 입장이다.(밑줄 편자) 던의 연인들은 세상을 소유하기 위해 세상을 버려야 할 입장이다.

혹은 또 하나의 예를 들자면, 워즈워스의 빛은 인간의 환상 중에서 서로 양립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이는 국면들, 즉 직관과 분석적인 이성에 대한 일반적인 상징으로서 이바지해야 할 입장이다. 사실상 워즈워스의 시는 시인의 특징이 되는 문제 자체를 아름답게 전형화시키고 있다. 이성이라는 점차로 밝아지는 빛 아래서 세상이 분리되고 판별되는 과정에 대해 그토록 심각하게 증언하고 있는 이 시조차도, 그러한 사실 앞에서 그 자체의 통찰의 형태로 멈출 수는 없고 오히려 한 편의 시가 되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여러 가지 환상에 대해 최악의 사실이 말해진 다음에라도 시인은 여하튼 어린아이가 어른의 아버지라는 사실과, 새벽의 빛이 어찌됐든 저녁의 빛과 똑같은 빛이라는 사실을 입증해야 할 입장이다.

그리고 나서 시인이 체험의 다면성을 충분히 고려에 넣으면서도 그것의 통일성을 극화해야 할 입장이라면, 그가 역설과 애매성을 구사하는 것이 필연적으로 느껴질 것이다. 그는 피상적으로 자극적이거나 신비한 수사를 구사해 가면서 김빠진 수프 냄비를 휘저으려고 애쓰고 있는 것만은 아니다(물론 이것이야말로 저급한 시인이 일반적으로 행하고 있는 바이며 또한 진짜 시인도 타락한 가운데서 행하고 있는 바이지만). 오히려 그는 우리에게 하나의 통찰력을 제시해주고 있는 것인데, 그 통찰력은 체험의 통일성을 지니고 있으며, 또한 그것이 더욱 고상하고 진지한 차원에 있을 때는 체험에 있어서의 뚜렷하게 모순되고 상충되는 요소들을 새로운 유형으로 결합시킴으로써 그것들을 극복하는 힘이다.

그러고 보면 워즈워스의 「각성」 송가는 한 편의 시일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시에 관한 하나의 비유임 셈이다. 키츠의 「그리스 항아리에 부치는 송가」는 그와 같은 비유로서 아주 두드러진 경우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사실상 이 저서에서 우리가 논의해온 대부분의 시들도 그와 같은 비유로서 생각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어떤 의미에서 벨린더를 취급하는 포프의 태도는 시의 특징을 이루는 모든 문제를 제기한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포프는 그의 ‘여신’을 취급하는데 있어서 자연주의의 요구와 상식의 요구에 다같이 직면해야 할 입장인데, 상식의 요구는 그녀의 신성함을 부정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가 그것들과 대면하지 않는다면 그는 단지 감상주의자에 불과할 것이다. 그는 그보다도 훨씬 더 엄격한 일을 해야 할 입장이다. 즉 그는 그녀를 자타가 공인하는 미녀로 치켜세우게 될 신성함이라는 관습적이고 정중한 속성을 초월해야 할 입장이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는 좀스럽고 분명한 시인이 되고 만다. 그는 상식적인 부정(야수적인 부정)이나 관습적인 부정(정중한 부정)에 맞서서 그녀의 신성함을 입증해야 할 입장이다. 그리하여 시는 다음과 같은 맥락에서 벗어나야 한다. 즉 거친 청년이 탐내지만 벨린더는 오히려 숙녀인 체하면서 방어하고 자연주의자는 동물적인 것에 불과하다고 주장하지만 곱슬거리게 손질된 가운데서 역사의 어떤 특정한 시대의 유행을 보여주는 벨린더의 머리타래는 별들 가운데서 영속적인 위치를 차지하게 된다.


각주

1) Cleanth Brooks, 이경수 역, “해석의 이단(異端),” 「잘 빚어진 항아리」, 개역판(서울: 문예출판사, 1997), pp. 255~280. "Heresy of paraphrase"의 번역인데, "paraphrase"는 “敷衍, 意譯, 또는 (알기 쉽게)바꾸어 말하기”를 의미하는 것으로서, 詩作에 있어서 부연하여 설명하거나 풀어서 언급하는 것을 피하여야 한다는 것을 언급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이 문구는 “부연설명은 이단이다”라고 번역하는 것이 보다 평이할 것으로 생각한다.(편주)   

2) John Donne(1572~1631): 그는 Ben Jonson(1572~1637)처럼 무슨 계파를 형성한 일은 없었지만 다음 세대에 미친 영향력은 한층 더 컸다고 할 수 있다. 그의 시에는 두 가지 두드러진 특징이 나타난다. 그 하나는 지성적 정열이고, 나머지 하나는 감각적 열정인데 둘 다 생동감을 가지고 있다. 그의 지성적 정열은 그 필연적 결과로서 생의 기원과 종말에 왕성한 관심을 표명하게 되었고, 그의 관능적 열정은 인생의 유한성과 아름다움의 덧없음에 대하여 날카로운 인식을 자아냈다. 결국 그의 시는 그의 기지(wit)의 바탕에 놓여있는 지성과 관능이 서로 작용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지성이 우세할 때에는 기지는 신랄하게 우리 열망을 현실과 비교하면서 빈정대기를 좋아하였고, 우울한 쇠퇴의 징상이 농후할 때에는 기지는 죽음의 심상에 머물면서 무시무시한 흉물로 화하기도 하였다. 하여간 그는 인생을 새로운 각도에서 예리하고도 냉철하게 관찰하였고 그것을 새로운 기교로 표현하였다.(편주)

3) William Butler Yeats(1865~1939): 그는 50년간 시인 생활을 하면서 시의 발전상을 수시로 보여주었다. 그것은 20세기의 시의 개혁을 어느 정도 요약한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는 아일랜드 출신으로서 처음에는 미술 공부를 하였지만 미술보다는 시에 마음이 끌리고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1885년경부터 일기 시작한 켈트 문예부흥 운동의 주도적 인물 중 하나로 활약한 그는 처음에는 언론인으로서 연사로서 민족주의 운동에도 관심을 가졌었다. 그는 영문학보다 아일랜드 문학을 더 훌륭하게 창조하려는 의욕을 가지고 켈트족의 특징인 신비주의와 초자연적인 세계에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아버지의 회의주의적 사고 방식에 영향을 받아 정통적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일 수 없었지만, 심령의 뿌리를 찾고 싶은 의욕과 포괄적인 종교에 대한 갈망을 언제나 가지고 있었다.(편주)   

4) Robert Herrick(1591~1674): Ben Jonson의 제자 중 가장 눈부시게 활약한 시인으로서 문인으로서의 활동 규모는 Jonson에 비해 그 범위가 좁았고 지적 능력이 스승을 따르지 못했지만 제한 된 범위 안에서 그가 보여준 세밀함과 완벽함은 주목할 만하다. 그는 100행 이상 되는 비교적 길다란 작품은 몇 편밖에 못 썼지만 2줄로 이루어지는 짧은 경구 시는 수없이 많이 썼다. 심지어는 가장 짧은 율격인 단보격(monometer)만으로 이루어지는 시까지 능숙하게 썼다. 한마디로 그는 세밀하고도 축소된 작품의 명수였다고 할 수 있다.(편주)

5) "paradigmatic structure"를 언급하고 있다.(편주)

6) "syntagmatic structure"를 언급하고 있다.(편주)

7) 제약인 悟性의 판단에 의지한다는 것을 의미한다.(편주) 

8) 물론 나는 이러한 논쟁 중의 일부가 대단히 유익했다는 사실을 극소화시키려 하거나, 혹은 지난 25년 동안의 논의에 의해 밝혀진 조명이 없었더라도 앞장들이 쓰여질 수 있었으리라는 사실을 암시하려는 것은 아니다.

9) 메타포들(혹은 내가 부여할 수 있는 특정한 메타포들)에 만족할 수 없는 독자들을 위해서는 나는 르네 웰렉(Rene Wellek)의 탁월한 에세이 「예술에 있어서의 문학작품의 존재 양식(The Mode of existence of a Literary Work of Art)」(『The Southem Review』지 1942년 봄호)을 추천하는 바이다. 나는 그가 시를 ‘규범들의 성층구조’라고 한 정의를 손쉽고 간결한 정의로 여기고, 재현하려고 애쓰지는 않겠다. 왜냐하면 그 정의는 그가 구사하는 개별적인 용어들에 대해 그가 귀속시키는 더 많은 정의들이 없다면 상대적으로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나는 이 장에서 그의 용어들을 특별히 이용하고 있지는 않지만 여기서 윤곽을 밝힌 시에 대한 일반화들은 그의 에세이가 출발하는 입장에서 적용될 수 있다고 믿는다.

10) 『Accent』지의 최근호에서는 그 동안 내가 높이 평가해온 작업을 해온 두 비평가가 시의 역동적인 특성을 강조해놓았다. 케네스 버크(Kenneth Burke)는 우리가 시로서 고찰하려면 시를 ‘행위의 양식’으로 고찰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블랙무어(R. P. Blackmur)는 시를 몸짓으로서, 즉 ‘내면적이고 상상된 의미의 외면적이고 극적인 연기’로서 고찰할 것을 우리에게 요구하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이 비평가들이 모두 극적인 혹은 상징적인 행위에 나의 견해를 따라주기를 바라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나 자신의 입장에서도 버크 씨의 입장에 대해서는 오히려 몇 가지 유보사항이 있다. 그러나 분명히 우리의 입장 사이에는 일치하는 영역이 상당히 크다. 독자는 또한 이 장에 부여된 시적 구조에 대한 설명을 수잔 랭거(Susanne Langer)의 『새로운 열쇠 속의 철학(Philosophy in a New Key)』에 나오는 다음 대목과 비교해 보아도 좋을 것이다. ‘…시의 재료는 언어지만 그것의 중요성은 어휘들로 이루어진 문자상의 주장이 아니라 그러한 주장이 이루어진 방법인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는 음향과 템포, 어휘들의 연상들이 풍기는 분위기, 관념들의 길고 짧은 연속들, 그 관년들을 내포하고 있는 스쳐가는 이미저리의 풍요함이나 빈곤함, 순수한 사실에 의한 돌연한 환상의 포착, 혹은 돌연한 환상에 의한 익숙한 사실의 포착, 오랫동안 기다려오던 핵심적인 어휘 속에서 해소된, 지속돼온 애매성에 의한 문자상의 의미의 동요, 그리고 리듬이 지니고 있는 통일적이고도 모든 것을 포괄하는 기교 따위들이 모두 포함된다.   

11) 사실상 우리가 스스로에게 충분한 어휘들을 허용하고 우리가 충분한 유보와 수식을 가할 수 있다면 우리는 시가 말하는 바의 윤곽을 나타낼 수 있으며, 그리하여 계속적인 접근과 세련화에 의해서 시의 의미에 점점 가까이 접근하기를 시도하고, 그 의미를 점차 확대하고, 그것을 구체화시키기보다는 오히려 그것이 놓여있는 영역을 지시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 책의 앞장들은, 성공적으로 쓰였다면, 분명히 그러한 과정에 대한 설명이다. 하지만 그러한 윤곽들에는 시의 긴장-즉 극적인 힘-이 결여돼 있을 뿐만 아니라 기껏해야 시에 대한 조잡한 접근에 불과할 것이다. 게다가-그리고 바로 이 점이 핵심적인 요점인데- 그것들은 더욱 가까운 접근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시의 방법들-유추, 메타포, 상징 등등-에 의존할 수밖에 없게 될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한 어반(Urban)의 논평이 흥미롭다.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즉 우리가 상징을 확대하다 보면 ‘우리는 상징의 상징으로서의 “의미”와 가치를 상실한다. 이러한 해결책은… 내가 보기에는 상징의 해석에 대한 충분한 이론 속에 존재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것은 상징적인 문장을 문자로, 다시 말해서 상징적인 진실을 “무딘” 진실로 대처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상징의 의미를 더 깊게 하고 풍요하게 해준다.’

12) Alfred Tennyson(1809~1892): 1850년 사망한 Wordsworth의 뒤를 이어 계관시인이 된 그는 빅토리아 시대의 선도적인 시인으로서 로맨티시즘의 유산을 흠뻑 물려받았다. 그는 특히 Keats의 시에 나타나는 짙은 감각적 분위기를 그대로 흡수한 시인이었다. 즉 그이 시에는 우울과 애수, 상실과 회한의 정감이 짙게 깔려있다. 시에 등장하는 대상은, 그 대상을 구현하는 이미지는 그 대상의 본질의 파악이 아닌, 분위기의 창출에 이바지한다.(편주)

13) John Keats(1795~1821): 25세에 요절한 그는 그 짧은 생애 중에 그토록 풍요로운 작품을 남긴 경이로운 존재라는 점에서 Shelly를 방불케 하지만 여러 면에서 선배 시인과는 다른 면모를 보여준다. 아주 빠르고 세차게 솟구쳐 오르는 운동이 Shelly의 특징이라면, Keats의 시는 이와는 대조적으로 풍요롭고도 알찬 걸음걸이로 느릿느릿하면서도 넉넉하게 움직인다. 그는 미래에 도달하기 위해서 초조하게 서두르지 않는다. 오히려 과거 인류에 나타났던 온갖 아름다움과 현재의 자연과 인간과 예술 속에 깃들인 모든 매력을 천천히 심사숙고한다.(편주)  

14) William Wordsworth(1770~1850): 영국 로맨티시즘의 가장 심오한 포부를 표현한 시인이다. 그는 새로운 안목으로 자연과 인간을 보았으며, 그의 모든 노력은 새로운 환상을 전달하려는 시도였다. 젊었을 때 그는 프랑스 혁명의 열렬한 지지자였지만 20대 후반부터는 정치적 혁명의 꿈을 버리고 인생의 진정한 행복을 다른 데서 찾기 시작하였다. 그가 추구하는 행복의 길은 인생의 진정한 관습에 젖은 옛 사고방식에서 벗어나 감수성과 상상력을 배양하는 가운데 가장 보편적이고도 건전한 생의 근원을 찾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엉뚱한 곳에서 행복을 찾으려 했으며, 아름다움과 즐거움의 진정한 길도 포기하고 그릇된 시의 이념 속에서 방황하고 있음을 밝혀 주어야만 했다.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그는 막연한 추상적인 교훈을 제시하는 일보다는 자기 자신의 실제 체험을 나타내는 일을 하였다. 그는 자아를 곰곰이 살펴보고 젊은 날의 꿈과 좌절, 순수하게 느낄 수 있었던 기쁨과 잘못된 생각으로 불행을 초래했던 일들을 회상했다. 그리고 어떻게 그가 마음의 평정을 되찾을 수 있었는지도 솔직하게 묘사했다.(편주)

15) T. S. Eliot, 金良洙 역, 「Bradley 哲學의 認識과 經驗」(서울: 형설출판사, 1997), pp. 133~168. “물 속에 있는 지팡이의 경우(이것은 환각의 환상과는 전혀 다른 현상이다), 거기에는 ‘비뚤어진 영상 그 자체’가 있다. 즉 정지 상태에서 그 지팡이를 추상하여 집어든다면 지팡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경우, 동일한 대상에서 그것의 부분적인 국면을 빼내어 완성시키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예컨대 당신은, 이것들이 두 개의 국면으로 나누어져 있으나 지향하고 있는 것은 완전히 하나의 대상으로서, 이 두 개의 국면이 하나로 합해지면, 그 의미에 있어서 본질적으로 각각의 국면이 이어지는 하나의 대상을 얻게 된다고 말할 것이다. 그런데 이 점이 이른바 감각에 의한 착각과 환각의 차이점이다. 즉 처음에 나타난 대상의 자기 완성의 방향이 틀린 것이다.” 이하 참조.(편주)

16) Robert Penn Warren(1905~1989): 미국의 소설가, 시인, 비평가. 남부의 전통적이며 소박한 가치관을 양단논법으로 표현한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1986년에 그는 미국 최초의 계관시인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