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산문시로의 길

 

新散文詩への 道

 

(한맥문학 통권 304호, 2016년 1월호: 2015. 12. 25)

 

 

키타가와 후유히코(北川冬彦, きたがわ ふゆひこ)

주근옥 역

 

1

나는 시를 쓰기가 아니고, 시는 쓰여야만 하는 것도 아니고, 흥취가 솟아나는 대로 다만 노래 부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나의 혼을 기록하는 것에 머문다.-

구시대의 시인 대부분은, 이러한 시관(詩觀) 하에 때때로 널리 알려진 변덕스러움으로, 유장(悠長)한 혹은 무잡(蕪雜)한 혹은 멋(色氣)을 부리는 말을 토하는 것에 유혹되었다. 이것이 소위 서정시인 것이다.

 

2

시가 일정한 형태를 갖고 있는 시대, 신타이시(新體詩) 시대는 이것으로 족했다. 왜냐하면 그 당시의 시인은 그 일정한 주형(鑄型) 가운데에 혼을 교묘하게 흘려서 집어넣으면 족했던 것이었으니까.

 

3

그 후, 정형시는 자유시운동에 의해서 파괴되었다.

 

4

자유시가 정형시를 파괴해서, 시를 광야(廣野)에 개방했던 것은 대단히 훌륭한 것이었지만, 자유시운동에 관계했던 시인들은 파괴하는 것의 내용만 알고 건설을 잊어버렸다. 아니, 건설을 잊어버렸다기보다는 진짜의 자유시를 건설할 때까지, 그 능력이 발달하지 못했다고 하는 쪽이 옳겠다.

 

5

그들은 파괴 후에 쉽게 안주하고 있다. 농담처럼 말을 늘어놓으면, 호흡이 멈출 때까지 참아서, 담배연기를 한번 멈췄다가 뿜어내는 것은, 시의 연을 잘라 만드는 것과 같다. 엉터리 말 같지만. 그래서 호흡을 참아서 멈추는 것은, 시의 연을 가르는 것은, 그들이 파괴의 대상으로 삼았던 정형시의 형해(形骸)를 등에 짊어졌다고 하는 그 정형시가 살가죽과 같다고 하는 사실과 마음이 교접되지 못했다는 것을 뜻한다. 그렇다고 하기는 하지만, 안주하는 것이 무리는 아니다. 이것을 알게 하는 것은 역사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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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형시의 형해(形骸)를 등에 짊어진 채로, 자유시는 타락해 갔다. 그래서 드디어 민중시(民衆詩)”까지 왔다.

 

7

타락은 끝이 났다. 각성(覺醒)이 외쳐지지 않을 리 없다. “단시운동(短詩運動)”의 창()이 던져졌던 것이다. 이것은 민중시의 장황(冗漫)과 무잡(蕪雜)을 공격해서, 시의 순화와 긴밀화를 외쳤다. 그래서 거듭 민중시를 격퇴해서 시단을 숙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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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시운동은, 다가오고야 말 새로운 산문시운동의 시험관이었다.

 

9

각성은 거듭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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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의 시인은, 이제 단적으로 말해서 혼의 기록은 아니다. 또 감정을 유로(流露)하는 것도 아니다.

그는, 첨예한 두뇌로서, 산재케 하는 무수한 말을 주도면밀하게 선택해서, 정리하고 한 개의 우수한 구성물(構成物)을 구축할 때의 기사(技師)이다.

 

11

말과 말, ()와 구(), 행과 행, 이것들이 빈틈없이 결합된다. 지붕의 개와처럼, 시멘트가 강하게 그 성질을 잘 살리지 않으면 안 되는 것처럼. 계획은 몇 번이고 변경되어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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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시의 구성법이 엄격하게 추구되면 추구될수록 터무니없이 참고 행해서, 시의 연을 가르는 일의 필연성이 상실된다. 그래서 외관(外觀)은 산문과 거의 다르지 않은 것이 된다. 여기에 진짜 자유시의 길로 들어가는 열쇠가 들어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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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자유시의 길이라고 하는 것은 어떤 것일까. “새로운 산문시로의 길이것이다.

 

14

이것을 확실한 의식으로 주장하는 것이 새로운 산문시운동이다.

 

15

이 새로운 산문시운동을 시의 산문화라고 힐난하는 시인이 이미 나타났다.

 

16

하지만, “새로운 산문시운동시의 산문화로 보는 것은 맞지 않는다. 그것은 지나치게 말의 음악을 존중하기만 했던 과거 시인의 시점에서 보는 사고방식이다. 운문문학으로부터 해를 받았던 구 심볼리즘의 관점에 지나지 않는다. 처음부터 일본의 시에 음악을 요구한 것은 의의가 없었다. 일본어라고 하는 것은, 프랑스어처럼 음악적인 말이 아니기 때문이다. 일본의 시는 빨리 말의 음악을 단념하고, 말의 결합으로 태어나는 메커니즘의 힘에, 그 본연의 모습을 보지 않으면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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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시는 그 새로운 산문시운동으로 인해서 큰 전환을 행하는 것을 만난다. 프롤레타리아 시처럼 한 가지 소재에 관련되는 문제가 아니다. 토대(土臺)부터 두드려서라도 고쳐야 하는 것으로서 중대한 근본적인 사항이다. 왜냐하면, 오랜만에 시와 시인의 유일한 레텔을 거의 완전히 잡아 벗기는 것이니까. 종래의 자유시의 형식에 대한 변혁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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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산문시운동의 입장에 서서 확실하게 했던 걸음을 걷고 있는 시인, 걸을 수 있는 시인으로서, 안자이 후유에(安西冬衛, あんざい ふゆえ, 18981965, 시인), 미요시 타츠지(三好達治, みよし たつじ, 19001964, 시인), 오가타 카메노스케(尾形龜之助, おがた かめのすけ, 19001942, 시인), 치다 히카루(千田光, ちだ ひかる, 19081935, 산문시인), 와타나베 슈우조우(渡邊修三, わたなべ しゅうぞう, 19031978), 타키구치 타케오(瀧口武士, たきぐち たけし、19041982), 타가 케이자부로(多賀圭三郞, たが けいざぶろ), 모리 타케오(森竹夫, もりたけお), 우에다 토시오(上田敏雄, うえだ としお), 타키구치 슈우죠우(瀧口修造, たきぐち しゅうぞう, 19031979, 화가, 시인, 미술평론가), 사카모토 에츠로우(阪本越郞, さかもと えつろう, 19061969, 독문학자), 이토우 세이(伊藤整, いとう せい, 19051969, 시인, 평론가, 번역가, 소설가), 키타죠노 카츠에(北園克衛, きたぞの かつえ, 19021978, 시인), 사카모토 료우(阪本遼, さかもと りょう, 19041970, 시인), 이이지마 타다시(飯島正, いいじま ただし, 19021996, 영화평론가, 시인), 사토우 하치로우(佐藤八郞, さとう はちろう, 19031973, 시인), 후쿠토미 세이지(福富菁兒, ふくとみ せいじ), 하루야마 유키오(春山行夫, はるやま ゆきお, 19021994, 시인, 평론가), 키타가와 후유히코(北川冬彦, きたがわ ふゆひこ, 19001990, 시인) 등을 열거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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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산문시로의 길!” “새로운 산문시로의 길!” “새로운 산문시의 길을 걷는 것의 내용이 신인(新人)’의 이름에 가치를 붙일만하다!

시단의 신인(新人)이라고 하는 것은 새로운 산문시운동을 하는 자를 의미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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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군은 바로, 자유시의 정도(正道)를 걷는 사람들이다! (“詩論쇼우와(昭和) 4=1929, 3.)

 

각주

1. 北川冬彦: 1900(메이지 331990(헤이세이 2). 滋賀県大津 出身. 본명은 타구로 타다히코(田畔忠彦, たぐろ ただひこ). 아버지가 만주철도에 근무한 관계로 만주에서 자랐다. 旅順中学⦁三高를 거쳐, 帝大仏法科를 졸업. 시집 検温器와 꽃으로 인해 시인으로 주목받았으며, 新散文詩 운동을 정력적으로 전개하여 시단에 자극을 주었다. 「三半規管喪失」을 간행하여 요코미츠 리이치(横光利一, よこみつ りいち)의 칭찬과 격려를 받았다. 시집 전쟁昭和詩史를 장식하는 작품이라고 한다. 전후에도 시를 발표하고 네오리얼리즘을 표방하며 일본의 대표적 시인으로 국제적으로도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시론집수필집번역 등이 많다. 다치카와(立川市) 시에 거주한 것은 昭和 38(1963), 이후 다치카와에서 시인 생활을 하게 된다. 연꽃잎을 좋아하여 자가 재배를 하고 있었다.

2. 安田保雄•木林勝夫•井利彦 편집, 「近代文學評論大系 8 詩論⦁歌論⦁俳論」(東京: 昭和 48=1973 초판, 昭和 57=1982 4), pp. 17317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