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몬드 카버(Raymond Carver) / 안종설 역


1

랄프 위먼은 열여덟 살 때 처음으로 집을 떠나면서 제퍼슨 초등학교의 교장이자 위버빌 엘크스 클럽 보조 밴드의 트럼펫 독주자인 아버지에게 몇 가지 충고를 들었다. 인생이란 막 첫 걸음을 떼어놓으려 하는 청년에게 적잖은 힘과 목적 의식을 요구하는 대단히 중요하고도 결코 만만치 않은 문제이며, 누구나 알고 있듯 그러한 노력에는 반드시 보상이 주어진다. 이것이 랄프 위먼의 아버지가 가진 신념이었고, 또한 아들에게도 그러한 자신의 신념을 힘주어 강조했다.

그러나 대학에 들어온 랄프는 목표가 막연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는 의사도 되고 싶고 법률가도 되고 싶었다. 그래서 의과대학 예과 과정과 법률사, 그리고 상법 강좌를 이수했다. 그러나 자신에게 의학 전공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감정상의 강인함도, 법학이 요구하는 엄청난 양의 책들을 읽어낼 능력도 갖춰져 있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은 그런 강좌들을 모두 이수한 다음의 일이었다. 특히나 재산이니 상속이니 하는 주제에 대한 교재들은 그로서는 도무지 읽어낼 재간이 없었다. 랄프는 여기저기를 기웃거리며 과학과 경영학 강의를 듣기도 했고, 가끔은 철학과 문학 수업도 들어보았다. 그러면서 그는 자기 자신에 대한 거대한 깨달음을 얻기 직전의 상태에까지 와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그런 깨달음은 결코 얻어지지 않았다. 후일, 그는 거의 쓰러지기 직전의 막다른 골목에까지 내몰렸던 이 시기를 자기 인생 최대의 침체기였다고 말하곤 했다. 그는 사교 클럽에 가입하여 매일밤 술을 마셨다. 어찌나 술을 마셔댔는지, 케그의 바텐더를 본따서 ‘잭슨’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였다.

그런 그가 3학년 때, 지대한 영향을 받은 한 선생을 만났다. 맥스웰 박사였다. 랄프는 그를 절대 잊지 못할 것이다. 그는 40대 초반의 몸가짐이 훌륭하고 목소리에 남부 지방의 흔적이 남아 있는, 잘 생기고 기품 있는 남자였다. 그는 반더빌트에서 유럽을 전공했었고, 나중에 동부로 돌아가서 한두 가지 문학 잡지와 관계를 맺고 있었다. 후일, 랄프는 거의 하룻밤 사이에 선생이 되기로 결정을 내렸다고 그 당시를 술회했다. 그는 술을 절제하며 열심히 공부하기 시작해서, 1년 만에 ‘오메가 프시’라는 국제 언론 사교 클럽의 회원으로 선출되었다. 이어서 그는 영문학 클럽의 회원이 되었고, 3년간 한 번도 연주해 본 적이 없는 첼로 솜씨를 인정받아 생긴 지 얼마 되지 않은 학생 실내악단의 멤버가 되었다. 나중에는 4학년 학생 대표 역할까지도 훌륭하게 해냈다. 그가 마리안 로스를 만난 것도 바로 이 무렵이었다. 그녀는 초서(Geoffrey Chaucer 14세기의 영국 시인;옮긴이)를 배우는 강의에서 바로 옆자리에 앉았던, 약간은 창백하고 호리호리한 여학생이었다.

마리안 로스는 머리를 길게 기르고 목이 긴 스웨터를 즐겨 입었으며 언제나 긴 가죽끈이 달린 가방을 메고 다녔다. 그녀의 커다란 눈망울은 한 번에 모든 것을 흡수할 것처럼 보였다. 랄프는 마리안 로스와 함께 돌아다니는 것을 좋아했다. 그들은 케그를 비롯하여 그 무렵 젊은이들이 곧잘 드나들던 곳을 찾아다녔지만, 그렇다고 공부에 지장을 초래할 정도로 경박한 학생들은 아니었다. 그들은 이듬해 여름에 결혼을 하기로 약속했고, 부모들도 그들의 결합을 허락했다. 랄프와 마리안은 봄에 치코의 한 고등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으며, 6월에 졸업을 했다. 그로부터 2주 후 그들은 성 제임스 감독 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결혼식 전날 밤, 그들은 손을 마주 잡고 결혼의 즐거움과 신비를 영원히 간직하자고 맹세했다.


신혼여행은 직접 차를 몰고 과달라하라(멕시코 할리스코주의 州都;옮긴이)로 가기로 했다. 그곳에서 폐허가 된 교회와 어둠침침한 박물관을 구경한 다음, 오후에는 느긋하게 시장을 둘러보며 쇼핑을 즐겼다. 그러나 그 동안에도 랄프는 내심 지저분하고 노골적인 욕망이 넘쳐흐르는 그곳 풍경에 경악을 금치 못했고, 얼른 안전한 캘리포니아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게다가 언제나 그의 뇌리에서 떠나지 않는, 그 무엇보다도 그를 괴롭혔던 한 가지 광경은 멕시코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이었다. 저녁때가 다 되어가는 늦은 오후였다. 랄프는 먼지투성이 흙길을 따라 숙소로 돌아오다가, 마리안이 베란다의 쇠난간에 팔을 얹은 채 미동도 하지 않고 기대 서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녀는 긴 머리칼을 어깨 위로 늘어뜨린 채 랄프가 다가오는 것을 보지 못하고 먼산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하얀 블라우스를 입고 목에는 빨간 스카프를 두르고 있었는데, 하얀 옷 속으로 팽팽하게 부풀어 오른 젖가슴의 윤곽이 확연히 드러나 보였다. 랄프는 겨드랑이에 상표가 없는 검은 와인병을 끼고 있었는데, 문득 그 모든 것이 영화의 한 장면을 연상케 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 영화의 극적인 순간은 마리안에게는 잘 어울릴 수 있는 것이었지만, 랄프 자신에게는 전혀 그렇지가 못했다.

신혼여행을 떠나기 직전, 그들은 캘리포니아 북부 벌채 지역의 한 조그만 마을에 위치한 고등학교에서 근무하기로 결정했었다. 1년 후, 학교도 마을도 그냥 눌러앉기에 상당히 이상적인 곳이라는 확신이 들자, 그들은 파이어 힐 구역에 있는 집을 한 채 샀다. 랄프는 그다지 진지하게 생각해 보지는 않았지만, 그저 막연하게 마리안과 자신이 서로를 완벽하게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완벽하다고까지 할 수 없을지는 몰라도, 적어도 다른 평범한 부부 관계 정도는 된다고 믿었다. 게다가 랄프는 스스로 자기 자신을 이해하고 있다는 느낌을 가질 수 있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것, 하지 않을 수 있는 것, 그리고 신중한 방법으로 그가 결정했던 곳으로 향하고 있는 자신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들의 두 아이들, 도로시아와 로버트는 이제 다섯 살과 네 살이 되었다. 로버트가 태어난 몇 달 후에 마리안은 마을 변두리에 있는 초급 대학에 불어와 영어 강사로 부임했으며, 랄프는 고등학교에 계속 남아 있었다. 그들은 스스로를 행복한 부부라고 생각했다. 단 한 번, 그들의 결혼 생활에 금을 가게 만든 사건이 있기는 했지만, 그것도 이미 2년 전의 과거지사가 되어 있었다. 그 일에 대해서는 두 사람 다 한 번도 거론한 적이 없었다. 그러나 랄프는 가끔씩 그 일을 생각하곤 했다. 솔직히 말하면, 그는 점점 더 그 사건을 많이 생각하도록 스스로를 내버려 두고 있었다. 그의 눈 앞에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생생한 환영들이 어른거리기 시작했다. 그는 아내가 미첼 앤더슨이라는 남자와 함께 자신을 배신한 적이 있다는 생각을 머리 속에 담아두고 있었던 것이다.


11월의 일요일 밤, 아이들은 자고 있었고 랄프는 쏟아지는 잠을 애써 참으며 소파에 앉아 시험 점수를 매기고 있었다. 그때 마리안이 다림질을 하고 있는 주방에서 들려오는 감미로운 라디오 소리가 그를 아주 행복하게 만들어 주었다. 그는 앞에 놓인 시험지에 조금 더 눈길을 주고 있다가, 그것들을 걷어 모으고 불을 껐다.

“끝냈어요?” 그가 문간에 나타나자 마리안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높은 걸상에 앉아 있던 그녀는 마치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다리미를 한쪽 옆으로 세워 놓았다.

“제기랄, 아니야.” 그는 시험지들을 식탁 위로 내던지며, 다소 과장되게 얼굴을 찌푸렸다.

그녀가 밝고 유쾌한 웃음을 터뜨리며 얼굴을 내밀자, 랄프는 그녀의 볼에 가볍게 키스를 해주었다. 그는 의자를 하나 끌어당겨 다리를 쭉 뻗고 앉아서 아내를 바라보았다. 마리안은 다시금 미소를 지으며 눈을 내리깔았다.

“실컷 졸기만 했어.” 그가 말했다.

“커피 드려요?” 그녀가 일어나서 커피 메이커에 손등을 올려놓으며 말했다.

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마리안은 불을 붙인 채 재떨이에 놔두었던 담배를 집어들어 방바닥을 응시하며 몇 모금 피우더니, 도로 재떨이 위에 올려놓았다. 남편을 바라보는 그녀의 얼굴에 따스한 표정이 번져갔다. 큰 키와 늘씬한 몸매를 가진 그녀는 풍만한 젖가슴과 조그만 엉덩이, 그리고 유난히 크고 예쁜 눈을 가진 여자였다.

“그 파티에 관해 생각해 본 적 있어요?” 그녀가 여전히 그를 쳐다보며 말했다.

랄프는 적이 놀라운 마음에 앉은 자세를 바로잡았다. “어떤 파티? 이년 전인가 삼년 전의 그 파티 말야?”

마리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잠시 기다려 보았지만, 마리안은 뭐라고 덧붙일 기색이 아니었다. “그게 어때서? 그게 어떻다고 지금 그 이야기를 꺼내는 거지?” 그리고 나서 이렇게 덧붙였다. “그날 밤에 그 친구가 당신에게 키스했지, 그렇지 않아? 나도 다 알아. 그 친구가 당신에게 키스하고 싶어했지, 그렇지 않아?”

“방금 갑자기 생각이 나서 한 번 물어본 것뿐이에요. 난 가끔 그때를 생각하곤 하거든요.” 그녀가 말했다.

“그래, 내 말이 맞아, 틀려? 대답을 해봐, 마리안.”

“그날 밤에 대해 생각해 본 적 있어요?”

그가 대답했다. “그렇진 않아. 벌써 오래전 일이니까, 그렇지 않아? 삼,사 년 전 일이라고. 이젠 내게 말해도 돼.” 그가 말했다. “당신이 지금 마주앉아 있는 사람은 아직도 예전의 그 잭슨이야, 기억나?”

그들은 웃음을 터뜨렸다. 그녀가 갑자기 웃음을 그치고 말했다. “그래요. 그는 몇 차례 내게 키스를 했어요.” 그러면서 그녀는 미소를 지었다.

그녀의 미소에 답해야 한다는 것은 알았으나, 그럴 수가 없었다. 그가 말했다. “전번에는 그러지 않았다고 했잖아. 그가 운전을 하는 동안 당신 어깨에 팔을 두르고 있었을 뿐이라고 말했었잖아. 어느 게 진짜야?”

“도대체 왜 이러는 거죠?” 그녀가 꿈을 꾸듯 말했다. “도대체 밤새도록 어디에 있었어?” 그는 벽력처럼 고함을 지르며 그녀 위에 버티고 서서 다시 한 번 주먹을 휘두를 기세였다. 그러자 그녀가 말했다. “난 아무 짓도 안했어요. 왜 때리는 거죠?”

“어쩌다가 우리가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죠?” 그녀가 말했다.

“당신이 먼저 꺼냈잖아.” 그가 말했다.

마리안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어째서 그런 생각을 했는지 모르겠어요.” 그녀는 윗입술을 당기며 바닥을 노려보다가 불쑥 어깨를 펴고 올려다보았다. “여보, 다림판 좀 옮겨 줄래요? 난 뜨거운 음료를 만들어 올게요. 버터를 넣은 럼은 어때요?”

“좋지.” 그가 말했다.

그녀는 식당으로 들어가서 불을 켜고 바닥에 떨어진 잡지를 집으려고 허리를 구부렸다. 그는 격자무늬 모직 치마 밑의 그녀 엉덩이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창문 앞으로 다가가서 가로등을 내다보며 서 있었다. 손가락으로 치마를 펴고는, 블라우스를 쑤셔넣기 시작했다. 혹시 그녀도 지금 그가 자신을 지켜보고 있는지 궁금해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베란다 벽장 속에 다림판을 집어넣고 도로 들어와 앉아 있는데, 마리안이 부엌으로 들어섰다. 랄프는 불쑥 이렇게 물었다. “그래, 그날 밤 마이클 앤더슨하고 또 무슨 일이 있었지?”


“아무 일도 없었어요. 나는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 중이었어요.” 그녀가 말했다.

“무슨 생각?”

“아이들 생각요. 이번 부활절 때 도로시아에게 어떤 드레스를 입혀야 할지 생각하고 있었어요. 내일 수업에 대해서도 생각을 좀 해봐야 하거든요. 학생들이 랭보(Arthur Rimbaud 1854-1891 프랑스의 시인;옮긴이)에 대해서 공부를 좀 해올지 모르겠어요.” 마리안은 그렇게 말하며 미소를 지었다. “괜히 말머리를 돌리려는 게 아니에요, 랄프. 정말 다른 일은 아무것도 없었어요. 괜히 쓸데없이 그 이야기를 꺼내서 미안해요.”

“좋아.” 랄프가 말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냉장고 옆의 벽에 기대섰다. 그리고는 마리안이 두 개의 컵에 설탕을 넣고 럼주를 섞어 숟가락으로 젓는 것을 지켜보았다. 물이 끓기 시작했다.

“여보, 어차피 이야기가 나온 김에 하는 말인데, 그건 벌써 사 년 전 일이잖아.” 랄프가 말했다. “그러니 우리가 마음만 먹으면 얘기하지 못할 이유가 아무것도 없잖겠어. 안 그래?”

마리안이 대답했다. “정말로 얘기하고 말고 할 게 없어요.”

그가 말했다. “난 알고 싶어.”

“뭘요?”

“그가 당신에게 키스말고 무엇을 했는지 말이야. 우린 성인이야. 실제로 벌써 몇 년 동안 앤더슨 가족을 보지 못했고, 아마 앞으로도 그들을 만날 일은 없을 거야. 게다가 그건 아주 오래전에 일어난 일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그 일을 이야기할 수 없는 이유가 어디에 있겠어?” 그는 자신의 이성적인 목소리에 약간 놀랐다. 의자에 앉아서 식탁보를 내려다보던 그가 다시 그녀를 바라보았다. “어때?”

“글쎄요......” 마리안은 소녀처럼 머리를 한쪽으로 갸웃거리며 개구쟁이 같은 미소를 지었다. “아니에요, 랄프. 정말이에요. 말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빌어먹을, 마리안! 어서 말해 봐, 이건 절대 장난이 아니라고!” 랄프는 그렇게 말해 놓고서야 정말로 자기 말이 장난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마리안은 물을 끓이던 가스불을 끄고 걸상에 팔을 올려놓았다. 그리고는 그 의자에 앉아 발꿈치를 의자 다리에 대고 세웠다. 팔짱을 낀 두 팔을 무릎 위에 올려놓고 몸을 약간 앞으로 내민 자세 때문에 블라우스 속의 젖가슴이 유난히 부풀어 보였다. 마리안은 치마에 붙어 있던 무언가를 떼어낸 다음, 고개를 들었다.

“에밀리가 비티네 부부와 함께 먼저 돌아간 건 기억나죠? 그때까지도 미첼은 그냥 머물러 있었어요. 사실 그날 미첼은 처음부터 어딘가 좀 이상한 것 같았어요. 어쩌면 에밀리하고 싸웠는지도 모르죠. 결국 당신하고 나, 프랭클린 부부와 미첼 앤드슨이 남게 된 거예요. 우린 모두 약간씩 취해 있었어요. 어쩌다가 그렇게 되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어떻게 하다 보니 미첼과 내가 잠시 부엌에서 둘이 있게 되었어요. 마침 위스키가 떨어지고, 술이라고는 우리가 가지고 있던 백포도주 조금밖에 남아 있지 않았죠. 그때가 아마 한시쯤 되어 가던 시간이었을 거예요. 미첼이 ‘우리가 지금 거인의 날개를 타고 나가면 술집이 문을 닫기 전에 술을 사올 수 있을 거요’하고 말했으니까요. 그 사람이 가끔 그렇게 연극 대사 같은 소리를 하곤 했다는 건 당신도 알죠? 마치 탭댄스를 추거나 표정 연기를 하는 것 같은 분위기 말이에요. 아무튼 그는 그런 쪽으로는 재주가 있었어요. 적어도 그 순간에는 그렇게 보이더군요. 게다가 술도 많이 취해 있었구요. 내가 왜 그랬는지는 나도 모르겠어요, 그러니 그건 묻지 마세요. 하지만 난 그가 나가자고 했을 때, 선뜻 따라 나섰어요. 우리는 그가 자기 차를 세워 둔 뒷마당으로 나갔죠. 우린 그냥...... 그러니까...... 잠깐 나갔다 들어올 생각이었기 때문에 벽장에 걸려 있던 코트도 꺼내 입지 않았어요. 그때 우리가, 아니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모르겠어요. 그러니까 그때 내가 왜 그를 따라 나섰는지 모르겠다는 말이에요, 랄프. 그냥 충동적으로 그랬다고 밖에는 달리 표현할 말이 없네요. 물론 잘못된 충동이었지만 말이에요.” 그녀는 잠시 쉬었다가 덧붙였다. “그날 밤엔 내가 실수를 했어요, 랄프. 정말 미안해요. 내가 그런 행동을 해서는 안되었다는 사실을 나도 잘 알아요.”

“제기랄!” 랄프의 입에서 자기도 모르게 그런 소리가 튀어 나왔다.  “하지만 당신은 언제나 그런 식이었어, 마리안!” 랄프는 지금 자신의 입에서 새롭고도 아주 기본적인 진실이 튀어나오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랄프는 마음속이 온통 그녀에 대한 비난으로 들끓는 가운데, 한 가지 구체적인 사실에 초점을 맞추려고 노력했다. 그는 자신의 손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다가, 문득 그 손이 그 옛날 발코니에 서 있는 그녀를 보았을 때와 똑같이 생명력을 상실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는 식탁 위에 놓여 있던 빨간색 채점 연필을 집어들었지만, 이내 도로 내려놓았다.

“듣고 있어.” 그가 말했다.

“뭘 말이에요?” 마리안이 되물었다. “랄프, 아무것도 아닌 걸 가지고 괜히 당신 혼자 이상하게 생각하고 있어요. 정말이지 다른 일은......아무것도 없었다니까요.”

“계속해 봐.” 랄프가 말했다.

“그나저나 우리가 지금 왜 이러고 있는 거죠? 어쩌다가 이렇게 됐는지, 당신은 알고 있어요? 정말 몰라서 하는 얘기예요.”


랄프가 말했다. “계속해 봐, 마리안.”

“랄프, 그게 다예요. 말했잖아요. 우린 차를 타고 나갔어요.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고, 그가 나에게 키스를 했어요. 난 아직도 우리가 세 시간 동안이나 어디서 무얼 했는지 전혀 모르겠어요. 물론 세 시간이라는 건 당신 얘기지만 말이에요.”

“말해 봐, 마리안.” 그는 그렇게 말하면서 틀림없이 그 이상의 어떤 일이 벌어졌었다는 확신을 느꼈다. 마치 자신이 오래전부터 그런 사실을 알고 있었던 듯한 느낌이었다. 뱃속이 자꾸만 쿵쿵 뛰고 있는 것 같았다. “아니, 말하고 싶지 않으면, 안 해도 좋아. 사실은 나도 이제 그 일은 그만 잊어버릴 생각이었어.” 그가 말했다. 그는 만약 자신이 결혼을 하지 않았더라면, 오늘 밤 어딘가 다른 곳에서 무언가 다른 일을 하고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얼핏 해보았다.

“랄프, 화내지 마세요, 네? 랄프? 우린 그저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뿐이에요. 화 안 내는 거죠?” 마리안은 그렇게 말하며 식탁 의자로 다가갔다.

그가 말했다. “알았어.”

“약속해요?”

“약속해.”

마리안이 담배를 하나 붙여 물었다. 랄프는 문득, 아이들을 보고 싶다는 참을 수 없는 충동을 느꼈다. 아이들을 침대에서 일으켜 세워, 아직도 잠이 덜 깬 그들을 한쪽 팔에 하나씩 안고 끝없이 달려가고 싶었다. 랄프는 식탁보에 그려진 조그만 마차를 향해 모든 정신을 집중시켰다. 네 마리 하얀 말이 각기 검은색 마차를 끌고 있었고, 그 말들을 모는 사람은 길다란 모자를 쓴 채 팔을 치켜들고 있었다. 마차 지붕에는 짐들이 묶여 있었고, 그 옆에는 등유 램프처럼 보이는 물건이 매달려 있었다. 만약 이 순간 랄프의 귀에 무슨 소리가 들려온다면, 그것은 저 검은 마차 안에서 들려오는 소리일 것이었다.

“......우리는 곧장 술을 파는 가게로 갔어요. 나는 그가 나올 때까지 차 안에서 기다렸어요. 그는 한 손에는 술병이 든 봉지를, 다른 손에는 얼음이 든 비닐 봉지를 들고 있었어요. 그는 차 안으로 들어오면서 약간 비틀거렸죠. 그가 다시 차를 몰고 가게 앞을 출발하고 나서야 나는 그가 몹시 취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어요. 그가 운전하는 걸 지켜보았죠. 굉장히 느린 속도였어요. 그는 운전대 위에 완전히 몸을 구부리고 있었어요. 눈은 고정되어 있었구요. 우리는 말도 안되는 소리들을 지껄여 대기 시작했어요. 다른 건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지만, 니체와 스트린드베리(August Strindberg 1849-1912 스웨덴의 극작가 겸 소설가;옮긴이)에 대한 이야기를 했던 것은 어렴풋이 기억이 나요. 그는 이학기 때 「미스 쥴리」를 가르치고 있었거든요. 그러다가 갑자기 노먼 메일러가 자기 아내의 가슴을 칼로 찔렀다는 이야기가 나왔어요. 그때 그는 길 한복판에 차를 세우더군요. 우리는 봉지에서 술병을 꺼내 한 모금씩 마셨어요. 그는 내가 가슴을 칼로 찔리는 장면을 생각하고 싶지 않다고 하더군요. 그 대신 자기는 내 가슴에 키스를 하고 싶다고 했어요. 그러면서 그는 차를 길가로 옮겨 세웠어요. 그런 다음 내 무릎에 얼굴을 묻고......”

그녀가 허둥거리기 시작하자, 랄프는 식탁 위에 두 손을 포개 놓고 앉아서 그녀의 입술을 쳐다보았다. 그의 시선은 난로와 냅킨꽂이, 다시 난로, 찬장, 토스터 등을 분주히 오가다가 다시금 그녀의 입술로 돌아왔다. 그러나 다음 순간에는 이미 또다시 식탁보의 마차를 바라보고 있었다. 랄프는 순간적으로 그녀를 자신의 다리 사이에 끼운 채 마구 흔들어 대고 싶다는 기묘한 충동을 느꼈다. 갑자기 마차가 서서히 흔들리는 것 같았다. 랄프가 막 ‘멈춰!’하고 소리를 지르려는 순간, 마리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가 한 번 해볼까요?’ 하고 물었어요.” 그녀는 잠시 후 이렇게 덧붙였다. “난 욕먹어 마땅해요. 다 내 탓이에요. 그는 모든 건 나한테 달려 있다고 했어요. 무엇이든 내가 원하는 대로 할 수 있다고 말이에요.”

랄프는 눈을 감았다. 그는 머리를 저으면서, 다른 결론을 맺을 수 있는 가능성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그는 2년 전 그날 밤을 되돌릴 수 없을까 하는 엉뚱한 공상으로 빠져들었다. 그들이 막 집을 나서려는 순간, 랄프 자신이 부엌으로 들어서며 다정한 목소리로 말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 안돼, 여보. 미첼 앤더슨이라는 녀석하고 나가지 말라구! 저 친구는 지금 취해서 운전도 제대로 못해. 게다가 당신은 이제 그만 자야지 그래야 내일 아침에 일어나 로버트와 도로시아를 돌볼 수 있을 것 아냐. 그만둬! 가지 말라구!

그는 눈을 떴다. 그녀가 손으로 얼굴을 덮고 소리내어 울고 있었다.

그때 그는 갑자기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사정없이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한동안 그는 멍하니 자신의 손만 내려다볼 수 있을 뿐이었다. 드디어 진실을 알아냈다! 이 새로운 깨달음으로 그의 가슴속이 요동치고 있었다.

“빌어먹을! 마리안! 하나님 맙소사!” 그가 튕기듯 식탁에서 일어나며 외쳤다. “빌어먹을! 안돼, 마리안!”

“아니, 아니에요.” 마리안이 절망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뒤로 젖혔다.

“당신이 그 자를 받아들였어!” 랄프가 소리쳤다.

“아니에요, 아니라구요.”

“당신이 받아들였어! 그 녀석이랑 붙어 먹었다구! 아냐? 아니라고 말해 봐! 한 번 하자고? 그 녀석이 그렇게 말했어? 대답해 봐!” 랄프는 미친 듯이 고함을 질렀다. “그가 당신 몸속으로 들어왔어? 그 자가 들어오도록 내버려 두었느냔 말야?”

“랄프, 제발 내 말 좀 들어봐요.” 마리안이 흐느끼는 목소리로 애원했다. “그렇지 않아요, 맹세할 수 있어요. 우리가 정말로 섹스를 한 건 아니라구요.” 마리안은 의자에 앉은 채 처절하게 몸을 비틀어 댔다.

“맙소사! 나쁜 년!” 랄프가 비명을 질렀다.

“아, 하나님!” 마리안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손을 내밀었다.

“우린 미쳤어요, 랄프. 지금 우린 제정신이 아니라구요. 랄프? 용서해 줘요, 랄프. 제발―”

“건드리지 마! 저리 꺼지란 말야!” 랄프가 소리쳤다.

마리안은 두려움에 사로잡혀 숨을 헐떡이기 시작했다. 그녀는 랄프를 향해 다가서려 했지만, 그는 그녀의 어깨를 와락 밀쳐 버렸다.

“용서해줘요, 랄프! 제발!” 마리안이 애절하게 소리쳤다.


2

그는 걸음을 멈춘 채 옆에 서 있던 자동차에 몸을 기댔다. 야회복을 입은 두 쌍의 남녀가 인도를 따라 다가오고 있었다. 그 가운데 한 남자가 큰소리로 뭐라고 지껄여 댔고, 나머지 사람들은 깔깔대고 웃음을 터뜨렸다. 랄프는 기대고 있던 차에서 몸을 떨어뜨리며 길을 건넜다. 이내 그는 블레이크의 술집 앞에 이르렀다. 유치원으로 아이들을 데리러 가기 전에 잠시 시간이 나면, 딕 코니그와 함께 맥주를 한 잔씩 마시곤 하던 곳이었다.

실내는 어두웠다. 한쪽 벽을 따라 목이 긴 병에 꽂힌 초에 불이 켜져 있었다. 랄프는 머리를 맞대고 이야기를 하고 있는 남녀들의 흐릿한 모습을 흘낏거렸다. 문 근처에 앉아 있던 한 쌍의 남녀가 이야기를 멈추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천정에 달린 상자 모양의 전등이 희미한 빛을 뿌리며 머리 위에서 돌아가고 있었다. 남자 둘이 바 한쪽 끝에 앉아 있었고, 그들에게 가려 몸 전체가 다 보이지는 않았지만 다른 남자 하나가 구석에 놓인 쥬크박스 위로 잔뜩 몸을 구부리고 있었다. 랄프는 마치 중대한 발견을 앞두고 있는 사람처럼, 관연 그 남자가 어떤 음악을 틀까 하는 생각에 잠긴 채 플로어 한가운데 서 있었다.

“랄프 위먼 선생!”

그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바 뒤에서 데이비드 팍스가 그를 부르고 있었다. 랄프는 그 쪽으로 걸어가서 잠시 바에 기댔다가 스르르 미끄러지며 의자 위에 엉덩이를 붙였다.

“한 잔 드릴까요, 위먼 씨?” 팍스가 웃으면서 잔을 집어들었다. 랄프는 고개를 끄덕이고, 팍스가 잔을 채우는 것을 지켜보았다. 꼭지 아래 잔을 비스듬히 넣고, 술이 차자 부드럽게 곧추세우는 솜씨가 아주 능숙해 보였다.

“어떻게 지내십니까, 위먼 씨?” 팍스는 바 아래 선반에 발을 걸쳤다. “다음주 경기에서 누가 이길까요, 위먼 씨?” 랄프가 맥주를 입으로 가져가며, 머리를 저었다. 팍스가 가냘프게 기침을 했다. “내가 한 잔 사지요, 위먼 씨. 이건 내가 낼게요.” 그가 다리를 내리고 자기 말을 믿어도 좋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앞치마 밑의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여기 있소, 놔둬요.” 랄프는 그렇게 말하며 동전을 몇 개 꺼내서 들여다보았다. 25센트와 5센트 하나씩, 10센트짜리 두 개, 1센트 짜리 두 개. 그것들이 마치 풀어야 할 암호라도 되듯이 셈을 했다. 25센트를 내려놓고, 나머지 동전을 주머니에 넣으면서 일어섰다. 쥬크박스 앞에 있던 남자는 아직도 손을 기계 옆에 얹은 채 그대로 서 있었다.

밖으로 나온 랄프는 어떻게 해야 할지를 결정하기 위해 애쓰면서 화를 가라앉혔다. 마치 한바탕 달리기를 한 것처럼 심장이 뛰고 있었다. 그의 뒤에서 문이 열리고 한 쌍의 남녀가 나왔다. 랄프가 길을 비켜 주자 그들은 한쪽 모퉁이에 세워 둔 차 안으로 들어갔는데, 랄프는 여자가 차에 타면서 머리를 한 번 홱 젖히는 것을 보았다. 그는 그때까지 그렇게 놀라운 광경은 일찍이 본 적이 없는 것 같았다.

그는 블록 끝까지 걸어가서 길을 건넌 다음, 또 한 블록을 걸어갔다. 그제서야 시내로 가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랄프는 주머니 안에서 주먹을 쥐고, 자갈길 위에 뚜벅뚜벅 소리를 내며 서둘러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는 연신 눈을 깜박거리며 여기가 자신이 사는 마을이라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는다는 생각을 했다. 머리를 한 번 가로저어 보았다. 잠시 어딘가 앉아서 생각을 좀 해보고 싶었지만, 앉을 수도 생각할 수도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아카타에서 구레나룻을 기르고 갈색 모직 모자를 쓴 노인이 두 다리 사이에 팔을 늘어뜨리고 인도 가장자리에 앉아 있던 걸 보았던 것이 생각났다. 그러면서 랄프는 생각했다. 마리안! 도로시아! 로버트! 불가능했다. 이 모든 일이 25년 후에는 어떻게 보일지 상상하려 애썼다. 그러나 아무것도 상상할 수 없었다. 학생들이 저희들끼리 돌려보던 쪽지를 빼앗아 보니 ‘한 번 어때?’라는 글자가 쓰여 있는 것을 상상해 보았다. 그는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중요한 건 아무것도 없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마리안을 생각했다. 조금 전 잔뜩 얼굴을 찌푸리고 있던 마리안을 보았던 것이 생각났다. 마리안은 바닥에 쓰러져 있었고, 앞이빨에 피가 번지고 있었다. “왜 나를 때렸어요?” 마리안은 드레스 속으로 손을 집어넣어 가터 벨트를 풀었다. 마리안은 등을 활처럼 구부리며 드레스 자락을 들어올렸다. 이어서 마리안은 잔뜩 흥분한 목소리로 울부짖었다. ‘어서, 좀더, 조금만 더!“

그는 멈춰 섰다. 토할 것 같았다. 길모퉁이로 다가갔다. 그는 계속 침을 꿀꺽꿀꺽 삼키고 있다가, 10대들이 탄 차가 옆으로 지나가면서 경적을 울리고 나팔을 길게 불어제끼는 것을 보았다. 그래, 세상에 밀려든 대단한 악마가 있었어, 놈들에게는 약간의 구멍, 약간의 틈만이 필요할 뿐이었어, 하고 생각했다.


사람들이 ‘두 번째 길’이라고 부르는 2번가로 갔다. 그 길은, 문을 닫은 허름한 하숙집이 있는 가로등 아래 셀튼에서 시작되어 낚싯배가 정박해 있는 선창까지 네다섯 개의 블록으로 이어져 있었다. 랄프는 6년 전에 중고서점을 찾아와 먼지 낀 낡은 선반을 뒤졌던 적이 한 번 있었다. 길 건너에 술집이 있었는데, 유리문 바로 안에서 신문을 보며 서 있는 남자가 보였다.

문 위에 달린 종이 땡그랑거렸다. 그 소리에 랄프는 하마터면 눈물을 흘릴 뻔했다. 담배를 사고 나와서 길을 따라 계속 걸으면서 유리창 안을 들여다보곤 했다. 유리창에는 무도회, 지난 여름에 왔다 간 쉬린 서커스, ‘프레드 C. 월터를 시의원으로’ 라고 적힌 선거 벽보 따위가 테이프로 붙여져 있었다. 어떤 유리창 안에는 싱크대가 놓여 있고 테이블 위에 파이프 접합부가 흩어져 있었다. 랄프는 그것을 보면서도 눈물을 글썽였다. 커다란 유리창을 가린 커텐 밑으로 불빛이 흘러 나오고 안에서 수영장의 물소리와 물 건너편에서 명랑하게 부르는 소리가 울려 나오는 빅 태니 체육관으로 걸어갔다. 길 양쪽의 술집과 카페에서 불빛이 좀더 흘러 나오고 있었으며, 서너명씩 모인 사람들이 더 많아졌으나 이따금씩 남자나 아니면 밝은 바지를 입고 급하게 혼자 걸어가는 여자도 있었다. 그는 유리창 앞에 멈춰 서서 풀에 뛰어드는 몇 명의 흑인과, 테이블 위의 환한 불빛 속에서 떠다니는 담배 연기를 바라보았다. 모자를 쓴 채 입에 담배를 물고 큐대에 초크를 칠하고 있던 남자가 옆에 있던 동료에게 무어라 말하고 둘이서 빙그레 웃더니, 처음의 남자가 신중하게 공을 들여다보며 당구대 위로 몸을 숙였다.

랄프는 짐의 오이스터 하우스 앞에서 멈추었다. 한 번도 와본 적이 없는 곳이었으며, 전에는 이런 곳이 한군데도 없었다. 문 위의 간판에는 노란 전구로 ‘짐의 오이스터 하우스’라는 글자가 박혀 있었다. 그 위에 석쇠가 설치되어 있고, 거기에 사람의 다리가 튀어나와 있는 거대한 대합조개가 그려진 네온이 번쩍이고 있었다. 몸통은 조개 속에 숨겨져 있었고 다리에 빨간 불빛이 위 아래로 점멸했기 때문에, 마치 다리가 발길질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랄프는 담배를 한 대 붙여 물고 문을 밀어 올렸다.

플로어에는 서로 팔짱을 낀 채 밴드가 새 곡을 시작하기를 기다리는 사람들로 붐볐다. 랄프는 바 쪽으로 헤치고 나갔는데, 술 취한 여자가 한 차례 그의 코트를 잡았다. 바에는 빈자리가 하나도 없었다. 랄프는 바 끝에서 해안경비대원과 작업복 차림의 주름투성이 남자 사이에 서 있어야 했다. 거울 속으로 밴드 단원 한 사람이 앉아 있던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이 보였다. 그들은 흰 셔츠에 검정 바지를 입고 목에는 빨간색의 작은 끈 타이를 매고 있었다. 금속 굴뚝 뒤에 가스를 사용하는 벽난로가 있었는데, 밴드의 무대는 그 옆에 마련되어 있었다. 단원 한 사람이 친숙한 미소를 지은 채 다른 사람과 무언가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전자 기타의 줄을 끼웠다. 밴드의 연주가 시작되었다.

랄프는 잔을 들어 쭉 들이켰다. 바 아래에서 한 여자가 화난 듯이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틀림없이 문제가 생길 거예요, 내가 할 수 있는 이야기는 그것뿐이라구요.” 연주자들은 한 곡이 끝나자 다른 곡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베이스 주자가 마이크 앞으로 다가가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랄프는 가사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밴드가 다시 휴식을 취하는 동안, 랄프는 화장실을 찾으려고 두리번거리기 시작했다. 바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연신 문이 여닫히는 것을 발견한 그는 그 쪽을 향해 다가갔다. 걸음이 조금씩 흔들리는 걸 보니 이제 그도 취한 모양이었다. 문들 중에 뿔 모양의 선반이 달려 있는 문이 하나 있었다. 한 남자가 그 문 안으로 들어가는 순간, 안에서 또 한 사람이 열린 문을 붙잡고 있다가 밖으로 걸어 나왔다. 랄프는 안으로 들어가 줄을 서 있는 세 남자 뒤에서 차례를 기다리다가, 문득 자신이 벽에 그려진 허벅지와 음부를 벌린 그림을 응시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 밑에는 ‘나를 먹어’라는 글자가 휘갈겨 쓰여 있었고, 더 아래에는 누군가가 ‘베티 M.이 먹었다 -RA 52275’라고 덧붙여 놓았다. 랄프 앞에 서 있던 남자가 앞으로 당겨서자, 그도 한 걸음 앞으로 다가섰다. 베티에 대한 중압감이 그의 마음을 짓누르고 있었다. 이윽고 자기 차례가 오자, 그는 소변을 보았다. 마치 벼락이 치듯 오줌 줄기가 쏟아져 나왔다. 그는 한숨을 내쉬며 몸을 앞으로 기울여 벽에 머리를 기댔다. 오, 베티. 그는 자신의 삶이 변화되었다는 것을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었다. 인생에서 하나의 사건을 만나고 그것이 파멸을 부르는 것이라는 것을 깨닫고 난 후, 그제서야 다른 방식으로 인생을 변화시키는 남자가 있을까? 랄프는 잠시 그대로 서 있다가,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손가락에 소변이 묻어 있었다. 세면대로 가서 더러운 술집 비누를 사용하지 않겠다고 결정하고 난 후 물을 틀었다. 타올을 풀면서, 흠집이 난 거울에 얼굴을 가까이 대고 자신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얼굴에는 특별한 기미가 하나도 없었다. 그는 거울을 살짝 건드려본 다음, 다른 사람이 세면대로 가려 하자 길을 비켜 주었다.

밖으로 나오자 그는 복도 반대편에 또 다른 문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곳으로 다가가 보니, 유리창을 통해 네 명의 남자가 녹색 테이블에 둘러앉아 카드 게임을 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랄프에게는 그 문 안쪽이 굉장히 평온하고 안락하게 보였고, 남자들의 조용한 동작에는 울적하고 무거운 의미가 내포되어 있는 듯이 보였다. 그는 유리에 기대서서 남자들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느낄 때까지 지켜보았다.

뒤쪽 바에서 화려한 기타 연주가 터져 나왔고 사람들이 환호하며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흰색 야회복을 입은 뚱뚱한 중년 여자가 무대로 끌려 올라가고 있었다. 그녀는 반항하는 기색을 보이긴 했지만, 정말로 싫은 눈치는 아니었다. 결국 그녀는 마이크를 받아들고 가볍게 인사를 했다. 사람들이 환호하며 발을 굴렀다. 그는 문득 카드를 하는 사람들이 바라보고 있는 그 방에 들어가지 않을 도리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지갑을 꺼내 돈이 얼마나 있는지를 확인해 보았다. 등 뒤에서 여자가 낮고 맥없는 소리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카드를 돌리는 사람이 쳐다보았다.

“함께 하고 싶소?” 그는 곁눈질로 랄프를 슬쩍 쳐다본 다음, 다시 테이블을 확인하며 그렇게 말했다. 다른 사람들도 잠깐 눈을 들어 랄프를 쳐다보긴 했지만, 카드가 날아오기 시작하자 이내 테이블로 시선을 떨구었다. 사람들은 일제히 카드를 집어들었고, 랄프에게 등을 돌리고 앉아 있던 남자가 콧김을 내뿜으며 고개를 돌려 그를 노려보았다.

“베니, 의자 하나 더 가져와!” 딜러는 의자를 테이블 위에 거꾸로 세워 얹어두고 밑을 청소하고 있던 노인을 향해 소리쳤다. 딜러는 덩치가 큰 남자였다. 하얀 셔츠의 옷깃을 풀어헤친 모습이었고, 굵고 검은 털이 난 팔뚝이 드러나도록 소매를 걷어올리고 있었다. 랄프는 길게 한숨을 쉬었다.

“마실 것을 드릴까요?” 베니가 테이블로 의자를 옮기며 물었다.

랄프는 노인에게 1달러를 집어주고 코트를 벗었다. 노인이 코트를 받아 나가면서 문 옆에 걸었다. 두 남자가 의자를 옮겨 자리를 만들어 주자, 랄프는 딜러의 맞은편에 앉았다.

“계속할까요?” 딜러가 쳐다보지도 않고 랄프에게 말했다.

“좋소.” 랄프가 말했다.

딜러는 점잖게 말했지만, 아직도 쳐다보지 않았다. “로우 볼이나 파이브 카드요. 배팅은 오달러까지입니다.”

랄프는 고개를 끄덕였다. 진행중이던 판이 끝나자, 그는 15달러어치의 칩을 샀다. 테이블에 카드가 뿌려지자, 패를 한눈에 볼 수 있도록 가지런히 정리를 해서 손에 쥐었다. 예전에 아버지가 카드놀이를 하던 모습이 떠올랐다. 랄프는 한두 번 눈을 들어 다른 사람들의 얼굴을 살펴보았다. 혹시 저 중에도 자신과 같은 경험을 한 사람이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랄프는 30분 동안 두 판을 먹었다. 자기 앞에 쌓여 있는 칩을 굳이 세어 보지 않아도 대략 15달러나 20달러 가량은 될 것 같았다. 그는 칩 하나를 술 한 잔과 맞바꾼 다음, 갑자기 자신이 오늘 밤 아주 먼 길을 왔다는 사실, 인생의 긴 여정을 헤쳐 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잭슨.’ 문득 그 별명이 떠올랐다. 그는 잭슨이 될 수도 있었다.

“들어올 거요, 죽을 거요?” 한 남자가 물었다. “클라이드, 도대체 판돈이 얼마야?” 그 남자가 딜러에게 말했다.

“삼달러요.” 딜러가 말했다.

“들어가겠소.” 랄프가 말했다. 그는 단지에 3개의 칩을 넣었다.

딜러는 랄프를 한 번 슬쩍 쳐다보고는 도로 카드로 눈을 돌렸다. “정말 재미있는 것을 원한다면, 여기 판이 끝나고 우리 집으로 갈 수도 있소.” 딜러가 말했다.

“아니오, 됐소.” 랄프가 대답했다. “오늘 밤엔 이만하면 됐어요. 내 마누라가 이 년 전에 다른 놈하고 놀아났었소. 난 그걸 오늘에야 알아차렸다 이 말이오.” 그는 헛기침을 했다.

한 남자가 카드를 내려놓고 담배에 불을 붙였다. 그는 연기를 내뿜으며 랄프를 응시하더니, 성냥을 흔들어 끄고 다시 카드를 집어들었다. 딜러가 검은 털이 무성한 빈손을 테이블에 올려놓은 채 눈길을 들었다.

“시내에 직장이 있소?” 그가 랄프에게 물었다.

“난 여기 살아요.” 랄프가 말했다. 그는 갑자기 자신의 몸속이 텅텅 비어 버린 느낌이었다.

“게임을 하는 거야 안하는 거야? 클라이드?” 한 남자가 말했다.

“입 다물고 좀 기다려 봐.” 딜러가 말했다.

“제기랄.” 그 남자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오늘 밤 무엇을 발견했단 말이오?” 딜러가 물었다.

“내 마누라를 발견했소.” 랄프가 말했다.

골목으로 나온 랄프는 다시 지갑을 꺼내어 남아 있는 돈을 세어 보았다. 2달러, 그리고 주머니에 동전이 몇 개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무엇인가 사먹을 만큼은 되었다. 그러나 배가 고프지 않았으므로, 생각을 하려 애쓰면서 건물에 어깨를 기댄 채 쪼그려 앉았다. 차 한 대가 골목으로 들어왔다가 되돌아나갔다. 그는 왔던 길을 되짚어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는 시끄럽게 떠들어 대며 거리를 활보하는 한 무리의 남녀를 피해 건물 쪽으로 바짝 붙어섰다. 긴 코트를 입은 여자가 옆에 있는 남자에게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건 그렇게 하는 게 아냐, 브루스. 넌 모른다구.”

그는 술 가게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안으로 들어가 카운터 위에 나란히 정돈되어 있는 술병들을 살펴보았다. 그는 럼주 반 파인트와 담배를 샀다. 병에 붙은 상표에는 석호를 배경으로 커다란 잎을 늘어뜨리고 있는 야자나무가 그려져 있었다. 그걸 보는 순간, 그제사 자기가 산 술이 ‘럼’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자신이 기절해 버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멜빵을 한 말라깽이 대머리 남자 종업원이 술병을 종이 봉지에 넣어 주며 윙크를 해보였다. “오늘 밤 뭐 좋은 걸 좀 하셨나 보지요?”

밖으로 나온 랄프는 부두 쪽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불빛이 반짝거리는 물을 보고 싶었다. 맥스웰 박사라면 이런 일을 어떻게 처리할까 하는 생각이 얼핏 들었다. 봉지에 손을 넣어 병의 봉인을 뜯은 다음, 문간에 멈춰 서서 술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맥스웰 박사라면 아마도 고상한 자세로 물가에 앉아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낡은 전차 레일을 몇 개 가로지르자, 한층 더 어두컴컴한 길이 나타났다. 벌써 부두 쪽에서 파도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그때 뒤에서 누군가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가죽 자켓을 입은 자그마한 몸집의 흑인 하나가 그의 앞을 가로막으며 말했다. “아저씨, 잠깐 좀 봅시다.” 랄프는 얼른 돌아서려 했지만 흑인이 먼저 나지막이 내뱉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제기랄, 네가 밟고 있는 게 내 발이야!” 랄프가 미처 달아날 틈도 주지 않고 흑인이 배를 강하게 때리더니, 그가 신음을 토하며 넘어지려 하자 코를 냅다 후려쳤다. 한쪽 다리가 엉덩이 밑에 깔린 채 벽을 향해 나가 떨어진 랄프가 어떻게든 몸을 일으키려고 안간힘을 다하고 있는데, 마지막으로 또 한 차례 뺨에 불꽃이 튀는 것을 느끼며 이윽고 랄프는 아스팔트 위에 쭉 뻗어 버리고 말았다.


3

그는 시선을 한 곳에 고정한 채 아침 이 시간에 흐린 하늘 아래서 바다 위를 빙빙 돌며 날고 있는 수십 마리의 새들, 갈매기를 보았다. 거리는 아직도 내리는 안개비로 칙칙했으며, 젖은 보도를 건너가는 달팽이를 밟지 않으려면 꽤나 신경을 써야 했다. 라이트를 켠 차가 천천히 지나갔다. 다른 차 한 대가 또 지나갔다. 이어서 또 한 대. 그 차에는 노동자들이 타고 있을 것이었다. 공장 노동자. 랄프는 나지막이 그 단어를 중얼거려 보았다. 월요일 아침이었다. 그는 모퉁이를 돌아, 블라인드가 내려지고 빈병들이 보초처럼 문 옆에 늘어서 있는 블레이크의 술집 앞을 지나갔다. 추웠다. 그는 이따금 두 손으로 어깨를 비비면서, 될 수 있는 대로 빨리 걸었다. 마침내 집에 도착하니 현관에는 불이 켜져 있었지만 창문은 캄캄했다. 잔디밭을 가로질러 뒷문으로 다가갔다. 손잡이를 돌려 조용히 문을 여니, 집 안은 쥐죽은 듯이 조용했다. 개수대 옆에 높은 의자가 있었다. 그들이 앉아 있었던 테이블이 놓여 있었다. 그는 어젯밤, 소파에서 일어나 부엌으로 자리를 옮겼었다. 그 후로 어떤 일이 벌어진 건가? 더 이상 아무것도 한 것이 없었다. 난로 위의 시계를 보았다. 주방에는 묵직한 유리가 덮힌 테이블이 놓여 있었다. 날개를 펴고 주름을 펼친 홍학으로 가운데가 장식된 레이스가 깔려 있었다. 그녀가 저 창가에 서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을까? 그는 거실 카펫 위로 걸음을 옮겼다. 그녀의 코트가 소파에 던져져 있었고, 흐릿한 빛 속에서 그녀가 피운 담배 꽁초로 가득찬 재떨이의 윤곽이 보였다. 지나가면서 얼핏 커피 테이블 위에 전화번호 수첩이 펼쳐진 채 놓여 있는 것도 눈에 띄었다. 문이 조금 열려 있는 그들의 침실에서 걸음을 멈췄다. 모든 것이 열려 있는 것 같았다. 그녀를 들여다보고 싶은 욕망에 잠깐 저항하다가, 손가락으로 문을 밀어 조금 더 열어 보았다. 그녀는 베개에서 머리를 떨구고, 벽을 향해 돌아누워 잠들어 있었다. 그녀의 머리는 시트에 대비되어 더욱 검어 보였고, 이불은 그녀의 어깨 주위에 뭉쳐진 채 침대 발치에서 끌어올려져 있었다. 그녀는 자기 자리에 누워 있었고, 그녀의 은밀한 몸매가 엉덩이에서부터 비스듬히 뻗어 있었다. 그는 오랫동안 아내의 몸을 쳐다보았다. 이제부터는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물건을 챙겨서 떠나 버릴까? 호텔로 갈까? 확실하게 절차를 밟아야 하는가? 남자는 이런 상황에 처했을 때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 이미 일이 벌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집 안이 아주 조용했다.

부엌 테이블에 앉아 팔뚝 위에 머리를 묻었다. 어떻게 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바로 지금, 바로 이 일, 코앞에 닥친 오늘과 내일이 문제가 아니라, 앞으로 살아갈 모든 날들이 문제였다. 아이들이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들이 부엌으로 들어서자, 랄프는 자세를 바로 하고 미소를 지으려고 했다.

“아빠, 아빠.” 아이들이 그에게 달려오면서 소리쳤다.

“아빠, 이야기 해주세요.” 아들이 무릎 위에 올라와 앉으면서 말했다.

“아빠는 우리한테 이야기해 주실 수 없어. 이야기를 하기에는 너무 이른 시간이야, 그렇죠, 아빠?” 딸이 말했다.

“아빠, 얼굴이 어떻게 된 거예요?” 아들이 손가락으로 상처를 가리키면서 말했다.

“어디 봐요! 보여 주세요, 아빠!” 딸이 자꾸만 어리광을 부렸다.

“불쌍한 아빠.” 아들이 말했다.

“아무것도 아니야. 괜찮아, 얘들아. 자, 이제 내려가거라, 로버트. 엄마 소리가 들리는구나.”

랄프는 재빨리 욕실로 들어가서 문을 잠궜다.

“아빠가 여기 계시니?” 마리안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빠 어디 계시니, 욕실에 계시니? 랄프?”

“엄마, 엄마! 아빠가 얼굴을 다쳤어요.” 딸이 외쳤다.

“랄프!” 그녀가 손잡이를 돌렸다. “랄프, 열어 줘요, 제발, 여보. 랄프? 제발!”

그가 소리쳤다. “저리 가, 마리안.”

그녀가 말했다. “갈 수 없어요. 제발, 랄프. 잠깐만 문을 열어요, 여보. 그냥 보고 싶어요. 랄프, 랄프? 당신, 다쳤다면서요? 어떻게 된 거예요, 랄프?”

“저리 가라니까.”

“랄프, 열어요, 제발.”

“제발, 조용히 좀 해주겠어?”

그녀 문 앞에서 기다리는 소리가 들렸고, 손잡이가 다시 돌아가는 것이 보였으며, 그리고 나서 아이들을 다독거리며 아침을 주기 위해 주방으로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랄프는 거울 속에서 자신을 오랫동안 들여다보았다. 스스로를 향해 이런저런 표정을 지어 보았다. 그러나 이내 포기해 버렸다. 거울에서 돌아서서 욕조 턱에 앉아서 구두끈을 풀기 시작했다. 손에 구두를 든 채 플라스틱 샤워 커텐에 그려진 푸른 바다를 가로질러 달리고 있는 쾌속선을 보며 하염없이 그렇게 앉아 있었다. 식탁보의 검은 마차를 생각하고는 하마터면, 서! 하고 외칠 뻔했다. 셔츠를 벗고 한숨을 쉬며 욕조 위로 몸을 기울여 마개를 막았다. 뜨거운 물을 트니, 얼마 안 있어 수증기가 피어올랐다.

물 속으로 들어가기 전에 타일 위에서 알몸으로 잠시 서 있었다. 갈비뼈 위에서 늘어진 살을 손가락으로 모아 보았다. 김이 서린 거울 속에서 자신의 얼굴을 다시 뜯어보았다. 마리안이 그의 이름을 부르자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랄프. 아이들은 방에서 놀고 있어요. 폰 윌리암스에게 전화해서 당신이 오늘 못 나간다고 했고, 나도 집에 있을 거예요.” 조금 후 그녀가 덧붙였다. “근사한 아침을 난로에 올려놓았어요, 여보, 당신이 목욕을 마치면 먹으라고요. 랄프?”

“제발, 조용히 해.” 그가 말했다.

랄프는 그녀가 아이들의 방으로 갈 때까지 욕실 안에 있었다. 마리안은 아이들에게 옷을 입히면서 워렌과 로이와 함께 놀고 싶지 않느냐고 물었다. 그는 집 안을 가로질러 침실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그리고는 한동안 침대를 바라보다가, 천천히 이불 속으로 기어 들어갔다. 똑바로 누워 천장을 노려보았다. 소파에서 일어나서, 부엌으로 들어갔었고, 앉......았었......다. 마리안이 방으로 들어오자, 얼른 눈을 감고 침대의 자기 자리로 돌아누웠다. 그녀가 이불 속에 손을 넣고 그의 허리를 어루만지기 시작했다.

“랄프.” 그녀가 불렀다.

랄프는 자신의 몸이 그녀의 손길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이내 그는 약간 긴장을 풀었다. 오히려 그게 훨씬 더 쉬었다. 그녀의 손이 엉덩이에서 복부로 옮아왔다. 이제 그녀는 몸을 그에게 바짝 밀착시킨 채 서서히 아래 위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랄프는 가능한 한 오랫동안 자신을 억제했다. 이윽고 그는 그녀를 향해 돌아누웠다. 그는 그렇게 돌아누우며 죽음과도 같을 잠 속으로 빨려 들려는 자신을 억제했으며, 자신을 덮쳐 오는 피할 수 없는 변화에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