自由詩의 발상자는 신체시다. 자유시 以前의 在한 西詩는 音數 體裁 등에 관한 複雜한 怪難한 法則에 지배되어 있다. 알렉산드리안調의 12綴音의
法則과 같은 그 현저한 例다. 이것은 ‘一行一段落制’라 할 法則이 없다. 이 法則에서 一行에 包하는 意味는 次行에 及치 않음을 그 原則으로
하였다. 곧 그 行行이 各各 ‘意味獨立’을 保치 않아도 안되었다. 이런 不自由의 外的 專制律이 詩人의 自由奔放의 情想을 抱束 압박하여 왔다.
近傾 우리의 흔히 듣는 ‘안쟌부맨’이란 語는 이 時代의 土産語品이다. 곧 彼 法則에 反對시는 ‘안쟌부맨’이라고 呼하였기 때문이다. 이 專制詩形에
反抗하여 立한 者는 곧 自由詩다. 자유시는 그 律의 根底를 個性에 置하였다. …近日 歐美와 日本에서 自由詩의 이름이 生함은 三富朽郞의 자유시
운동으로부터 始한다. 律이라 함은 이 自由詩의 或 性律을 이름이다. 이 律名에 至하여는 사람에게 의하여 各各 個 內容律, 或 內在律, 或
內心律, 혹 內律, 心律이라 呼한다. 그러나 이는 모두 自由詩 곧 個性律을 形容하는 同一意味 말이다. 나는 此等 種種의 名을 包括하여 單히
‘靈律’이라 칭하려 합니다. - 黃錫禹, “朝鮮詩壇의 發足點과 自由詩,” 「每日申報」, 1919. 11. 10., 韓啓傳,
「韓國現代詩論硏究」(서울 : 일지사, 1983), p. 32에서 재인용.
자유시 [自由詩, free verse]
보들레르의 "상응'은 정형시 소네트이다.
장 랭보의 일뤼미나시옹(Illuminations) 연구_한대균 키타가와 후유히코(北川冬彦)의 "새로운 산문시로의 길"-두산 백과사전 "자유시" 명목을 쓴 분도 기타가와 후유히코와 동일한 시각에서 쓰고 있다.
키타가와 후유히코(北川冬彦): “詩와 詩論” 쇼우와(昭和) 4=1929, 3. 발표. 김억: 동아일보: "격조시형론소고" (동아일보 1930.1.16-26, 28-30. 발표. (김억이 기타가와 후유히코의 글을 본 것 같다.)
산문시의 발생 시기에, 프랑스의 시는 예를 들어 베르드랑(Aloysius Bertrand; 1807~1841)과 보들레르(Charles Baudelaire; 1821~1867)와 같은 시인들이 모반했던 극도로 엄격하고 힘든 형식, 즉 알렉상드랭(Alexandrine)에 의해, 지배를 받고 있었다. 더 나아가 산문시의 옹호자들 중에는 예를 들어 랭보(Arthur Rimbaud)와 말라르메(Stéphane Mallarmé)와 같은 프랑스 시인들이 포함되었다. 프랑스에서 산문시는 자코브(Max Jacob)와 퐁지(Francis Ponge)와 같은 작가들에 의해 20세기까지 계속 창작되었다. 따라서 이들 시인들이 모반하면서 들고 나온 형식이 산문시였지 한국의 학자와 문인들이 주장하는 그 자유시가 아니었다는 것이다(이렇게 잘못 된 판단의 기원은 황석우로부터 비롯된 것 같다). 저명한 모더니스트 시인 T. S. 엘리엇(T. S. Eliot)은 한 두 편의 산문시를 시도하기는 했지만, 아무튼 맹렬하게 산문시를 반대했다. 또한 그는 시적으로 창작되었다고 높이 평판을 받았던 쥬나 반스(Djuna Barnes)의 1936년의 소설 "Nightwood"가 시행의 리듬 또는 “음악적 패턴”을 결코 가지고 있지 못한 만큼 “시적 산문(poetic prose)”으로 분류되지 못할 것이라고 하는, 아무튼 그 장르를 정의하는 것에 대해, 자신의 그러한 견해를 논쟁에 첨가시켰다. 그만큼 자유시(운율 시)는 산문시의 일종이 아니라 엄격하게 구분이 된다는 의미이며, 모더니티 또한 정형시와 자유시 등의 운율 시와 산문시의 구분 없이 표출될 수 있다는 것이다.
주근옥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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