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e texte est traduit avec la langue Coréenne. This text is translated with the Korean language.)


  

-레이몬드 카버(Raymond Carver), 에이미 헴펠(Amy Hempel), 그리고 메어리 로비슨(Mary Robison)


C. W. 할렛(Cynthia Whitney Hallett)1) / 주근옥 역


1. 후소시학(後素詩學, Parallel Poetics)2)

    (시문학 통권 392호, 2004. 3. 1)

 

문학 분석에서, 용어 "minimalism"은 대개 소설 쓰기의 양해된 어떤 스타일뿐만 아니라 특히 단편소설에 속하는 어떤 성격의 한 덩어리를 일컫는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미니멀리스트로 알려진 작가는, 특히 더 나아가 단편소설의 미니멀리스트로 알려진 작가는 후소(後素)의 미학, 즉 복잡한 방정식의 신중한 축소, 다시 말해서 복잡하게 뒤얽힌 것이 가장 단순한 항으로 표현될 때까지 이질적인 것을 인수분해 한다. 일반적으로 이러한 텍스트 안에서, 독자가 개인적 경험의 편린들, 즉 인간을 설복시키는 힘으로서의 진술되지 않은 표현으로 반영된 사회전체와 마주칠 때까지 이완과 혼란은 인간의 정신적 교감으로부터 제외된다. 흔히 미니멀리스트로 알려진 에이미 헴펠(Amy Hempel)은 이러한 기법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당신의 작품 안에 보고 되지 않은 많은 경험이 실제적으로 페이지 위에 나타난 것보다 더 중요하다. 흔히 이야기의 정서적 초점은 기술되지 않은, 또는 이야기 안에 귀착되어 있는, 다시 말해서 그 밑에 깔려있는 어떤 사건이다.”(Sapp 82~83). 요컨대, 작가는 독자가 적어도 생략되었지만 실제적으로는 주어져있는 것으로부터 추측하고 있는 어렴풋한 하나의 가능성을 갖도록 조심스러우면서도 충분하게 그 빈 공간의 틀을 어떻게 해서든지 짜 맞추지 않으면 안 된다. 언급된 모든 것 안에는 적어도 반영 또는 함축(비유적 어떤 형식)으로도 언급되지 못한 모든 것을 담아야 한다. 흔히 독자에게는 하찮은 일 또는 사건 같은 것으로서의 사실적인 보고로 여겨지는 것 같은 것으로 주어진다. 비록 최후의 변형이 외부의 실재성을 닮았을지라도, 그 표상적 방법은 단지 외면적으로 언급된 세부묘사만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보다 더 많은 이야기가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일반적으로 미니멀리즘 또는 단편소설의 장인들은, 때로는 부연하고, 때로는 사라지게 하고, 때로는 변형시킬 줄 아는 창조적 재능을 공유한다. 그들은 외견상으로는 긴장 없이 의식적으로 확실한 직조법을 성취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공유, 즉 기본적인 성격은 미니멀리스트적 스타일이라고 하는 것과 일반적으로 문학 분석가들로부터 칭찬보다 비난을 더 받고 있는 단편소설의 장르라고 하는 두 가지를 모두 획득하고 있다. 그리고 만약 비난이 아닐지라도, 그때 적어도 소설 쓰기와 장르 사이에 존재하는 진지한 고찰은 없을 것이다. 어느 쪽이든지 간에, 미니멀리즘과 단편소설은 종종 너무 낮게 평가된다. 흔히 이러한 저평가의 이유로 반대자들은 그들 예술의 핵심 구성요소가 짧음에 두고 있다. 그러나 그들이 예술적으로 성공하도록 만들고 있는 것은 그들 구조의 간결성이다.

많은 문학비평가들은 자진해서 그저 산문이 아닌(산문은 시만큼 교묘한 착상, 다시 말해서 은유와 같은 기법이 없는 것을 기본적인 전제로 삼기 때문에, 따라서 그 의미를 확장하기 위하여 겉으로만 반영된 사실성보다 경험된 그리고 진정한 반영으로서의 사실성만이 유익한 것처럼) 시의 짧음과 은유와 같은 기법이 없으면서도 발휘되는 교묘한 착상을 받아들이는 것에 호기심이 강하다. 그들은 소설 안의 지나치게 많은 기교를 참을 수 없는 것으로 여기는 듯하다. 반면에 그들은 시(짧고 간결한)를 소중하게 여기는 것 같다. 왜냐하면 이 비평가들은 환원된 복합체의 간결한 시와 겉으로 기교가 많은 단편소설(미니멀리즘의 기교를 시적 기교와 동일시하거나 단편소설을 일종의 “산문시”로 받아들이는 것을 우리에게 허락할 수 없을 것인) 사이에 신성한 장막이 존재하는 것으로 여기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즉, 마치 시 쓰기와 미니멀리스트의 단편소설의 생산이 그들 이외의 소설작법과 다르고 일종의 특별한 기교(art)인 것처럼. 미니멀리스트와 다르게 기교를 부리는 소설의 그 논법은 약간의 경계심으로부터 아슬아슬한 히스테리에 이르는 것과 일치하여, 이중노출의 복합적 소설류 산문의 조정적(措定的) 기본요소로서의 미니멀리즘과 대립하는 것으로 표면화되었다. 매디슨 벨(Madison Bell)은 레이몬드 카버(Raymond Carver)가 “이러한 모드(미니멀리스트)의 뛰어난 기교가이며, 아마 최고일 것이며, 그러나 약간 위험한 선구자일 것(67)”이라고 전망한다. 그리고 스벤 버커츠(Sven Birkerts)는 다음과 같이 경고한다. “만약 소설이 잔재주를 부리는 무리보다 더 오래 살아남으려고 한다면, 분열과 불안의 수동적인 반영보다 더 많은 무엇인가에 모험을 걸어야만 할 것이다(33).” 제롬 클린코비츠(Jerome Klinkowitz)는 미니멀리스트의 소설은 “피상적인 삶(상상력의 인간적 견지의 판단적 사용을 강요하는 공포 때문에)의 가장 평범한 관계를 분석해내는 편향의 모든 미학적 혁신을 유보시킨다(364).”고 확신한다. 그리고 1989년, 잘 알려진 5명의 작가와 비평가들은 문학적 항적(航跡)을 남겨놓았는데, 그것은 다음과 같이, “원탁토론(a round-table discussion),” 그리고 “미니멀리즘에 대한 악담에 오물을 던지며(Throwing dirt on the Grave of Minimalism-Koch et al-)”라고 하는 타이틀 아래 그들의 집단적인 찬사를 피로했다.

종종 그러한 소설가들에게 “미니멀리스트”라고 라벨을 붙여준 그 비평가들에 대한 부정적인 태도가 있는 것은, 성급하게 그 용어를 지워버리면서 그리고 보다 더 조정적인 목소리를 내는 것을 암시하면서, 방어적으로 반응하는 많은 이들 작가들에게 그 원인이 있다. 일단 레이몬드 카버는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어떤 사람은 나를 미니멀리스트 작가라고 불렀다. 그러나 나는 싫어한다. 거기에는 미니멀리스트에 대해 내가 싫어하는 변형과 제작에 관한 미미한 낌새라고 할 수 있는 어떤 것이 있다(Simpson 210).” 그럼에도 불구하고 레이몬드 카버는 미니멀리즘을 위한 전형적인 지시대상이 되었다. 미니멀리스트라고 불리고 있는 에이미 헴펠의 대답 또한 그와 유사하다. “내가 실제로 불공평하다고 느꼈던 바로 그것으로서의 그들 비평가들의 비평은(T, Throwing…미니멀리즘에 대한 악담에 오물을 던지며) 미니멀리즘에 관한 매우 지쳐버린 평론을 위한 경우로 사용되었던, 내 저서에 대해 썼던, 보고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나는 미니멀리스트라고 하는 용어를 더 좋아한다(Sapp 85).” 그녀가 그렇게 언급하였을지라도, 그러나 에이미 헴펠의 용어가 내는 목소리보다 더 정밀한 것은 없을 것이며, 그것은 미니멀리스트가 단순명세를 삭제함 없이 원형이미지보다 더 작은 영역에서의 변형을 생산하기 때문에 부정확했을 것이다. 그렇다고는 하나 미니멀리스트는 매우 조심스럽게 응축된 공간 안에 담겨진 부분적 변형(상상)을 생산한다. 그 변형이라고 하는 것은 생략되었던, 밑에 깔려있던 것이 전체 그림에 정확하게 폭로된 부분이라는 것을 나타내고 있음에 틀림이 없다. 그가 “부정이라고 하는 것에 관하여(On Being Wrong: Convicted Minimalist Spills Bean)”라고 제목을 붙였던 그 안의 라벨 "m, minimalist"에 대해 호의적으로 대답한다면, 프레더릭 바슬미(Frederick Barthelme)는 미니멀리스트를 발아시키는 것은 분명한 문장 속의 이야기 쓰기에 의해 그들 과거의 소설의 어려움에 응답하는 것이었으며, 단조롭게 보일는지 모르지만, 그때 기준이념으로서의 명백한 문장보다 더 힘이 강력하고 보다 광범위할는지도 모르는 일이었으며, 그 안의 “평범한 경험”은 “큰 랑가주와 만나는 것(25)”보다 더 중요했다고 확신했다.

이러한 비평가들은 미니멀리스트의 작품이 작가, 스타일, 그리고 이야기를 칭찬하는 것보다 더 잘 변호하는데 자주 공헌하고 있는 분석과 마찬가지로 독해에도 보답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한다. 소위 미니멀리즘이라고 하는 용어에 어떤 제한이 있을지라도, 모욕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을지도 모르는 그것을 완화하는 시도일지 모른다. 문학비평가와 소설 작가에게 당면한 문제는 문학구조보다 오히려 문화의 조정적 함축 안에 있는 것 같다. 어떤 사람을 위한 어떤 문화는 보다 적거나 보다 짧은(또는 작은) 것이 하위계열에 있게 됨으로써 결정된다. 많은 비평가들이 사회적 불명예로부터 문학 스타일의 특색을 구별해내기가 어렵다는 것을 발견했다는 것은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다. 비슷한 이유로, 현대 단편소설은 흔히 19세기와 20세기에 발전되는 동안 부정적(은유와 같이 랑그 차원이 아닌 개별적 의미에 입각한) 비평과 문학적 식별에 종속되어왔다.

정의를 내릴 수 없는 문학 스타일로서의 미니멀리즘은 “1980년대(May The Short Story 97) 미국문학에 불꽃이 일어났던 단편소설의 르네상스”로 보이는 현상의 일부로 출현되었던 것 같다. 이러한 소생 이전에, 1960년대와 1970년대에 미국문학의 미니멀리즘은 반리얼리즘, 자의식적 경험, 패러디, 그리고 때로는 글쓰기의 게임 지향류와 동일시된 포스트모더니스트의 미학에 의해 지배를 받았다. 1980년대 초반의 환상적(fabulative) 그리고 메타픽션적(metafictional) 전략은 차차로 없어졌다. 벤저민 데모트(Benjamin DeMott)는, “이러한 소설의 어조와 태도의 가장 명백한 뿌리는 삶의 경험 안에, 다시 말해서 충격, 죄, 증오, 국가에 대한 강한 반감 안에 그리고 1960년대 후반과 1970년대 초반의 사려 깊은 젊은이들을 억제했던 오랫동안의 명백한 정서적 스트레스 안에 들어있다(27)”고 썼다. 소설적 표현의 단순성과 직접성에 대한 향수가 나타났던 것이다. “개성과 감수성에 관한, 개인의 심리학적 관망의 내적 역동성에 관한 현대 작가의 관심증가”라고 한 언급에 대하여, 고든 위버(Gordon Weaver)는, “이것은 …우리 문화의 지배적인 감수성으로서 윤리적 절대주의로부터 윤리적 상대주의로 이동하는 역사적 변동과 아마 관계되어 이동하는 것일 것이다(126)”라고 본다. 이렇게 새로운 이치가 발생하는 것은 단편소설, 특히 전통적, 모더니스트, “구성이 잘 된,” 그리고 포스트모더니스트의 작품 안에서 발견된 이러한 것들로부터 급진적으로 출발된 이야기의 인기를 상승시켰다. 이미 확립된 그러나 오랫동안 무시되거나 종종 그레이스 팰리(Grace Paley)와 신디아 오지크(Cynthia Ozick)와 같이 빠뜨리고 바라보게 된 작가와 마찬가지로 안 비티(Ann Beattie), 보비 안 메이슨(Bobbie Ann Mason), 프레더릭 바슬미, 레이몬드 카버, 메어리 로비슨(Mary Robison), 그리고 에이미 헴펠은 독자와 비평가와 같은 이들의 주의를 끌어당기기 시작했다. 그들의 작품은 신 리얼리즘 또는 네오리얼리즘, 심지어 “더러운 리얼리즘,” 또는 단순히 최근 미국적 글쓰기의 미니멀리스트적 성향을 구현하는 것이라고 언급했다. 미니멀리즘의 발생과 동시에 일어난 단편소설의 인기가 상승했기 때문에, 미니멀리스트의 산문이 단편소설의 르네상스에 빚을 지고 있는 것처럼 단편소설의 재생은 그 추진력에 있어서 미니멀리스트의 산문에 많은 빚을 지고 있다는 것에 의심의 여지가 거의 없다. 이러한 부활은 단편소설을 흥미롭게 만들고, 또한 세계의 이미지와 마찬가지로 그 한계를 채우면서도 그 통제, 다시 말해서 특히 하찮은 행위와 개략적으로 의사소통을 하는 언어활동의 무능력을 초월하여, 미니멀리스트의 일상적 표현, 속세, 그리고 평범함 속에 독자의 조정적 응답을 반영한다.

소설의 스타일 또는 단편소설의 형태 어느 것이든지 간에, 미니멀리스트의 산문은 에두름과 근사 잠재의식적으로 줄잡아 말함과 느릿느릿 힘겹게 거래한다. 이러한 역설은 현혹적이며 단순한 비유적 언어에 의해 성취된 갈등적 결과를 생산한다. 비유적 암시의 영역 안의 모든 사건과 행동은 문학적 세계 안에 적용된 상대성의 동일법칙에 의해 지배를 받으며, 어떤 단어와 이미지는 다양한 다시 말해서 사회적, 심리학적, 역사적 결합을 산출시키는 함축을 담고 있다. 이러한 함축은 의미를 촉진시키고 확장한다. 즉, 환유적인 것은 은유적 시니피앙으로 번역된다. 이러한 변형의 삽화와 해석은 구로프(Dmitri Gurov)의 내레이터 보고 안에 있는 체호프(Anton Chekhov)의 “개를 데리고 다니는 부인(Lady with Dog)”에서 다음과 같은 시퀀스가 발견된다.

 

…그에게 흥미롭고 중요한 모든 것, 그에게 본질적이었던 모든 것, 그의 인생의 핵심을 구성하고 있던 모든 것은 다른 사람들에는 숨겨지고 있었다. 반면에 모든 것은 거짓이었으며, 그가 진실을 덮어서 숨겼던 그 껍질… 모든 것은 열려져버렸다.

 

여기서 추상적 정서상태의 기술은 등장인물 구로프를 환유적으로 묘사하고 있으며, 그 자신의 비유적 언어의 해석을 담고 있다. 먼저 은유적 언어의 사용은 얇고 깨지기 쉬운 단층(껍질)의 이미지와 동시에 오로지 구로프만이 알고 있는, 억제하고 가면으로 변장하며 소용돌이치고 있는 정서를 창조한다. 생명이 부여된 정서를 담고 있는 그 얇은 껍질은 계란껍질의 개념과 상관된다. 만약 그 용기가 계란껍질처럼 깨지기 쉽다고 한다면, 그때 그것은 쉽게 관통되며 그 내용은 접근하기가 쉽다. 그 껍질이 무언가 숨기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진짜얼굴을 숨기고 있는 가면으로 생각할는지 모른다. 즉, 이러한 변장술로 그 겉껍질/가면은 교묘하게 솜씨를 부린다. 그 결합은 참으로 다양하며 독자를 유도하고 있는 이러한 후소 이미지가 여기서 거두고 있는 대부분의 다른 어떤 성과는 표면 이미지와 동등하게 타당하다. 예를 들어, 만약 구로프가 인위적 작용체계 아래 그의 진짜 감정을 숨기고 있다고 한다면 우리는 그것을 추론할 수 있을 것이며, 그때 그것은 다른 사람들이 지나치게 추론하는 것이 가능할 것이다. 아마 모든 사람들의 지나친 추론이 가능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결합체계는 미니멀리즘 운용의 열쇠이다. 그리고 그 결합은 단편소설 기능의 본질이다. 그때 미니멀리즘은 텍스트의 최소량(총계)보다 더 작으며, 단편소설은 소설이 짧은 이야기보다도 더 짧다. 그리고 미니멀리스트의 단편소설의 최종 측정은 짧은 단편소설보다 더 짧다.

먼저 독서할 때, 많은 미니멀리스트의 이야기는 내부적으로 분리된, 다시 말해서 첫줄과 마찬가지로 발단부터 종말까지 다른 것들과 분리된 문장을 볼 수 있다. 그러나 그 이야기가 정독될 때, 빗나간 언급과 어렴풋한 디자인은 풍부한 수사구조(상징적 구조 안에서 의미의 양식을 폭로하고 있는)를 결합한다. 이러한 단편소설은 오직 이야기의 껍질인 것이며, 압축된 의미의 깨지기 쉬운 용기이며, 줄여 말하기의 환유적 구조인 것이다. 이러한 형태는 메어리 로비슨의 소설 “당신의 것들(Yours)” 안에서 명백해지는데, 그 안에서 독자는 할로윈(Holloween)을 위해 남편과 아내가 호박을 새기며 조각하고 있는 것을 본다. 그의 조각된 얼굴은 정성을 들여 능숙하게 만들어졌고, 반면에 그녀의 얼굴은 소박하고 서툴기까지 하다. 이렇게 하찮고 뒤범벅이 된 외형은 얼굴의 매섭고 놀라운 변형과 죽음(그리고 심층의, 좀 더 으스스하기까지 한 묵시의 평범한 삶)의 진상이다. 또 다른 이야기 안에서 언어와 사건은 하찮게 보이는 것 같지만, 평범한 단계는 역으로 중요한 단계를 강력하게 암시한다. 어떤 첫 번째 내레이터의 수다스러운 어조는 두 이방인 사이의 인위적인 우정을 암시하는데, 이 경우에 그들은 내레이터와 독자이다. 또한 그것은 마치 어떤 사람이 잘못 된 것이 아무 것도 없는 것처럼 행동할 때 흔히 나타나는 고도로 스타일화 된 부정적 행동을 모방하는데, 사실, 어떤 것은 아주 지독하게 잘못 된 것이다. 이러한 방정식은 에이미 헴펠의 소설 “알 졸슨(Al Jolson)이 묻힌 묘지에서(in the Cemetery Where Al Jolson is Buried)”의 주제와 구조 안에 있다. 어떤 사람이 죽고 있는데, 그러나 병실 안의 배경 또는 병, 특히 피할 수 없는 죽음에 대하여 들을 수 있도록 언급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정말로 일어나고 있는 어떤 중요한 것을 추론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며, 모든 대화는 마치 “비 올 때 결코 젖지 않으면서도 모두 떨어져 없어진 하루살이처럼” 그리고 “미국에서 전에 빙 크로스비(Bing Crosby)가 불렀던 녹음테이프를 아무도 가지고 있지 않은 것처럼” 하찮은 것에 지시된다. 게다가, 죽음에 관한 완곡어법은 삶의 함축을 그로테스크하게 만든다. 즉, “아침에 그녀는 알 졸슨(Al Jolson)이 묻힌 묘지에 운반되었으며, 나는 ‘사라짐의 공포’를 갖게 되었다.” 내레이터는 말리부(Malibu) 여행과 같은, 팔이 잘려 죽은 한 남자의 모습 같은, 어미 침팬지가 죽은 새끼를 가리키는 것 같은, 비약하는 그녀의 꿈에 관한 다른 이야기를 한다. 먼저 이러한 이야기 속의 이야기는 꼭 소음과 함께 침묵으로 채워져 있는 방식으로 되어있는 것 같다. 그러나 곧 그들은 내레이터의 진짜 감정을 숨기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들은 내레이터의 죽음에 대한 공포와 그녀의 친구관계의 실패로 인한 죄의식과 죽음의 괴로운 실재에 있어서 언어의 파괴에 대한 환유적 암시이며, 어미 원숭이가 그녀의 죽은 새끼를 가리킬 때처럼, 다음과 같이 단언한다. “아가, 이리 온. 아가, 이리 온.” 내레이터의 전체 이야기는 슬픔의 언어이다.

미니멀리즘과 단편소설에 생기를 불어넣고 있는 예술과 교묘한 솜씨의 씨앗은 포우(Edgar Allen Poe), 체호프, 이스(James Joyce), 사뮈엘 베케트(Samuel Beckett), 그리고 헤밍웨이(Ernest Hemingway)와 같은 또 다른 다양한 작가들로부터 추적될 수 있다. 그들의 의식적 코드인 생략의 모든 것은 그들이 이해했던 것, 다시 말해서 포우의 경우 관념의 조화와 효과의 단일성, 체호프의 경우 그가 단편소설의 결말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그리고 작품 전체의 인상을 거기에 교묘하게 농축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는 격언, 조이스의 경우 외관상 정적인 에피소드와 실재성의 “편린”의 편애 속에서 고도로 구성된 이야기를 포기하고 있는 플롯의 전통적인 관념에 최소로 의지함, 사뮈엘 베케트의 경우 전통적 장르를 압축하고 증류(순화)하는 그의 독특한 세계관을 나타내는 효과(Hutchings 86), 그리고 헤밍웨이의 경우 여기서 기왕에 토론했던 용어로서 그가 “빙산의 일각(tip of iceberg)”의 효과라고 불렀던, 명확한 명세의 외관상 단순한 구조에 의해 갈등적 정서 상태와 의사소통하는 방식보다 더 많이 느끼는 독자층을 만들도록 설계되었다. 이와 다르게, 또는 헤밍웨이와 단순히 다르게, 그의 등장인물은 종종 행동의 어떤 형태와 의사소통하는 그들의 무능력에 응답하며, 현대의(contemporary) 미니멀리스트 작가들은 조이스의 “더블린사람들(Dubliners)” 안에서 이들을 더 좋아하는 등장인물의 성격을 창조하는데, 종종 그들의 애매한, 그러나 항상은 아닌, 마비상태의 무기력을 유도해낸다. 이러한 행동 또는 동작의 무기력은 또한 사뮈엘 베케트에 의해 쓰인 많은 작품 속의 사람들에게서 이러한 성격의 이미지에서 환기된다. 대부분, 미니멀리스트의 등장인물은 실생활보다 영웅적이거나 위대하지 않은 보통사람, 흔히 행동만 하고 아무것도 말하는 것이 없는 것이 양자택일보다 더 쉬운 “사실 그대로의 세계”에 존재하여 나타나는 바로 그 사람들이다. 침묵과 무기력 속에서 그들은 “텍스트 안의 헤밍웨이의 영웅(hyper-Hemingway-heros),” 좀 모자란 영웅적은 더욱 아닌(헤밍웨이의 영웅은 영웅적이 아니다), 비영웅적은 더더욱 아닌 것으로서 나타난다. 미니멀리스트의 단편소설에 있어서. 제재와 글쓰기 스타일은 종종 뛰어난 효과를 결합한다. 무디고 완벽하지 못한 산문은 등장인물의 공허한 삶을 반영한다. 내레이터에 의해 이루어지는 논설적 비평의 결핍과 주관적 기술은 광범위한 독자의 참여를 요구한다. 이러한 문학적 성격은 그 진전이 미국산문의 분식뿐만 아니라 이제 유전자공학적으로, 그리고 일반적으로 단편소설과 결합된 어떤 것에 의해 문학 속에서 미학적으로 특별한 긴장을 반영하는 문학형태를 산출하여 결합한다.

산문형식의 소설 장르로서, 단편소설은 특별히 복잡한, 극히 다양한, 그리고 개성적으로 압축된 내러티브적 매개물이다. 짧음에 부가해서, 단편소설의 이러한 특징을 나는 단편소설과 비유적 언어의 인위적인 사용, 무관계의 가장 효과적인 생략, 특히 감성적인 언어, 그리고 과장된 리얼리즘으로부터 결과한 검출 가능하다고 호칭하는 것을 포함하는 미니멀리즘 사이의 유사관계를 확립하는데 결정적인 것으로 생각한다. 많은 단편소설 분석가들이 이러한 개인적 기본요소에 대해 토론했다. “단편소설과의 화해(Coming to Terms with the Short Story)”라고 하는 비평문에서, 수산 로하퍼(Susan Lohafer)는 시의 “수축된 언어”와 소설의 “연장된 언어”의 개념으로부터 단편소설의 언어기능을 분리하는 “축약언어(contracted language)”의 개념을 충족시킨다(34). 그녀의 전략은 단편소설의 “축약언어”에서 이해구조로서의 통사법을 구별한다(34). “현대 단편소설의 리얼리티”라고 하는 항목에서, 찰스 메이(Charles May)는 단편소설과 뚜렷이 구별되는 문학적 테크닉의 윤곽을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즉, “사물을 도외시하며 의미를 폭로하는 수사적 방법, 그리고 환유적 의미에 의해 은유를, 다시 말해서 외재 리얼리티를 기술함으로써 내재 리얼리티를 표현하려고 하는 그리고 종종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을 언급하려고 할 때의 인간적 딜레마를 주제화하는 의미를 창조하는 언어 스타일…(369).” 존 가드너(John Gardner)는 “소설의 기교”에서, “현재… 지배물체에 관한 테크닉의 변화효과로부터 느끼는 매력은” 단편소설 작가들이 “카메라의 무관심과 함께 이미지를 선택하는 효과와 그리고 감성적 효과와 함께 언어를 억압하고 조심스럽게 무효화하는 것이 어디서나 가능하게” 만드는 것을 재빠르게 했다는 것을 관측한다(135). 감정을 나타내는 것에 부가해서 이러한 모든 특성, 다시 말해서 미니멀리즘과 단편소설의 교배잡종으로서의 특성은 종종 “이야기”의 결핍으로 성격이 만들어진다.

수산 로하퍼는 단편소설을 다음 문장으로, 즉 주어와 술어(행동)가 담겨있는 그리고 종속 없이 완벽한 상상력이 되게 하는 언어체계의 문법적 구성단위이라고 비유한다. 비유적 언어 안에서 쇠처럼 두들겨 만드는 가단성(可鍛性)의 논증으로 납득시킨 후에(그녀의 모델은 Nadine Gordimer의 “Rhodesia에서 온 기차”에서 추출한 문장이다), 수산 로하퍼는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린다. 즉, “따라서 그 문장은 곧 삶을 단지 반영만하는 거울로서보다 미학적인 대상과 개념적으로 디자인된 것으로 파악된다. 그 디자인은 무엇이 중요하고 진실한가 하는 작가의 지각과 함께 많은 점에서 일치(즉, 은유가 될 것이다)할는지도 모른다(42).” 그러나 그것은 이야기의 종결이 아니다. 왜냐하면 최후의 의미(종결)는 아직 텍스트의 외부에 그리고 작가의 의도를 초월하여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독자와 함께 존재한다. 킨리(Keenly)는 이 우유부단함을 알고 있는데, 어떤 소설가는 내러티브 안에서 종결(의미)을 시도하지 못한다. 그러나 오히려 그러한 방법 안에 디자인 된 이야기의 기본요소는 그들 개인적 삶의 문맥 안에서 독자들을 위해 나타나야만 한다. “무엇이 중요하고 진실한가”의 이러한 의미를 향해 독자를 유도시키기 위하여, 작가는 독자가 인식하고 관계할 수 있는 의미의 강력한 양식을 창조하여야만 한다. 이러한 구조는 미니멀리스트 소설의 기초기능이다. 흔히 미니멀리스트 소설의 작가는 보류되거나 개시된 종결의 목적을 위하여 “표준” 이야기의 전형적․대립적(진화) 결단구조를 비켜, 페이지 위에서만 끝나고 마는 전통적 관념의 종결의미를 회피하거나 거절한다. 그러한 종결은 먼저 애매하게 나타나지만, 결국은 독자의 경험 안에서 의미와 결단을 발견한다. 변경의 무제한은 일반적으로 미니멀리스트 작가들의 반일차원성의 일부이어야만 한다. 그들은 일차원성이 그들을 위해 인간존재의 복잡성과 아이러니, “실재성”의 무작위와 불확정을 충분히 고찰할 수 없기 때문에 일차원적 플롯을 거절한다. 그 이야기는 그 자신의 삶, 그리고 부여받은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는 그 삶과 마찬가지로 개시(開示)된 종말로서 나타난다. “유사한 삶”으로 디자인된 복제물로서의 사람들과 사건은, 세계와 평범한 것의 확대된 이미지들은 미니멀리스트의 이야기가 “내재사실주의(hyperrealistic)”란 라벨이 붙게 된 첫 번째의 이유이다. 미니멀리스트의 테크닉은 “자의적이고 독단적인 것이 실재인 것처럼 보이도록 만들고 있는 기묘한 효과를 가지고 있거나, 또는 아마 독단적이고 자의적인 것이 어떻게 실재적인가 폭로하고 있는 기묘한 효과를 가지고 있을 것이다(Porter 81).”

미니멀리스트의 단편소설은 포우에 의해 정의되고, 체호프에 의해 성격이 만들어지고, 마침내 레이몬드 카버의 작품 속에 나타나 충분히 정리되었으며 헤밍웨이에 의해 정제됨으로써 완성된 단편소설의 디자인 중의 일부이다. 이러한 미니멀리즘의 문학적 계보는 오늘날 평범한 존재 속에서 차단되고 분리된 의미, 즉 스타일의 레벨과 형식적 구조상에 반영된 활기가 있지만 유보된 의미를 극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그 이야기를 작가들 속에서 경험케 한다. 총체적인 미니멀리스트의 스타일은 꾸밈이 없고, 절약하고, 내용이 빈약하고, 긴장되어 있다. 그것은 수사적 장식법으로부터 자유로운 경향이 있으며 때로는 표면상으로 구어체언어와 관용어의 사용을 지나치게 고집한다. 확실히, 작가 스타일의 의식적인 결핍과 의욕부진 속 미니멀리스트의 모드는 전통사회와 같은 어떤 것으로부터 그들이 차단된 등장인물의 삶의 정신적 결핍을 모방한다(Gorra 155).

어떤 이야기 속에서 행동은 총체적으로 이유가 없는 것 같고 모든 감정은 표면의 냉정한 내러티브의 목소리와 무변조의 대화 아래 지워진 것 같다. 따라서 미니멀리스트의 산문은 표면상으로는 파편으로 조각난 실행 속 “이야기 없는 이야기(storyless story)”의 환각일 뿐만 아니라, 또한 이야기에 대해 보다 더 관습적·작가적 어떤 내부적인 것으로부터 또 다른 내러티브의 목소리를 분명히 내고 있는 극히 이례적인 힘 속의 “작가 없는 이야기(authorless story)”를 창조한다. 그 효과는 마치 독자가 정정 당당하게 앞에서 이야기를 하는 것(경청하는 것)보다 우연히 엿듣거나 대화와 사건에 대해 일부러 도청하는 것처럼 아무런 소리가 없는 것이다. 존 가드너(John Gardner)에 의하면, 이러한 부류의 소설 속에서 이루어지는 “예술가의 개성의 은폐는 실질적으로 전체화될 수 있으며… 개인적 스타일의 포기는 오히려 매우 완벽하게 만드는데… 우리는 또 다른 것으로서의 어떤 작가의 작품에 대해 언급할 수 없다. 그러나 스타일의 바로 그 은폐가 하나의 미학적 선택으로서의, 감정표현으로서의 스타일이다(Art of Fiction 136).” 일반적으로, 미니멀리스트 작가가 하고 있는 주제의 분해와 차단의 일치하는 관습은 독단적이며 개시된 종말, 표면의 세부항목 간의 상호작용, 내러티브적 생략, 그리고 일차원적 플롯과 같은 非콘티누우(continuo) 를 더선호하는 것에 의해 반영된다.

일반적으로, 미니멀리스트 단편소설의 작가는 실제적으로 시니피에와 인간조건과 능력으로서의 비유적 양식인, 단순 사건, 단지 일어나기 쉬운, “여기에-무언가 일어나고 있지만-아무것도 없는(nothing-is-happening-here)” 이야기가 되어 나타나는 것으로 제공되는 비유적인 말을 교묘히 다룬다. 이러한 테크닉과 함께 그들은 개별적인 것과 보편적인 것, 부분과 전체, 사소한 것과 의미 있는 것 사이의 수학적 관계와 비율을 창조한다. 그 단순사건은 인간조건(오로지 인간을 의미하는 것의 일부분)에 공통적인 죽음과 같은 보편적 인간 환경을 반영한다. 게다가, 생략된 많은 것은 그 부재에 의해 의미가 만들어진다. 이야기 속에서 이미지와 의미의 확장을 위한 매개물로서의 이러한 시적 수사어구의 의식적 사용은 이러한 서정적 단편소설을 만드는 것이다. 이야기의 이러한 방법은 서정적인 것과 사실적인 것, 현대 단편소설의 기본적인 성격의 체호프적인 결합을 반영한다(“현대 단편소설의 실재성일는지 모른다.” 371). 이러한 역동적이고 은유적인 의미는 이야기의 깨지기 쉬운 껍질의 집이 만들어진다. 잘 알려진 문학비평가 월튼 리츠(A. Walton Litz)는 미국에서, 일찍이 소설작가는 “미국적 삶의 ‘박약,’ 즉, 부의 결핍과 복잡한 사회구조에 의해 만들어진 일부분, 즉 그들의 강렬하지만 격리된 경험을 위한 자연적 형식처럼 보이는 짧은 시적 이야기 속에서 단편소설을 유도해냈다(4).”고 시사했다. 만약 리츠의 언급이 정확하다면, 오늘날 이러한 ‘박약’은 현대의 미국적 삶, 즉 어떤 무능력 또는 감정의 결핍 그리고 말로 나타내거나 의사소통하거나, 또 다른 것과 연결하는데서 볼 수 있는 무기력에 의해 성격이 만들어진 사회적 환경의 특별한 전망을 나타낸다. 유진 커렌트-가르시아(Eugene Current-García)는 그것을 “소외와 자기충족을 위한 개인적 탐색의 문제, 그리고 그들 노력의 결과로 본다…(499).” 이러한 노력의 현대적 묘사는 조이스의 감정적 그리고 언어적, 어떤 때는 심지어 육체적 무기력, 즉 “더블린사람들(Dubliners)”에서의 무기력, 그리고 좀더 최근으로는 레이몬드 카버의 “파란색”에서 발견된 무기력을 회상시킨다. 억제되고 압착된 감정, 즉 깨지기 쉽고, 현혹되기 쉬우면서 말이 없는 표면에 울려 퍼지는 감정은 미니멀리즘 기능의 열쇠이다.

네오리얼리스트로서의 미니멀리스트 작가는 세계가 규칙과 진리와 법률의 어떤 안정된 집합에 의해 지배를 받는다기보다 오히려 임의적이고 불확정적이라는 확신을 포스트모더니스트들과 함께 공유하는 것 같다. 그들은 언어에 대하여 동일한 확신을 많이 갖고 바라본다. 미니멀리스트 작가들에 의해 승인된 전형적인 모더니즘의 영향력은 그들의 스타일과 주제 면에서 명백하다. 이러한 상호관통을 빈번하게 동반하고 있는 고통을 환기시키면서 등장인물의 삶의 핵심과 함축된 인간조건의 “핵심을(to the quick)” 바짝 잘라낸다. 미니멀리스트 작가들이 화해 또는 휴식이 제공된 세계를 최후로 탐색하면서 인간의 성격을 나타내는 것은 매우 드물다. 그들의 많은 등장인물들은 심리적 또는 감정적 고통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비록 있다 하더라도, 화해는 약간 발견할 수 있을 뿐이며, 그 고통으로부터의 휴식이나 은신처를 발견하는 것 또한 약간일 뿐이다. 대신에, 그들은 이러한 심리적/감정적 고통이 단순하게 마치 그들 삶 속의 상업용 배경음악(Muzak)인 것처럼, 일상적인 상황의 사건이나 사건이 아닌 것에 연결도 관계도 없는 엘리베이터 음악인 것처럼, 그러나 오히려 다른 소음 부류(아마 사고 또는 각성일 것이다) 이외의 강한 소리에 압도되어 들리지 않게 되는데 또는 지속저음에 기여하거나, 그리고 그렇게 함으로써, 어떤 공포에 대한 사적 감수성을 감춘다. 이렇게 모든 종류의 고통에 나타난 감수성의 감소는 20세기 후반의 많은 소설 속에 극적으로 표현됨으로써 인간조건의 중심이념이 되었으며, 그리고 이러한 “무감각”에 선천적으로 응답하는 단축표현은 응축된 구조와 미니멀리스트 단편소설의 분리된 내러티브적 어조 안에 특별하게 반영되었다.

에이미 헴펠의 아주 짧은 소설 “욕조 속에서(In a Tub)는 주체와 환유구조로 되어있는 인간조건의 우수한 실례이다. 육체에서 이탈된 목소리에 의해 언급된 겨우 백 단어 넘는 그 소설은 세 곳의 행위현장에서 뒤죽박죽으로 만들어지는데, 그것은 안정성과 연결 장치에 대한 내레이터 자신의 결핍이 반영된 디자인이다. 오직 어떤 것의 뒤에서만 시작하는 그 이야기는 이미 발생하였지만 뒤죽박죽이다. “내 사랑―나는 그것을 관두기로 했다. 그래서 나는 차를 타고 하느님을 향해 달려갔다.” 그리고 “술기운이 올라 앉아 있었고 술잔을 더럽히며, 또 귀를 기울였다.” 이것만이 그녀의 사랑이라고 말한다. 왜? 콩콩 심장이 뛰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그녀의 손톱에 관해 우연히 알게 되었는데, “그 소동은 마음 깊은 곳에서 잔물결로 나타날 것이다(상처로 생각하지 마라? 왜냐하면 그것은 그녀가 그녀의 손가락을 박살낸 것처럼 소리가 나니까).” ―오직 이러한 이미지들만이 어떤 무서움에 도달한 독자 앞에 발생하여야만 했던 어떤 사실을 향해 몸짓을 한다. 집으로 돌아와, 그 내레이터는 “콘크리트로 만들어진 물통(a concret mixing Tub)” 안에서 호수 위로 떠밀려 배회하는 아이처럼 그녀 자신에게 그 이야기를 한다. 그녀가 “훔친 노와 어망의 찌를 모래밭에서 떠밀어 내보내며, 한동안 아무것도 들을 수 없었을 것이다.” ―아무것도 들을 수 없는 것 그러나 그것은 그녀의 심장고동일는지도 모른다. 나중에 그 내레이터는 이러한 이야기를 암송한다. “여기 무언가 일어나고 있다. 너는 자신을 욕조(물통) 속으로 서서히 밀어 넣는다. 너는 서서히 편안해진다. 너는 드러누워 잔물결이 사라질 때까지 기다린다. 그때 너는 심호흡을 하고, 머리를 수그리고 심장의 유쾌한 고동소리를 엿듣는다.” ―그녀의 표현어조는 관습적 의미를 전한다. 즉, 그녀는 이 이야기를 전에 했으며 다시 그것을 할 것이다. 잠시 동안 어떤 것이 숨김없이 폭로된다면, 이러한 이야기는 길이와 폭이 단축될 것이다. 내레이터의 공포와 더 중요한 것을 의미하는 환유적 이미지를 삽입하고 있는데, 그녀는 물의 상징과 용기의 원형이 탄생/삶으로서의 물, 재생/세례로서의 원본이라고 하는 은유가 된 그녀의 조건(살아서 충만한 존재)을 확인할 필요가 있다. 조금 면밀히 조사해보면, 그 상징은 다음과 같은 재확인에 의지한다. “나는 아직 살아있는가?” ―즉, 삶과 삶의 흔적을 위해 반복된 탐색. 만약 내레이터가 살아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그녀의 심장고동소리를 듣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면, 그때 독자는 그 내레이터가 살아있다고 느끼고 있지 못하는 것이 틀림없는 이러한 관습의 확인 없이 추론할 것이다. 예를 들어, 이렇게 짧은 분석은 이렇게 이례적인 이야기의 복잡한 구조, 약간의 이미지, 그리고 각각으로부터 발생하고 있는 결합과 함축의 탐험을 통하여 흔히 짧음을 중단시킨다.

회의론자들은 이렇게 질문할는지 모른다. “우리는 이러한 성격이 고통이라는 것을 어떻게 알게 되는가?” 또는 “그들은 고통을 표현할 수 없는 것이 틀림없는가?” 그리고 “만약 그들이 고통을 표현할 수 없다면, 우리는 그들이 고통 안에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그들이 고통이어야만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러한 몇 가지 질문에 대한 대답은 미니멀리스트의 테크닉의 타당성과 단편소설의 정의와 방법론에 대한 질문의 대답과 동일하다. 질문과 대답은 보르헤스(Jorge Luis Borges)의 단편소설 “끝없는 미로의 정원(The Garden of Forking Path)”에서 발견된다.

 

“의문투성이의 그의 대답은 체스인데, 방해를 받고 있는 그 단어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나는 잠시 “단어 체스”를 생각하고 대답했다.

“엄밀히…” 그러면서 앨버트(Albert)에게 말했다. “한 단어를 생략함으로써, 서투른 은유와 명백한 완곡법으로 재분류하는 것은 아마 그것을 강조하는 가장 어조가 강한 방법일 것이다.”

 

여기서, 어떤 무엇으로 불릴 때까지 의미가 어떤 침묵의 공간에서 소리칠 때(어떤 중요한 것이 하찮은 것으로 취급되는 단계에 의해 대화적으로 측정될 때, 또는 어떤 것이 명백히 보이는 부재 또는 그것이 명칭을 갖게 될 때까지 실제적으로는 아무것도 없는 언어로서의 사실에 의해 설득력 있게 나타날 때), 등장인물 앨버트(Albert)는 기능적이고 실재적인 삶 속의 이러한 실례에 귀착하고 있다. 이러한 의사소통의 자연적 현상은 미니멀리즘에서 생략의 기능을 정당화하고 단편소설의 시학을 반영한다.

이야기는 그들이 실제적으로 의미하거나 실제적으로 느끼는 것을 어쨌든 간신히 언급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정확한 단어의 전달 없이 사람들은 명백히 느끼면서 의사소통하는 여러 가지 방식으로 흔히 존재한다. 그러나 대신에, 즉석 어구, 출산처럼 예기된 반응, 풍자, 어떤 다른 방법으로 즉각 언급하는 완곡어법, 또는 에밀리 디킨슨(Emily Dickinson)의 언급에서, 사람들(folks)이 어떻게 “진실을 말하나 곧 빗대어 말하나”와 같은 말로 대답한다. 미니멀리스트의 소설에 거주하는 등장인물의 침묵과 무기력에 대한 하나의 해석은 사르트르(Jean-Paul Sartre)의 주장, “언급하는 것은 행동하는 것이며, 우리가 이름 짓고 있는 모든 것은 그 순결을 잃는 것이며,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의 일부분이 되는 것이다”라고 한 언급에서 발견될는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언급하지 않는(따라서 행동하지 않는) 것은 순결을 지키는 한 가지 방법이다.

햄릿(Hamlet)의 “쥐덫(Mousetrap)”에 비교해보면, 햄릿의 이야기 가운데 한 가지 익살, “오늘은 평온한 날이 될 것이다(Today Will be A Quiet Day)”는 이야기 밖의 과정, 그리고 이 경우에, 거리낌 없이 이야기하는 것의 아픔을 반영한다. 익살의 극본 속에서, 두 사람의 삶은 그들이 문제를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이든지, 만약 그들이 문제를 인식하였다고 하더라도 아무것도 언급할 수 없었기 때문이든지 둘 중의 어느 하나에 할애된다. 그러나 그 문제를 인식하고 그것을 큰 소리로 표명하는 개인은 사망한 것이다. 그는 지식(knowing)을 위해 사망한 것이 아니라 그의 이야기하기, 다른 것의 배려(attention)를 일깨우기 위해 사망한 것이다. 미니멀리스트의 소설과 약간의 우수한 현대 단편소설은 해석과 판독과 국가적 견지를 제공하지 않는다. 대신에, 이러한 종류의 이야기는 독자가 지식, 경험, 또는 의미의 전망을 추론할 수 있는 열쇠구멍으로서의 투시도법을 제공한다. 때때로 이러한 단편소설은 컬러를 식별하기 어렵고 오직 희미한 격상 또는 왜곡된 반전으로서의 사진의 음화(negative)처럼 더 잘 나타난다. 이러한 표현은 적어도 표면상으로는 흔히 분명하고 평평하고 정확하며 대화로 꽉 차 있으며, 거의 무감정이다. 그 최후의 효과를 존 바스(John Barth)는 하드에이지(hard-edge) 같은, 주도면밀한(fine-toothed), 불가해한 초현실주의(enigmatic super-realism), 그리고 그가 만들어낸 용어, “후기 알콜성의 블루칼라 미니멀리스트의 초긴장 리얼리즘(Post-Alcoholic Blue-Collar Minimalist Hyperrealism)”이라고 하는 이러한 종류의 단편소설의 변형이라고 부른다(Friday Book 256).

그 장면은 흔히 보다 가정적이다. 등장인물은 가족의 일원 또는 동거인이다. 조금도 행동으로 고찰되지 않는 속세이다. 각각의 내러티브는 보다 길게 함축된 이야기로부터 발췌된 요소이다. 이러한 이야기는 그들 한계의 중간에서 시작하고 중간에서 끝난다. 비유적으로 디자인된 통사구조에서, 그들은 전체 경험을 위하여 제유적(提喩的)으로 그리고 보편타당한 지식을 위하여 은유적으로 위치한다. 그저 때때로 강제하여 허락된 극적 사건일 뿐이다. 그 사건이 일어날 때, 그 효과는 조이스의 단편소설 속의 한 요소인, 작은 챈들러(Chandler)가 불빛 속에 서서 “안 돼!” 하고 소리칠 때, 다시 말해서 그의 경험의 무기력과 고립에 대한 상징적 몸짓과 많이 닮아있다. 그때, 불빛으로부터 조용히 물러서서 작은 챈들러는 그의 삶 그 자체로서의 보다 익숙한 어둠과 무기력에 자신의 몸을 맡긴다. 그래 냉혹하고 말구. 그러나 비록 미니멀리스트의 단편소설이 그 사건에 대해 냉혹한 분위기를 가지고 있을지라도, 그것은 흔히 예리하고 슬프고 줄잡아 말을 하고 병적인,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학적인 것과 엮여있는 것과 꼭 같다. 먼저 사람들과 사건의 관점은 무의미하거나 근시안적인 것으로 나타나지만, 좀 더 면밀히 음미하고 밀접하게 초점을 맞춰 분석해 보면, 그 이야기는 보편적 적용으로 확장된다. 교묘한 정밀도가 성공적일 때, 미니멀리스트의 소설 작가는 아무것도 언급하는 것이 없으며 차라리 그들은 보여준다. 흔히 흘긋 보여주기만 하면서도, 그 보여줌은 실제적으로는 모든 것을 폭로한다. 그러나 독자는 그 요점을 스스로 획득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러한 흘긋 바라봄은 “독자의 윤리적 존재 위에 그 자신을 영원히 새겨 넣고 세계를 사기꾼의 초점으로 끌어들인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그들 스스로 소성적(塑性的) 성격을 얻게 된다. 이러한 방식으로 경험의 어떤 무엇은 경험의 날것으로서 살아있는 실체로서의 어떤 무엇보다 부족하지 않음을 읽게(형성하게) 된다(Wolff ⅹⅳ, ⅻ).

미니멀리즘의 문학은 리얼리즘과 강한 우호관계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표면”과 “분리”의 개념은 포스트모던적 표현의 경험과 성격이 같기 때문에, 미니멀리즘의 문학은 또한 포스트모더니즘과 동족관계를 드러낸다. 따라서 미니멀리즘은 내재적으로 표상과 추상, 전통과 경험이 동시에 구동되고 분리되어 나타난다. 삶과 문학의 미니멀리스트적 변형은 1960년대 이래로 미국적인 잠재조건을 가지고 있었다. 더 나아가 미니멀리스트의 스타일은 단편소설의 고전적 기능에 뿌리가 잡혀있다. 비록 단일 성격이 소설의 다른 형식으로부터 단편소설을 구별하는 것으로 결정될 수 없을지라도, 그것은 장편소설과 구별되는 유일한 리듬 속에서 특별한 조화와 효과의 단순성과 “축소언어”를 사용함으로써, 압축되고, 순화되고, 간결하고, 의지하고, 분명한 것으로 매우 흔히 정의되는 것이 계속되고 있다. 단편소설은 단순히 다른 내러티브 형식에 의해 제공된 정도보다 더 다른 종류의 독서경험과 같은 독서경험을 제공하며, 훌륭한 미니멀리스트의 소설은 이러한 성격을 최대로 적용한다. 그러므로 문학비평으로부터 “미니멀리즘”이라고 하는 용어를 해산시키는 것은 잘못이다. 차라리 그 용어를 경멸적으로 적용하는 것으로부터 회피하는 것이 절실할 것이다. 한편, 많은 비평가들이, 에이 속상하게도, 그것이 펀(pun)이기 쉽다고 입증했던 것보다 더 절실하다. 미니멀리즘의 일반적인 성격과 함께 결합되어왔던 소설의 형태는 “추상예술의 가능성을 한계까지 밀어 올리는 인위적인 것의 중간이다(Kuspit 14).” 미니멀리즘과 단편소설은 표면 이미지에 초점을 맞추고 과묵하게 언급하는 단수형의 말에, 다시 말해서 박약에 공을 세우고 있는 그리고 가치를 위해 애쓰고 있는, 문학적 편견의 좋지 않은 성질에 종속된, 능력과 실질의 결핍으로 결합된, 문학 주체와 도구로서의 언어로부터 벗어나고 있는 단수형의 말에 특권을 부여한다. 그것에 대해 가장 우수한 항변은 미니멀리스트를 입증했던 프레더릭 바슬미의 교훈이다.

 

당신은 독자를 위하여, 적어도 그들의 상상력을 다루기 좋아하는 것을 위하여 공간을 남겨놓는 것을 생각하는 것이 더 좋다고 그들에게 말하라. 즉, 당신은 이러한 독자들이 그 속삭임을 듣도록, 속임수와 환영을 붙잡도록, 발자취를 헤아리도록, 압력을 느끼도록, 그리고 그 동안 산문이 드라마로 요술을 부리도록, 그리고 그 드라마가 그들의 마음을 흩뜨려놓도록 기대를 걸고 있다고 말하라(27).

 

시문학 통권 392호, 2004. 3. 1.
  조선문학 통권 176호, 2005. 12. 1
  조선문학 통권 177호, 2006. 1. 1.

  PEN 문학 통권 87호, 2008. 6. 10.)
 

 

미니멀리즘_C.W.할렛, 워런 모트/주근옥 역

주근옥의 미니멀리즘 시선집

 SUR LES ROUES/Gueune-Ok JOU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