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e texte est traduit avec la langue Coréenne. This text is translated with the Korean language.)


  

-레이몬드 카버(Raymond Carver), 에이미 헴펠(Amy Hempel), 그리고 메어리 로비슨(Mary Robison)


C. W. 할렛(Cynthia Whitney Hallett)1) / 주근옥 역


1. 후소시학(後素詩學, Parallel Poetics)2)

    (시문학 통권 392호, 2004. 3. 1)

 

문학 분석에서, 용어 "minimalism"은 대개 소설 쓰기의 양해된 어떤 스타일뿐만 아니라 특히 단편소설에 속하는 어떤 성격의 한 덩어리를 일컫는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미니멀리스트로 알려진 작가는, 특히 더 나아가 단편소설의 미니멀리스트로 알려진 작가는 후소(後素)의 미학, 즉 복잡한 방정식의 신중한 축소, 다시 말해서 복잡하게 뒤얽힌 것이 가장 단순한 항으로 표현될 때까지 이질적인 것을 인수분해 한다. 일반적으로 이러한 텍스트 안에서, 독자가 개인적 경험의 편린들, 즉 인간을 설복시키는 힘으로서의 진술되지 않은 표현으로 반영된 사회전체와 마주칠 때까지 이완과 혼란은 인간의 정신적 교감으로부터 제외된다. 흔히 미니멀리스트로 알려진 에이미 헴펠(Amy Hempel)은 이러한 기법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당신의 작품 안에 보고 되지 않은 많은 경험이 실제적으로 페이지 위에 나타난 것보다 더 중요하다. 흔히 이야기의 정서적 초점은 기술되지 않은, 또는 이야기 안에 귀착되어 있는, 다시 말해서 그 밑에 깔려있는 어떤 사건이다.”(Sapp 82~83). 요컨대, 작가는 독자가 적어도 생략되었지만 실제적으로는 주어져있는 것으로부터 추측하고 있는 어렴풋한 하나의 가능성을 갖도록 조심스러우면서도 충분하게 그 빈 공간의 틀을 어떻게 해서든지 짜 맞추지 않으면 안 된다. 언급된 모든 것 안에는 적어도 반영 또는 함축(비유적 어떤 형식)으로도 언급되지 못한 모든 것을 담아야 한다. 흔히 독자에게는 하찮은 일 또는 사건 같은 것으로서의 사실적인 보고로 여겨지는 것 같은 것으로 주어진다. 비록 최후의 변형이 외부의 실재성을 닮았을지라도, 그 표상적 방법은 단지 외면적으로 언급된 세부묘사만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보다 더 많은 이야기가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일반적으로 미니멀리즘 또는 단편소설의 장인들은, 때로는 부연하고, 때로는 사라지게 하고, 때로는 변형시킬 줄 아는 창조적 재능을 공유한다. 그들은 외견상으로는 긴장 없이 의식적으로 확실한 직조법을 성취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공유, 즉 기본적인 성격은 미니멀리스트적 스타일이라고 하는 것과 일반적으로 문학 분석가들로부터 칭찬보다 비난을 더 받고 있는 단편소설의 장르라고 하는 두 가지를 모두 획득하고 있다. 그리고 만약 비난이 아닐지라도, 그때 적어도 소설 쓰기와 장르 사이에 존재하는 진지한 고찰은 없을 것이다. 어느 쪽이든지 간에, 미니멀리즘과 단편소설은 종종 너무 낮게 평가된다. 흔히 이러한 저평가의 이유로 반대자들은 그들 예술의 핵심 구성요소가 짧음에 두고 있다. 그러나 그들이 예술적으로 성공하도록 만들고 있는 것은 그들 구조의 간결성이다.

많은 문학비평가들은 자진해서 그저 산문이 아닌(산문은 시만큼 교묘한 착상, 다시 말해서 은유와 같은 기법이 없는 것을 기본적인 전제로 삼기 때문에, 따라서 그 의미를 확장하기 위하여 겉으로만 반영된 사실성보다 경험된 그리고 진정한 반영으로서의 사실성만이 유익한 것처럼) 시의 짧음과 은유와 같은 기법이 없으면서도 발휘되는 교묘한 착상을 받아들이는 것에 호기심이 강하다. 그들은 소설 안의 지나치게 많은 기교를 참을 수 없는 것으로 여기는 듯하다. 반면에 그들은 시(짧고 간결한)를 소중하게 여기는 것 같다. 왜냐하면 이 비평가들은 환원된 복합체의 간결한 시와 겉으로 기교가 많은 단편소설(미니멀리즘의 기교를 시적 기교와 동일시하거나 단편소설을 일종의 “산문시”로 받아들이는 것을 우리에게 허락할 수 없을 것인) 사이에 신성한 장막이 존재하는 것으로 여기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즉, 마치 시 쓰기와 미니멀리스트의 단편소설의 생산이 그들 이외의 소설작법과 다르고 일종의 특별한 기교(art)인 것처럼. 미니멀리스트와 다르게 기교를 부리는 소설의 그 논법은 약간의 경계심으로부터 아슬아슬한 히스테리에 이르는 것과 일치하여, 이중노출의 복합적 소설류 산문의 조정적(措定的) 기본요소로서의 미니멀리즘과 대립하는 것으로 표면화되었다. 매디슨 벨(Madison Bell)은 레이몬드 카버(Raymond Carver)가 “이러한 모드(미니멀리스트)의 뛰어난 기교가이며, 아마 최고일 것이며, 그러나 약간 위험한 선구자일 것(67)”이라고 전망한다. 그리고 스벤 버커츠(Sven Birkerts)는 다음과 같이 경고한다. “만약 소설이 잔재주를 부리는 무리보다 더 오래 살아남으려고 한다면, 분열과 불안의 수동적인 반영보다 더 많은 무엇인가에 모험을 걸어야만 할 것이다(33).” 제롬 클린코비츠(Jerome Klinkowitz)는 미니멀리스트의 소설은 “피상적인 삶(상상력의 인간적 견지의 판단적 사용을 강요하는 공포 때문에)의 가장 평범한 관계를 분석해내는 편향의 모든 미학적 혁신을 유보시킨다(364).”고 확신한다. 그리고 1989년, 잘 알려진 5명의 작가와 비평가들은 문학적 항적(航跡)을 남겨놓았는데, 그것은 다음과 같이, “원탁토론(a round-table discussion),” 그리고 “미니멀리즘에 대한 악담에 오물을 던지며(Throwing dirt on the Grave of Minimalism-Koch et al-)”라고 하는 타이틀 아래 그들의 집단적인 찬사를 피로했다.

종종 그러한 소설가들에게 “미니멀리스트”라고 라벨을 붙여준 그 비평가들에 대한 부정적인 태도가 있는 것은, 성급하게 그 용어를 지워버리면서 그리고 보다 더 조정적인 목소리를 내는 것을 암시하면서, 방어적으로 반응하는 많은 이들 작가들에게 그 원인이 있다. 일단 레이몬드 카버는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어떤 사람은 나를 미니멀리스트 작가라고 불렀다. 그러나 나는 싫어한다. 거기에는 미니멀리스트에 대해 내가 싫어하는 변형과 제작에 관한 미미한 낌새라고 할 수 있는 어떤 것이 있다(Simpson 210).” 그럼에도 불구하고 레이몬드 카버는 미니멀리즘을 위한 전형적인 지시대상이 되었다. 미니멀리스트라고 불리고 있는 에이미 헴펠의 대답 또한 그와 유사하다. “내가 실제로 불공평하다고 느꼈던 바로 그것으로서의 그들 비평가들의 비평은(T, Throwing…미니멀리즘에 대한 악담에 오물을 던지며) 미니멀리즘에 관한 매우 지쳐버린 평론을 위한 경우로 사용되었던, 내 저서에 대해 썼던, 보고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나는 미니멀리스트라고 하는 용어를 더 좋아한다(Sapp 85).” 그녀가 그렇게 언급하였을지라도, 그러나 에이미 헴펠의 용어가 내는 목소리보다 더 정밀한 것은 없을 것이며, 그것은 미니멀리스트가 단순명세를 삭제함 없이 원형이미지보다 더 작은 영역에서의 변형을 생산하기 때문에 부정확했을 것이다. 그렇다고는 하나 미니멀리스트는 매우 조심스럽게 응축된 공간 안에 담겨진 부분적 변형(상상)을 생산한다. 그 변형이라고 하는 것은 생략되었던, 밑에 깔려있던 것이 전체 그림에 정확하게 폭로된 부분이라는 것을 나타내고 있음에 틀림이 없다. 그가 “부정이라고 하는 것에 관하여(On Being Wrong: Convicted Minimalist Spills Bean)”라고 제목을 붙였던 그 안의 라벨 "m, minimalist"에 대해 호의적으로 대답한다면, 프레더릭 바슬미(Frederick Barthelme)는 미니멀리스트를 발아시키는 것은 분명한 문장 속의 이야기 쓰기에 의해 그들 과거의 소설의 어려움에 응답하는 것이었으며, 단조롭게 보일는지 모르지만, 그때 기준이념으로서의 명백한 문장보다 더 힘이 강력하고 보다 광범위할는지도 모르는 일이었으며, 그 안의 “평범한 경험”은 “큰 랑가주와 만나는 것(25)”보다 더 중요했다고 확신했다.

이러한 비평가들은 미니멀리스트의 작품이 작가, 스타일, 그리고 이야기를 칭찬하는 것보다 더 잘 변호하는데 자주 공헌하고 있는 분석과 마찬가지로 독해에도 보답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한다. 소위 미니멀리즘이라고 하는 용어에 어떤 제한이 있을지라도, 모욕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을지도 모르는 그것을 완화하는 시도일지 모른다. 문학비평가와 소설 작가에게 당면한 문제는 문학구조보다 오히려 문화의 조정적 함축 안에 있는 것 같다. 어떤 사람을 위한 어떤 문화는 보다 적거나 보다 짧은(또는 작은) 것이 하위계열에 있게 됨으로써 결정된다. 많은 비평가들이 사회적 불명예로부터 문학 스타일의 특색을 구별해내기가 어렵다는 것을 발견했다는 것은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다. 비슷한 이유로, 현대 단편소설은 흔히 19세기와 20세기에 발전되는 동안 부정적(은유와 같이 랑그 차원이 아닌 개별적 의미에 입각한) 비평과 문학적 식별에 종속되어왔다.

정의를 내릴 수 없는 문학 스타일로서의 미니멀리즘은 “1980년대(May The Short Story 97) 미국문학에 불꽃이 일어났던 단편소설의 르네상스”로 보이는 현상의 일부로 출현되었던 것 같다. 이러한 소생 이전에, 1960년대와 1970년대에 미국문학의 미니멀리즘은 반리얼리즘, 자의식적 경험, 패러디, 그리고 때로는 글쓰기의 게임 지향류와 동일시된 포스트모더니스트의 미학에 의해 지배를 받았다. 1980년대 초반의 환상적(fabulative) 그리고 메타픽션적(metafictional) 전략은 차차로 없어졌다. 벤저민 데모트(Benjamin DeMott)는, “이러한 소설의 어조와 태도의 가장 명백한 뿌리는 삶의 경험 안에, 다시 말해서 충격, 죄, 증오, 국가에 대한 강한 반감 안에 그리고 1960년대 후반과 1970년대 초반의 사려 깊은 젊은이들을 억제했던 오랫동안의 명백한 정서적 스트레스 안에 들어있다(27)”고 썼다. 소설적 표현의 단순성과 직접성에 대한 향수가 나타났던 것이다. “개성과 감수성에 관한, 개인의 심리학적 관망의 내적 역동성에 관한 현대 작가의 관심증가”라고 한 언급에 대하여, 고든 위버(Gordon Weaver)는, “이것은 …우리 문화의 지배적인 감수성으로서 윤리적 절대주의로부터 윤리적 상대주의로 이동하는 역사적 변동과 아마 관계되어 이동하는 것일 것이다(126)”라고 본다. 이렇게 새로운 이치가 발생하는 것은 단편소설, 특히 전통적, 모더니스트, “구성이 잘 된,” 그리고 포스트모더니스트의 작품 안에서 발견된 이러한 것들로부터 급진적으로 출발된 이야기의 인기를 상승시켰다. 이미 확립된 그러나 오랫동안 무시되거나 종종 그레이스 팰리(Grace Paley)와 신디아 오지크(Cynthia Ozick)와 같이 빠뜨리고 바라보게 된 작가와 마찬가지로 안 비티(Ann Beattie), 보비 안 메이슨(Bobbie Ann Mason), 프레더릭 바슬미, 레이몬드 카버, 메어리 로비슨(Mary Robison), 그리고 에이미 헴펠은 독자와 비평가와 같은 이들의 주의를 끌어당기기 시작했다. 그들의 작품은 신 리얼리즘 또는 네오리얼리즘, 심지어 “더러운 리얼리즘,” 또는 단순히 최근 미국적 글쓰기의 미니멀리스트적 성향을 구현하는 것이라고 언급했다. 미니멀리즘의 발생과 동시에 일어난 단편소설의 인기가 상승했기 때문에, 미니멀리스트의 산문이 단편소설의 르네상스에 빚을 지고 있는 것처럼 단편소설의 재생은 그 추진력에 있어서 미니멀리스트의 산문에 많은 빚을 지고 있다는 것에 의심의 여지가 거의 없다. 이러한 부활은 단편소설을 흥미롭게 만들고, 또한 세계의 이미지와 마찬가지로 그 한계를 채우면서도 그 통제, 다시 말해서 특히 하찮은 행위와 개략적으로 의사소통을 하는 언어활동의 무능력을 초월하여, 미니멀리스트의 일상적 표현, 속세, 그리고 평범함 속에 독자의 조정적 응답을 반영한다.

소설의 스타일 또는 단편소설의 형태 어느 것이든지 간에, 미니멀리스트의 산문은 에두름과 근사 잠재의식적으로 줄잡아 말함과 느릿느릿 힘겹게 거래한다. 이러한 역설은 현혹적이며 단순한 비유적 언어에 의해 성취된 갈등적 결과를 생산한다. 비유적 암시의 영역 안의 모든 사건과 행동은 문학적 세계 안에 적용된 상대성의 동일법칙에 의해 지배를 받으며, 어떤 단어와 이미지는 다양한 다시 말해서 사회적, 심리학적, 역사적 결합을 산출시키는 함축을 담고 있다. 이러한 함축은 의미를 촉진시키고 확장한다. 즉, 환유적인 것은 은유적 시니피앙으로 번역된다. 이러한 변형의 삽화와 해석은 구로프(Dmitri Gurov)의 내레이터 보고 안에 있는 체호프(Anton Chekhov)의 “개를 데리고 다니는 부인(Lady with Dog)”에서 다음과 같은 시퀀스가 발견된다.

 

…그에게 흥미롭고 중요한 모든 것, 그에게 본질적이었던 모든 것, 그의 인생의 핵심을 구성하고 있던 모든 것은 다른 사람들에는 숨겨지고 있었다. 반면에 모든 것은 거짓이었으며, 그가 진실을 덮어서 숨겼던 그 껍질… 모든 것은 열려져버렸다.

 

여기서 추상적 정서상태의 기술은 등장인물 구로프를 환유적으로 묘사하고 있으며, 그 자신의 비유적 언어의 해석을 담고 있다. 먼저 은유적 언어의 사용은 얇고 깨지기 쉬운 단층(껍질)의 이미지와 동시에 오로지 구로프만이 알고 있는, 억제하고 가면으로 변장하며 소용돌이치고 있는 정서를 창조한다. 생명이 부여된 정서를 담고 있는 그 얇은 껍질은 계란껍질의 개념과 상관된다. 만약 그 용기가 계란껍질처럼 깨지기 쉽다고 한다면, 그때 그것은 쉽게 관통되며 그 내용은 접근하기가 쉽다. 그 껍질이 무언가 숨기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진짜얼굴을 숨기고 있는 가면으로 생각할는지 모른다. 즉, 이러한 변장술로 그 겉껍질/가면은 교묘하게 솜씨를 부린다. 그 결합은 참으로 다양하며 독자를 유도하고 있는 이러한 후소 이미지가 여기서 거두고 있는 대부분의 다른 어떤 성과는 표면 이미지와 동등하게 타당하다. 예를 들어, 만약 구로프가 인위적 작용체계 아래 그의 진짜 감정을 숨기고 있다고 한다면 우리는 그것을 추론할 수 있을 것이며, 그때 그것은 다른 사람들이 지나치게 추론하는 것이 가능할 것이다. 아마 모든 사람들의 지나친 추론이 가능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결합체계는 미니멀리즘 운용의 열쇠이다. 그리고 그 결합은 단편소설 기능의 본질이다. 그때 미니멀리즘은 텍스트의 최소량(총계)보다 더 작으며, 단편소설은 소설이 짧은 이야기보다도 더 짧다. 그리고 미니멀리스트의 단편소설의 최종 측정은 짧은 단편소설보다 더 짧다.

먼저 독서할 때, 많은 미니멀리스트의 이야기는 내부적으로 분리된, 다시 말해서 첫줄과 마찬가지로 발단부터 종말까지 다른 것들과 분리된 문장을 볼 수 있다. 그러나 그 이야기가 정독될 때, 빗나간 언급과 어렴풋한 디자인은 풍부한 수사구조(상징적 구조 안에서 의미의 양식을 폭로하고 있는)를 결합한다. 이러한 단편소설은 오직 이야기의 껍질인 것이며, 압축된 의미의 깨지기 쉬운 용기이며, 줄여 말하기의 환유적 구조인 것이다. 이러한 형태는 메어리 로비슨의 소설 “당신의 것들(Yours)” 안에서 명백해지는데, 그 안에서 독자는 할로윈(Holloween)을 위해 남편과 아내가 호박을 새기며 조각하고 있는 것을 본다. 그의 조각된 얼굴은 정성을 들여 능숙하게 만들어졌고, 반면에 그녀의 얼굴은 소박하고 서툴기까지 하다. 이렇게 하찮고 뒤범벅이 된 외형은 얼굴의 매섭고 놀라운 변형과 죽음(그리고 심층의, 좀 더 으스스하기까지 한 묵시의 평범한 삶)의 진상이다. 또 다른 이야기 안에서 언어와 사건은 하찮게 보이는 것 같지만, 평범한 단계는 역으로 중요한 단계를 강력하게 암시한다. 어떤 첫 번째 내레이터의 수다스러운 어조는 두 이방인 사이의 인위적인 우정을 암시하는데, 이 경우에 그들은 내레이터와 독자이다. 또한 그것은 마치 어떤 사람이 잘못 된 것이 아무 것도 없는 것처럼 행동할 때 흔히 나타나는 고도로 스타일화 된 부정적 행동을 모방하는데, 사실, 어떤 것은 아주 지독하게 잘못 된 것이다. 이러한 방정식은 에이미 헴펠의 소설 “알 졸슨(Al Jolson)이 묻힌 묘지에서(in the Cemetery Where Al Jolson is Buried)”의 주제와 구조 안에 있다. 어떤 사람이 죽고 있는데, 그러나 병실 안의 배경 또는 병, 특히 피할 수 없는 죽음에 대하여 들을 수 있도록 언급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정말로 일어나고 있는 어떤 중요한 것을 추론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며, 모든 대화는 마치 “비 올 때 결코 젖지 않으면서도 모두 떨어져 없어진 하루살이처럼” 그리고 “미국에서 전에 빙 크로스비(Bing Crosby)가 불렀던 녹음테이프를 아무도 가지고 있지 않은 것처럼” 하찮은 것에 지시된다. 게다가, 죽음에 관한 완곡어법은 삶의 함축을 그로테스크하게 만든다. 즉, “아침에 그녀는 알 졸슨(Al Jolson)이 묻힌 묘지에 운반되었으며, 나는 ‘사라짐의 공포’를 갖게 되었다.” 내레이터는 말리부(Malibu) 여행과 같은, 팔이 잘려 죽은 한 남자의 모습 같은, 어미 침팬지가 죽은 새끼를 가리키는 것 같은, 비약하는 그녀의 꿈에 관한 다른 이야기를 한다. 먼저 이러한 이야기 속의 이야기는 꼭 소음과 함께 침묵으로 채워져 있는 방식으로 되어있는 것 같다. 그러나 곧 그들은 내레이터의 진짜 감정을 숨기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들은 내레이터의 죽음에 대한 공포와 그녀의 친구관계의 실패로 인한 죄의식과 죽음의 괴로운 실재에 있어서 언어의 파괴에 대한 환유적 암시이며, 어미 원숭이가 그녀의 죽은 새끼를 가리킬 때처럼, 다음과 같이 단언한다. “아가, 이리 온. 아가, 이리 온.” 내레이터의 전체 이야기는 슬픔의 언어이다.

미니멀리즘과 단편소설에 생기를 불어넣고 있는 예술과 교묘한 솜씨의 씨앗은 포우(Edgar Allen Poe), 체호프, 이스(James Joyce), 사뮈엘 베케트(Samuel Beckett), 그리고 헤밍웨이(Ernest Hemingway)와 같은 또 다른 다양한 작가들로부터 추적될 수 있다. 그들의 의식적 코드인 생략의 모든 것은 그들이 이해했던 것, 다시 말해서 포우의 경우 관념의 조화와 효과의 단일성, 체호프의 경우 그가 단편소설의 결말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그리고 작품 전체의 인상을 거기에 교묘하게 농축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는 격언, 조이스의 경우 외관상 정적인 에피소드와 실재성의 “편린”의 편애 속에서 고도로 구성된 이야기를 포기하고 있는 플롯의 전통적인 관념에 최소로 의지함, 사뮈엘 베케트의 경우 전통적 장르를 압축하고 증류(순화)하는 그의 독특한 세계관을 나타내는 효과(Hutchings 86), 그리고 헤밍웨이의 경우 여기서 기왕에 토론했던 용어로서 그가 “빙산의 일각(tip of iceberg)”의 효과라고 불렀던, 명확한 명세의 외관상 단순한 구조에 의해 갈등적 정서 상태와 의사소통하는 방식보다 더 많이 느끼는 독자층을 만들도록 설계되었다. 이와 다르게, 또는 헤밍웨이와 단순히 다르게, 그의 등장인물은 종종 행동의 어떤 형태와 의사소통하는 그들의 무능력에 응답하며, 현대의(contemporary) 미니멀리스트 작가들은 조이스의 “더블린사람들(Dubliners)” 안에서 이들을 더 좋아하는 등장인물의 성격을 창조하는데, 종종 그들의 애매한, 그러나 항상은 아닌, 마비상태의 무기력을 유도해낸다. 이러한 행동 또는 동작의 무기력은 또한 사뮈엘 베케트에 의해 쓰인 많은 작품 속의 사람들에게서 이러한 성격의 이미지에서 환기된다. 대부분, 미니멀리스트의 등장인물은 실생활보다 영웅적이거나 위대하지 않은 보통사람, 흔히 행동만 하고 아무것도 말하는 것이 없는 것이 양자택일보다 더 쉬운 “사실 그대로의 세계”에 존재하여 나타나는 바로 그 사람들이다. 침묵과 무기력 속에서 그들은 “텍스트 안의 헤밍웨이의 영웅(hyper-Hemingway-heros),” 좀 모자란 영웅적은 더욱 아닌(헤밍웨이의 영웅은 영웅적이 아니다), 비영웅적은 더더욱 아닌 것으로서 나타난다. 미니멀리스트의 단편소설에 있어서. 제재와 글쓰기 스타일은 종종 뛰어난 효과를 결합한다. 무디고 완벽하지 못한 산문은 등장인물의 공허한 삶을 반영한다. 내레이터에 의해 이루어지는 논설적 비평의 결핍과 주관적 기술은 광범위한 독자의 참여를 요구한다. 이러한 문학적 성격은 그 진전이 미국산문의 분식뿐만 아니라 이제 유전자공학적으로, 그리고 일반적으로 단편소설과 결합된 어떤 것에 의해 문학 속에서 미학적으로 특별한 긴장을 반영하는 문학형태를 산출하여 결합한다.

산문형식의 소설 장르로서, 단편소설은 특별히 복잡한, 극히 다양한, 그리고 개성적으로 압축된 내러티브적 매개물이다. 짧음에 부가해서, 단편소설의 이러한 특징을 나는 단편소설과 비유적 언어의 인위적인 사용, 무관계의 가장 효과적인 생략, 특히 감성적인 언어, 그리고 과장된 리얼리즘으로부터 결과한 검출 가능하다고 호칭하는 것을 포함하는 미니멀리즘 사이의 유사관계를 확립하는데 결정적인 것으로 생각한다. 많은 단편소설 분석가들이 이러한 개인적 기본요소에 대해 토론했다. “단편소설과의 화해(Coming to Terms with the Short Story)”라고 하는 비평문에서, 수산 로하퍼(Susan Lohafer)는 시의 “수축된 언어”와 소설의 “연장된 언어”의 개념으로부터 단편소설의 언어기능을 분리하는 “축약언어(contracted language)”의 개념을 충족시킨다(34). 그녀의 전략은 단편소설의 “축약언어”에서 이해구조로서의 통사법을 구별한다(34). “현대 단편소설의 리얼리티”라고 하는 항목에서, 찰스 메이(Charles May)는 단편소설과 뚜렷이 구별되는 문학적 테크닉의 윤곽을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즉, “사물을 도외시하며 의미를 폭로하는 수사적 방법, 그리고 환유적 의미에 의해 은유를, 다시 말해서 외재 리얼리티를 기술함으로써 내재 리얼리티를 표현하려고 하는 그리고 종종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을 언급하려고 할 때의 인간적 딜레마를 주제화하는 의미를 창조하는 언어 스타일…(369).” 존 가드너(John Gardner)는 “소설의 기교”에서, “현재… 지배물체에 관한 테크닉의 변화효과로부터 느끼는 매력은” 단편소설 작가들이 “카메라의 무관심과 함께 이미지를 선택하는 효과와 그리고 감성적 효과와 함께 언어를 억압하고 조심스럽게 무효화하는 것이 어디서나 가능하게” 만드는 것을 재빠르게 했다는 것을 관측한다(135). 감정을 나타내는 것에 부가해서 이러한 모든 특성, 다시 말해서 미니멀리즘과 단편소설의 교배잡종으로서의 특성은 종종 “이야기”의 결핍으로 성격이 만들어진다.

수산 로하퍼는 단편소설을 다음 문장으로, 즉 주어와 술어(행동)가 담겨있는 그리고 종속 없이 완벽한 상상력이 되게 하는 언어체계의 문법적 구성단위이라고 비유한다. 비유적 언어 안에서 쇠처럼 두들겨 만드는 가단성(可鍛性)의 논증으로 납득시킨 후에(그녀의 모델은 Nadine Gordimer의 “Rhodesia에서 온 기차”에서 추출한 문장이다), 수산 로하퍼는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린다. 즉, “따라서 그 문장은 곧 삶을 단지 반영만하는 거울로서보다 미학적인 대상과 개념적으로 디자인된 것으로 파악된다. 그 디자인은 무엇이 중요하고 진실한가 하는 작가의 지각과 함께 많은 점에서 일치(즉, 은유가 될 것이다)할는지도 모른다(42).” 그러나 그것은 이야기의 종결이 아니다. 왜냐하면 최후의 의미(종결)는 아직 텍스트의 외부에 그리고 작가의 의도를 초월하여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독자와 함께 존재한다. 킨리(Keenly)는 이 우유부단함을 알고 있는데, 어떤 소설가는 내러티브 안에서 종결(의미)을 시도하지 못한다. 그러나 오히려 그러한 방법 안에 디자인 된 이야기의 기본요소는 그들 개인적 삶의 문맥 안에서 독자들을 위해 나타나야만 한다. “무엇이 중요하고 진실한가”의 이러한 의미를 향해 독자를 유도시키기 위하여, 작가는 독자가 인식하고 관계할 수 있는 의미의 강력한 양식을 창조하여야만 한다. 이러한 구조는 미니멀리스트 소설의 기초기능이다. 흔히 미니멀리스트 소설의 작가는 보류되거나 개시된 종결의 목적을 위하여 “표준” 이야기의 전형적․대립적(진화) 결단구조를 비켜, 페이지 위에서만 끝나고 마는 전통적 관념의 종결의미를 회피하거나 거절한다. 그러한 종결은 먼저 애매하게 나타나지만, 결국은 독자의 경험 안에서 의미와 결단을 발견한다. 변경의 무제한은 일반적으로 미니멀리스트 작가들의 반일차원성의 일부이어야만 한다. 그들은 일차원성이 그들을 위해 인간존재의 복잡성과 아이러니, “실재성”의 무작위와 불확정을 충분히 고찰할 수 없기 때문에 일차원적 플롯을 거절한다. 그 이야기는 그 자신의 삶, 그리고 부여받은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는 그 삶과 마찬가지로 개시(開示)된 종말로서 나타난다. “유사한 삶”으로 디자인된 복제물로서의 사람들과 사건은, 세계와 평범한 것의 확대된 이미지들은 미니멀리스트의 이야기가 “내재사실주의(hyperrealistic)”란 라벨이 붙게 된 첫 번째의 이유이다. 미니멀리스트의 테크닉은 “자의적이고 독단적인 것이 실재인 것처럼 보이도록 만들고 있는 기묘한 효과를 가지고 있거나, 또는 아마 독단적이고 자의적인 것이 어떻게 실재적인가 폭로하고 있는 기묘한 효과를 가지고 있을 것이다(Porter 81).”

미니멀리스트의 단편소설은 포우에 의해 정의되고, 체호프에 의해 성격이 만들어지고, 마침내 레이몬드 카버의 작품 속에 나타나 충분히 정리되었으며 헤밍웨이에 의해 정제됨으로써 완성된 단편소설의 디자인 중의 일부이다. 이러한 미니멀리즘의 문학적 계보는 오늘날 평범한 존재 속에서 차단되고 분리된 의미, 즉 스타일의 레벨과 형식적 구조상에 반영된 활기가 있지만 유보된 의미를 극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그 이야기를 작가들 속에서 경험케 한다. 총체적인 미니멀리스트의 스타일은 꾸밈이 없고, 절약하고, 내용이 빈약하고, 긴장되어 있다. 그것은 수사적 장식법으로부터 자유로운 경향이 있으며 때로는 표면상으로 구어체언어와 관용어의 사용을 지나치게 고집한다. 확실히, 작가 스타일의 의식적인 결핍과 의욕부진 속 미니멀리스트의 모드는 전통사회와 같은 어떤 것으로부터 그들이 차단된 등장인물의 삶의 정신적 결핍을 모방한다(Gorra 155).

어떤 이야기 속에서 행동은 총체적으로 이유가 없는 것 같고 모든 감정은 표면의 냉정한 내러티브의 목소리와 무변조의 대화 아래 지워진 것 같다. 따라서 미니멀리스트의 산문은 표면상으로는 파편으로 조각난 실행 속 “이야기 없는 이야기(storyless story)”의 환각일 뿐만 아니라, 또한 이야기에 대해 보다 더 관습적·작가적 어떤 내부적인 것으로부터 또 다른 내러티브의 목소리를 분명히 내고 있는 극히 이례적인 힘 속의 “작가 없는 이야기(authorless story)”를 창조한다. 그 효과는 마치 독자가 정정 당당하게 앞에서 이야기를 하는 것(경청하는 것)보다 우연히 엿듣거나 대화와 사건에 대해 일부러 도청하는 것처럼 아무런 소리가 없는 것이다. 존 가드너(John Gardner)에 의하면, 이러한 부류의 소설 속에서 이루어지는 “예술가의 개성의 은폐는 실질적으로 전체화될 수 있으며… 개인적 스타일의 포기는 오히려 매우 완벽하게 만드는데… 우리는 또 다른 것으로서의 어떤 작가의 작품에 대해 언급할 수 없다. 그러나 스타일의 바로 그 은폐가 하나의 미학적 선택으로서의, 감정표현으로서의 스타일이다(Art of Fiction 136).” 일반적으로, 미니멀리스트 작가가 하고 있는 주제의 분해와 차단의 일치하는 관습은 독단적이며 개시된 종말, 표면의 세부항목 간의 상호작용, 내러티브적 생략, 그리고 일차원적 플롯과 같은 非콘티누우(continuo) 를 더선호하는 것에 의해 반영된다.

일반적으로, 미니멀리스트 단편소설의 작가는 실제적으로 시니피에와 인간조건과 능력으로서의 비유적 양식인, 단순 사건, 단지 일어나기 쉬운, “여기에-무언가 일어나고 있지만-아무것도 없는(nothing-is-happening-here)” 이야기가 되어 나타나는 것으로 제공되는 비유적인 말을 교묘히 다룬다. 이러한 테크닉과 함께 그들은 개별적인 것과 보편적인 것, 부분과 전체, 사소한 것과 의미 있는 것 사이의 수학적 관계와 비율을 창조한다. 그 단순사건은 인간조건(오로지 인간을 의미하는 것의 일부분)에 공통적인 죽음과 같은 보편적 인간 환경을 반영한다. 게다가, 생략된 많은 것은 그 부재에 의해 의미가 만들어진다. 이야기 속에서 이미지와 의미의 확장을 위한 매개물로서의 이러한 시적 수사어구의 의식적 사용은 이러한 서정적 단편소설을 만드는 것이다. 이야기의 이러한 방법은 서정적인 것과 사실적인 것, 현대 단편소설의 기본적인 성격의 체호프적인 결합을 반영한다(“현대 단편소설의 실재성일는지 모른다.” 371). 이러한 역동적이고 은유적인 의미는 이야기의 깨지기 쉬운 껍질의 집이 만들어진다. 잘 알려진 문학비평가 월튼 리츠(A. Walton Litz)는 미국에서, 일찍이 소설작가는 “미국적 삶의 ‘박약,’ 즉, 부의 결핍과 복잡한 사회구조에 의해 만들어진 일부분, 즉 그들의 강렬하지만 격리된 경험을 위한 자연적 형식처럼 보이는 짧은 시적 이야기 속에서 단편소설을 유도해냈다(4).”고 시사했다. 만약 리츠의 언급이 정확하다면, 오늘날 이러한 ‘박약’은 현대의 미국적 삶, 즉 어떤 무능력 또는 감정의 결핍 그리고 말로 나타내거나 의사소통하거나, 또 다른 것과 연결하는데서 볼 수 있는 무기력에 의해 성격이 만들어진 사회적 환경의 특별한 전망을 나타낸다. 유진 커렌트-가르시아(Eugene Current-García)는 그것을 “소외와 자기충족을 위한 개인적 탐색의 문제, 그리고 그들 노력의 결과로 본다…(499).” 이러한 노력의 현대적 묘사는 조이스의 감정적 그리고 언어적, 어떤 때는 심지어 육체적 무기력, 즉 “더블린사람들(Dubliners)”에서의 무기력, 그리고 좀더 최근으로는 레이몬드 카버의 “파란색”에서 발견된 무기력을 회상시킨다. 억제되고 압착된 감정, 즉 깨지기 쉽고, 현혹되기 쉬우면서 말이 없는 표면에 울려 퍼지는 감정은 미니멀리즘 기능의 열쇠이다.

네오리얼리스트로서의 미니멀리스트 작가는 세계가 규칙과 진리와 법률의 어떤 안정된 집합에 의해 지배를 받는다기보다 오히려 임의적이고 불확정적이라는 확신을 포스트모더니스트들과 함께 공유하는 것 같다. 그들은 언어에 대하여 동일한 확신을 많이 갖고 바라본다. 미니멀리스트 작가들에 의해 승인된 전형적인 모더니즘의 영향력은 그들의 스타일과 주제 면에서 명백하다. 이러한 상호관통을 빈번하게 동반하고 있는 고통을 환기시키면서 등장인물의 삶의 핵심과 함축된 인간조건의 “핵심을(to the quick)” 바짝 잘라낸다. 미니멀리스트 작가들이 화해 또는 휴식이 제공된 세계를 최후로 탐색하면서 인간의 성격을 나타내는 것은 매우 드물다. 그들의 많은 등장인물들은 심리적 또는 감정적 고통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비록 있다 하더라도, 화해는 약간 발견할 수 있을 뿐이며, 그 고통으로부터의 휴식이나 은신처를 발견하는 것 또한 약간일 뿐이다. 대신에, 그들은 이러한 심리적/감정적 고통이 단순하게 마치 그들 삶 속의 상업용 배경음악(Muzak)인 것처럼, 일상적인 상황의 사건이나 사건이 아닌 것에 연결도 관계도 없는 엘리베이터 음악인 것처럼, 그러나 오히려 다른 소음 부류(아마 사고 또는 각성일 것이다) 이외의 강한 소리에 압도되어 들리지 않게 되는데 또는 지속저음에 기여하거나, 그리고 그렇게 함으로써, 어떤 공포에 대한 사적 감수성을 감춘다. 이렇게 모든 종류의 고통에 나타난 감수성의 감소는 20세기 후반의 많은 소설 속에 극적으로 표현됨으로써 인간조건의 중심이념이 되었으며, 그리고 이러한 “무감각”에 선천적으로 응답하는 단축표현은 응축된 구조와 미니멀리스트 단편소설의 분리된 내러티브적 어조 안에 특별하게 반영되었다.

에이미 헴펠의 아주 짧은 소설 “욕조 속에서(In a Tub)는 주체와 환유구조로 되어있는 인간조건의 우수한 실례이다. 육체에서 이탈된 목소리에 의해 언급된 겨우 백 단어 넘는 그 소설은 세 곳의 행위현장에서 뒤죽박죽으로 만들어지는데, 그것은 안정성과 연결 장치에 대한 내레이터 자신의 결핍이 반영된 디자인이다. 오직 어떤 것의 뒤에서만 시작하는 그 이야기는 이미 발생하였지만 뒤죽박죽이다. “내 사랑―나는 그것을 관두기로 했다. 그래서 나는 차를 타고 하느님을 향해 달려갔다.” 그리고 “술기운이 올라 앉아 있었고 술잔을 더럽히며, 또 귀를 기울였다.” 이것만이 그녀의 사랑이라고 말한다. 왜? 콩콩 심장이 뛰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그녀의 손톱에 관해 우연히 알게 되었는데, “그 소동은 마음 깊은 곳에서 잔물결로 나타날 것이다(상처로 생각하지 마라? 왜냐하면 그것은 그녀가 그녀의 손가락을 박살낸 것처럼 소리가 나니까).” ―오직 이러한 이미지들만이 어떤 무서움에 도달한 독자 앞에 발생하여야만 했던 어떤 사실을 향해 몸짓을 한다. 집으로 돌아와, 그 내레이터는 “콘크리트로 만들어진 물통(a concret mixing Tub)” 안에서 호수 위로 떠밀려 배회하는 아이처럼 그녀 자신에게 그 이야기를 한다. 그녀가 “훔친 노와 어망의 찌를 모래밭에서 떠밀어 내보내며, 한동안 아무것도 들을 수 없었을 것이다.” ―아무것도 들을 수 없는 것 그러나 그것은 그녀의 심장고동일는지도 모른다. 나중에 그 내레이터는 이러한 이야기를 암송한다. “여기 무언가 일어나고 있다. 너는 자신을 욕조(물통) 속으로 서서히 밀어 넣는다. 너는 서서히 편안해진다. 너는 드러누워 잔물결이 사라질 때까지 기다린다. 그때 너는 심호흡을 하고, 머리를 수그리고 심장의 유쾌한 고동소리를 엿듣는다.” ―그녀의 표현어조는 관습적 의미를 전한다. 즉, 그녀는 이 이야기를 전에 했으며 다시 그것을 할 것이다. 잠시 동안 어떤 것이 숨김없이 폭로된다면, 이러한 이야기는 길이와 폭이 단축될 것이다. 내레이터의 공포와 더 중요한 것을 의미하는 환유적 이미지를 삽입하고 있는데, 그녀는 물의 상징과 용기의 원형이 탄생/삶으로서의 물, 재생/세례로서의 원본이라고 하는 은유가 된 그녀의 조건(살아서 충만한 존재)을 확인할 필요가 있다. 조금 면밀히 조사해보면, 그 상징은 다음과 같은 재확인에 의지한다. “나는 아직 살아있는가?” ―즉, 삶과 삶의 흔적을 위해 반복된 탐색. 만약 내레이터가 살아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그녀의 심장고동소리를 듣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면, 그때 독자는 그 내레이터가 살아있다고 느끼고 있지 못하는 것이 틀림없는 이러한 관습의 확인 없이 추론할 것이다. 예를 들어, 이렇게 짧은 분석은 이렇게 이례적인 이야기의 복잡한 구조, 약간의 이미지, 그리고 각각으로부터 발생하고 있는 결합과 함축의 탐험을 통하여 흔히 짧음을 중단시킨다.

회의론자들은 이렇게 질문할는지 모른다. “우리는 이러한 성격이 고통이라는 것을 어떻게 알게 되는가?” 또는 “그들은 고통을 표현할 수 없는 것이 틀림없는가?” 그리고 “만약 그들이 고통을 표현할 수 없다면, 우리는 그들이 고통 안에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그들이 고통이어야만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러한 몇 가지 질문에 대한 대답은 미니멀리스트의 테크닉의 타당성과 단편소설의 정의와 방법론에 대한 질문의 대답과 동일하다. 질문과 대답은 보르헤스(Jorge Luis Borges)의 단편소설 “끝없는 미로의 정원(The Garden of Forking Path)”에서 발견된다.

 

“의문투성이의 그의 대답은 체스인데, 방해를 받고 있는 그 단어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나는 잠시 “단어 체스”를 생각하고 대답했다.

“엄밀히…” 그러면서 앨버트(Albert)에게 말했다. “한 단어를 생략함으로써, 서투른 은유와 명백한 완곡법으로 재분류하는 것은 아마 그것을 강조하는 가장 어조가 강한 방법일 것이다.”

 

여기서, 어떤 무엇으로 불릴 때까지 의미가 어떤 침묵의 공간에서 소리칠 때(어떤 중요한 것이 하찮은 것으로 취급되는 단계에 의해 대화적으로 측정될 때, 또는 어떤 것이 명백히 보이는 부재 또는 그것이 명칭을 갖게 될 때까지 실제적으로는 아무것도 없는 언어로서의 사실에 의해 설득력 있게 나타날 때), 등장인물 앨버트(Albert)는 기능적이고 실재적인 삶 속의 이러한 실례에 귀착하고 있다. 이러한 의사소통의 자연적 현상은 미니멀리즘에서 생략의 기능을 정당화하고 단편소설의 시학을 반영한다.

이야기는 그들이 실제적으로 의미하거나 실제적으로 느끼는 것을 어쨌든 간신히 언급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정확한 단어의 전달 없이 사람들은 명백히 느끼면서 의사소통하는 여러 가지 방식으로 흔히 존재한다. 그러나 대신에, 즉석 어구, 출산처럼 예기된 반응, 풍자, 어떤 다른 방법으로 즉각 언급하는 완곡어법, 또는 에밀리 디킨슨(Emily Dickinson)의 언급에서, 사람들(folks)이 어떻게 “진실을 말하나 곧 빗대어 말하나”와 같은 말로 대답한다. 미니멀리스트의 소설에 거주하는 등장인물의 침묵과 무기력에 대한 하나의 해석은 사르트르(Jean-Paul Sartre)의 주장, “언급하는 것은 행동하는 것이며, 우리가 이름 짓고 있는 모든 것은 그 순결을 잃는 것이며,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의 일부분이 되는 것이다”라고 한 언급에서 발견될는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언급하지 않는(따라서 행동하지 않는) 것은 순결을 지키는 한 가지 방법이다.

햄릿(Hamlet)의 “쥐덫(Mousetrap)”에 비교해보면, 햄릿의 이야기 가운데 한 가지 익살, “오늘은 평온한 날이 될 것이다(Today Will be A Quiet Day)”는 이야기 밖의 과정, 그리고 이 경우에, 거리낌 없이 이야기하는 것의 아픔을 반영한다. 익살의 극본 속에서, 두 사람의 삶은 그들이 문제를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이든지, 만약 그들이 문제를 인식하였다고 하더라도 아무것도 언급할 수 없었기 때문이든지 둘 중의 어느 하나에 할애된다. 그러나 그 문제를 인식하고 그것을 큰 소리로 표명하는 개인은 사망한 것이다. 그는 지식(knowing)을 위해 사망한 것이 아니라 그의 이야기하기, 다른 것의 배려(attention)를 일깨우기 위해 사망한 것이다. 미니멀리스트의 소설과 약간의 우수한 현대 단편소설은 해석과 판독과 국가적 견지를 제공하지 않는다. 대신에, 이러한 종류의 이야기는 독자가 지식, 경험, 또는 의미의 전망을 추론할 수 있는 열쇠구멍으로서의 투시도법을 제공한다. 때때로 이러한 단편소설은 컬러를 식별하기 어렵고 오직 희미한 격상 또는 왜곡된 반전으로서의 사진의 음화(negative)처럼 더 잘 나타난다. 이러한 표현은 적어도 표면상으로는 흔히 분명하고 평평하고 정확하며 대화로 꽉 차 있으며, 거의 무감정이다. 그 최후의 효과를 존 바스(John Barth)는 하드에이지(hard-edge) 같은, 주도면밀한(fine-toothed), 불가해한 초현실주의(enigmatic super-realism), 그리고 그가 만들어낸 용어, “후기 알콜성의 블루칼라 미니멀리스트의 초긴장 리얼리즘(Post-Alcoholic Blue-Collar Minimalist Hyperrealism)”이라고 하는 이러한 종류의 단편소설의 변형이라고 부른다(Friday Book 256).

그 장면은 흔히 보다 가정적이다. 등장인물은 가족의 일원 또는 동거인이다. 조금도 행동으로 고찰되지 않는 속세이다. 각각의 내러티브는 보다 길게 함축된 이야기로부터 발췌된 요소이다. 이러한 이야기는 그들 한계의 중간에서 시작하고 중간에서 끝난다. 비유적으로 디자인된 통사구조에서, 그들은 전체 경험을 위하여 제유적(提喩的)으로 그리고 보편타당한 지식을 위하여 은유적으로 위치한다. 그저 때때로 강제하여 허락된 극적 사건일 뿐이다. 그 사건이 일어날 때, 그 효과는 조이스의 단편소설 속의 한 요소인, 작은 챈들러(Chandler)가 불빛 속에 서서 “안 돼!” 하고 소리칠 때, 다시 말해서 그의 경험의 무기력과 고립에 대한 상징적 몸짓과 많이 닮아있다. 그때, 불빛으로부터 조용히 물러서서 작은 챈들러는 그의 삶 그 자체로서의 보다 익숙한 어둠과 무기력에 자신의 몸을 맡긴다. 그래 냉혹하고 말구. 그러나 비록 미니멀리스트의 단편소설이 그 사건에 대해 냉혹한 분위기를 가지고 있을지라도, 그것은 흔히 예리하고 슬프고 줄잡아 말을 하고 병적인,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학적인 것과 엮여있는 것과 꼭 같다. 먼저 사람들과 사건의 관점은 무의미하거나 근시안적인 것으로 나타나지만, 좀 더 면밀히 음미하고 밀접하게 초점을 맞춰 분석해 보면, 그 이야기는 보편적 적용으로 확장된다. 교묘한 정밀도가 성공적일 때, 미니멀리스트의 소설 작가는 아무것도 언급하는 것이 없으며 차라리 그들은 보여준다. 흔히 흘긋 보여주기만 하면서도, 그 보여줌은 실제적으로는 모든 것을 폭로한다. 그러나 독자는 그 요점을 스스로 획득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러한 흘긋 바라봄은 “독자의 윤리적 존재 위에 그 자신을 영원히 새겨 넣고 세계를 사기꾼의 초점으로 끌어들인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그들 스스로 소성적(塑性的) 성격을 얻게 된다. 이러한 방식으로 경험의 어떤 무엇은 경험의 날것으로서 살아있는 실체로서의 어떤 무엇보다 부족하지 않음을 읽게(형성하게) 된다(Wolff ⅹⅳ, ⅻ).

미니멀리즘의 문학은 리얼리즘과 강한 우호관계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표면”과 “분리”의 개념은 포스트모던적 표현의 경험과 성격이 같기 때문에, 미니멀리즘의 문학은 또한 포스트모더니즘과 동족관계를 드러낸다. 따라서 미니멀리즘은 내재적으로 표상과 추상, 전통과 경험이 동시에 구동되고 분리되어 나타난다. 삶과 문학의 미니멀리스트적 변형은 1960년대 이래로 미국적인 잠재조건을 가지고 있었다. 더 나아가 미니멀리스트의 스타일은 단편소설의 고전적 기능에 뿌리가 잡혀있다. 비록 단일 성격이 소설의 다른 형식으로부터 단편소설을 구별하는 것으로 결정될 수 없을지라도, 그것은 장편소설과 구별되는 유일한 리듬 속에서 특별한 조화와 효과의 단순성과 “축소언어”를 사용함으로써, 압축되고, 순화되고, 간결하고, 의지하고, 분명한 것으로 매우 흔히 정의되는 것이 계속되고 있다. 단편소설은 단순히 다른 내러티브 형식에 의해 제공된 정도보다 더 다른 종류의 독서경험과 같은 독서경험을 제공하며, 훌륭한 미니멀리스트의 소설은 이러한 성격을 최대로 적용한다. 그러므로 문학비평으로부터 “미니멀리즘”이라고 하는 용어를 해산시키는 것은 잘못이다. 차라리 그 용어를 경멸적으로 적용하는 것으로부터 회피하는 것이 절실할 것이다. 한편, 많은 비평가들이, 에이 속상하게도, 그것이 펀(pun)이기 쉽다고 입증했던 것보다 더 절실하다. 미니멀리즘의 일반적인 성격과 함께 결합되어왔던 소설의 형태는 “추상예술의 가능성을 한계까지 밀어 올리는 인위적인 것의 중간이다(Kuspit 14).” 미니멀리즘과 단편소설은 표면 이미지에 초점을 맞추고 과묵하게 언급하는 단수형의 말에, 다시 말해서 박약에 공을 세우고 있는 그리고 가치를 위해 애쓰고 있는, 문학적 편견의 좋지 않은 성질에 종속된, 능력과 실질의 결핍으로 결합된, 문학 주체와 도구로서의 언어로부터 벗어나고 있는 단수형의 말에 특권을 부여한다. 그것에 대해 가장 우수한 항변은 미니멀리스트를 입증했던 프레더릭 바슬미의 교훈이다.

 

당신은 독자를 위하여, 적어도 그들의 상상력을 다루기 좋아하는 것을 위하여 공간을 남겨놓는 것을 생각하는 것이 더 좋다고 그들에게 말하라. 즉, 당신은 이러한 독자들이 그 속삭임을 듣도록, 속임수와 환영을 붙잡도록, 발자취를 헤아리도록, 압력을 느끼도록, 그리고 그 동안 산문이 드라마로 요술을 부리도록, 그리고 그 드라마가 그들의 마음을 흩뜨려놓도록 기대를 걸고 있다고 말하라(27).

 

2. 미니멀리즘의 기원을 찾아서

   (조선문학 통권 176호, 2005. 12. 1, 통권 177호, 2006. 1. 1)

 

충분히 계발된 형식으로서의 미니멀리즘은 비교적 최근에 만들어진 문학양식이다. 그러므로 그 기원에 대한 고찰은, 특히 미니멀리즘이라고 하는 것이 레이몬드 카버 또는 다른 단편소설 작가의 펜에서 자연적으로, 즉 자연발생의 결과로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에, 그것이 갖고 있는 어떤 영향력의 계기(繼起)를 들추어내야만 할 것이다. 끊임없이 단편소설 미학의 구성요소를 그리고 점진적으로 혼합(hybrid) 문학예술형식으로 발전시켜 미니멀리즘이 형성된 것은 최근이다. 그 발전은 포우, 체호프, 크레인(Stephen Crane), 조이스, 헤밍웨이, 그리고 사뮈엘 베케트(그의 초기 작품)와 같은 작가에 의해 혁신적으로 도입된 단편소설의 이러한 양상의 어떤 것에 깊이 뿌리가 박혀있다. 이러한 각각의 작가들이 비록 그들 연대의 예술가들 사이에서의 선각자이기는 하지만, 그 각각의 작가들은 그만이 가지고 있는 그 순간 그 계기의 특별한 문학적 기반 안에서 발전했으며, 그 기반의 환경은 그 시대의 기본적인 문학운동을 포함했을 것이다. 포우의 경우에 그 기반은 로맨티시즘일 것이며, 체호프의 경우에는 리얼리즘일 것이며, 크레인의 경우에는 자연주의일 것이며, 조이스, 헤밍웨이, 그리고 사뮈엘 베케트의 경우에는 실존주의의 개인적 변형일 것이다. 모든 각양각색의 문학운동의 이론적 경향은 이러한 전술 작가들과 함께 함으로써 그 활동기 동안에 생산된 모든 문학의 형식과 중심에 어떤 방식으로든지 영향을 끼쳤다. 그러나 이러한 작가들의 모든 것은 독특하다. 이러한 작가들은 대체적으로 다음 관찰이 암시하는 것보다 더 복잡하다. 그리고 이러한 텍스트 안에서는 그들의 복잡한 예술에 대해 주제넘게 정확히 처리하는 체할 것이라곤 아무 것도 없다. 비록 이러한 작가들이 미니멀리스트의 기교에 기여했던 것이 오직 하나만이 아니라고 할지라도, 나의 의도는 그들의 개인적 미학과 문학작품의 어떤 관련된 양상을 면밀히 조사하는 것이며, 오늘날의 어떤 단편소설 작가에 의해 실행됨으로써 미니멀리스트의 스타일로 드디어 발전된 문학적 발생의 특별한 변형으로 대부분 기여했던 것으로 나타나는 이러한 구성요소에만 초점을 맞추는 것이다.

미국의 단편소설은 어빙(Washington Irving), 포우, 그리고 호손(Nathaniel Hawthorne)의 작품과 이념에서 특히 19세기 전반에 정의를 요구했으며, 그들의 각각은 단편소설을 썼을 뿐만 아니라 그들이 선택한 매개체의 기능을 정의하려고 했다. 포우에 의해 제안된 3가지, 즉 조화(unity), 간결(brevity), 배제(exclusion)는 대부분 미니멀리즘과 단편소설의 특별한 변형의 발생을 초래했던 것 같다. 1842년에 포우는 길이로 처음 단편소설을 정의했다. 즉 “즉석에서 읽혀질 수 있고, 또는 총체성으로부터 추론할 수 있는 막강한 힘을 자제할 수 있는” 그리고 나서 신중성에 의해, 즉 “어떤 단일한 또는 단순한 효과가 성립된(950)” 단편소설을 정의했다. “이렇게 예상된 효과를 확립함으로써, 최적의 원조로 그러한 사건을 결합하는” 과정의 인위성은, 내 견해로는, 혼합체계(hybrid system)가 바로 미니멀리즘의 핵심이라는 것이다(950).

거의 50년 후에, 러시아에서, 체호프가 “단편소설은 너무 많이 언급하는 것보다 충분하지 않게 언급하는 것이 더 좋다(106).”고 단언했다. 또한 그는 포우의 효과의 원리와 공통된 이야기의 결말 또는 의도의 의미를 갖고 있는 것으로 나타낸다. 즉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연극의 무대와 같은 단편소설은 무대의 약속과 같은 규칙을 가지고 있다. 나의 직관은, 소설 또는 이야기의 결말에, 독자를 위하여 전체 작품의 인상을 교묘히 농축하여야만 한다고 나 자신에게 언급한다.” 1932년, 헤밍웨이는 이러한 소견이 성공적인 소설의 방법과 구성과 관련되고 있음을 피력했다. 즉 그의 생각은 포우와 체호프의 그리고 미니멀리즘의 이것을 배경으로 하고 확장한다.

 

만약 산문의 작가가 그 자신이 쓰고 있는 것에 대해, 그가 알고 있는 것을 생략할는지 모르는 것에 대해, 그리고 독자에 대해 충분히 알고 있다면, 만약 작가가 진실로 충분히 알고 있다면, 작가가 충분히 진술했던 것만큼 강하게 이러한 것의 감정을 갖게 될 것이다. 빙산 운동의 장엄함은 물 위에 존재하는 것의 1/8이 아니라 물 아래의 8에 기인한다.

 

포우, 체호프, 그리고 헤밍웨이의 실질적인 기여에 부가해서, 크레인에 의해 묘사됨으로써 자연주의의 개념은 레이몬드 카버, 에이미 헴펠, 그리고 메어리 로비슨의 작품 속에 명시된 미니멀리즘의 최후의 착상에 약간 영향을 끼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관찰될 수 있는 어떤 성격-유형, 문체론적 착상, 그리고 다음에 상술된 조이스사뮈엘 베케트의 작품 속에서 탁월한 철학을 추가한다.

조이스는 플롯에 대한 전통적인 생각(완전한 의미를 제공하는 발단, 중재, 결말)을 거절했으며, 행위의 고전적 구조를 표면상 정적인 에피소드와 단지 리얼리티의 “박편(slice)”인 것을 포섭하는 “총체(wholeness)”의 구조로 대체했다. 사뮈엘 베케트의 방식은 플롯을 은유적 착상, 단원(單元)과 상징으로 응축된 장치로 환원했으며, 휴머니티의 최소의 형식(종속을 정의하는 이러한 최소의 공통단자[共通單子, common denominator]로 환원된 인류의 의미)으로 그의 주제를 위축시켰다. 게다가 개성이 애매성을 두드러지게 하는 성격으로 그들의 작품에 생명을 불어넣은 양 작가들은 흔히 마비상태의 특별한 형식을 이끌어내며, 그것은 그들이 삶과 환경 안에 존재하고 있는 것으로부터 끌어낸 무기력을 암시한다.

이렇게 유명한 저자의 말과 작품을 따라가면, 즉 레이몬드 카버의 단편소설, 특히 그의 초기 작품, “부탁이니 제발 조용히 해줘(Will You Please Be Quiet, Please?),” 그리고 “사랑에 대해 말할 때 우리들이 하는 이야기(What We Talk About When We Talk About Love)”는 미니멀리즘 문학의 주목할 만한 모델로 잔존하고 있다. 비록 단편소설에 있어서 레이몬드 카버의 초기 산문 스타일이 그의 문학적 천성의 기질만큼 똑같이 그의 환경의 성향(예를 들면, 그의 알코올 중독, 이혼, 그리고 다양한 육체노동 직업)에 귀속되었을 지라도, 그의 종합적인 스타일, 즉 주제 내용의 선택과 지속적인 철학 양쪽에 강력하게 영향을 끼쳤다.

미니멀리스트 단편소설의 다양한 특징에 대해 가장 잘 증명할 수 있는 동일성은 다음과 같이 뭉뚱그려 포함시킬 수 있다. ① 언뜻 겉으로 보기에 짧고 무뚝뚝한, 깡마르고 구부러진, 그러면서 불완전한 산문 ② 개성적이며 멋있는 착상이 먼저 평범한 사건이 나타나는 것으로부터 세계적 관련사건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으로 확장하는 하나의 수사어구의 복합 양식을 초래하고 있는 간결체 산문 ③ 작가의 강요, 그리고 약간, 내레이터적인 강요가 있으면서도 명백하지 못한 그 설명보다 더 설명적인 대화 ④ 일상적인 사람들이 일상적인 것들을 행하고 있는 것을 닮은 비 영웅적인 성격 ⑤ 모든 “연기(action)”가 조금 전에 발생했던 것으로 나타나든지, 또는 이야기 시작 이전의 바로 그 순간에 발생했든지, 또는 “무대 밖(off-stage)”의 뒤에서 발생하든지 하여간 어디서든지 나타나는 의미 ⑥ “실재적(real)” 커뮤니케이션 안에서 세계의 성립이 불가능한, 흔히 부조리한 실존의 함축, 그리고 무익함-항변이 사물의 생기를 약화시키고 있는 행동, 즉 투쟁은 사물의 에너지를 약화시킨다. 다시 말해서 “아무것도 언급하지 않는 것이 그리고 한결같이 그리 중요하지 않은 것을 행하는 것이 보다 더 좋다.” ⑦ 가장 좋은 것은 말을 취소하는 것이기 때문에, 말이라고 하는 것은 아무 짝에도 쓸모없다는 인식 ⑧ 시간은 저항 없이 지나간다고 하는 지각, 또는 등장인물은 그들 자신의 세계와 삶 속에서 관여자로서보다 차라리 청중으로 존재하며, 그 이유는 특히 그들이 행하거나 언급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것 그 자체가 차이를 만들고 있는 것 같기 때문일 것이다. ⑨ 아무 것도 없는 것 안에 나타나는 세계는 본질적으로 중요하고, 그러므로 모든 가치는 개인적 가치에 의해 결정되며 인위적으로 증여받는다.

비록 이러한 특성이 포우에 의해 승낙된 미학을 본질적으로 적게 소유하고 있을지라도, 미니멀리즘의 발전에 있어서 그가 가지고 있는 주요한 기능은 초기 미국문학에 있어서 종합, 즉 “통합된 미학(unified aesthetic)/형이상학적 철학(metaphysical philosophy)”을 확립하는데 처음으로 기여했던 그의 단편소설에 대한 정의와 직접적으로 관련된다(May Poe 10). 미니멀리스트가 가지고 있는 문학적 기교의 기본적인 것은 조화와 효과이며, 그 두 가지 수사학적 기교의 원리를 포우는 그의 이론 속에서 활발하게 강화하고, 그의 소설과 시에서 드러낸다. 그 각각의 원리는 배제의 미학을 통하여 달성된다. 즉 “직접적 또는 간접적 경향의 전체의 구성 속에 기록된 단어는 없고, 하나의 예정된 착상”도 없다(Poe 950). 과잉의 의식적인 생략과 마찬가지로 의식적인 배제에 의해 선택된 포섭의 이러한 경제적 양식과 닮은 미니멀리스트의 산문은 그 중추적 기능으로서의 조화 상에 크게 의지한다. 복합적(갈등적)이고 계획적인 이미저리의 착상 안의 이 본질적인 조화는 포우가 역설하는 단순하고 단일한 효과를 정밀하게 산출하는 미니멀리스트적인 기능에 힘을 부여한다. 로맨틱 시대의 지배적인 문학적 특성은 직관적이며 감정적인 것의 조력으로 이성적이며 합리적인 것과 지적인 것의 거절을 포함한다. 비록 그의 철학적이며 비판적인 이론이 대단히 지적이고 교육적일지라도, 포우는 교훈적이고 지적인 기본요소가 문학적 교묘한 솜씨 안에 위치를 잡지 못했음을 강조했으며, 예술의 주체적인 사건이 감정을 다루어야만 할 뿐만 아니라, 가장 위대한 예술은 감정상에 직접적인 효과를 가지고 있어야만 한다고 주장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예술가들은 이성적이며 합리적인 의미를 통해서 이러한 감정(획책된 최후의 효과)에 도착한다. 포우는 그의 탐정과 의사-과학적 이야기의 착상이 지극히 합리적이며 이성적인 의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그의 시와 단편소설들은 골칫거리(위협)의 기록되지 않은 진짜의미를 담고 있으며, 그들의 감정에 의해 지배를 받는 주요 등장인물의 특징을 이루고 있고, 따라서 그것은 파괴된 의미이다. 이러한 후자의 기본요소는 주요 등장인물의 사적인 악행으로부터 투영된 환영적인 악마임을 매우 흔하게 증명하는 환경을 협박하고 있는, 즉 어둠을 창조하는 것으로 결합한다. 주인공의 이러한 사적인 지옥은 독자에게 친숙해지는 것을 필요로 하는데, 그 이유는 포우가 어떤 이야기 안에는 마지막 효과, 즉 독자에 의해 알려지고 느껴진 효과의 구성과 무관계한 것이 아무 것도 없기 때문이라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약 독자가 결코 살해되지 않았다고 한다면, 생명이 결코 매장되지 않았다고 한다면, 또는 포우의 많은 등장인물이 경험하는 어떤 기괴한 상황 안에 능동적으로(또는 수동적으로) 포함되었다고 한다면, 그러한 친숙함이 어떻게 가능할 수 있는가, 더 나아가 독자가 어떻게 “예, 압니다.” 또는 “예, 거기에 있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이러한 효과를 갖게 된 것은, “그의 교묘한 솜씨와 물질적 세계의 모든 이미지를 영혼의 표출로 전환하려고 하는 그의 필요와 함께,” 포우는, “아마 우리들 각각의 영혼 속으로 잠복하는 사건(또는 사건의 공포)을 실행하려고 하는 욕망을 우리에게 말할 수 있었던” 것이 가능했기 때문일 것이다(Hoffman 319, 318). 다시 말해서, 모든 휴머니티 안에는 어둠, 유령적인 애매성과 영혼적이며 감정적인 “리지아(Ligeia)”의 흡혈귀와 마찬가지로 “포도주통(Cask of Amontillado)”의 복수심에 불타는 살인자와 참회자, “수다쟁이 마음(The Tell-Tale Heart)”의 살인자와 미치광이를 잠복시킨다.

아마 이 세 가지 이야기 중의 하나인 “수다쟁이 마음(The Tell-Tale Heart)”은 “그의 거의 완벽한 이야기 가운데 하나임이 틀림없을 것이다. 그것은 단지 4페이지에 불과하지만, 예술의 경제성에 대한 위업이다. 그 사건들은 작고 간결한 행동이다(Hoffman 222).”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우의 가장 짧은 내러티브 중의 그 하나는 휴머니티의 편집(과대망상) 성향의 심원한 조사보고이다. 포우의 많은 1인칭 내레이터(가장 정교한 것이라고 해도, 다시 말해서 기껏해야, 이성적이며 합리적인 것이 의심스러운)와 같은 이러한 내레이터는 스스로 제 정신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믿고, 이러한 젠체하는 태도로부터, 그가 미친 것임을 증명하는 것 같은, 그의 불합리한 행동을 합리화하려고 시도한다. 분명 아이러니하게도, “그가 미친 것과 동시에, 이러한 내레이터는 신경과민의 주인공이다. 그의 과장된 의미는 천국과 지옥 양 쪽을 가깝게 불러들인다.” 비록 내레이터가 살해할 동기가 없었다고 할지라도, “나는 노인을 사랑했다.”고 주장한다. 그는 다음과 같이 이유를 댄다.

 

나는 그의 눈을 생각한다! 그래, 이거였어! 그의 눈 하나는 독수리와 닮았어(얇은 껍질로 덮인 창백하고 푸른 눈. 그 눈이 나를 바라볼 때마다 내 피는 얼어붙었어. 그래 점점 매우 천천히). 나는 그 노인의 삶을 빼앗기로 했어, 그리고 영원히 그 눈을 제거했어.

 

“독수리 눈”의 의미는 인간존재의 1세기 동안의 신화적 공포였다. 유사한 신화적 원형의 뿌리는 노인과 눈이다. 초로의 남성으로서의 노인은 모든 지식(all-knowing)의 아버지다운 지혜를 이미지화하는 하나의 격상(格象, figure)이다. 그 눈은 일견 이원성을 상징한다. 게다가 그 눈은 영혼에 대한, “실재성”의 외부와 마찬가지로 내부의 반영에 대한, 지식의 매개물에 대한, 그리고 미래의 매개물에 대한 창과 동일시된다. 포우의 이야기에서의 눈은 숨겨지며, 그래서 그 광경은 왜곡되고, 마치 “독수리 눈”이 위협하고 있는 것과 같은 상징이 된다. 관측/이해, 전방/관측, 무지(無知), 그리고 숨겨진 광경을 갖고 있어야만 하는 최고의 직유, 은유, 그리고 암시는 이러한 추이에 적용될 수 있다. 즉 포우의 이야기에 있는 약간의 이러한 문장을 보면, 상징적 구조가 매우 조밀해서 이러한 탐구의 프레임으로서의 완벽한 분석도 불가능하고 미니멀리즘의 입장에서의 이러한 검토도 불가능하다. 이러한 짧은 예가 제공하는 것은, 그가 만들어내는 솜씨와 마찬가지로, 압축된 독자-시각 안에 담긴 최대량의 정보를 통해 뿌리 깊은 곳으로부터 초래되고 있는 단 하나의 포우의 콘셉트에 대한 절대적인 성공의 증거이다. 짧지만 짧은 그대로의 “수다쟁이 마음(The Tell-Tale Heart)”에서, 포우는 많은 독자들이 인식할 수 있는 매우 사실적인 범죄행위의 결과를 묘사한다. 포우는 하나의 복합체, 즉 현재 미니멀리스트의 소설에서 발견될 수 있는 격상적 지시와 명확한 이미저리의 응축된 양식을 통해서 이러한 효과를 성취했다.

또한 미니멀리즘의 기원은 관찰 속에 그리고 체호프의 효과 속에 강력하고 깊이 있게 뿌리를 내리고 있는데, 그의 작품들은 플롯 또는 행동에 의해 증대되지 않은 리얼리즘에 가장 적합하게 성격이 만들어진다. 어떤 비평가는 그것을 백 년 전 미국에서 성행했던 자연주의의 형식으로 본다. 어떤 의미에서, 자연주의의 어떤 형식은 로맨티시즘의 필법으로 조절된 리얼리즘으로 지각될 수 있는데, 왜냐하면 소설의 최초의 전제는 인식될 수 있는 것으로, 또는 적어도 이야기 안에서 인식으로서의 그러나 무기력한 힘으로서의 진상(眞相, nature)의 반어적 의미에 의해 압도된 또는 통제된 그래서 친숙한 사람들, 장소들, 사건들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따라서 먼저 사실적으로 나타났던 그것은 심오하게 격상적인 것이 되며, 로맨티시즘의 흔적은 의인법으로 또는 더 나아가 특히 진상의 신격화로 나타나게 된다. 미국문학에서, 크레인의 단편소설은 문학 분석가들이 자연주의의 우수한 예라고 하는 그 조건을 갖추고 있다. 소설에서의 자연주의에 대한 크레인의 관점의 조절된 원리는 그 세계 안에서 진상의 의인화된 역할의 바로 그 특별한 관점에 뒤얽혀 한정되며, 그것은 실존주의와 동일시되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콘셉트는 크레인이 쓴 다음의 시 속에서 명백하다.

 

한 사내가 세계에게 말했네.

“나는 존재한다.”

“그러나,”라고 세계는 답하며,

“나는 그 진상을 창조하지 않았네,

책임의식을 가지고,“

 

어떤 무관심한 중립세계(indifferent universe)의 냉랭한 관념은 네 사람이 너른 바다의 조각배 안에서 살아남기 위하여 싸우고 있는 크레인의 단편소설 “조각배(The Open boat)”에서 나타난다. 호된 시련을 겪음으로써, 그 사람들은 세계가 적개심과 불길함을 갖든지 또는 아름다움과 평온을 갖든지 하여간 어떻든지 간에 그러한 소신(감정)을 갖게 되는데, 그러나 끝에 가서, 그들은 진상이 그들을 위해 주목하는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배우게 된다. 왜냐하면 진상은 원래 그들을 전혀 주목할 수 없기 때문이며, 그리고 그들이 안중에도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 단편소설이 비록 은유를 풍부하게 소유하고 있을지라도, 크레인은 하여튼 의인화된 진상을 명백하게 하지 못한다. 그 대신에 그는 그것이 진상이 아니라 차라리 인류의 감상벽(感傷癖), 인간의 감정과 요구라는 것을 예증(例證)하며, 사실상 의지, 목표, 아름다움의 관념을 산출한다. 또한 가장 우수한 미니멀리스트의 단편소설과는 달리, 이러한 이야기는 플롯, 등장인물, 장치, 주제 그리고 상징의 우수한 예를 한 편의 단편소설 안에 동시에 작용시키고 있다. 따라서 단편소설의 기교라고 하는 영역에서 볼 때, 크레인의 작품은 미니멀리스트의 스타일에 크게 공헌했다고 언급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기에는 결국 미니멀리즘 안에 자연주의의 어렴풋한 재치의 번득임, 즉 러셀 뱅크스(Russell Banks)의 논설로 연료가 확실하게 적재된 재치의 번득임, 다시 말해서 러셀 뱅크스의 논설 안의 “레이몬드 카버와 크레인”에게서는 “잔인성, 즉 불가피한 결정론과 함께 괴로운 논거의 극화에 의해 강화된 작품을 증거 없이 내세우는 것이” 존재하며, 드디어 그것이 그들의 등장인물을 무력케 할 때, 비극으로 접근한다(101). 최근 20세기의 미니멀리스트가 쓴 이야기의 신실존주의자의 세계는 미니멀리즘에 대한 자연주의의 철학적 공헌의 예리한 예인 크레인의 소설의 무관심한 중립세계와 유사한다.

메이(Charles E. May)체호프 작품의 특징을 고조(高調)된 리얼리즘으로, 형편에 따라서는 리얼리즘의 과장된 변형으로 보며, 그것은 “상징적 투영이든지 또는 사실적 묘사라기보다 차라리 분위기(mood)로서의 성격”을 만든다(Chekhov 199). ―외관적으로 사실적인 세부묘사로서의 형식은 그들이 묘사하고 있는 것보다 더, 다시 말해서 상징적인 것보다 더, 그보다 더 나아가 실물크기, 사진과 같은 확대, 그들이 과장해서 전체가 된 과장보다 더 큰 것으로 앙양된다. 일종의 리얼리즘과 같은 체호프의 작품을 연구하는 것이 중요한데, 그 이유는 그것이 정선(精選)되고, 구체적이며, 표면적으로 세부 묘사된 것으로서의 표상에 의해 성격의 복합(갈등)적인 내면상태가 된 표현과 관련된 현대 단편소설의 기본적인 특징 중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체호프의 작품이 가지고 있는 미학에 있어서의 사실성은 객관적인 것과 마찬가지로 내면상태로 나타난다. 그의 예술철학의 결과는 사실적으로 기술한 것이지만, 그저 표면적인, 때때로 피상적인, 속세의 사실성으로 기술될 뿐이지만, 단순하지가 않고, 바로 그 성격에 의해 그것은 프로이트적인 어떤 꿈(텍스트 안에서 그들의 지위와 기능에 의해 결정된 함축적 은유로의 변형) 못지않게 은유적인 것이 된다. 그런 식으로 단편소설은 소설이 떠받고 있는 성격과 사건의 점증적 발전을 초상화처럼 그리도록 요구된 일상적 시간과 조화될 수 없다. 그러므로 하나의 장르로서 단편소설은 “평범한 사실성의 리듬의 계시적인 해체 상에 초점을 맞추며,” 그리고 체호프적인 단편소설은 “특별한 분위기로 만들어지고 조화의 원리로 플롯보다 어조(tone) 상에 더 의존하는 경험”에 초점을 맞춘다(200). 따라서 체호프의 착상은 삶의 변화과정보다 차라리 삶의 단순한 에피소드로 특징이 이루어진다. 그리고 그것은 그것에 대한 에피소드든지 또는 내레이터의 지각이든지 하여간 어떤 것으로든지 존재하며, “종잡을 수 없게(착란적으로) 이해된(discursively understood)” 것보다 차라리 “현상학적으로 조우된(phenomenologically encountered)” 그 경험은 체호프에 의해 인위적인 것이 된 것으로서의 현대 단편소설의 중심으로 존재한다(201). 그래서 체호프는 이러한 조우에 대한 내러티브적인 초점을 교묘히 다룸으로써, 그의 “타당한 세부묘사의 영민한 선택”에 의해, 그는 구체적으로 다음처럼 표현한다.

 

…내면상태의 복잡성. 뒤에 엘리엇(T. S. Eliot)은 그러한 기법을 “객관적 상관물(objective correlative)”이라고 지시했다. 즉 그 객관적 상관물이란 세부 묘사된 사건, 기술, 또는 추구된 감정(emotion)을 위한 일종의 객관화 또는 형식으로 기여된 특성 짓기를 말한다.

 

주관적 상태를 묘사하고 있는 객관적 묘사의 사용은 체호프의 소설에 잘 예증되어 있으며, “불행(misery),” 그것은 근본적으로 슬픔의 성격에 대한 것이다. 이야기는 그 자체 스스로 언급하고 있는 것 같은데, 왜냐하면 포타포프(Iona Potapov)가 세 시간을 그의 아들의 죽음에 대한 세부묘사를 공유하려는 것과 그리고 그 자신의 슬픔과 고독의 깊이로 표현하려고 하기 때문이며, 그러나 어떤 사람이 그를 구원하도록 허락한다. 오직 그 말(horse)만이 그의 존재의 불행이 움직임 없이, 분명히 듣고 있음을 공유하며, 반면에 포타포프는 그의 이야기를 언급한다. 눈, 추위, 빈곤의 곧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냉혹한 상태를, 그리고 포타포프의 일상 존재를 정의하는 불행을 설치함으로써, 그 이야기는 명백한 해석을 제공하지 않는 내러티브적 목소리로 보고된 구체적인 세부묘사와 함께 단순하게 언급된다. 체호프의 기교는 포타포프의 시기를 놓친, 애처롭게 익살스러운, 청자를 발견하는데 철저히 무익한 것의 은밀한 동기로 인하여 매우 효과적이며, 그 독자는 슬픔, 고독, 그리고 노인의 절망과 슬픔의 의사소통이 안 되는 성격이 보편적이라는 것을 추리하고 있음을 파악할 수 있다.

이러한 종류의 이야기는 플롯이 거의 없으며, 만약 전혀 정적인 것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만약 뚜렷한 결말로 진전하는 것 대신에 어떤 명백한 진전이 약간 있다고 하더라도, 그 이야기는 끝까지 이끌어가지 못하거나 간단히 끝나고 말 것이다. 체호프에 의해 최초로 형성된 이러한 소설-디자인은 혼동하기 쉬운 기분전환을 포함하거나 시적 정의의 어떤 감각에 적합한 또는 해피엔딩을 위하여 독자의 욕망을 충족시키는 사건을 만들어낸다. 이러한 이야기는 현상(現像)이 부족하거나 불완전한데, 그 이유는 그 이야기에 있어서의 허구와 장치가 부족하게 만들어져 있기 때문인 것 같으며, 그 헐거운 결말이 단호하게 처리하지 못하거나 경사진(그러나 이러한 이유 때문에 분명히 그들은 조작된 경험의 효과를 만들어낸다. 그들은 마치 어떤 사람이 무의식적으로 문을 조금 열어 두었거나 전화선이 어떤 일시적 연결로 교차된 것처럼 중간에서 시작하고 중간에서 끝나는 것 같다. 독자는 갑자기 타인의 삶을 그들에 대한 사전 지식 없이 내밀히 관여하고, 이상하게도 엿보고 엿듣도록 강제된다), 훔쳐보는 취미의 역할에 저항 없이 초래된 끝머리를 과감하게 처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 다음에 갑자기 그 문은 닫히고, 그 연결은 단절된다. 즉 훔쳐보는 취미처럼 그렇게 강제된 위치로부터 어떤 것을 해방한다. 그러나 마음은 눈감아줄 수 없다. 이것은 체호프가 창작했던 이야기 방식의 효과이다.

체호프의 기교의 중요한 특징은 네 가지이다. ① 플롯이 없는 디자인은 단순 경험상에 초점을 맞춘다. ② 어조의 우아한 그러나 얽히고설킨 양식과 정밀한 세부묘사는 서정적 조직으로 짜진다. ③ 객관적 표현은 내러티브적 목소리와 매우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독자는 그 이야기와 함께 닫힌 연상(聯想) 속으로 말려든다. ④ 평범한, 세속적인, 그리고 주체로서의 중간분류체는 설명, 비평, 또는 변명 없이 표현되며, 또 왜곡 없이 복합(갈등)적인 시적 형식으로 주조되며, 그러나 미학적 분위기에 의해 강조된다. 체호프의 작품은 깜짝 놀라게 하는 기략이 풍부하고 재주가 많은 것을 예증하는데 기여하고 있다. 그는 소설의 경제성에 있어서 터무니없다. 그의 시대에 있어서 가장 우수한 다른 작가들의 줄거리는 훌륭하다고 생각되는 소설의 페이지를 채우기 위하여 충분히 포괄적인 것으로 판단했으나, 체호프는 약간의 페이지로 처리했다. 이렇게 강력하게 경제적인 기교의 예를 들면, 그의 소설 “반카(Vanka)”가 있는데, 그것은 아홉 살짜리 소년의 유년시절의 에피소드에 불과하다. 그러나 이렇게 단순한 사건의 디자인은 과거의 사건과 장차 일어날 불길한 시사(示唆)를 언급하고 있는 몸짓 안에 삶 전체의 비극을 불러일으킨다. ―즉 삶 전체가 4~5 페이지의 공간으로 수축된 짧은 길이(span)이다.

체호프의 등장인물들은 “그들이 분위기를 구상화한 것보다 사실주의적인 격상을 충분히 에워싸지 못한 것으로” 흔히 인식된다(May "Chekhov" 201). 그러나 그의 소설 “개를 데리고 다니는 부인(Lady with Dog)”을 읽었던 사람은, 사랑에 의해 예기치 않게 융합된 독특한 열정, 고통에 찬 선택과는 반대로 맹렬한 연인인, 안나(Anna Sergeyevna)와 구로프를 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체호프는 고상함과 그들의 진실한 사랑의 비극적인 성격을 일련의 고정관념에 반하여 초월할 수 있는 시련으로, 그리고 헛된 일련의 부서지기 쉬운 예상으로 발전시킨다. 안나는 구로프가 전에 사랑했던 다른 모든 부인들과는 다르게 반응하며, 그리고 구로프는 다른 부인들의 반응을 처리하는 것에 익숙했던 방식으로 그의 감정(feeling)을 다룰 수 없다는 것을 스스로 발견한다. 또한 마지막 장면은 안나가 그의 삶의 은밀한 핵심으로 남아있지 못할 것이라고 하는 것을 강력하게 암시할 뿐만 아니라 그들이 실행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그들은 결코 완벽하게 행복하거나 자유롭지도 못할 것이다. 이 소설을 나보코프(Vladimir Nabokov)가 고찰한 바에 의하면, “이야기하고 있는 소설의 전통적인 규칙은 20페이지 정도의 놀랄만한 그의 소설 안에서 깨져버렸다. 거기에는 아무 문제도 없으며, 완전한 클라이맥스도 없으며, 끝내는 포인트도 없다. 그러면서도 그것은 일찍이 쓰였던 가장 우수한 소설 가운데 하나이다.” 체호프의 소설은 은밀한 충격을 예측하며, 오직 표면 이미저리만을 사용하고 있는 심층의 감정(emotion)을 반영하고, 요술지팡이나 거울처럼 세밀하게 구체화한다. 체호프의 예술가적 천성의 충격은 20세기 내내 반향을 일으키고 있고, 조이스, 맨스필드(Katherine Mansfield), 앤더슨(Sherwood Anderson), 헤밍웨이, 그리고 레이몬드 카버와 같이 저명한 단편소설작가의 작품 속에서 증명된다.

논픽션의 약간의 비형식적인 경우에, 조이스는 그의 예술가적 신조의 관념을, 편집자가, “당신은 내가 여기 저기 단어를 지우도록 요구했던 것을 조금만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그러한 말소가 사활을 결정할는지 모른다고 하는 입장에서 단편소설을 당신은 명확하게 관찰하지 못하고 있습니다(Geddes 364).”라고 제안했던 수정에 반응해서 쓴 편지로부터 조금씩 수집된 관찰 쪽으로, 들추어냈다. 포우의 외연적 관찰과 체호프의 명백한 석명(釋明)과는 달리, 대부분 소설의 기교 상에서의 조이스의 신념은 그의 작품의 구조 속으로 짜여 들어갔다. 그것의 가장 주목할 만하고 널리 스며서 영향력을 미치는 것은 조이스의 등장인물에 기인한 미학이며, 히로우(Stephen Hero), “본질의 돌연한 현현(epiphany)으로서의 그는 파롤의 또는 몸짓의 비속성이든지, 또는 마음 그 자체의 기억할 만한 단계로든지, 하여간 어떤 것으로든지 갑작스런 정신적 표출을 의미했다. 그는 그것이 지극히 조심하며 이러한 현현을 기록하는 그 편지를 쓴 사람을 위하여 존재했다고 믿었다…” 단편소설이 특히 현현 상에 추축(樞軸)된다고 하는 생각은 미니멀리스트의 소설에 직접적으로 활력을 불어넣는 것으로 나타나지는 않는다. ―즉 그것은 저항 받고 있는 것에 의해 일종의 동역학적 힘으로 존재(exist)할는지 모르기 때문에 “직접적으로(directly)”가 아니다. 단편소설에 대한 대부분의 미니멀리스트의 변형 때문에, 현현은 사회의 불합리 상의 초점에 의해 거부되고 재배치된다. 그러나 단편소설의 조이스의 작품, “더블린사람들(Dubliners)”에는 그의 단지 현현으로서의 관념보다 더 많은 것이 존재한다. 그리고 이렇게 다른 형식 안에는 문학에 통달한 미니멀리스트의 기교 상에 조이스의 강력한 영향력이 위치하고 있다. 조이스는 명백히 정적인, 리얼리티의 에피소드인 “삶의 박편”에 찬성하여 고도로 플롯이 만들어진 소설의 전통을 포기했다. 구체적 사건 그리고 1차적(직선적), 즉 원인과 결과의 간단한 관념으로서의 1차적 내레이션에 도전했던 잠재적으로 의미가 꽉 찬 사태를 유발시키고 있는 대상 상에 그가 초점을 맞춤으로써, 그 어떤 것이 방금 발생하고 있는 어떤 무엇으로 나타나며, 모든 이러한 사건은 드디어 결말의 특별한 부류 안에 안주하기 위하여 동시에 모여든다. 문학비평가 레빈(Harry Levin)은 조이스의 단편소설을 오 헨리(O. Henry)에 의해 사용된 “낡은” 기교와 비교한다. 단편소설의 이러한 유형에서, 작가는 “경악의 부도덕한 조작에 의해 보다 더 파란만장한 일상적 삶을 만들려고 시도했으며, 반면에 동시 발생적 조이스는 체호프와 마찬가지로 그러한 책략을 버렸으며,” 대신에 “경험의 흐름에 불쑥 적응하는, 열린 구조”를 사용하려고 시도한다(18). 레빈이 체호프의 디자인과 같다고 생각하는 조이스의 소설의 이렇게 플롯 없는 양상은 미니멀리스트 소설의 기본적인 구성요소와 동일시 될 수 있다.

게다가 경험의 전망보다 차라리 흘끗 봄(glimpses)을 제공함으로써, 조이스의 소설에 있어서 그가 선택한 등장인물들은 체호프의 등장인물들을 닮고 있다. 체호프의 이러한 것과 같은 조이스의 격상들은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의미에서의 고전적 영웅도 아니고, 신화적 또는 로맨틱한 영웅도 또는 인류의 지도자도 아니며, 프라이(Northrop Fry)의 방정식에 의하면, 그들은 다른 사람들 또는 그들의 환경과 대비하여 하나의 의미 또는 종류 또는 단계의 초월로 존재한다. 그들은 융(Carl Gustav Jung)적 의미 또는 고정관념으로서의, 용어의 현대적 사용으로서의 원형(archetypes)이 아니다. 평범한 조이스의 소설의 등장인물은 “일상생활”의 일반의미로서의 보통사람일 뿐만 아니라 일반적으로 억압받고 때때로 그들의 사태(물리적 고정이 아니더라도 행동이 따르지 않는 또는 감정적 무기력을 흔히 이끌어내는 마음과 경제적 상태)에 의해 풀이 죽게 된 서민으로서의 사회집단의 일원이다. 조이스의 단편소설집 중의 “더블린사람들(Dubliners)”에 나오는 등장인물들에게 재앙으로 나타나는 행동의 모호함과 무능력은 체호프의 단편소설에 나오는 등장인물을 괴롭히는 수동적인 저항과 명료한 문제들의 형식보다 더 가혹하다. 혀와 수족의 무감각은 조이스의 어둡고 더러운, 그리고 특히 오늘날 미니멀리스트 소설의 등장인물을 괴롭히는 언어와 그 혼란의 문제와 관련되어 질식할 것 같은 것으로 나타나는 것으로서의 수많은 시민들을 괴롭힌다. 그것을 기술적으로 대비해 보면, 조이스와 어떤 미니멀리즘 작가의 풍부한 언어가 외관상으로는 무언과 정지로서의 이러한 소설의 표층 아래에서 강력한 저류(底流)로 기여하고 있음을 관찰할 수 있다.

“더블린사람들(Dubliners)”에서 조이스는 그의 동시대의 사람들을 그리고 아일랜드의 “윤리적 역사”를 반영하는데 기여하고 있는 일련의 조심스럽게 그린 비네트(vignette)를 나타낸다. 그는 유년기, 청년기, 성숙한 삶과 공적인 삶의 이야기로 소설집을 분할한다. 소설 “대응물(Counterpart)”은 이러한 더블린사람들 각각을 한데 동여맨 윤리적 무기력의 강력한 초상화이다. 이 소설에서, 조이스는 화가 그 안에서 끓어오름으로써 좌절당하고 스스로 좌절하고 있는 패링톤(Farrington)의 무기력한 격노를 반복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격정적 경련은 순식간에 목을 꼭 쥐었다.” “큰 소리로 저주하기를, 그의 주먹은 폭력적으로 어떤 무엇을 파괴하기를 열망했다.” “그의 몸은 어떤 무엇을 실행할 것을, 돌진할 것을 그리고 폭력 행사를 간절히 바랬다.” “그의 가슴은 격정으로 부풀었으며… 그의 격정은 그를 거의 질식시켰다.” 따라서 굴복당하고 좌절당한, 근본적으로 그 자신의 바보임과 냉담함의 결과로, 패링톤은 오리무중에서, 밤의 암흑 속에서, 그리고 취중의 망각 속에서 탈출구룰 찾는다. 그러나 그의 오만은 취함으로써 얻게 된 기회의 그 자신을 유린하게 되는데, 그 이유는 그가 우연히 만난 알레인(Mr. Alleyne)의 왜곡된 이야기에 동정적으로 귀를 기울이며 술 마시는데 돈을 탕진했기 때문이다. 한층 더 격분된 패링톤이 귀가했을 때, 그는 “어둠을 뚫고” 그의 집을 응시하다가 그의 아들을 덥석 붙잡고, “등불을 켜라. 어둠 속에 위치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불빛과 패링톤의 침착한 제정신의 진기한 상태는 그가 순결한 소년을 통해 그의 갇힌 격정에 구멍을 뚫는 것에 기인한 자기폭로의 변화를 초래한다. 비록 그렇게 잘못 지시된 행동(behavior)이 연기(action)와 동등할지 모르지만, 그는 그의 불행의 실재적 가동자(시험자, 원조자, agent)와 대항해서 거의 연기하지 않았으며, 그러므로 환경의 영향을 받아서 움직이지도 않는다. 패링톤에 의해 반영된 그 유형과 비교해 보면, 현대 미니멀리즘 작가에 의해 창작된 등장인물은 똑똑히 말을 못하는 경향을 조이스의 “더블린사람들(Dubliners)”과 공유한다. 등장인물이 적어도 적당한 말(words)을 원하는 그 말의 결핍은, 적당하게 반작용하는 또는 하여간 연기 등을 하는, 환경이 현상(státus quó)으로든지 무엇이든지 간에 그로부터 움직이는, 무능력 안에 결과적으로 나타난다. 게다가 미니멀리스트 단편소설의 비판에 의해 아주 흔히 동일시된 숨이 막힐 것 같은 분위기는 조이스의 어두운 더블린으로서의, 어디든, 미니멀리스트의 환경(milieu) 안에서처럼, 이러한 정적과 반영된 무기력에 결과하고 있는 것과 보통 사람들의 상태를 폭로하는 것으로서의, 환각적 이미지를 불러일으킨다.

사뮈엘 베케트의 시각에서 보면, 인간의 진력(盡力)은 공허할 뿐만 아니라, 또한 출발부터 지긋지긋하다. 이러한 태도는, 이러한 등장인물과 그들의 창조자 양측이 현실화하여 나타나는 언어의 문제를 예증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가장 평범한 사람들과 가정 그리고 그들의 정적 경험으로서의 무관심한 중립세계를 극적으로 표현함으로써 신뢰할 수 있는 현대소설로서의 독특한 경향을 반영하는 부조리에 대한 사뮈엘 베케트의 미학과 결합한다. 사뮈엘 베케트는 휴머니티의 영웅적 형식보다 못한 형식과 함께 그의 기교를 내던져버린다. 그의 격상은 사회의 멀리 떨어진 변두리에서 솟아오르며, 흔히 휴머니티의 가장 낮은 단자로 존재한다. 그와 같이 유형적인 것은 은유로 행동하고 이야기하게 되는 그 모든 것이다. ―그러나 간신히 움직이고 매우 자주 불합리한 추론을 말한다. 사뮈엘 베케트의 등장인물에 의해 존재하게 된 세계는 때때로 “그러므로 격변은 아주 적게 되풀이될 수 있는 삶으로 고갈된다. 우리는 폭행의 부재에 근접하며… 인간의 혀는 공포로 말을 할 수 없다…(Hassan 8)사뮈엘 베케트의 등장인물의 유형에 있어서, 플롯이 없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으로서의 외관상으로는 디자인이 전혀 없는 플롯에 관한 관념은, 그리고 인간의 커뮤니케이션이 전혀 없는 것과 다름없는 언어의 표상은, 미니멀리스트의 소설 속에서 그들의 대응물과 매우 흡사하게 닮은 용모로 존재한다.

부조리로 생각되는 그의 터무니없는 능력의 아주 널리 퍼지는 효과를 정확히 판단할 사람은 아무도 없으나, 약간 부정할 수 있는 사람은 있을는지도 모른다. 핫산(Ihab Hassan)에 의하면, 인간 존재의 불합리에 대한 사뮈엘 베케트의 극적 표현은 “수학적 동어반복에, 환원(축소)하고 있는 문학에 근접하고 있다. 사뮈엘 베케트의 그 연역법은 그저 엔드게임(endgame)을 연출하고 있는 휴머니티와 함께 스스로 기진맥진한 역사를 떠맡는다. …언어는 공허하게 되고, 따라서 말은 그들의 공허를 드러낼 수 있을 뿐이다(30).” 또한 언어와 함께 사뮈엘 베케트의 투쟁에 어드레싱(addressing)함으로써, 모리악(Claude Mauriac)은 “따라서 언급할 수 없는 것에 반하여 그 자신을 함정에 빠뜨리고 있는 작가는, 말이 그의 의지에 반하여 그가 언급하도록 하는 것을 언급하지 못하도록 하는 대신에, 그들이 완전히 덮여 디자인된 바로 그 성격으로 표현하는, 그의 모든 교활한 솜씨, 즉 불명확성, 모순대당(矛盾對當), 생각할 수 없는 일을 사용하지 않으면 안 된다(81).” 커뮤니케이션을 위한, 특히 감정(emotion), 주체적 개념과 불가해한 질료(matter)를 전달하기 위한, 하나의 부적당한 도구라고 할 수 있는 언어의 개념은, 미니멀리즘 작가가 가지고 있는 감수성의 주요한 기본요소이다. 만약 언어가, 다시 말해서 커뮤니케이션의 주요한 도구가 부적당하다고 한다면, 그때는 전체 시스템이 불완전하다. 불완전한 교섭의 바로 이러한 시스템 안에서 창조하도록 떠맡겨진 미니멀리즘의 작가는 그들 기교의 명확한 디자인으로 언어의 부적당함을 사용한다. 그 주체적이고 불가해한 것은 부적당한 프레임―엘리엇(T. S. Eliot)의 “육체로 구현된(made flesh),” 적어도 문학적 골육으로 구현된 객관적 상관물과 같은 것이지만 폭로되어 나타나는 것으로 발생된다.

작품은 특별한 철학적 성질과 문학에서의 예술운동의 극히 주요한 예로 기여하는데, 그 둘은 미니멀리즘의 주요한 기본요소와 아주 많이 닮아있다. 이러한 관점에서의 조화(consistency)사뮈엘 베케트의 단편소설 가운데 어떤 것 한편에 대한 검토를 요구한다. 그러나 약간의 비평가들 그리고 더 나아가 독자들은 사뮈엘 베케트의 단편소설과 대부분 친숙한데, 그 이유는 그것이 그의 생애 중 아주 초기에 쓰였고 철학적 그리고 예술적 관념의 수수께끼 같은 미궁으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페더맨(Raymond Federman)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그들의 이단적 형식, 즉 소설의 성격에 본질적인 기본요소의 결핍, 언어의 현혹적 사용, 그들의 명백한 앞뒤가 맞지 않음에 의하면, 그들은 모순된 해석을 이끌어낸다(3).” 소설, 시, 또는 단편소설을 통하여 사뮈엘 베케트를 조우하는 것보다 차라리 거의 모든 사람들은 먼저 그의 무대연극 “고도를 기다리며(Waiting for Godot)”를 통하여 그를 경험한다. 이 연극은 사뮈엘 베케트의 예 적 디자인과 철학의 근본적인 예이기 때문에, 미니멀리스트,의 단편소설에 재등장하는 기술적 기본요소를 실험하는 가장 우수한 모델이다. ―무대에서 대화의 최초로 벌어지는 언쟁과 함께 시작하고 있는, 최초의 말은 외톨이 사내에 의해 아무렇게나 지껄여지는데, 뒤에 그는 묵묵히 그의 장화를 벗기 위하여 억지로 시도한다. 그의 명백한 불합리론적 추론은 “아무래도 안 되겠는걸.”하고 말하며 인간존재의 성격을 선언한다. 계속해서 두 번째 사내가 무대장면으로 들어가며, “내가 그 생각에 빠져들다니.”하고 말한다.

주요 등장인물은 어릿광대의 두 가지 다른 유형인 라우렐(Stan Laurel)과 하디(Oliver Hardy) 사이의 조롱 가운데 하나를 상기할는지도 모르는 두 사람의 부랑자이다. 별명인 디디(DiDi)와 고고(GoGo), 그 중 한사람 블라디미르(Vladmir)는 매우 유쾌하면서도 무능력하고, 또 다른 사람, 에스트라공(Estragon)은 대개의 경우 친구의 보호를 받는데 내던져진 세계의 무능력자이다. 나중에 두 명의 다른 사람, 포조(Pozzo)와 럭키(Lucky)가 도착하는데, 그들도 마찬가지로 근거 없이 나타나지만, 포조가 가져온 밧줄로 서로 묶고 럭키의 목을 매고 있는데, 우애롭다기보다 차라리 물리적이다. ―그들은 주종관계 같이 보인다. 이 연극에 대해 매우 자주 인용된 비평적 관찰은 메르시예(Vivian Mercier)에 의해 1952년에 이루어졌는데, 그는 “아무것도 없는 그 곳에서 두 번 발생하는” 두 가지 연기로 “고도를 기다리며(Waiting for Godot)”를 보았다. ―즉 재치, 그러나 유익하지도 않고 정확하지도 않은, 적어도 몇몇 사람들 때문에 메르시예가 “아무것도 없는 것”을 의미했을는지 모르는 것을 고찰하기 위하여 그녀가 흔해빠진 재치의 한계조차 넘을 수 없는, “아무래도 안 되겠는걸”에서처럼, 또는 헤밍웨이의 “깨끗하고 밝은 장소(Cean Well-Lighted place),” “나다(Nada)”에서 기다리는 사람의 기도를 넌지시 암시하는 것처럼, 미묘한 변화는 두 개의 막 사이에 반드시 존재한다. 두 번째 막에서, 일단 잎이 진 나무에는 헝겊조각이 걸려있다. 포조와 럭키 사이의 밧줄은 더 짧아지고, 이제 한 사람은 벙어리가 되고 다른 사람은 장님이 된다. 럭키는 웅변조의 독백을 뿜어낸다. 그 연기가 끝난다. 고도(Godot)는 결코 오지 않는다. 주제 “아무래도 안 되겠는걸”은 등장인물 속에서 체현되고, 대화 속에서 목소리가 되며, 여분의 장면 속에서 뇌리를 떠나지 않게 지시되며, 무대상에서 동작의 결핍으로 명시된다. 이러한 동기(motif)의 반향은 음성적 주장(assertion) 등에 대한 시각적 모순이며, 명령적 “가자(Let's go)”는 결코 출발로 이행되지 않는다. 연기는 “아무것도 없는 것에 대하여 너무 야단법석이다.” ―즉 아무것도 없는 것이 어떤 무엇을 너무 많이 발생시킨다. 의미 없는 회화와 의미 없는 연기는 등장인물의 의미 없는 삶을 반영한다. 그들은 아무데서도 오지 않았으며, 그들이 존재했던 곳에 대한 확신도 없고, 그저 아무데나 가고 있다. 그들은 정지된 애니메이션의 상태로, 기다리는―즉 “고도”라고 하는 어떤 무엇을 기다리는 상태로 체류한다. 사뮈엘 베케트는 인간의 조건을 “우리가 최후의 리얼리티에 대하여 대답을 하지 못하는, 우리가 그것에 대하여 물을 올바른 질문조차도 알지 못하는 것과 거의 마찬가지로서의 어떤 것으로” 나타낸다(Ulmer 17). 프랑스 비평가 제겔(Sylvain Zegel)은 파리에서의 첫 공연 이틀 후에 “고도를 기다리며(Waiting for Godot)”에 대한 첫 번째 논평을 썼다. 제겔(Sylvain Zegel)이 식별하고 있는 관찰은 사뮈엘 베케트 연극의 진수를 들추어냈다.

 

모든 휴머니티를 대표하는 이러한 두 방랑자는 우리들 중의 누군가가 발언할는지 모르는 소견을 발언한다. 이러한 두 사람은 말다툼하며, 그들 스스로 즐거워하며, 싫증내며, 서로 간의 이해 없이 말한다. 이 모든 것을 행하는 그들은 몹시 바쁘다. 시간을 보내며. 그들이 살고 있다고 하는 것을 생생히 하거나 그들 스스로 느끼며.

 

많은 세월이 지난 지금도, 현대 미니멀리스트 소설의 기술적 특징(특히 특성, 행동양식, 그리고 등장인물의 동기부여[비동기부여])은 거의 같은 말로 묘사될 수 있다.

나중에 미니멀리즘의 특징으로 표면화되고 있는 사뮈엘 베케트의 기본으로서의 주제적 디자인의 또 다른 의미작용적 특징은 시간의 애매한 성격이다. “고도를 기다리며(Waiting for Godot)”의 두 개의 막 사이에서, 시간의 해결할 수 없는 가치는 연극세계 안에 귀속되었다. 관객은 먼저 휑뎅그렁한 나무였던 곳에 이제 나뭇잎이 있게 되었기 때문에 그것이 어떤 밤이라기보다 오히려 낮에 존재했음을 알 수 있지만, 그들은 회화로 확실하게 언급할 수 없는데, 그 이유는 그 대화가 첫 번째 시퀀스에서 했던 바로 그것 같기 때문이다. 나무의 변화 이외에, 어떤 시간이 경과한 기호는 포조와 럭키 사이의 밧줄의 짧아진 길이이며, 그 터무니없음은 다른 둘의 명백한 동일성과는 완전히 다른 벙어리와 장님 이 둘로 변한다. 디디와 고고는 1차적이다. 즉 그들은 나날의 변화가 알아차릴 수 없을 만큼 미세한 매일 그만큼의 매일, 어디로든지 결코 갈 수 없는 것 같다. 이와는 현저히 달라서, 포조와 럭키의 시간은 완곡하다. 왜냐하면 그들은 계속 전진하지만, 재등장하기 때문이다. ―즉 주기적으로, 어디든지 그들은 존재했다. 그들의 변화는 그들의 부재의 공간 때문에 더 눈에 띤다. 그때 시간은 직선과 원형, 그리고 경과된 시간 ―또는 편승된, 투시도법(perspective)에 의지하는, ―즉 시각적으로 양측 양식에 명확하고 숨김이 없는 시간의 결과와 동시에 나타나게 된다. 철학적 변형과 시간 이동의 이렇게 눈에 보이는 표출은 미니멀리스트 소설의 중요한 구성요소이다.

만약 사뮈엘 베케트의 미학적 사이키(프시케)가 미니멀리즘을 위한 철학적 모체로 고찰될 수 있다면, 그와 마찬가지로 헤밍웨이의 미학적 형식 또한 현대 미니멀리즘의 산문, 특히 레이몬드 카버의 작품과 함께 시작하고 있는 문체론적 생식기관과 동일시될 수 있을 것이다. 이 깨끗하고 예리한 산문 스타일은 오늘날 헤밍웨이 소설의 등장인물로 알려진 지극히 평범한, 비영웅적 등장인물에 의해 언급된 대화로 채워진다. 헤밍웨이는 주장한다. 작가는 “그가 알고 있는 것을 생략할는지도 모르며, 만약 작가가 충분히 진실하게 쓰고 있다면, 독자는 작가가 체호프의 모범 소설, 즉 지나치게 많이 언급하는 것보다 충분히 언급하지 못한 것이 더 좋은 단편소설과 상관되고 있는 그들을 진술한 것처럼 이러한 것들에 대한 감정(feeling)을 갖게 될 것이다.”라고. 또한 결합은 헤밍웨이의 효과와 조이스의 “먼저 기본적으로 의사소통이 안 되는 그렇게 터무니없는 인간의 복잡성을 은유적으로 전달하면서도 그저 평범하게 눈에 보이는 리얼리티의 사실적 묘사로만 보이는 것을 만들고 있는 시도” 사이에 존재한다(May The Short Story 66). 이러한 연결은 미니멀리스트의 단편소설에서 유래된 미니멀리스트의 미학을 산출한 문학이론과 기교의 발전적 연속으로 연결되는 고리이다.

이러한 융합(coalescence) 스타일을 잘 예증하고 있는 것이 헤밍웨이의 단편소설 “흰 코끼리 같은 언덕(Hills Like White Elephants)”이다. 이 소설은 고전적으로 말수가 적은 헤밍웨이의 산문 스타일을 반영하며, 파탄의 위기에 가장 흔한 삶의 의미, 그리고 사회적으로 썩고 오염된 인간관계의 감정을 전한다. 헤밍웨이의 소설과 매우 공통적인 이러한 주제적 기본요소는, 더 나아가 당대적(contemporary)으로 적용하면, 오늘날 미니멀리스트 작가의 많은 소설 속에 흔히 나타난다. 이러한 소설에 나타나는 리얼리티의 헤밍웨이적인 양식은 리얼리즘의 체호프적인 모델, 즉 마음의 복합(갈등) 상태, 은유의 조이스적인 적용을 반영하는 구체적 세부묘사의 사용과 결합하며, 그 작가에 의해 만들어진 매개물은 주관적 세부묘사와 유사하게 커뮤니케이션이 될 수 있다. 이러한 커플은 출발역과 도착역 사이에 있는 교차점의 기차역에서 기다린다. 그 사실적 장치와 상태는 그들의 관계가 여행과 같은 모든 삶의 광범위한 상징을 환기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교차로에 있는 사실을 은유적으로 묘사한다. 4페이지보다 적은 분량의 이 소설은 폭로(exposition)의 짧은 한 단락을, 그리고 내러티브의 대부분을 떠맡으며 대화의 끈을 장식하고 있는 몇 가닥의 짧은 기술을 포함한다. 얄궂게도 이 소설이 비록 “미국인과 그와 함께 있는 소녀” 사이의 회화를 통하여 주로 폭로되고 있을지라도, 효과적인 커뮤니케이션은 그 둘 사이에서 좀처럼 드러나지 않는다. 사실, 가장 눈치 빠른 독자는 어느 쪽이든지 간에 그 커플이 실행하는 것보다 더 잘 이해할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 독자에게는 등장인물이 변화하는 말보다 더 많은 정보가 제공되지 못하는데, 그 이유는 그 약간의 밀담(密談)이 그 커플 스스로 이미 알고 있거나 발생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는 것하고만 객관적으로 관계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소설 안에 거의 존재하지 않는 내레이션은 사설적인 주석이나 평가 없이 제공된다. 그러면 어떻게 독자들은 그것을 이 작은 드라마 안의 참여자보다 더 잘 이해할 수 있는가? 내러티브적인 애티튜드(attitude)의 결과로서의 그 독자는 객관적 관찰자로 위치가 잡히며, 정의하면 그것은 편견에 치우치거나 편견에 치우치지 않은 통찰을 제공하는 투시도법인데, 그 이유는 그것이 항상 다른 사람들의 문제의 원인을 찾아내거나 “보는” 것보다 더 쉽게 보이기 때문인 것 같다. 어떤 독자들은 상태의 보편성에 의해 조성된다. 이렇게 무력한 축어(逐語)적 변화는 요컨대 그들 감정의 종류와 정도를 무엇이든 정확하게 표현하는 대중의 무능력을 암시한다. 그 이유는 그 커플 간 투쟁의 실제적 근원이 “그것(it, 즉 여러 가지 형식[그것, 유산; 그것, 아기; 그것, 문제]의 문제를 지시하고 있는)”으로 단순하게 그리고 아주 흔하게 지시되기 때문이며, 이러한 대명사의 애매함은 남녀 간의 관계를 복잡하게 하거나 오염되게 할는지 모르는 어떤 것이 만들어지는 투쟁을 허락한다.

은유적 결합에 부가해서, 어느 문학 연구자에 의해 이루어진 면밀한 분석은 시간의 문제와 함께 독자에게 내놓고 있는 이야기를 폭로한다. 그 이야기의 첫 순간에, 엄밀히 말해서 독자는 “40분 안에 바르셀로나(Barcelona)에 도착할 것이라고 하는 표현”을 듣게 된다. 그러나 비록 그것이 그 이야기를 읽는 시간의 가치를 거의 절반가량 얻게 될지라도, 끝내 “기차는 5분 안에 도착한다.” 35분은 기차역에서 지나갔다. 15분이나 그 밖의 시간들엔 무엇이 일어났는가?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 미니멀리즘은 어떤 것이 잃어버린 시간(침묵, 아무것도 말하지 못하는 동안의 시간. 흔히 투쟁이 있을 때, 변화 간 이러한 긴 휴지는 불유쾌한 침묵을 지시한다)만을 오직 떠맡을 수도 있다는 것을 이유로 모순(discrepancy)에 대해 주목하는 것을 중요시하며, 시간은 생각하는데 소비됐지만 생각하거나 느끼는 것이 실제 커뮤니케이션으로 이행되는 것은 아니다. 시간은 과거에 대해 소비하고 현재와 미래의 반향에 대해 고려하는데 소비한다. 시간은 말을 선택하는데 소비한다. 시간은 “그것(it)”을 어떻게 말할까 어림하려고(figure out) 시도하는데 소비한다. 시간은 “정의”를 선택하려고 시도하는 반면에 삶은 이러한 교차로에서 속을 태우게 된다. 모든 이러한 가능성은 출발과 도착(출생과 사망, 과거와 미래) 사이의 중간, 즉 어쩔 수 없이 선택하는 교차로에서 단기체재 하는 여행과 같은 삶의 은유적 장치로서의 개연성이 된다. 이 장소를 떠날지 안 떠날지 모르지만, 차라리 “내가 여기서 꼭 출발하해야만 하는 노정(路程)이다.”

헤밍웨이의 스타일은 아주 짧은 내러티브적 목소리 바로 그것이다. 그는 각각의 단편소설에서 초라한 내러티브적 세부묘사와 관련된 특별한 목소리를 창조한다. 따라서 그의 내레이터는 말하는 것과 말하지 않는 것을 선택한다. ―즉 명백히 폭로된 것을 병렬시키고 그것은 함축에 의해 폭로되거나 또는 생략에 의해 강조된다. 명사, 동사, 형용사, 부사 등 내레이터가 선택하는 모든 것은 소설-디자인의 의도적인 구성요소이며, 소설의 최종효과를 산출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세부묘사와 이야기를 서정적으로 만드는 통합양식으로서의 그들의 조직과 마침 그것이 의미와 동조(同調)할 때 사실적이고 자연적인 것 같은 것을 만드는 것”으로서의 내레이터의 선택이기 때문이다(May "Chekhov" 201). 헤밍웨이는 폭로와 기술을 거의 존재하지 않는 제3의 인물과의 대화를 통하여 그들 자신의 말로 그들 자신과 그들의 이야기를 폭로하는 그의 등장인물을 허락하는 것을 매우 자주 선택한다. 단순한 언어는 객관적 투시도법을 암시하고, 공적 보고서의 어조를 포기한다. 독자는 등장인물의 평가적 기술을 수용하고, 그것은 내레이터로부터 직접적으로라기보다 차라리 등장인물의 한 사람으로부터 오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 기교는 세상에 알려진 헤밍웨이의 소설 안에서 쉽게 식별될 수 있다. 이렇게 짧은 폭로와 함께 시작하는 “프란시스 마콤버의 짧고 행복한 삶(The Short Happy Life of Francis Macomber)”은, “지금은 점심시간이고 그들은 발생한 것이 아무것도 없는 것을 있는 체하고 있는 정찬(正餐) 텐트의 초록색 천막 입구의 자락 아래 모든 것을 설치하고 있었다.” 이러한 관찰은 세 명의 야영자 사이의 짧지만 긴장된 대화에 의해 곧 추적된다. 이렇게 퉁명스런 개시로부터 독자는 시간, 장치, 투쟁을 추론할 수 있다. 더 나아가 짧은 폭로와 대화의 혼합된 밀집(간결)은 과거, 현재의 위업을 환기시키고, 미래를 유발시킨다. 언어는 준비 없이 하는 리포터적인 어조를 성취하는 어떤 가위로 잘린 것 같은 리듬으로 방출되어, 성글고 부족하지만, 안달이 나서 긴장된 그리고 잠재적으로 폭발하기 쉬운 세계를 창조한다. 탐구자 각각의 시각적 특성과 역사적 배경을 제공함으로써, 내레이터는 마르고 마콤버(Margot Macomber)를 직접적으로 기술하는 것을 선택하는데, 그러나 그 경우 마르고 마콤버의 눈을 통하여, 즉 어떤 포착할 수 없는 작가적 권한과 함께 나타난다. 내레이터적인 투시도법 안에서의 이러한 변화는 독자가 그의 시점에서 명백한 변화의 감각을 가지고 있지 않은 것으로 매우 교묘하게 성취되며, 그래서 그것은 먼저 프란시스 마콤버(Francis Macomber)가 극적으로 표현된, 또는 특히 더 비겁자 정도로 행동함으로써 지각된, 그의 아내의 눈을 통하여 존재한다. 그 내레이터는 등장인물, 장치, 투쟁, 그리고 객관적으로 어떤 사건을 도입했지만, 전략적으로 프란시스 마콤버의 아내의 지각 안에서 만들어진 그의 비겁함의 보고서로 매복되었다. 그 다음의 대화는 객관적 성격묘사의, 남몰래 나타나는 주관적인 정보를 허락하는 기교의 핵심으로 재생된다. 등장인물들은 그들 자신의 말로, 생각으로, 연기로, 그리고 감응으로 그들 스스로를, 그리고 그들 상호간을 정의 하며, 그렇게 해서 외관상으로 언뜻 보기에 편견이 없는 것으로 체류하는 내레이터를 허락하고 있다.

이야기를 통해서, 헤밍웨이는 사태와 등장인물, 그리고 고요함, 신중함, 리포터-내레이터의 편안한 어조 모두를 형성하는 긴장 사이의 미묘한 균형을 유지한다. 이런 유형의 내러티브적 기교는 배제(exclusion)라고 하는 헤밍웨이의 미학에 엄격히 적용되는데, 그 이유는 그것과 함께 내레이터는 모든 것을 존재케 하지만 지워지며, 독자는 보다 더 직접적으로 이야기를 경험하는 것으로서의 감각과 함께 남아있기 때문이다. 다음에 그 이야기는 종결된 내레이터보다 차라리 독자 쪽에 의지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야기에 귀착하는 것과 함께, 헤밍웨이의 기교로 인하여 생긴 결과는 실제로 발생된 것을 초월하여 진전하고 있는 하나의 논쟁, 즉 프란시스 마콤버는 어떻게(그리고 왜) ―터무니없는 사고로 또는 계획된 살인으로 죽는가, 하는 논쟁으로 존재한다.

배제의 시학은 작가들이 어떤 이야기로부터 반드시 생략하여야만 하는 것을 제한하지 못한다. 이러한 기교의 논리는 내부에 남아있는 것이 필요한 것과 외부에 남게 될 수 있는 것을 선택하는 작가의 자각 상의 단언에 의해 “포괄(inclusion)”의 콘셉트에 역점을 두어 다룬다. 여기서 논의된 작가가 미니멀리스트 스타일의 발전에 대한 유일한 선구자 또는 기여자는 아니다. 그들은 배제의 미학, 또는 배제에 의한 포괄, 또는 이러한 용어의 어느 또 다른 결합의 미학을 암시하는 스타일에 무자맥질하는 유일한 작가도 아니다. 포우는 예견된 효과를 산출하기 위하여 조화, 텍스트적인 질료의 통제로 믿었다. 그들의 시대에, 크레인사뮈엘 베케트는 개인감정을 섞지 않은 장소로서의 세계를 극적으로 표현했으며, 그리고 특히 사뮈엘 베케트는 그러한 세계 안에 존재하려고 하는 어떤 부조리한 인간을 증명하는데 진력했다. 체호프와 헤밍웨이는 폭로되어야 하는 것과 언급되어서는 안 되는 것에 부여된 어떤 의식적 고찰과 함께 어떤 이야기를 분명하게 언급하는 것으로 믿었다. 미국의 단편소설이 발전하는데 있어서는 다변적 문학공정이 존재하고 있는데, 그것은 이들과 또 다른 많은 작가들의 예술적 감수성에 많은 빚을 지고 있다. 여기서 개개의 작가가 논의되지 못하는 것은 그들이 이러한 현상에 관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공간의 결핍 때문에 배제된 결과이다.

여기서 다루어진 작가는 단편소설의 기교에 기여했다고 하는 확신을 가지고 선택되었다. 문학적 미니멀리즘은 단편소설의 어떤 기본적 함수와 상관된 특징을 내포하는 것으로 나타나며, 그래서 이러한 작가들의 예술적 방법은 미니멀리즘의 발전에 어떤 영향력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확정될 수 있다. 헤밍웨이와 함께 이러한 영향력은 대개 그들의 초기 작품 안에 그리고 레이몬드 카버의 스타일 안에 정위(定位)될 수 있는 극점(極點)을 달성한다.

 

3. 레이몬드 카버와 미니멀리스트의 미학

   (PEN 문학 통권 87호 2008. 6. 10)

 

미국소설의 미니멀리스트적인 경향은 이제 헤밍웨이의 고전적인 문학기교, 즉 그 청정과 절감으로까지 더듬어 올라갈 수 있으며, 레이몬드 카버의 소설에서 그 자신이 원형임을 뽐낸다. 레이몬드 카버가 비록 헤밍웨이와 그의 스타일이 유사하다는 것을 인정했다고 할지라도, 그는 “영향이라기보다 차라리 칭찬의 말로” 언급하기를 더 좋아했다(Saltzman 76). 또한 레이몬드 카버는 현대 거장 중 그가 좋아하는 작가로서 체호프와 플로베르(Gustave Flaubert)를 포함시켰으며, 종종 대학에서 창작지도 교수였던 존 가드너(John Gardner)에게 감사하다는 말을 했다. 직업적인 작가로서의 경력이 비교적 짧음에도 불구하고, 레이몬드 카버는 그의 세대에서 가장 강력하고 혁신적인 단편소설 작가 중의 한 사람으로 비평적 명성을 확립했다. 그는 “하이퍼리얼리스트적인 미니멀리즘(hyperrealistic minimalism)”과 “적은 것이 더 많다(less-is-more)”는 주제를 내건 학파라고 하는 용어로서의 신조어를 만들어낸 존 바스(John Barth)가 그러한 단편소설 작가들의 주요한 배후인물이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1970년대 후반에 시작된 단편소설의 르네상스를 주도했던 리더로서 많은 문학 비평가들에 의해 그와 동일시되었었다. 레이몬드 카버의 처녀작 세 편 중에서 대부분의 작품이 미니멀리스트 소설의 극점의 모델로 인식되었다.

모든 훌륭한 작가들이 불가사의한 창작과정에서 발생하는 작품의 독특한 변화를 각각 창조할 수 있었다고 하는 그러한 관점에서 보면, 선배, 스승, 편집자, 그리고 친구들에게 어떤 무엇을 단단히 신세지고 있는지도 모르며, 그러나 천부적으로 가지고 있는 재능의 현존과 환경의 뿌리 깊은 영향이 경시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캘리포니아에서, 레이몬드 카버는 다양한 블루컬러의 직업으로 그의 아내와 아이들을 부양하면서, 여가를 이용하여 소설을 썼다. 부족한 돈과 시간으로서의 그러한 평범한 고통으로, 게다가 의사소통의 평범한 결핍으로 시달리며, 그 결혼생활은 폭풍우처럼 동요하게 되었으며, 드디어 극단으로까지 치달았고(특히 음주량의 증가로), 결국 이혼으로 끝을 냈다. 후에, 이러한 사건으로 인하여 레이몬드 카버는 알코올 중독자가 되었다. 1977년 6월부터 한 해 동안, 그는 폭음을 하고 있었고, 1988년 8월 2일 그가 사망할 때까지 지속했던 테스 갤러거(Tess Gallagher)와의 인간적인 그리고 직업적인 친밀관계에 금이 가기 시작한 것은 그때부터였다. 레이몬드 카버에 의하면, 그가 알코올 중독에서 회복된 경험은 삶에 있어서 그가 전도(前途) 있는 것으로서의 근본적인 변화를 초래케 했다. 그는 그의 처녀작 세 편 속에서 자신을 “황폐한 소설작가”라고 고백하지 않고 삶 속의 신념과 기쁨 같은 것으로 표현했다(Cochrane 79). 이야기하는 마음가짐이 변했을 뿐만 아니라, 스타일도 표준보다 짧은 미니멀리즘으로 변해버렸다. 비록 처음에 가치가 떨어지는 전기문학으로 보이는 것이 확고할지라도, 또는 비록 어떤 작가의 소설에 근접해 있다는 것이 타당할지라도, 레이몬드 카버의 경우에, 문학 비평가들은 독특한 것으로, 어떤 것은 그가 술독에 빠졌다가 나온 뒤에 글쓰기의 스타일이 의외의 것으로 변했다고 언급한다.

대부분의 작가 지망자들은 “당신이 알고 있는 사물에 대하여 써라”와 같은 규칙에 친숙하다. 레이몬드 카버 역시 이것을 엄밀하게 지켰다. 그는 그의 소설에서 자전적 기본요소에 대하여 솔직하게 쓰고 언급했다. 레이몬드 카버의 소설주제에 대한 민첩한 반성은 실재적 삶과 소설 간의 결합을 확실하게 한다. 모리스 딕스타인(Morris Dickstein)의 아래와 같은 기술은 대부분의 문학 비평들과 견해를 같이 한다.

 

레이몬드 카버의 소설 대부분은 태평양연안 노스웨스트에서 만들어진다. 중상류층 삶의 본류와 먼 그의 블루컬러 성격의 삶은 세련된 도시풍의 아이러니와 궤변을 함께 가지고 있다. 이러한 소설은 우주론적 딜레마를 다루지 않지만, 그러나 결혼생활의 일상적인 불행과 알코올 중독, 부랑자적 불성실, 따분한 직업, 오래 지속되었던 실직상태와 같은 문제 속의 가정생활을 다룬다.

 

레이몬드 카버에 대한 회고 속에서, 리처드 에더(Richard Eder)의 논평은 다음과 같은 세속적 시나리오로 확장되어 나타난다. 즉 “삶은 그것을 떠받고 있는 것이라곤 아무 것도 없지만, 그러나 낡아버린 냉장고이며, 실패한 직업이며, 자취를 감춘 가정이며, 그리고 아마 아이들 또는 어린시절의 기억이 될 것이다(3).”

레이몬드 카버는 알코올 중독으로부터 회복되기 전에 그리고 미니멀리즘으로부터 스타일리스트적인 전환이 보고되기 전에 쓴 세 편의 단편소설을 발표했다. 즉 “부탁이니 제발 조용히 해줘” “성난 계절과 그 밖의 이야기(Furious Season and Other Stories, 1977),” “사랑에 대해 말할 때 우리들이 하는 이야기(What We Talk About When We Talk About Love, 1981)”를 말한다. 이 세 편 중에서 특히 “사랑에 대해 말할 때…” 안에 절감된 텍스트는 노동계급의 절망과 뿌리 없음을 기록한 작가라고 하는 명성을 그에게 안겨주었다. 그러나 그 세 번째 소설을 쓴 뒤에, 레이몬드 카버는 “아무것도 쓸 수 없음을 느꼈다. 더 나아가 그가 미학적으로 불만족하고 있는 그 절감된 소설로서의 텍스트를 발견했던 그 회상에 잠겨, 특히 논평자들이 그에게 문학적 미니멀리스트라는 명칭을 덧붙이기 시작한 뒤부터(Gentry, ⅹⅴ, ⅹⅲ).” 1981년 이후에 몇 번 인터뷰를 갖게 됨으로써 표면화된 용어 미니멀리즘을 그는 불신하고, 다른 유형의 소설을 창작하는 데 의식적으로 전념하고 있는 것 같았다. 비평가 마셜 브루스 젠트리(Marshall Bruce Gentry)와 윌리엄 L. 스툴(William L. Stull)은 레이몬드 카버의 스타일리스트적인 변화를 그들 자신의 말로 기록하고 있다.

 

1981년과 1983년 사이에 레이몬드 카버는 회복되어 때로는 그가 “사랑에 대해 말할 때…”로 환원시켰던 텍스트를 다수의 소설로 확장시켰으며, 더 나아가 동일 기간에 그는 보다 풍부하고, 보다 알차고, 그리고 보다 더 희망에 찬 비결로 12편의 새로운 소설을 공들여 썼다. “나의 소설은 그들이 5년 전에 했던 것보다 지금을 더 긍정하려고 한다.”라고, 1982년 봄 학생과의 인터뷰에서 언급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그것은 폭 넓은 단계가 시작되는 레이몬드 카버의 발전이라고 할 수 있는데…, 애덤 마이어(Adam Meyer)는 “모래시계 양식(hourglass pattern)”이라고 교묘하게 언급했다. (ⅹⅳ)

 

레이몬드 카버의 경력 가운데 이러한 두 번째 단계에 썼던 새롭고 교정된 소설은 “대성당(Cathedral, 1983)”과 내가 “전화를 걸고 있는 장소(Where I'm Calling From, 1986)” 두 편으로 발표되었다. 그동안 그는 열정적으로 산문, 운문, 그리고 픽션, 즉 평론, 시, 소설 작품(1983)을 발표했다. 비평가들은 그가 시, 그리고 소설 “강물이 서로 만나는 곳(Where Water Comes Together with Other Water, 1985)”과 “울트라마린(Ultramarine, 1986)” 두 편 이외에는 아무것도 쓰지 못했던 기간을 레이몬드 카버의 문학경력 가운데 세 번째 단계와 동일시한다. 레이몬드 카버가 그의 경력 가운데 후기에 계속 성공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그것이 트레이드마크인 미니멀리즘과 가장 동일하다고 인정받고 있는 것을 그가 혐오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최초로 그를 문학적 주목의 대상으로 밀어붙이고 있는 소설의 특별한 브랜드였다.

아서 M. 샐츠맨(Arthur M. Saltzman)은 레이몬드 카버를 “문장에 즐거움을 주는 정련공”이라고, 어떤 관찰력이 다시 말해서 미니멀리즘의 힘이 배제의 그 시학 속에 웅크리고 있는 이론을 강력하게 지원한다고, 정의한다(7). 래리 매카페리(Larry McCaffery)와 신다 그레고리(Sinda Gregory)와의 인터뷰에서, 레이몬드 카버는 그의 작품을 정련하기 위하여 그것을 무턱대고 좋아한다고 설명한다. 즉 “문장을 매만지며, 그들과 놀고, 그들을 고쳐 쓰고, 그들이 어쩐지 딱딱한 것 같으면 그들을 벗겨내며 항상 사랑했다…. 그것은 나를 되돌아보고, 페이지 위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을 정련하고, 불필요한 삽입어구를 제거하는 세계 속에서의 가장 자연스러운 취미였다(74)”고 한다. 레이몬드 카버의 미니멀리즘을 향한 성벽은 자연적인 것 같다. 같은 인터뷰에서, 그는 그 자신의 예술적 콘셉트의 타당성으로 플로베르의 “미학개념”을 인용한다. 먼저 레이몬드 카버는 다음과 같은 플로베르의 말을 인용한다. “작품 속의 예술가는 그의 작품에 한해서 눈에 보이지 않는 그리고 매우 강력한 신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 신은 도처에서 지각되지 않으면 안 되지만, 그러나 어느 곳에서도 보이지 않는다.” 그러고 나서 덧붙여 말한다. “특히, 나는 어느 곳에서도 보이지 않는다고 하는 그 마지막 부분을 좋아한다(74).” 어떤 비평가는, 레이몬드 카버의 스타일은 그의 등장인물을 괴롭히는 애매성에 타당성을 갖게 했던 것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즉 “은어(또는 사투리)를 허용하는 한계로까지 진행된다면, 경험은 지각의 허약해진 어휘가 되어야만 한다. 대화는 짧고, 변명할 여지가 남겨지고, 그들이 어떤 것에 대해 필요해지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의 투영으로 존재한다. 현재의 삶에 대해 아연실색케 하는 성격은 그의 소설에 스며든 축어적(逐語的) 무능력이 선천적으로 존재하기 때문이다(Saltzman 7~8).” 레이몬드 카버 소설의 등장인물은 “특별히 감수성이 강하거나 내관적인 것 같지는 않지만, 그는 그들에게 결코 겸손하지 않으면서도, 그들을 직접적으로 판단하지도 않는다. 대신에, 그는 그들의 압축된 자각을 그의 기교로 조작한다(Dickstein 508).” 레이몬드 카버와 가장 우수한 미니멀리스트 작가들이 각기 창조한 것들을 허구적 등장인물들과 함께 공유하여 나타내는 것은 “말의 지시적 적당함의 막연한 느낌”이다. 그러나 언어의 정련공처럼, “그들은 문장 운율의 냉정하고 객관적인 판단을 공유한다(Saltzman 10).”

게다가 공유 문장을 안정시키기 위하여, 레이몬드 카버(즉, 미니멀리스트)의 스타일은 가장 우수한 언어체계에 선천적이며 격상적인 결합의 빈틈없는 자각을 반영한다. 언어의 격상적 성격을 이용함으로써, 레이몬드 카버는 리얼리즘의 껍질 안에 이러한 주체적 상호관계를 관현악곡처럼 조직화한다. 이러한 결합은 단지 리얼리즘에 불과한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생산하는데, 그 이유는, 레이몬드 카버의 어떤 소설 속에는 “어떤 이상함, 즉 신화의 꼬투리”가 발견되기 때문이다(Eder 3). 미니멀리즘의 옹호자이자 비평가인 킴 A. 헤르친저(Kim A. Herzinger)는 미니멀리스트 작가의 디자인을 리얼리즘의 전통과 비교하며, “전통적 리얼리스트들은 하나의 세계를 가지고 있었으며, 그것을 기술하는데 관념과 감정의 복합(언어로 다듬은; 기술적 관념과 은유와 같이 언급된 수사의 결합-역주)을 사용했고, 미니멀리스트들은 그들이 기술하는(원문 그대로) 세계를 이용하는 관념과 감정의 복합(언어로 다듬은; 기술적 관념과 언급되지 않은 심층의미의 결합-역주)을 가지고 있다(20)”고 한다. 킴 A. 헤르친저의 단평은 “객관적 상관물”의 미니멀리스트적인 적용으로서 다른 방법으로 동일시될 수 있다는 것을 지시한다. 레이몬드 카버는 그것을 이런 식으로 언급한다. “시 또는 단편소설 속에서 흔해빠진 사물과 흔해빠지고 아주 적확한 언어를 사용하고 있는 대상에 대해 쓰는 것이, 그리고 이러한 사물들(의자, 커튼이 드리워진 창문, 포크, 돌, 여자의 귀고리)에 막대하고 깜짝 놀라게 하는 힘을 부여하는 것이 가능하다("On Writing" 24).”라고. 그것이 가능한 이유는 레이몬드 카버가 “적은 것이 더 많다. 즉 보다 적은 심리상태, 보다 적은 문학적 언어, 보다 적은 연속적 내레이션, 독자 자신으로서의 우리가 조립하지 않으면 안 되는 선언적(選言的, disjunctive) 세부목록을 소중히 다뤄 절약하여야만 한다”고 언급했기 때문이다. 레이몬드 카버의 소설은 픽션의 조립재료일습을 갖추고 있는 연장통과 같다(Dickstein 508).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기에는 모리스 딕스타인의 재치 있는 단평이 시사하는 것보다 레이몬드 카버의 미학이 그 이상으로 존재한다. 마르크 셰네티에(Marc Chénetier)는 레이몬드 카버의 소설을, “페이지 위에 나타나고 있는 말의 일차원적이면서 연속적인 해독을 충분히 초월하는 ‘메시지’를 가지고 있는 생략에 의해 기록된 공동(空洞), 즉 기묘한 무언을 향하여 쾅하고 갑자기 기세 좋게 그리고 멋지게 전진하기 시작하는 내러티브”로 본다(166).” 레이몬드 카버의 스타일에 놀라운 정밀성과 힘이 부여됨에 따라, 어떤 결핍과 천박함을 포함하고 있는 것으로 그가 그 용어를 지각하여, 본질적로 미니멀리스트와 동일시하는 것을 거절한 것은 잘못된 것이다. 작가 또는 비평가와 마찬가지로, 보다 좋게 기여했을지 모르는 문학은 미니멀리즘으로 라벨이 붙어있는 레이몬드 카버의 스타일보다 더 좋은 레이몬드 카버 스타일의 방식으로 정의되었던 문학적 미니멀리즘을 갖고 있었다. 조정적 접근으로서의 이것은, 작가에게 매우 훌륭하게 부여됨으로써, 달성된 역동적인 예술의 레벨로 글쓰기의 스타일을 향상시켰는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사실상 그 단편소설은 미니멀리즘의 모든 기본요소를 담고 있기 때문이며, 게다가 레이몬드 카버의 초기 스타일은 미니멀리스트의 기교 전체를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계는, A. M. 츠페레프(A. M. Zverev)가 미니멀리즘과 레이몬드 카버 양측에 각주로 쓰고 있는 1992년 그의 비평 논문 “미국적인 체호프의 러시아적인 관점(A Russian view of American Chekhop)”에서 그에 의해 잘 이해되고 있다.

 

아주 흔해빠진 상황 쪽으로, 뚜렷하게 유형적인, ‘통계적으로 평균적인’ 성격과 굉장히 케케묵은 이야깃거리인…, 거의 항상 현세의 밀집단층으로, 또한 언외의 의미인, 사실상 체호프적인, 모두 언급된 단평과 직접적인 의미보다 더 많이 의미작용을 하고 있는 모든 저자의 말로 꾸려진…, 편견(또는 선입관, bias), 즉 이미저리의 극단적(extreme) 절약에 의해 성격이 만들어진…(112).

 

레이몬드 카버 초기 소설의 어떤 것에 대한 비평적인 분석은 미니멀리즘의 기본성격을 정의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알코올 중독으로부터 그가 회복되기 전 그의 최초의 특징과 동일시하는 양측 모두에 기여한다. 이러한 연구는 미니멀리스트로서의 특별한 재능을 입증할 뿐만 아니라, 용어 미니멀리즘의 비평적 적용이 문학적 평가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재확인한다. 대신에 잘 실행될 때, 그 용어는 존재(being)의 복합 상태인, 그리고 보편적 인간 조건의 기본요소와 서로 관계있는, 구체적 세부목록으로 나타나는 은어와 수사어구의 정교한 조정으로 귀속된다.

레이몬드 카버에 대한 비평적 연구에서, 유잉 캠벨(Ewing Campbell)은 레이몬드 카버의 단편소설을 “미국적인 막연한 불안과 절망의 간결한 해석”으로 보고, 미국적인 리얼리즘의 부흥풍조 안에서의, 레이몬드 카버의 작품은 예술적으로 그리고 상업적으로 합리적인 형식으로서의 단편소설의 부흥으로 생각된다고 지시한다(ⅳ). 레이몬드 카버가 가지고 있는 스타일리스트적인 방법의 격상적 천착(穿鑿)은 하찮은 것들의 그럴 듯한 박판(薄板, veneer) 아래의 보편적 의미를 방출하는 것과 같은 소설양식의 미니멀리스트적인 과정의 이러한 비평적 기술과 매우 유사하다.

 

각각의 소설은 히말라야 삼목으로 안을 댄 반침(半寢)의 판벽 널과 같다. 그 표면을 발로 문질러 닳게 해도, 더욱 더 그것은 그 본질의 어떤 것을 방출하는데 결코 실패하지 않는다. 거기에 감정적이며 지적인 쾌감이 있다. 왜냐하면 블루컬러의 절망으로든지 또는 통찰을 되찾는 것으로든지 하여간 어떤 것으로든지 새로운 모양으로 고쳐 만들어진 경험으로 레이몬드 카버의 구성을 시험하는 것은 삶이 마음의 눈앞에서 형상(shape)을 획득하는 것을 경험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구성된 광경과 사건의 어떤 이해는 작가와 함께 대화를 형성하고, 그러한 영적교통을 이끌어냄으로써, 우리는 우리자신을 알게 되고, 좀 더 분명하게 우리의 세계를 포착하게 된다(ⅹ).

 

이러한 요약은 “작가와의 대화”라고 하는 유잉 캠벨의 콘셉트가 교정된 것이건 아니건 하여간 정밀한 것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소설은 작가의 자취가 없고 그렇게 분명하기 때문이다. 거기에는 내레이터가 거의 없다. 유잉 캠벨이 암시하는 대화는 레이몬드 카버와 함께 있는 것이 아니지만, 그러나 차라리 소설과 함께 있는 것이다. 그것은 영적교통을 제공하는 소설이며, 그것은 자유로이 자기 자신을 발견하도록, 그리고 세계에 대해 크게 자각하도록 독자에게 개방되어 있는 것이다. 레이몬드 카버의 소설은 솔직히 “독자들에게 위임했던 단장(斷章)들을 독자들 스스로 완성하도록 요구했던 그 독자들 안에서 공동 제작으로” 만들어진 것이다(Saltzman 16). 이러한 교환이 발생할 수 있는 것은 곧 알아볼 수 있는, 즉 보통사람들이 보통의 삶을 영위하고 있는 장면 속에서의 낯익은 등장인물을 창조하기 때문이다. 레이몬드 카버의 초기 소설에 등장하는 격상으로서의 인물들에 대해, 어떤 비평가는 먼저 사회 변두리의 소외계층, 즉 술고래인, 정신장애자인, 실직자인, 그리고 학대 받는, 세일즈맨과, 평범한 남편과, 평범한 부인과, 웨이트리스와, 모텔 직원과 동일시된, 그리고 알코올중독, 간통, 불면증과 절망으로 납작해진 그러한 부류의 인간으로 지각된, 그 부정적인 인간으로 기술된 등장인물들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종류의 소설 속에서, 강조되는 그 중요성은 등장인물보다는 차라리 그 역할에, 그리고 이러한 역할과 그들이 그들의 개인적으로 부조리(어리석은 언행)에 대처하는 방법이 실패로 끝난 그 위에 정위된다. 소설적 등장인물 유형의 혼합 리스트로서보다 차라리 개인적인 발산 군(群)으로 고찰함으로써, 이러한 목록은 미국사회에서의 많은 민중을 묘사한다. 이보다 더 정밀한 정의는, 소설 속 이러한 등장인물의 출현이, “미국소설 속에서 리얼리즘과 지방분권주의로의 복귀, 즉 보통의 삶과 보통 민중의 재발견을…” 크게 다루었던 것이라고 언급된 단편소설의 르네상스 상에 있었던 같았다고 하는 그 충격으로 설명될 수 있을는지도 모르며, 레이몬드 카버의 잘 알려진 이 미니멀리즘은 모더니스트의 회의론과 절망의 용광로를 통하여 만들어진 후기-사뮈엘 베케트의 리얼리즘이다(Dickstein 508).

대부분의 문학 비평가들은, 레이몬드 카버의 등장인물을 지각하는데 있어서 그의 간결한 스타일만큼이나 그의 미니멀리스트 소설의 기본요소도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사랑에 대해 말할 때 우리들이 하는 이야기”에 관한 짧은 논평에서, 도날드 뉴러브(Donald Newlove)는 “강력한, 몽롱상태의 거의 객관적인 작품… 희망 없는 상태의 열일곱 이야기, 즉 그 결혼과 알코올중독으로 인한 파멸은 ‘차가운 스머노프의 열다섯’만큼이나 아주 부족한 산문 속에서 언급한 것”과 동일시한다(77). “성난 계절과 그 밖의 이야기에 관한 논평에서, 안 비티는 “레이몬드 카버의 소설은 문체상 독창적인 효과를 생산한다. 즉 그의 사실로서의 질료, 다시 말해서 사건의 분리된(객관적) 관찰은 더욱더 기묘함과 당황케 함이 되는 사건으로서의 힘을 쟁취한다(178)”고 언급한다. 안 비티는 “그의 주체 질료(subject matter)는 곧 평범하면서도 기묘하며…, 레이몬드 카버는 결혼에 대해 다음과 같이 쓴다. ―기묘한 속박과 결합, 두 사람 간에 인식된(또는 인식되지 못한) 언외의 강박관념이다(179).” “이웃(neighbors, 곧 객체 질료)”과의 단절에 대하여 안 비티는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그것은 거의 신화적이며…, 부연설명이 지나치게 완벽하고…, 그것은 당신의 눈에 비치는 빛 못지않게 분명하고 순전하며, 그것은 슬픔을 초월하는 어떤 무엇의 원인이다(179).”

모리스 딕스타인은 그의 소론(小論)에서, “평범함의 추구”에 대하여, 레이몬드 카버 소설의 그 민중 그 격상에 대해 언급했던 것과 병치적이라고 소견을 밝힌다. “그의 블루컬러 등장인물들은 중상류층 삶의 본류와 먼, 다시 말해서 세련된 도시풍의 아이러니와 궤변으로 삶을 영위한다(507).” 또한 모리스 딕스타인은 그들을 “특별히 감수성이 강하거나 내관적이지는 않은” 것으로 보지만, 레이몬드 카버는 “그들에게 결코 으스대지도 않고 그들을 직접적으로 판단하지도 않는다. 대신에, 그는 그들의 압축된 자각을 그의 기교로 조작한다(507~508)”고 주석을 단다. 워런 칼린(Warren Carlin)의 단평은 다음과 같이 기술을 계속한다. “레이몬드 카버는 우리가 단편소설 작가의 작풍과 결합했던 변화와 문학적 개성을 밖으로 많이 드러낸다. 그 등장인물들은 몹시 취한다. 그들의 말은 천진난만하다. 그러나 그 표층에는 아무것도 없거나, 거의 아무것도 발생하지 않는다. 등장인물들은 그들의 성생활이 천박하고, 일시적이며 좌절하고 있다는 것을 폭로한다(87~88).” “부탁이니 제발 조용히 해줘”의 엿보기 취미(voyeurism, 관음증), 인격의 분열, 그리고 레이몬드 카버의 기교에 관한 그들의 소론에서, 데이비드 복서(David Boxer)와 카산드라 필립스(Cassandra Phillips)는 먼저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인격의 분열은 인간 그 자신의 정체성과 삶으로부터의 일탈을 의미한다.” 그러고 나서, “그의 일탈된 등장인물은 일시적으로 타자를 추구하며, 레이몬드 카버는 그들 삶의 공허가 섬뜩하게 분명한 광경을 돌연 그들에게 부여하면서 그들을 매복시킨다(75).” 또한 데이비드 복서와 카산드라 필립스는 이 레이몬드 카버의 등장인물에 관해 상세하게 기술하고, 그들에 대한 개념을 정의한다.

 

그의 등장인물들은 실직자 그리고 비참하게 고용된 자, 향상지향(사회적․경제적 지위)의 일을 하고 있는 소수일원과 중류층이다. 그들의 결혼생활은 친밀한 정이 없고, 보다 나은 것으로의 변화에 대한 막연한 꿈으로 표현되지 못한, 실현되지 못한, 또는 승화된 결핍(needs)이다. 그들은 이웃 서민이며, “진짜 미국인”의 흔한 표상이다. 일반적으로 레이몬드 카버는 생기가 없는, 난잡함과 같은 삶을 영위하고 있는 등장인물들, 즉 직업 중에서도 세일즈맨, 거짓말쟁이 중에서도 작가, 한 학기 동안의 학생들, 결혼생활 중에서도 평범한 남편과 아내, 그리고 의식이 말똥말똥한 그리고 도저히 잠들지 못하는 불면증환자에 대하여 쓴다. 레이몬드 카버에게 선택된 과제는 이러한 민중들이 혼돈과 그들의 공허한 삶을 분리하는 커튼 뒤에서 흘끗 엿보며 갑자기 깜짝 놀라게 하고 있을 때 그 특별한 순간을 가장 적합한 언어와 상징을 통하여 시사하는 것이다. …그때 그들은 그들 자신의 경험의 관음증환자가 된다(76).

 

“매듭을 풀고, 그것은 레이몬드 카버의 소설에서 애매성으로 다시 묶이며,” 미가엘 고라(Michael Gorra)를 인용하여, 미가엘 거하트(Michael Gearhart)는 “비평가들은 이러한 등장인물들이 그들의 사회적, 윤리적, 그리고 정신적 마비상태의 원인이 되고 있는 말(무능력, 즉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말)로 그들의 좌절을 명확히 표현할 수 있는 어떤 무능력을 공유한다고 썼다는 것을 지시한다. 즉 ‘그 각각의 순간은 등장인물을 어리둥절하게 할 수 있고, 그(또는 그녀)를 무위(無爲)의 혼동으로 간담을 서늘하게 한다’(439)”고 한다. 결국 쥬디스 체틀(Judith Chettle)은 레이몬드 카버의 “생략된 것이 없어지지 않고 남아있는 것만큼 의미작용을 하고 있는 그 장소의 공유 스타일은 인간의 정신적 황무지의 이러한 인상을 강화할 뿐이다.”라고 넌지시 언급한다(1503).

레이몬드 카버의 단편소설은 완고하게 입이 무겁고 말하기를 꺼린다. ―소설 그 자체에 살고 있는 등장인물들처럼. 그의 선배 체호프와 헤밍웨이의 소설과 비교해보면, 레이몬드 카버의 소설은 거의 말없이 많은 것을 암시하고 있는 에두름으로 의사소통이 이루어진다. 그들은 이런 식으로 조용히 살았던 삶의 흑백 스냅사진과 아주 많이 닮았으며, 만약 침묵을 지키지 않는다고 한다면, 그것이 비록 솔직하고 단순한 것처럼 보일지라도, 언어로 언급된 그 기술은 고귀하게 명상되고 양식화될 것이다. 그의 소설 중 어떤 것은 아주 극소해서 그 안에 생명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 단순히 비인간화된 양식으로만 보이는 것 같다. 어떤 주제이든지 간에 레이몬드 카버의 소설은 때때로 충격적이며 적나라한 윤곽으로, 보통 하찮은 사건으로, 그리고 여백으로, 그들의 고립적인 성격을 전혀 분절할 수 없는 것 같은 등장인물의 과묵으로 존재할는지도 모른다. 레이몬드 카버 소설의 가장 기본적인 주제는 남녀간의 박약한 결합과 항상 절박한 것 같이 보이는 불가사의한 간격이다.

발표된 “사랑에 대해 말할 때 우리들이 하는 이야기”와 단편소설집에서 가장 흔한 것 중의 하나인 “춤추지 않으시겠어요?(What Don't You Dance?)”는 그가 결혼의 박약한 결속을 매우 흔한 연기로 묘사하는 것에 적용된 레이몬드 카버의 미니멀리스트 스타일 가운데 가장 우수한 예이다. 전형적인 레이몬드 카버의 줄잡아 말함 속에서, 명백히 하찮은 장면의 은밀한 기술은 붕괴된 결혼생활과 아내 부재의 순수 환경을 넌지시 언급한다. 즉 다음과 같은 표현이 그 예이다. “부엌에서 그는 마실 것을 쏟아 붓고, 침실은 앞마당에 만든다. 매트리스는 벗겨지고, 줄무늬 시트는 양복장 위에 두 개의 베개와 나란히 놓여있다(3).” 다음 시퀀스에서, 사이가 틀어진 아내는 소유격 대명사 "her"의 부재로서의 원형(antecedent)이다. 애매한 그리고 물러난 그녀에 대한 변죽울림 전체는 앞마당 잔디밭에 배치됨으로써 세간에 대한 남편의 관찰에 의한 발언 속에 묻힌다. “그러한 일이 없었다면, 물건들(그의 침대 옆에 있던 책상과 독서 등, 그녀의 침대 옆에 있던 책상과 독서 등)은 그것들이 침실에 있었던 방식 그대로 놓여있었을 것이다(3).” 그 사람은 실내 생활품을 앞마당으로, 모든 사람들이 보는 밖으로 내동댕이치고, 그리고 그것은 싸구려 물품처럼 보인다.

 

그날 아침 그는 찬장을 청소했고, 살림방에는 세 개의 납지용기만 있을 뿐, 모든 소지품은 집밖에 있었다. 그는 그쪽으로 코드 확장을 계속하고, 모든 것은 서로 연결되었다. 물건들은 그것들이 실내에 있었을 때 있었던 방식 그대로 변함없이 작동되고 관찰되었다.

이제 그러고 나서 자동차는 느리게 움직이고, 사람들은 말똥말똥 바라본다. 그러나 정지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게다가 그가 결코 아무 것도 실행하지 않았던 것이 그에게 나타났다(4).

 

어떤 젊은 커플이 운전하고 있는데, “처녀가 청년에게 말했다. 중고 가정용품 판매임에 틀림없어(4).” 젊은 커플 사이에서 통용되며 계속 삭감된 그 신비로운 교환은 최초의 개진만큼 생략된다는 것을 증명한다. 그러한 교통은 마치 “흰 코끼리 같은 언덕”에서의 남녀간의 부자연스런 교환과, “프란시스 마콤버의 짧고 행복한 삶”에서의 긴장된 교환같이, 헤밍웨이의 소설 속 대부분의 등장인물과 공유된 대화가 회상된다. 중고 가정용품 판매장의 결혼생활의 팬터마임은 계속된다. 침대를 시용(試用)해보기 위하여, 처녀는 옆에 누워있는 청년을 향해 말한다. “키스해줘요,” 그러나 그는 “일어나 텔레비전을 보는 체하며 그대로 있었다(5).” 그 남자는 일어나 “개방된” 집 안에서 연기하고 있는 그들을 발견한다. 그 세 사람은 파괴된 가정으로부터 발아(發芽, 새로운 의미가 될 것이다: 역주)로 이동하는 찰나의 동작을 경험한다. 그 남자는 거실 밖의 젊은 커플을 환대한다. 그들은 함께 마시고 춤춘다. ―개방된 그 장소에서 기진맥진하여, 이웃의 모든 사람들에게 증언한다. 그리고 그 남자 자신에게 말한다. “그들은 이곳을 초월한 모든 사물을 보았다고 생각했다.”

레이몬드 카버의 이와 같은 소설 속의, 적나라한 사건은 폭로의 결과가 나타날 수 있는 것이라곤 아무 것도 없는 것과 커뮤니케이션이 이루어진다. 내레이터는 그 남자가 알코올중독으로 별거하게 되었고 또는 이혼하게 되었으며, 그리고 매우 우울하게 되었다는 것을 독자에게 명백하게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은 이 남자가 주정뱅이로 취급받아 소외되고, 그의 삶 속에 있었던 일로 인하여 더 이상 동기유발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명백하게 인지한다. 그 남자는 공개된 모든 것, 즉 ―그의 파괴된 결혼생활에 대한 필사적인 은유를 앞마당 잔디밭에 연출하는 것으로 그의 가정생활의 은밀한 내재-삶을 밖으로 구체화했다. 약혼한 그 커플의 행동은 그들 자신을 예시할는지도 모르는 결혼생활의 무의식적으로 모방한 시나리오를 나타낸다. 타인의 붕괴의 여파를 그 젊은 커플의 출발에 후소화시킴으로써(함축적으로 병치시킴으로써), 레이몬드 카버는 독자를 위해 소설의 직감 속 그 처녀를 동일 부류의 긴장으로 재창조한다. 유잉 캠벨에 의하면, “레이몬드 카버는 꿈이 필사적인 행위 속에 자기 자신을 표출하는 것 자체가 종종 시시해진다는 것을, 이러한 필사적인 사람은 그가 그녀또래였을 때, 그리고 그녀를 좋아하는 관계로 인생을 시작할 때 사랑에 빠지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을 인지하는 발단으로 처녀를 이끌어간다(45).” 젊은 그 처녀는 후소를 직관으로 인지하는 것 같으며, 그것을 필사적으로 빈사화하여 나타내려고 시도하며, 마치 그 소설을 자세히 열거함으로써 그것을 믿는 것처럼 어쨌든 그녀는 그 결합을 예측할 수 있고, 그것으로 그 결과를 교묘하게 다룬다. 내레이터는 다음과 같이 보고한다. “그녀는 모든 것을 이야기했다. 거기에는 많은 것이 있었으며, 그녀는 그것이 기탄없이 이야기하는 것을 얻으려고 시도했다. 잠시 후에, 그녀는 시도를 중단한다(10).” 가장 훌륭한 다른 미니멀리스트 작가에 의해 쓰인 소설과 마찬가지로 레이몬드 카버의 소설 대부분은, 어떤 문제이든지 간에 “기탄없이 이야기할 수” 없지만, 그보다는 오히려 소설 그 자체 안에서 객관화될 수 있을 뿐이다. 이러한 객관화는 등장인물을 위한 함수적 세계와 레이몬드 카버의 창작기교의 과정을 통하여 독자를 위한 최후의 효과 양측에 나타난다.

그의 첫 작품집 “부탁이니 제발 조용히 해줘”에서, “비곗덩어리(Fat)”는 일일이 이야기하는 사건에 의해 어떤 무엇을 인지하려고 하는 웨이트리스와 함께 이러한 종류의 딜레마를 정확하게 연기한다. 그녀는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나는 커피를 마시고 담배를 피위기 위해 내 친구 리타(Rita) 쪽으로 고쳐 앉아, 그것(it)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어요(1).” 여기서 "it"에 대한 지시는 헤밍웨이의 “흰 코끼리 같은 언덕” 안에서의 "it"에 대한 사용을 생각나게 하는데, 그 이유는 두 소설 속에서, "it"이 어떤 모든 것을 포함한 "it(전체)"과 동시에 "it(일부)"의 개인적인 양상을 지시하기 때문이다. “흰 코끼리…”에서의 "it"은 낙태, 유아, 선택의 자유라고 하는 일부, 그리고 전체의 장면을 함께 지시한다. “비곗덩어리(Fat)”로서의 "it"은 비곗덩어리 고객과의 조우이다. 즉 비곗덩어리라고 하는 고객으로서의 변형(separate version)/ 사람이 아닌 물체로서의 비곗덩어리라고 하는 변형(version of fat), 본질직관으로서의 존재(being)/ 환원된 단자로서의 비곗덩어리(becoming fat), 강박관념으로서의 강제(compulsion)/ 그것이 임의적으로 선택한 비곗덩어리(choice), 그리고 그 편차의 종합적 함축원리와의 만남이다. 웨이트리스의 이야기는 포식증환자가 중축이 되기 때문에, 많은 비평가들은 카프카(Kafka)의 “굶주린 광대(A Hunger Artist)”와 “비곗덩어리”를 비교하여 이해할 수 있게 그리고 빠르게 움직인다. 유잉 캠벨은 “레이몬드 카버의 선택의 자유가 아닌(그러나 먹기만 하는) 굶주린 광대의 근원은 선택의 자유가 아니지만 고정된 카프카의 “굶주린 광대”와 비교됨이 명백하다(14)”고 본다. 이러한 상호관계가 겉으로는 의심할 여지없이 확실하지만, 그러나 레이몬드 카버는 카프카의 내러티브에 없는 어떤 무엇을 제공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사람은 굶주린 광대와 직관적으로 동일시한다. 먹도록 강제된, 그저 “굶주린 광대”와 같은 내레이터는 그렇다고 해서 내적으로 뚱뚱해지지는 않는다. 그 기하학적 도형과 같은 양식은 일차원적이며 직선적인 대당이라기보다 차라리 트라이앵글 모양으로 변하며, 이러한 카프카적인 결합보다, 레이몬드 카버의 “거기에는 더 많은 것이 존재한다.”

그녀의 친구 리타와 함께 이야기를 공유하는데 진력함으로써, 웨이트리스-내레이터는 커뮤니케이션과 의미를 확립하려고, 다시 말해서 아마 자신의 의미를 확립하려고 시도할는지도 모른다. 그녀는 비곗덩어리 고객에 한해 부속되어 세부묘사를 떠맡고 있는 그녀로 한정되지 않지만, 그러나 자기혼자만의 순간과 묵상에 대한 정보를 신중히 포함한다. 그녀는 그녀의 이야기 속에서 이러한 개인적 데이터를 비곗덩어리인 고객에 대하여 어떤 세부목록으로 후소화시킨다. 그렇게 실행함으로써, 그녀는 비곗덩어리 남자와 그녀 자신 사이의 대비를 드러내고, 그녀의 거동과 레스토랑에서 일하는 타인들의 거동과의 차이를 폭로하며, 사건에 대해 그녀 자신이 인지하고 있는 것과 리타의 어리둥절함 사이의 편차를 지각한다. 첫 번째 사람의 복수 대명사 "we"를 사용하는, 그 비곗덩어리 남자가 하고 있는 담화의 총괄적인 방식은 그 웨이트리스와 그의 결합에 신용을 빌려주지만, 그는 그의 테이블에 혼자 앉아 말을 걸며 이야기하는 레스토랑의 단지 어떤 사람에 불과할 뿐이다. 그는 그녀에게 말을 건다. “이제 주문을 하려고 하거든요.(1)

웨이트리스는 조롱하는 것 같은 코멘트에 대해 방어적인 자세를 취하고, 레스토랑의 다른 종업원들은 지절거린다. “맙소사, 정말 비곗덩어리야, 하며 리앤더(Leander)도 말했어. 저 사람이라고 저렇게 되고 싶었겠어, 그러니, 입 닥치라구(3).” “비곗덩어리는 아직도 먹고 있니?, 하며 해리어트(Harriet)가 말했어. 너도 해리어트를 알지?(4)” “…루디(Rudy)는, 해리어트가 그러는데 네가 비곗덩어리를 서커스에서 데려왔다고 말했어…, 난 이렇게 말해주었지. 루디, 그가 비곗덩어리인 것은 사실이야, 그렇지만 그게 모든 얘기라고 판단해서는 안 된다구(5).” “마르고(Margo)는 내게 말했지. 너 비곗덩어리한테 반했구나? 그는 진짜 비곗덩어리야. 헌데 뚱뚱한 것은 그 사람의 일부분이야(Now that's part of it). 난 정말 일부분이라고 생각해(2).” 여기서 그녀가 "it"에 대해 만들고 있는 것을 지시하는 그 애매함은 애티튜드의 원리(a principle of attitude)에 기인한 것이다. 여기서 대명사 "it"에 대해 웨이트리스가 사용하는 것은 타인과 그녀를 분리하는 그 남자의 조건을 향한 감수성으로서의 편차를 가리키는 것이며, 그리고 그것은 그 비곗덩어리와 그녀를 연결한다. 이러한 결합은 “그녀의 경우에 비록 그녀가 뚱뚱해질 수 없다고 할지라도, 그녀가 거리낌 없이 너무 먹는다는 것을 고객에게 말할 때 보강된다(Campbell 13).” 게다가 “그게 모든 얘기라고 판단해서는 안 된다구(that is not the whole story)”라고 지시됨으로써, 그녀가 아이를 뱄는지 안 뱄는지, 그리고 지나치게 뚱뚱한 것처럼 보이는 것으로 폭로된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인지 아닌지 의심스러워질 때, 그녀는 나중에 비곗덩어리 고객과 그녀의 결합에 대한 자각을 입증시킨다. 그 다음에 침대에서, 그녀가 루디의 성적 진전을 받아들임으로써, 그녀는 갑자기, “루디가 작은 대상, 즉 아무리 보아도 거의 없는 대상이 되고, 그래서 그녀가 무시무시하게 비곗덩어리인, 지나치게 비곗덩어리인,” 그 비곗덩어리로 느껴진다(6). 지나치게 비곗덩어리 같지는 않더라도, “무시무시하게” 비곗덩어리이어서, 부정적 이미지라기보다 차라리 조정적인 비곗덩어린 것이다. 그녀의 감수성으로, 그녀는 대수롭지 않은 루디보다 더 큰 인간이 된다. 따라서 디디와 고고가 아직도 고도를 기다리는 것만큼, 리타도 “기다리며 앉아서…, 무엇을 기다리고 있는지? 나는 알고 싶다”고 내레이터에게 말하며, 조정적인 주석으로 끝을 맺는다. “이제 당당해야지. 내 삶도 변화시키고 말 거야. 난 그것을 느껴(6).” 어쩌면 그녀가 루디의 애를 뱄을지도 모른다. 즉 그녀가 경험으로부터 성장되고 있는 그리고 루디와 다른 작은 사람들로부터 생성되고 있는, 새로운 자신의 자각으로 수태되었을지도 모른다. 그 경우가 무엇이든지간에, 그것은 지나치게 “무시무시하다.” 그러나 이러한 정보가 텍스트 안에는 하나도 없다는 것이 명백하다. 객관적 내레이터는 사설적 단평 또는 평가적 관찰로 소설을 이야기 하지 않는다. 내레이터는 사건의 관여자일 뿐만 아니라, 레이몬드 카버의 등장인물 중의 오직 한 사람만이 접근하는 것이 아니든지, 일어난 것이 아무 것도 없는 어떤 본질의 돌연한 현현이든지, 하여간 소수의 하나일 뿐이다. 여기서 단어 “본질의 돌연한 현현(epiphany)”은 개념의 가장 일반적인 적용으로 사용되는데, 그 이유는 통찰이 소설 속에서 갑작스럽게 주조해내는 것이라곤 아무 것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떤 세계 속에 지각과 변화가 거의 존재하지 않을지라도, 즉 발생될 어떤 무엇이 측정됨에 있어서 그 의미가 매우 하찮은 것일지라도, 상대적으로 말하기는 본질의 돌연한 현현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소설 속에서의 지적인 그리고 윤리적인 결합은 함축적이다. 많은 것들이 은유적 결합이다. 비록 소설의 마지막 순간이 조정적 주석으로 에워싸일지라도, 그 결말은 애매하다. 해답은 가장 중요한 무엇을 포함하여야만 하는 것, 즉 "it"이 무엇이든지간에 이러한 여인의 삶 속에서의 어떤 종류의 변화와 성장이 있어야만 하는 그곳의 독자와 함께 존재한다. 유잉 캠벨은 이러한 콘셉트를 다음과 같이 옹호한다. “비록 지각의 차원에서 인식될 수 있을지라도 그리고 슬쩍 비춰 보일지라도, 그녀의 새롭게 하기는 완성된 것으로 또는 정지된 것으로 조망되어서는 결코 안 되는데, 그 이유는 그녀가 생성의 유동상태 안에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13).”

또한 레이몬드 카버의 단편소설의 첫 작품집 “부탁이니 제발 조용히 해줘”속에서, “이웃들(neighbors)”은 보다 더 애매하며, 여러 가지 면에서 충격적인 소설이다. 그것은 결혼한 젊은 커플, 즉 여행을 떠난 그들의 이웃 해리어트와 짐 스톤(Jim Stone)을 위해 아파트를 돌보는 빌(Bill)과 아를린 밀러(Arlene Miller)의 특징을 이룬다. 그들이 “행복한 커플”이기는 하지만, 빌과 아를린 밀러는 그들이 그들의 친구집단 사이에서, 즉 “대부분 그들의 이웃 해리어트와 짐 스톤의 삶”과 비교하여, 최소한의 풍요로운 삶을 누리고 있다는 것을 느낀다(7). 주요한 초점은 그가 이웃집 아파트에서 볼일로 오래 꾸물거리고 있는 빌에게 있다. 그의 최초의 행동은 빈사적(賓辭的)이다. 그는 킁킁거리며 사물을 찾아다니고 주제넘게 간섭하지만, 그의 몸짓은 빠르게 기상천외의 것이 된다. 그는 아파트에서 꾸물거리기 시작하고, 대단한 것은 아니지만 알약이나 어떤 담배의 용기같이 하찮은 물건을 훔치기 시작한다. 그는 냉장고에서 음식을 꺼내먹고, 그들의 위스키를 착복한다. 빌은 이웃집에 체류하는 동안 성적으로 자극을 받는다. 그는 직장에서 몰래 쉬는 시간을 낸 후 이웃집 아파트에서 하루의 거의 대부분을 보낸다. 그는 짐 스톤의 셔츠와 짧은 바지 하나를 골라 입는다. 또한 그는 해리어트의 브래지어와 속옷을 입어본다. 소설은 독자가 빌과 마찬가지로 황홀지경에 빠진 아를린 밀러를 체득하게 될 때 빠르게 중첩되기 시작한다. 그녀는 서랍에서 발견된 사진에 대해 이야기하지만, 그 내용은 독자의 추측으로 남게 된다. 그들이 이웃집 아파트에 체류하게 된 것을 깨닫게 된 후, 그들은 그들 자신으로 되돌아오고, 그리고 해리어트와 짐 스톤이 “돌아오지 않을” 가능성을 생각한다. 그러고 나서 그들은 그들이 이웃집 아파트 안에서 열쇠로 잠갔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예기치 못한 사건의 반환에 대한 그들의 반응은 기묘하게 필사적인 것으로 나타난다. “‘걱정 마,’ 그는 그녀의 귀에 대고 말했다. ‘아무쪼록, 걱정 마.’ 그들은 그대로 있었다. 그들은 서로 끌어안았다. 마치 그들은 바람과 단단히 준비된 자기 자신에게 대항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도어에 기댔다(14).” 여기서 레이몬드 카버의 짧은 서술문은 내레이터 “그리고 독자가 빌과 아를린 밀러의 포옹처럼 함께 빤히 바라보고 있는 것 속에 문학적 환경을 생산한다. 그것은 그들이 또는 우리가 기대했던 물리적인 결합이 아니며, 그리고 그것은 기껏해야 일시적으로 일진의 돌풍에 잘 견디는 오직 그들만을 허락할 수 있는 포옹이다(Beattie 178).” 레이몬드 카버의 초기 작품의 유형인, 이러한 소설은 근거에 대한 명백한 실마리가 담겨있지 않다. 그것은 어떤 인간의 통찰력, 즉 별개의 숨겨진 리얼리티, 특히 다른 것에 대한 동일성이 보다 좋은 위치에 정위될 때, 그 신비스러운 매력을 그린다. 그것은 또 다른 퍼스나의, 다시 말해서 지식과 독특성으로서의 만져서 알 수 있을 정도로 명백한 이러한 충당의 전율적인 흥분에 대한 것이다. 빌과 아를린 밀러는 어둠, 즉 그들 “이웃집”의 미지의 세계로 들어갔을 때, 그들은 관음증환자의 스릴을 경험했고, 또 해리어트의 란제리를 입어보는데 그 자신이 혼자이고 아무에게도 관찰되지 않고 있다고 믿고 있는 빌을 관찰하고 있는 독자-관음증환자로서의 스릴도 경험했다.

이와 동일한 첫 작품 가운데, “그들은 당신의 남편이 아니다(They're Not Your Husband)”는 관음증이 한계의 붕괴 상에서 항상 결합하는 것으로서, 또는 남녀가 어떤 또 다른 허약 상에서 향연을 베푸는, 말하자면 점점 거세지는 배경으로서, 그의 결혼생활의 완고한 주제와 함께 인간조건의 선천적인 기본요소로 존재한다는 그 함축을 레이몬드 카버가 결합하는 것 그 중의 한 소설이다. 또한 그 소설은 커뮤니케이션의 결핍으로 인한 순환주제 또는 커뮤니케이션의 무능력을 표현한다. 독자가 인지하게 되는 모든 것은 등장인물과 상태의 내재 실재성을 반영하는 일상생활의 그 장면 안에 담긴 결합으로부터 직관으로 알게 되는 것이다. 얼 오버(Eearl Ober)는 해고된 세일즈맨이고, 그의 아내 도린(Doreen)은 철야 커피숍에서 웨이트리스로 일하고 있다. 그가 일하고 있는 아내를 보려고 잠간 들렀을 때, 얼 오버는 두 남자가 아내의 몸매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것을 엿듣는다. “‘저 엉덩이 좀 보게. 정말 대단하군…,’ ‘뭐 그 정도를 가지고 그래…,’ ‘내 말이 그 말이야… 하지만 비곗덩어리 칼집을 좋아하는 놈들도 있다구…,’ ‘난 아냐…,’ ‘난 절대 아냐(21).’” 이렇게 약간 엿들은 후에, 얼 오버는 그의 아내가 반드시 다이어트를 해야 한다고, 그리고 식욕을 감퇴시키는 몸으로 몰아붙여야 한다고 결심한다. 그녀의 동료들이 그들의 걱정을 말로 나타낼 때, 얼 오버는 그들을 무시하고 도린에게 말한다. “그들은 당신의 남편이 아니야.” 친밀하게 가깝지는 않더라도 인지할만한 단순 장면, 단순 변화(이러한 사건)는 약간의 사회적인, 배우자로서의, 그리고 종개념으로서의 고유의 개인적인 문제를 반영한다. 그러나 거기에는 그보다 더 많은 것이 존재한다.

사용되지 않은 말 그리고 이러한 말, “비곗덩어리 칼집을 좋아하는 놈들”과 같이 겉으로 표현하는 말 중의 하나가 되기를 원치 않는, 얼 오버는 인색한 회계사의 말과 유사한 행동을 연출한다. 매일 밤 그는 동전을 쌓고 지폐를 펴며 도린의 팁을 계산한다. 매일 아침 그는 그가 목표로 삼았던 눈금 상의 보이지 않는 무게로 그녀를 계산한다. 그는 양측의 접합을 계속 유지한다. 구두쇠의 시각적으로 형이하의 은유는, 무게가 전이된 그의 행위를 통하여, 살덩어리의 무게를 착취하고 있는 샤일록(Shylock)의 이미지로 확장한다. 결국 부인에 대한 얼 오버 자신의 관점과 번역으로, 그는 그녀의 체중감량을 ―즉 어떤 "it"에 대한 체중감량을 계속한다. 즉 간이식당에서 남자 손님에게 묻는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좀 인상적인 것 같지 않습니까? …보기가 좋은지 나쁜지 얘기 좀 해봐요(27).” 무례한 질문을 엿듣고 다른 웨이트리스가 도린에게 가서, 얼 오버를 가리키며, 저놈 누구야? 아주 순진하게 묻는다(27). 얼 오버를 “건달” 협회의 설립위원 쯤으로 알았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여기서 용어 “건달”이 환기시키고 있는 모든 내포와 변죽울림은 웨이트리스, 내레이터, 작가, 그리고 독자에 의해 얼 오버에게 적용된다. 어떤 이유 때문에, 즉 이 소설의 분석에서 유잉 캠벨은 얼 오버가 스스로 그의 특성을 벌충하지 못한다고 하는, 그리고 얼 오버의 성격에 대한 작가의 전개가 관심을 갖고 어떤 이유를 제공하지 못한다고 하는, 그 사실 때문에 쩔쩔매게 된다. 거기에는 그에 대한 비극적이거나 애처로운 것도, 감탄할만한 것도 아무 것도 없다. 그는 단순히 불쾌하고, 천박함과 해악함을 결코 실현하지 못하는 것 같은 숙맥일 뿐이다(19~20). 결국 유잉 캠벨은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린다. “그것은 세계를 재해석하거나 자신의 번역으로 팽창시키는데 도움을 줄 것이라고 하는 것을, 등장인물도 독자도 하여간 어느 누구도 결코 알아채지 못한다(20).” 아마 유잉 캠벨은 그가 얼마나 구역질나는 사람인가 정확하게 폭로하고 있다는 것의 은밀한 관찰에 대한 가치를 알 수 없을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가장 우수한 독자는 얼 오버가 실제로 실행하는, 즉 결코 알아채지 못하거나 변하지 못하는 것과 같은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분명히 이해한다. 더 나아가 실존주의자는 어떤 인간존재든지 그렇게 무자비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거나, 따라서 어느 누구에게도 그렇게 어리석을 수 있다는 결론을 내릴는지도 모른다. 아니, 본질의 돌연한 현현은 결코 경험적으로 얼 오버의 것으로 존재하지 못하지만, 갑자기 또는 그렇지 않게, 통찰로 나타나며, 여기서 생각건대, 모든 독자를 위하여 존재한다. “보통사람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세심하게 관심을 기울임으로써,” 레이몬드 카버는 모든 인간성의 수용능력을 반영한다(Saltzman 18).

레이몬드 카버의 첫 단편집 “부탁이니 제발 조용히 해줘”가 형성하고 있는 강력한 요구는 헤밍웨이의 단편소설 “흰 코끼리 같은 언덕”에서 젊은 부인의 애조 띤 애원을 상기시킨다. “제발 제발 제발 제발 제발 제발 제발 그만 좀 하지 않겠어요?” 침묵을 위해 이렇게 부탁하는 애원은 평화와 평온을 위한 필요성에 의해 흔히 유발되며, 그래서 애원자가 그 상황에서 생각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경우에, 말하기는 커뮤니케이션의 효과가 없는 것 같으며, 따라서 이렇게 요구를 하고 있는 것은 의미 없는 단어의 소음과 함께 있는 것보다 더 좋게 느껴진다. 아서 M. 샐츠맨은 “속삭임에 충격을 받은” 존재가 됨으로써, 그리고 “오도(誤導)된 격발(激發)의, 신경의, 그리고 전도(顚倒)의 변형 속의 공통된 병폐를 그들이 포착하려고 시도하는 만큼 드러냄으로써,” 이렇게 특별한 작품 속의 등장인물을 정의한다(22). 아서 M. 샐츠맨은은 크리스토퍼 라쉬(Christopher Lasch)의 논쟁의 여지가 있는, 즉 이러한 일치상태에서의 삶의 사회심리학적 연구, 다시 말해서 「미니멀리즘적인 자아: 어려운 시점에서의 심리적 생존자(The Minimal Self: Psychic Survival in Troubled Times)」를 인용한다.

 

어려운 때에, 일상생활은 살기위한 몸부림이 된다. …이러한 조건 하에서, 자아는 절박한 결핍생활의 시대에 그 외곽에 정위된 일종의 사치품이 된다. 자아는 개인의 역사, 친구, 가족, 다시 말해서 어떤 처지의 의미를 함축한다. 그러한 포위공격 하에서, 자아는 역경에 대항하여 무장된 방어적 핵으로 수축된다. 정서적 평형상태는 지난 세월의 오만한 자아가 아닌 미니멀리즘적인 자아를 요구한다(Lasch 15).

 

20세기 미국에서의 크리스토퍼 라쉬의 삶이 비록 어떤 것과 논쟁적인 것인지 모를지라도, 아서 M. 샐츠맨은 그의 표현이 미니멀리스트 소설의 많은 등장인물의 삶 속에서 발생하고 있는 많은 것을 설명한다는 것을 넌지시 암시한다. 미니멀리스트 소설 속에서 발견되는 이러한 허구적 장면은 많은 독자들에게 친숙한 것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문학 비평가들은 일반적으로 크리스토퍼 라쉬의 이론에 리얼리티가 있는 것으로 게다가 어떤 적절한 원천임에 틀림없다는 것으로 결론을 내린다.

레이몬드 카버의 작품집 “사랑에 대해 말할 때 우리들이 하는 이야기” 속의 소설들은 미니멀리스트 소설의 가장 우수한 정의를 담고 있는 것으로 제공되었다. 이 세 번째 작품집 속의 소설들은, 비평적으로 약간의 주목을 받았던 그의 두 번째 작품집 “성난 계절과 기타의 소설들” 안에서는 거의 나타나지 않았었다. 1989년도 판 “사랑에 대해 말할 때 우리들이 하는 이야기”의 뒤표지에 있는 다음과 같은 기록은, 전체 미니멀리스트의 효과를 잘 요약하는데 기여하고 있는데 그것은 프랭크 커모드(Frank Kermode)가 쓴 것으로서, 통찰력 있는 보고서이다. “레이몬드 카버의 소설은, 전체적인 문화와 전체적인 윤리의 조건이 비록 외관상 가벼운 스케치로 표상될지라도, 그것이 얼마간 완벽하게 실현되기 전의 한 순간을 포착하는 방식으로 꼭 잡아둔다.”

사뮈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와 관련이 있는 그 비평적 관찰에는, 그것(it) 안에 “발생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하는 골칫거리가, 레이몬드 카버의 타이틀 소설 “사랑에 대해 말할 때 우리들이 하는 이야기”와 대비되어 꼭 박혀있다. “고도를…”에서와 마찬가지로, 레이몬드 카버의 소설은 두 명씩 두 결합으로 만들어진 네 명의 등장인물이 등장하는 무대이다. 즉 멜(Mel)과 그의 두 번째 부인 테리(Terri), 그리고 닉(Nick)과 그의 부인 로라(Laura)의 경우를 말한다. 디디와 고고에 비교할만한 그들은 어떤 장소에 갈려고 하는데, 그러나 결코 그 장소에 가지는 못한다. 모리스 딕스타인은 그 소설의 일반적인 특색을 다음과 같이 친숙한 말로 기술한다. “레이몬드 카버의 유명한 미니멀리즘은 모더니스트의 회의론과 절망의 용광로를 통하여 용해되었던 포스트-사뮈엘 베케트의 리얼리즘이다(508).” 이 두 커플이 하는 것은 평범하게 식탁 주변에 앉아 진을 마시며 사랑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다. 헤밍웨이의 “흰 코끼리…”에서와 마찬가지로 교환은 "it"을 위해 다양한 지시대상물을 두드러지게 다루며, 이 소설 속에서의 대화는 사랑의 많은 다양성을 명시한다. 즉 정신적인, 육체적인, 육감적인, 감상적인, 기사도 정신적인, 게다가 헌신적인 애정이 이상화된 사랑, 친구들 간의 사랑, 그리고 유잉 캠벨이 “그 정도가 아니라 정말이지 욕설로, 종종 살인으로, 어떤 때는 자살로, 스스로를 드러내는 복잡한 고통의 부류와 동일시하는 사랑(46)”을 말한다. 헤밍웨이의 같은 소설 속에서 침묵을 요구하고 있는 진심으로 반복된 단어 “제발(please)”은, 레이몬드 카버의 소설 속에서의 대화, “평생 한번만이라도 입 다물어 줘… 잠깐 동안만 내게 호의를 베풀어주지 않겠어?”와 같은 애원이다(146). 안 비티는 다음과 같이 주석을 단다. “헤밍웨이를 상기하지 않고 레이몬드의 소설을 읽기란 어려운 일이다. 즉 여기서 냉철함(stoicism)은 매우 지나치게 화려한 형식이 아님을 말한다. 비록 체념처럼 보일지라도… 침묵은 어떤 무엇의 감응으로 충당되는 것 같다(180~81).”

닉은 이 소설에서 제1의 내레이터이다. 그러나 네 명의 등장인물 중 멜은 사랑에 관한 이 담화의 주요한 유인자(誘因者)이며, 언제나 아이러니하게도, 심장 병리학자, 즉 사랑에 관해 강의하고 있는 심장전문의이다. 그는 두 가지 일화와 관계한다. 즉 하나는 테리의 전 남편 에드(Ed)에 관한 것인데, 그의 두 가지 중 첫 번째는 위협적인 것이며, 따라서 결국 자살을 저질렀고, 두 번째는 어떤 노부부가 교통사고로 심하게 부상을 당했고, 몸을 깁스해서 꼼짝 못하고 눕게 되었는데, 영감이 할멈보다 덜 다쳤는데도 불구하고 풀이 죽어 있었다. 멜은 경청하고 있는 그들을 바라보며, “무슨 얘긴지 알아들을 수 있어? 그 영감은 젠장 머리를 돌려 젠장 할멈을 볼 수 없다는 이유로 풀이 죽어있었다, 이런 얘기야(151).” 이렇게 주관적인 이야기는 그 대화의 방향을 멜의 편향으로 흐르게 하고, 따라서 사랑에 대한 주관적인 형세를 반영한다. 그 내레이터는 대화의 무드를 반영하고 있는, 그리고 “이 소설에, 궁극적으로 그 타이틀을 부여하고 있는 그 책 안에서의 모든 무드에, 즉각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그래서 도움이 되는 비유와 함께 관찰력이 예리한 내레이터를 제공하고 있는 그 자신만의 햇빛에 쬐인 이미지의 무리를 가지고 있다(Runyon 132).” 소설의 바로 그 발단에서, 닉은 “햇빛이 싱크대 뒤의 큰 창으로 들어와 부엌을 가득 채웠다”는 것을 관찰했다(137). 그가 주목한 뒤에, “방안의 햇빛은 이제 변하면서, 점점 엷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창밖의 나뭇잎들은 여전히 희미하게 반짝거리고 있었으며, 나는 유리창과 포마이카 카운터 위에 드리워진 그것들의 무늬, 즉 양식(pattern)을 지그시 바라보고 있었다. 물론 그것들은 같은 양식이 아니었다(150).” 그 양식들은 표면(유리창, 포마이카)이 다르기 때문에 다르다. 이러한 반영의 화맥(context)은 그것들의 양식에 영향을 미친다. 그러므로 그 대상(things) 가운데서도 특히 사랑의 화맥은 그것이 획득한 그리고 사랑하는 이들의 내재-형세(inner-state)를 반영하는 양식에 영향을 미친다. 랜돌프 폴 루니온(Randolph Paul Runyon)은, 그의 레이몬드 카버의 단편소설에 관한 비평적 연구, “레이몬드 카버 읽기”에서, 이러한 열쇠를 제공하고 있는 그 타이틀 소설의 전체 작품을 통하여 반복됨으로써, 화맥으로 변하고 있는 양식의 반영인 이러한 주제를 관찰하고 있다.

 

그러나 그 양식의 비유는 멜의 마음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에 대해 우리에게 언급하는 것보다 더 많은 것과 관련되어 있다. 세 개의 다른 양식 안에서 일어난 동일 기초 이미지의 이러한 예는…, 단순한 이야기 안에서 규정화되며, 그러므로 그것은 아마 그 타이틀의 소설 안에서 우연적으로 행해지는 것은 아닐 것이다. 모든 두 이야기(때로는 세 이야기)는 동일 기초 이미지를 다른 양식으로, 다른 화맥으로, 과장하여 나타낸다. 할멈이 바로 곁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할멈을 볼 수 없다는 이유로 영감이 비탄에 빠진 것과 같은, 그 이야기는 영감의 바로 곁에 누워있는 그의 짝을 반밖에 지각할 수 없다는 것과 그 표층 아래의 지금 당장 반밖에 알 수 없다는 관계를 만들고 있는 그들(멜, 닉, 테리, 로라)의 한계를 애타게 탈출하고자 하는 것을 동시에 너무나 잘 보여주고 있는 것 같다(133).

 

이러한 콘셉트는 다음과 같은 멜 자신의 가정으로 함축된 어떤 무엇을 후소화시킨다(병치시킨다). “로라, 만약 내가 테리를 버린다면, 그녀를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다고 한다면, 그리고 만약 닉이 나의 가장 좋아하는 친구가 아니라고 한다면, 나는 당신과 사랑에 빠질는지도 모릅니다(150~152).” 다시 말해서 그 화맥이 변형될 때, 어떤 장면(이러한 이야기로서의, 내재 이야기로서의, 이러한 관계속의 모든 이야기로서의, 독자의 삶이 있는 그 이야기로서의), 즉 그 모든 것이 “만약(if)”으로 다르게 폭로될 수 있을는지도 모른다(다르게 보일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남자, 부인, 삶, 사랑이라고 하는 최초의 양식은 항상 동일하다. 레이몬드의 소설, “사랑에 대해 말할 때 우리들이 하는 이야기(절대적으로 “아무것도 발생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으로서의 어떤 이야기)”는 사랑의 전체 양식을 반영하고, 그 명칭을 함축하고 있는 전체관계의 이야기를 몸짓으로 연기한다. 이러한 미니멀리즘의 소설집은 사랑의 양식을 위해 다양한 화맥을 반영하고, 그런 식으로 존재하는 것이 틀림없는 거의 무한수의 화맥을 넌지시 언급한다. 이러한 소설과 각각의 이야기는 종합적으로 또는 개별적으로 작품집 속에 내포되어 있고, 이러한 소설, 이러한 작품집, 이러한 작가가 “사랑에 대해 말할 때 우리들이 하는 이야기”와 같은 방식으로 내포하고 있는 모든 것을 반영하며, 미니멀리스트 스타일의 최대량의 디자인을 반영한다.

그의 개인적 그리고 문학적 르네상스의 화맥 속에서, 레이몬드 카버는 어떤 미니멀리즘의 사람을 감동시키는 예와 함께 문학비평분야에 제공된 그 자신을 아무것도 없는 것과 대비시킨다. 그는 알코올중독과 미니멀리즘으로부터 전환된 뒤 단순히 새롭게 또는 단순히 마전장이(fuller)의 방식으로 소설을 생산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초기 소설의 어떤 무엇을 고쳐 쓰고 증대시켰다. “대성당”의 새로운 이야기들은 초기 작품집에서의 이야기들보다 낙천적이고 희망에 찬 것 같이 보이며, 교정된 그 이야기들은 마전장이적인 방식이면서도 초판보다 더 상세하다. 새로운 스타일 속에서, 레니몬드 카버는 이야기를 야기 시킨 감정과 장면을 토론하고 설명하고 탐구하는, 그래서 더욱 더 증가하는 자율성을 드러낸 내러티브적 목소리로 이야기를 생산했다. 선언(選言) 대신에, 레이몬드 카버의 후기 소설은 비록 폐쇄되어있을지라도, 결합 또는 재결합 쪽으로 이동한다. 문학적 변형(metamorphosis, 메타형태형성)은 레이몬드 카버의 성분상의 의식적이며 스타일리스트적인 변화라기보다 오히려 “전망 있는… 일종의 신념과 살아있는 환희를 표현하고 있는 인생관으로의 기본적인 이동의 반영이었다(Cochrane 79).” 레이몬드 카버의 스타일과 판에서 이러한 변화의 가장 심원한 예는 그의 1976년 작품 “목욕(The Bath)”에서의 이야기와 1983년 작품 “사소하지만 좋은 것(A Small, Good Thing)”에서의 이야기 사이에서 발견된 그 기본적인 편차로 현저하게 나타난다.

두 이야기에서, 병원에 입원한 아들의 양친은 그의 상태를 걱정하면서 그의 생일을 보낸다. 교통사고로 여덟 살의 스카티(Scotty)는 지금 혼수상태에 빠져 있다. 이렇게 무시무시한 장면은 성가심으로 인하여 더욱 악화된다. 즉 그 양친의 집으로 성가시게 익명의 전화 걸려오는데, 그 사람은 아들의 생일 파티를 위해 어머니가 케이크를 주문했던 빵집주인이었으며, 그 케이크는 스카티가 그의 생일인 월요일 아침 등교 도중에 발생한 사고로 인하여 배달되지 못했던 것이다.

“목욕”은 레이몬드 카버의 미니멀리스트 스타일로 쓰인 간략한 소설이다. “사소하지만 좋은 것”은 단지 세 시간 동안만의 이야기이다. 레이몬드 카버는 비록 아들을 위한 그들의 기도가 그들이 전에 결코 느끼지 못했던 진심에서 우러난 인간내성으로 그들을 함께 동여매고 있음을 연상시키고 있을지라도, 두 커플의 정서적 삶을 마전장이의 방식으로, 교감적인 세부묘사로 발전시킨다. 두 소설은 세부이야기묘사의 증가로, 그리고 뒷이야기 안에서 발견된 정서적 카타르시스의 세부묘사로 다툴 뿐만 아니라, 급박하게 결말로 이끈다.

“목욕”에는 의미적으로 그 소년이 죽었는지 살았는지 알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으며, 있다면 빵집주인의 전화가 걸려오고 작은 스카티의 케이크가 배달되었다고 하는 정도이다. 매우 부분적이기 때문에, 그 소설은 내러티브의 목소리가 단조롭고, 냉담하고, 감정이 없고, 심지어 비교감적이어서 의사소통이 되지 않는 것 같은, 형용사적 또는 부사적 수사어구가 거의 담겨져 있지 않은, 그저 단순한 문장이 조용하게 중개될 뿐이다. 이러한 억양은 기괴한 어떤 것이 발생하고, 하여간 모든 것이 슬로우 모션의 말과 동작으로 나타날 때 흔히 경험되는 그 몽상의 특징에 효과적으로 기여한다. 몽상적 담화의 이러한 이미지는 무감정적으로 그리고 소설의 방법론으로 강화된다. 레이몬드 카버가 비록 모든 일반적인 대화를 관례적인 구두점으로 중단하여 표현하고 있을지라도, 양친의 내재독백은 마치 인용구나 이탈리아 체 글씨처럼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특성이 없는 것으로 주어진다. 따라서 오히려 “언급된 텍스트”로서, 내러티브의 목소리의 일부인 것처럼, 각각 나타난다. 예를 들어,

 

아버지는 아들을 주시했다… 그때 그는 더 많은 공포를 느꼈다. 그는 머리를 떨기 시작했다. 그는 이처럼 그 자신에게 말했다. 그 애는 무사해. 집에서 잠자고 있는 대신에, 여기서 잠자고 있을 뿐이야. 잠은 어디서 자든 마찬가지야(51).

(의사를 바라보며) 어머니는 이처럼 그 자신에게 말하고 있다. 그는 사람들을 만나러 어딘가에서 꼭 올 거야. 그들은 그에게 특별한 메달을 줄 거야(52).

 

이러한 화맥적 역기능은 독자의 임무에 헤살을 넣고, 이해의 속도를 늦춘다. ―독자는 연상을 조정하지 않으면 안 되고, 말을, 이야기 속에서 양친의 혼미상태의 가장을 작동하는 필요조건을 재배분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러한 “비현실”의 감정을 제공하는 요인은 아마 집에 가기 위하여, 즉 목욕을 하고 옷을 갈아입기 위하여 병원을 떠나야만 하는 어머니의 그 이유로서의 비논리적인 추론일 것이다. 그녀는 이렇게 깊이 생각한다. “내가 여기서 그를 돌보고 있지 않는다고 할지라고, 그는 아마 소생할 거야. 그가 내 앞에 없을지라도 난 항상 돌보고 있으니까.” 세상을 미신에 사로잡힌 것으로 맞바꾸든지, 신을 값 싸게 팔아버리든지, 하여간 어떤 것으로든지 그녀의 생각은 불합리하다(비록 매우 일반적이라 할지라도). 그래서 그녀가 병원을 떠남으로써, 다쳐서 위태롭게 된 소년의 다른 가족과 조우한다. 이 두 양친이 의사소통할 수 있는 모든 것은 “우리 넬슨(Nelson)”이라는 말뿐이다. 그 부인은 스카티의 어머니가 자기 아들 넬슨의 소식을 가져왔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들의 어긋난 연기와 불합리한 추론의 간단한 대화는 초점 결핍의 속이 빈 메아리이며, 흐릿해진 지각작용과 느릿해진 반응은 소위 이야기의 연기를 구성한다. 그 이야기는 수심에 찬 어머니가 받은 전화 속에서 익명으로 언급된 다음과 같은 말로 끝난다. “‘스카티,’ 그 남자의 목소리였다. ‘스카티에 대해서입니다.’ 역시 그 남자의 목소리였다. ‘스카티와 함께 해야만 해요, 암.’” 이 막연한, 최후의 말은 빵집주인의 것인지, 병원 누군가의 것인지 확실하지가 않다. 이렇게 확실한 정보 없이 그리고 그렇게 옹색한 내러티브적 프레임 안에 담겨있는 그밖에 모든 것과 함께, 그 이야기는 스카티에 대해 적게, 그리고 이러한 이야기와 이러한 장면의 유형이 생산하는 그런 식의 경험, 즉 사람들이 이렇게 무시무시한 장면 속에서 행하는 어떤 무엇을 보다 많이 나타낸다.

보다 팽창적인 이야기 “사소하지만 좋은 것” 속에서, 상처를 입은 소년은 죽고, 그 양친은 빵집주인과 대치하고, 결국 세 어른들은 종교의식의 이미지를 환기시키는 “빵의 파괴”를 공유한다. 이러한 내러티브 안에서, 스카티의 죽음과 세 어른들이 일으키는 적종적(適從的) 연기는 희생과 구속(救贖)의 주제적 이미지―죄 많은 사람의 구속에 무감각한 순수를 환기시킨다. 순결한 소년의 죽음은 어른들을 구속하는데 기여한다. 양친이 성나서 빵집주인을 방문할 때, 그 대치는 양친이 빵집주인의 고독을 그리고 빵집주인은 그들의 슬픔을, 화해와 소생을 함께 공유하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입원: 레이몬드 카버의 소설에서 알코올중독과 회복”에서, 해밀턴 E. 코크런(Hamilton E. Cochrane)은 다음과 같이 주석을 달고 있다. “‘사소하지만 좋은 것’의 말 속, 익명의 알코올중독자의 세계에서처럼, 그것은 보다 큰 힘으로 그리고 그들의 상대에게로 사람들을 이끌어 간다(84).” 더 나아가 이야기를 지시하는 윤리적 어조는 마크 A. R. 패크니츠(Mark A. R. Facknitz)의 논평 “잔잔하고, ‘사소하지만 좋은 것’ 그리고 ‘대성당’: 레이몬드 카버와 인간가치의 재발견” 속에 나타난다. 그는 “사소하지만 좋은 것”의 기본 등장인물 앤(Ann)과 호워드 웨이스(Howard Weiss)가 행복의 파괴와 대치한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아들의 죽음이라고 하는 파국과 대치하며 부딪쳐나감으로 해서, 이러한 경우, 그들의 기본 악역에 의해 구원을 받는다.

비록 발단 장면에서 등장인물과 위기가 동일하다고 할지라도, 이 두 이야기는 스타일, 내용, 그리고 효과(어떤 비평가의 견해에 반하여) 면에서 매우 차이가 있다. 즉 그들은 동일 이야기의 분리된 버전으로 단순하게 동일시될 수 없다. 그들은 동일 이야기가 아니다. 한 이야기를 다른 것으로 단지 확장만 한 것이 아니다. “목욕”의 미니멀리스트 스타일은 독자가 개인적인 고통 없이, 휴머니티의 이러한 반응을 생성하는 공포 없이, 떠맡을 수 있는 매우 특별한 정서적 경험을 아주 생생하게 중첩시킨다. “사소하지만 좋은 것”의 마전장이 스타일은 기술과 사건으로 가득 차 있고, 어떤 경험보다 더 많은 주제를 극적으로 표현한 것 같은 전혀 다른 이야기로 끝을 맺는다. 작품집 “대성당”이 출간된 후 레이몬드 카버와의 인터뷰에서, 래리 매카페리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얻어냈다.

 

LM: “사랑에 대해 말할 때 우리들이 하는 이야기”에 나타난, 초기 버전 “목욕”과 “사소하지만 좋은 것(sic, 대성당에서)”을 비교할 때, 편차의 인상적인 예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두 버전 간의 편차는 단지 세부묘사를 첨가하고 있거나 부분을 살찌웠거나 하는 것보다 더 확실하게 기본적인 것이 더 많은, ―즉, 두 작품의 전체 경향은 매우 차이가 있는 것 같은데…

RC: “사소하지만 좋은 것” 안에는 낙천주의가 분명히 더 많이 들어있습니다. 내 자신의 마음속으로 나는 그들이 동일한 이야기의 단지 다르기만 한 버전이 아닌, 사실 전적으로 두 개의 다른 이야기라고 생각하며, 그 이야기는…, 내가 강조하려고 했던 위협의 특성에 스포트라이트를 비추고 있는 “목욕” 안에 응축되었었고 압축되어 있었습니다(66). …

 

레이몬드 카버는 “빵집주인을 둘러싼 연기, 즉 전화가 걸려오고, …목욕을 하고, 등등은, 그래요, 내 이야기 속의 많은 사람들을 위협을 하고 있는 장소입니다. 내가 그 사람들에 대해 쓰려고 선택한 것은 위협을 느끼도록 하는 것이며, 그리고 그 세계가 위협적인 장소라고 느끼는 사람이 매우 적을지라도, 나는 많은 것을 생각합니다(66, 67).” 라고 하는 말 속의 불쑥 거대한 모습을 나타내는 위협과 동일시한다.

사치스러운 기술이 없는 것으로서, 그리고 이에 반하여 “사소하지만 좋은 것” 안에서 확장된 세부묘사와 대당이 되는 것으로서, “목욕” 안에서의 압축을 분명하게 예증하고 있는 다음 비교와 각각의 효과로서의 결과를 이끌어내고 있는, 텍스트에 의해 생산된, 요컨대, 편차에 어떤 의심이 있음에 틀림이 없다.

 

그 남자는 병원에서 차를 몰고 집으로 갔다. 그는 평소보다 더 빠르게 도로를 운전해갔다. 지금까지 행복한 삶을 향유했었다. 아버지로서의 역할, 가족으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했었다. 그 남자는 운이 좋았었고 행복했었다. 그러나 그가 목욕을 한다는 것이 무서워졌다(“목욕,” 49).

호워드 웨이스는 병원에서 차를 몰고 집으로 갔다. 축축하고, 어둑한 도로를 매우 빠른 속도로 달렸지만, 문득 그것을 깨닫고 속도를 늦췄다. 지금까지, 그의 삶은 무척 순탄했고, 만족스러웠다. 즉 대학생활, 결혼생활, 경영관리학 석사학위를 취득하기 위한 대학원시절, 그리고 투자회사의 하급사원으로 일하는 현재까지, 아버지로서의 역할도. 지금까지, 그는 행복했고, 운도 좋았었다(“사소하지만 좋은 것” 62).

 

대학원에서의 경영관리학, 그리고 투자회사의 하급사원, 이러한 호워드 웨이스의 약력과는 공통점이 거의 없고, 있다 하더라도, 레이몬드 카버의 초기 “블루 칼러” 소설의 등장인물들일 것이다. 다음 예증은 양친의 철야기도를 묘사하고 있는 이렇게 매우 다른 장면과 드라마틱한 대조를 나타낸다. ―“목욕”에서.

 

“난 기도했어요.” 그녀가 말했다.

“나도,” 아버지도 말했다. “나도 기도했어.” (“목욕” 53)

 

―“사소하지만 좋은 것”에서:

“난 기도했어요.” 그녀가 말했다.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말했다. “난 기도하는 법을 잊어버린 줄 알았는데, 막상 해보니 되데요. 내가 한 것이라곤 눈을 감고, ‘주여 저흴 도와주셔요, 스카티를 도와주셔요,’ 라고 하는 것뿐이었지만, 그러고 나니 나머지는 술술 나오데요. 바로 거기에 준비되어 있었던 것처럼 말예요. 당신도 기도를 해보면 아마 같은 걸 느낄 거예요.” 그녀가 그에게 말했다.

“난 벌써 기도했어.” 그가 말했다. “난 오늘 오후, 아니 어제 오후 기도했어. 당신 전화 받고, 병원에 차를 몰고 오는 동안 내내 기도했어,” 그가 말했다.

“잘 했어요.” 그녀가 말했다. 처음으로 그녀는 이러한 곤경을 남편과 함께 헤쳐 나가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이제까지 어리석게도 그녀는 이 모든 것이 오직 그녀와 스카티에게만 일어난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을 문득 깨달았다. 비록 호워드 웨이스가 곁에 있었고 또한 그가 절실하게 필요했음에도 불구하고, 호워드 웨이스를 없는 거나 마찬가지로 생각했던 것이다. 그녀는 그의 아내라는 것을 뿌듯하게 느꼈다. (67~68)

 

시문학 통권 392호, 2004. 3. 1.
  조선문학 통권 176호, 2005. 12. 1
  조선문학 통권 177호, 2006. 1. 1.

  PEN 문학 통권 87호, 2008. 6. 10.)
 

 

미니멀리즘_C.W.할렛, 워런 모트/주근옥 역

주근옥의 미니멀리즘 시선집

 SUR LES ROUES/Gueune-Ok JOU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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