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진스키(Jerzy N. Kosinski) / 안 무승 역(대전대학교 전영문과 교수)


★ 하나


일요일이었습니다. 챈스는 정원에 있었습니다. 그는 한쪽 통로에서 다른 쪽 통로를 향해 초록색 호스를 끌면서 천천히 옮겨 다녔습니다. 호스 끝에서 뿜어 나오는 물줄기를 조심스럽게 살펴보면서 그는 아주 꼼꼼하게 호스 물줄기가 풀잎 하나하나, 꽃송이 하나하나, 그리고 정원의 나뭇가지마다 모두에게 골고루 뿌려지도록 조심스럽게 마음을 썼습니다.

식물이란 사람과 비슷했습니다. 그들 역시 사람과 마찬가지로 생기 있게 살아가고 질병을 이겨내며 평화로운 죽음을 맞기 위해서는 누군가 정성껏 보살펴 주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식물은 사람과는 달라서 자신을 돌아 볼 수도 없고 스스로 자신의 모습을 알 수도 없습니다. 식물에게는 자신의 얼굴을 비추어 볼 거울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어떤 식물도 고의적인 행동을 할 수 없습니다. 식물이란 어쩔 수 없이 성장해 가지만 이성적으로 생각할 수도 없고 꿈을 꿀 수도 없기 때문에 그 성장이란 무의미한 것입니다.

식물은 정원 안에서는 안전하고 평화롭습니다, 정원은 담쟁이덩굴로 덮인 붉은 벽돌담으로 높게 바깥 거리와 격리되어 있어 정원 안은 아늑하고 안전했으며 거리를 지나가는 자동차 소리조차 정원의 평화로움을 방해하지 않았습니다. 비록 집과 정원 밖으로 한 발자국도 나가 본 적이 없었지만 챈스는 담장너머의 삶에 대해 전혀 관심을 두지 않았습니다.

영감님이 살고 있는 집안 내부도 담장이나 갓길과 별로 다를 것이 없었습니다. 정원으로 향한 일층 뒤쪽에는 흑인 하녀가 기거하고 있었습니다. 홀 건너편에는 챈스의 방과 화장실이 있었고, 정원으로 통하는 복도가 있었습니다.

정원이 특별하게 그의 마음에 드는 점이 있다면, 아무 때나 좁은 산책길이나 덤불과 나무 사이를 거닐고 있다가도 그가 아무 곳으로나 걸음을 옮길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가 정원에서 앞으로 가고 있는지, 또는 뒤로 가고 있는지, 바로 전 발자국의 앞에 있는지 뒤에 있는지 도무지 분간이 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리하여 마치 자라나는 식물처럼 자기만의 시간 속에서 자기 마음대로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만이 그에게는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가끔씩 챈스는 수돗물을 잠그고 잔디밭에 앉아 생각에 잠기곤 했습니다. 때때로 바람이 불어 와 덤불과 나뭇가지들을 멋대로 흔들어 놓곤 했습니다. 이따금 도시의 먼지가 풀꽃 위에 곱게 덮이곤 했지만 꽃들은 참을성 있게 먼지가 비에 씻겨 내리거나 햇볕에 몸을 말릴 날을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정원은 피어나는 그 모든 생명력에도 불구하고 또 스스로의 무덤이기도 했습니다. 모든 나무와 덤불 아래 썩은 등걸과 죽음을 기다리며 누워 있는 뿌리가 있었습니다. 겉으로 본 정원과 그 안에서 끊임없이 자라났다 죽어가는 이 무덤 중 어느 쪽이 더 의미 있는 것인가를 말하기란 무척 어려웠습니다. 예를 들면 담장 가까이에는 다른 식물들은 안중에도 없이 제멋대로 자라난 울타리 풀들이 무성했는데 이들은 다른 식물보다 성장이 빨라 키 작은 꽃들을 억누르면서 자기들보다 힘이 약한 관목들의 영토로 무섭게 세력을 뻗어 나가는 것이었습니다.

챈스는 집안으로 들어가 TV를 켰습니다. TV는 스스로의 빛, 스스로의 색깔, 스스로의 시간을 창조해 냈습니다. 그것은 영원히 모든 식물들을 고개 숙이게 하는 중력의 법칙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TV에서는 모든 것이 얽히고 뒤섞여 나가지만 결국은 풀리기 마련이었습니다.

밤이건 낮이건, 크건 작건, 강하건 약하건, 부드럽건 거칠건, 뜨겁건 차건, 가깝건 멀건 말입니다. 따라서 텔레비전의 총천연색 세계에서도 가꾸는 것은 결국 장님의 흰 지팡이와도 같았습니다.

채널을 바꿈으로써 그는 자신을 바꿀 수 있었습니다. 마치 정원의 식물들이 다양한 변화의 과정을 거쳐 가듯 그도 마음대로 변화를 겪을 수 있었고, 게다가 TV의 채널을 멋대로 돌림으로써 그는 원하는 순간순간마다 마음대로 변화를 맛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어떤 경우네 그는 TV에 출연한 사람이 화면 위에 번져 가듯. 하염없이 화면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 느낄 때도 있었습니다. 또 채널을 바꿈으로써 챈스는 다른 사람들을 자신의 동공 속으로 불러들일 수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챈스는 스스로를 느끼게끔 하는 것은 누구도 아닌 바로 챈스 그 자신뿐이라고 믿게 되었습니다.

TV 화면에 보이는 인물은 거울에 비쳐지는 자신의 모습과 흡사했습니다. 비록 읽고 쓸 줄은 몰랐지만 챈스는 TV의 등장인물들과는 다른 점보다 흡사한 점이 훨씬 많았습니다. 예를 들면, 그들은 음성이 흡사했습니다. 그는 화면 속으로 빨려 들어갔습니다. 햇빛과 시원한 공기와 또는 보슬비와도 같이 정원 저 밖의 세계가 챈스의 내부로 밀려들어 왔으며, 챈스는 마치 TV의 영상처럼 보이지도 않고 이름 지을 수조차 없는 힘에 의해 바깥 세계 위로 떠올랐습니다.

갑자기 챈스의 머리 위에서 창문 열리는 소리가 나더니 뚱보 하녀가 그를 부르는 것이었습니다. 마지못해 일어난 그가 조심스럽게 TV를 끄고 밖으로 걸어 나왔을 때 뚱보 하녀는 위층 창문 밖으로 몸을 내민 채 팔을 저어 대고 있었습니다.

챈스는 이 여자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흑인 하녀 루이즈가 병들어 고향인 자메이카로 돌아 간 후 얼마 안 되어 들어온 하녀인데 무척이나 뚱뚱했으며 외국에서 왔는지 발음이 이상했습니다. 그녀 스스로가 TV에서 하는 이야기를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겠다고 자인한 터였습니다. 챈스는, 그녀가 자기 방으로 식사를 가져 와서는, 영감님이 오늘은 무엇을 잡수셨고 무슨 말씀을 하셨는지 신이 나서 장황하게 떠버릴 때면 할 수 없이 듣는 척 하는 게 버릇처럼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 뚱보가 챈스에게 빨리 위로 올라오라는 손짓을 하고 있었습니다.

챈스는 위층으로 통하는 삼층 층계를 걸어 올라가기 시작했습니다. 하녀 루이즈가 전에 한번 엘리베이터 안에 갇혀 몇 시간 고생한 일이 있고서부터 챈스는 엘리베이터를 미덥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집안을 가로지르는 긴 복도를 따라 걸어갔습니다.

그가 마지막으로 이 집안 내부를 본 것은 여기 크고 무성한 정원 나무들 중 몇몇 그루가 아직 작고 볼품이 없던 때였습니다. 아직 그때는 TV도 없었습니다. 넓은 홀의 큰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언 듯 보았을 때, 챈스는 어릴 적  자기 모습과 더불어 커다란 의자에 묻혀 있듯 앉아 계시던 영감님의 모습을 보는 듯 했습니다. 그때도 영감님의 머리는 잿빛이었고 손등은 쭈글쭈글 주름이 져서 마치 오그라진 것처럼 보였으며, 자주 거친 숨을 몰아  쉬면서 가끔씩 말을 쉬고는 했습니다.

챈스는 창문에 모두 두터운 커튼이 쳐져 햇빛이 거의 들어오지 못하는, 텅 빈 느낌이 드는 방들을 지나오면서 천천히 낡은 시트에 덥혀 있는 덩치 큰 가구들과 베일로 가려져 있는 거울들을 둘러보았습니다. 애초에 영감님이 처음 그에게 하신 말씀들은 이제 그의 기억 속에 단단한 뿌리처럼 깊이 박혀 있었습니다. 챈스는 고아였으며, 어릴 적부터 집안에 그를 맞이하여 키워 준 것은 바로 영감님 자신이라는 것…. 챈스의 어머니는 그를 낳을 때 돌아가셨다는 것…. 그러나 아무도, 심지어 영감님조차도, 그의 아버지가 누구인가를 그에게 알려주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나이가 들어 다른 아이들처럼 읽고 쓰기를 배울 때가 되어서도 챈스는 도무지 읽고 쓰기를 배울 수가 없었습니다. 주위에서 다른 사람들이 그를 두고 하는 말이나 그에게 건네는 말을 이해하는 듯한 눈치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챈스는 다만 정원에서 평화롭게 자라나는 화초와 잔디 그리고 나무들이나 돌보며 그 안에서 살아 왔을 뿐이었습니다. 그는 마치 그것들처럼 말이 없었고, 해가 나면 속이 탁 트이고 비가 오면 마음이 무거워져 오직 그들을 닮아 갈 뿐이었습니다.

우연히 태어났다고 해서 그의 이름도 챈스였습니다. 그에게는 도대체 가족이 없었습니다. 너에게는 일 가 친척이 없느니라…. 너의 어머니는 대단한 미인이긴 했지만, 머리 속은 너만큼이나 엉망 이었어….. 온갖 생각들이 움터나는 땅인 챈스의 뇌수, 그 부드러운 토양은 영원히 파괴되어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바깥이나 정원 밖의 사람들이 살아가는 생활 속 에서는 자기 자리를 찾을 수 없었습니다.

챈스는 자기 인생을 자신의 침실과 정원만으로 한정시키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그는 집안으로 함부로 드나 들 수도 없었고 또한 정원 밖으로 나가서도 안 되었습니다. 식사마저도 챈스와 만날 수 있고 이야기를 건네도 좋다고 허리긴 유일한 사람인 하녀 루이즈가 언제나 방으로 날라다 주기로 되어 있었습니다. 어느 누구도 챈스의 방에 들어 갈 수 없다…. 다만 영감님 자신이 정원에 들어와 쉬어 갈 경우는 예외이다….

챈스는 그저 시키는 일만 해야지, 영감님 말씀대로 그렇지 않으면 미친놈들만 모여 사는 집으로 보내 버릴 것이고, 그렇게 되면 그는 일생 독방 속에 갇혀 완전히 잊혀질 거라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챈스는 하라는 일만 했으며, 흑인 하녀 루이즈도 그 점에서는 마찬가지였습니다.


육중한 방문의 손잡이를 꽉 쥐게 되자 챈스는 다시 한번 하녀의 날카로운 목소리를 들었습니다. 마침내 방안으로 들어서 보니 천장이 다른 방들보다 두 배는 높아 보였고 벽을 둘러 짜 넣은 책장에는 책들이 꽉 차 있었으며 커다란 책상 위에는 가죽으로 제본된 서류철이 여기저기 널려 있었습니다.

전화통에 대고 소리를 질러대고 있던 하녀는 뒤돌아보다가 챈스를 발견하고 침대 쪽을 가리켰습니다. 그래서 챈스는 침대머리로 다가갔습니다. 영감님은 탄탄한 배게 들을 등에 받치고 앉아 마치 홈통을 흘러내리는 물방울들의 속삭임에 홀려 있는 듯이 보였습니다.

어깨는 축 처져 있었으며 머리는 마치 가지에 매달린 무거운 열매처럼 한 쪽으로 늘어져 있었습니다. 챈스는 영감님의 얼굴을 차분히 바라보았습니다. 핼쓱한 영감님의 얼굴은 볼이 축 늘어져 있었고 아래 입술도 늘어져 턱과 겹쳐 일그러져 있었습니다. 한 쪽 눈만이 정원에 떨어져 죽어 있는 새의 눈알처럼 열려 있었습니다. 하녀는 수화기를 내려놓더니 지금 의사를 불렀으니 곧 의사가 도착할거라고 말했습니다.

챈스는 한 번 더 영감님을 차분한 눈으로 바라보았습니다. 그리고는 혼자 마지막 인사말을 중얼거리고 영감님의 방을 나왔습니다. 그리고는 자기 방으로 들어가 TV를 켰습니다.


★ 둘


그날 늦게까지 TV를 보면서, 챈스는 위층에서 무엇인가 끌어내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는 방을 나와 현관홀의 커다란 조각품 뒤에 몸을 숨기고 건장한 사내들이 영감님의 시신을 운반해 가는 광경을 바라보았습니다. 영감님이 떠나신 이상 이제 누군가가 이 집과 새로 온 하녀와 챈스 자신의 운명을 결정해 줘야만 할 것이었습니다.

TV에서 본 바 대로라면 일단 사람이 죽고 나면 친척들, 은행직원들, 변호사들 그리고 장의사 사람들이 일으키는 가지가지 변화가 닥쳐오기 마련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날은 별다른 일없이 지나갔고 아무도 찾아오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챈스는 간단히 저녁식사를 마치고 TV쇼를 본 후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여느 때처럼 일찍 일어난 챈스는 하녀가 방문 앞에 차려 놓고 간 아침을 찾아 먹고 정원을 나갔습니다.

그는 말없이 화초 포기 아래의 토양 상태를 점검하고 꽃의 피어난 모습들을 살펴보기도  하고 죽은 잎사귀를 쳐 내며 관목들을 다듬기도 했습니다. 모든 것이 평소처럼 질서 정연했으며 밤사이 비가 내려 새싹들이 많이 돋아나 있었습니다. 챈스는 햇빛 속에 앉아 잠시 눈을 부쳤습니다.

사람들은 보아주지 않으면 사실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마치 TV에서처럼, 눈길을 주어야만 존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때서야 비로소 그들은 머리 속에 자리를 차지하지만, 머지않아 새로운 이미지에 의해 지워져 나가는 것이었습니다. 챈스 또한 예외일 수 없었습니다. 그를 바라봄으로써 사람들은 그를 분명하게 하고, 그를 열고, 그를 풀 수 있었습니다. 남들에게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흐려지고 꺼지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어쩌면 챈스는 TV를 통해 남들을 보기는 하지만 그들에게는 보이지 않음으로써 많은 것을 놓치고 있는지도 몰랐습니다. 이제 영감님이 돌아가셨으니 지금까지 그를 한번도 본적이 없는 사람들에게 자신을 선보일 수 있게 될 것이라는 점이 그를 흡족하게 만들었습니다.


챈스는 자기 방의 전화가 울려 대는 소리를 듣자 급히 뛰어 들어갔습니다. 낯선 남자의 목소리가 그를 서재로 올라오라고 했습니다. 챈스는 서둘러 작업복을 벗고 그가 가지고 있는 영복 중 제일 좋아 보이는 것으로 갈아입고, 조심스럽게 머리에 빗질을 한 뒤 정원에서 일할 때 쓰는 커다란 썬글라스를 끼고 위층으로 올라갔습니다.

책으로 들어찬 좁고 침침한 서재에 들어서니 웬 낯선 남녀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두 사람은 여러 가지 서류가 널려 있는 커다란 책상에 자리 잡고 앉아 있었습니다. 챈스가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 몰라 잠시 방 한가운데 잠자코 서 있자 남자가 먼저 일어나 손을 내밀며 그에게 다가왔습니다.

“핸코크, 애덤즈 앤드 콜비 법률사무소의 토머스 프랭클린입니다. 우리 법률사무소에서 영감님의 부동산을 관리하고 있죠.” 그리고 여인 쪽으로 돌아서며, “이 분은 저의 직원 미스 헤이즈입니다.” 라고 소개했습니다. 챈스가 남자와 악수를 나누며 여인에게 목례를 보내자 여인도 미소를 보였습니다.

“하녀가 나에게 말하기를 어떤 남자 한 분이 이 집에 살면서 정원 일을 보아 왔다고 하더군요.” 프랭클린은 챈스에게 머리를 끄덕여 보였습니다. “그런데 우리 기록에는 지난 40년간 사망인이 고용했거나 그의 주택에 거주한 바 있는 남자의 이름은 기록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댁이 이곳에 얼마나 오래 계셨는지 물어 봐도 상관없겠습니까?”

챈스는 책상 위에 널려있는 그 많은 서류 중 어디에도 자신의 이름이 언급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에 놀랐습니다. 아마도 정원 역시 어디에도 기재되어 있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그의 머리를 스쳐 갔습니다. 챈스는 머뭇거리며 말했습니다. “전, 제 기억이 미치는 한, 아주 어릴 적부터, 영감님이 엉치뼈를 다치셔서 항상 침대에 누워 계시게 되기 훨씬 전부터 이 집에서 살아 왔습니다…. 저는 정원에 있는 저 많은 관목이 크기 전부터, 그리고 자동 살수기가 설치되기 전부터 이 집에서 살아 왔습니다. 또한 TV가 있기 전부터죠.”

“뭐라 구요?” 프랭클린이 물었습니다. “댁이 이 집에서 어릴 적부터 살아 왔다 구요? 실례지만 댁의 성함을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챈스는 불안해졌습니다. 그는 사람의 이름이 그 사람의 인생과 중요한 관계가 있음을 알고 있었습니다. TV에 나오는 사람들이 언제나 두 가지 이름 -TV밖에서 쓰는 그들 자신의 이름과 배역에 따라 바뀌게 되는 이름들-을 갖는 것도 그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제 이름은 챈스입니다.” 그가 말했습니다.

“챈스씨?” 변호사가 되물어 오자 챈스는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러면 어디 기록을 다시 한번 뒤져볼까요?” 프랭클린씨가 말했습니다. 그는 자기 앞에 쌓여 있는 서류를 뒤적여 그 중 몇 장을 집어 들었습니다.

“여기 고인이 생존했을 때 그분이나 그 분의 소유지에 고용된 일이 있는 사람들의 완벽한 기록이 있습니다. 물론 고인께선 유언장을 맡겼으리라고 믿어지나, 아직까지 그러한 유언장은 발견되지 않고 있습니다. 사실, 돌아가신 양반은 개인적인 문서를 남겨 놓은 게 거의 없죠. 허나, 다행히도 고용인의 명단만은 모두 우리 사무소에 비치되어 있습니다.” 그는 손에 들고 있는 서류를 내려다보면서 강조하듯 말했습니다.

챈스는 잠자코 다음 말을 기다렸습니다.

“자, 좀 앉으세요. 챈스씨.” 여인이 처음으로 입을 열었습니다.

프랭클린씨는 손으로 턱을 괴고 있었습니다. “참 난처한 일이군요. 챈스씨.” 그는 살펴보고 있는 서류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말했습니다. “정말 당신의 이름은 우리가 관리하고 있는 서류의 기록 어디에도 보이질 않으니 말입니다. 챈스라는 이름을 가진 남자와 사망인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것 같지 않습니까? 챈스씨, 댁이 이 집에 고용돼 있었던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겠죠?” 챈스는 매우 조심스럽게 대답했습니다.

“저는 아주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이 집 정원사로 일해 왔습니다. 제 일생 동안 내내 이 집 정원에서 일해 온 셈이지요. 제 기억이 미치는 한 말입니다. 제가 이 집에서 일을 시작했을 때는 아주 어린 꼬마 때였죠. 나무들도 작고 울타리 풀도 없었구요…. 지금 정원을 한번 둘러보시면…”

프랭클린씨가 잽싸게 말을 가로챘습니다. “그러나 이 집에 정원사가 살면서 일해 왔다는 기록은 여전히 찾아 볼 수 없는 게 사실입니다. 우리들, 미스 헤이즈와 난, 우리 법률 사무소에서 고인의 유산을 관리 처분하도록 법적으로 위임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고인에 관한 장부라면 우리가 모두 가지고 있는데.” 그가 말을 이었습니다.

“당신이 지금까지 이 집에 고용됐던 사실에 관한 계정이 아무 곳에서도 발견되지 않은 것은 제가 분명하게 장담할 수 있습니다. 지난 40년간 남자라고는 고용된 기록이 전혀 없으니까 말입니다. 그런데 댁은 직업적인 정원사인가요?”

“저는 정원사입니다.” 챈스가 말했습니다. “이 집 정원에 대해 저보다 잘 아는 사람은 없지요. 정말 꼬마 때부터 여기서 일한 사람은 저밖에 없으니까요. 저보다 먼저 일하던 사람으로 키가 큰 흑인 남자가 한 사람 있었지요. 그 사람은 제가 할 일을 가르쳐 주고 어떻게 일하는 건지 시범을 보여 주고는 떠나버렸죠. 그 후로는 계속 저 혼자서 모든 정원 일을 해왔답니다. 나무들 중 상당수가 제 손으로 심은 것들이죠.” 그는 몸 전체로 정원 쪽을 가리키면서 말을 이었습니다. “꽃들도 마찬가지고 산책길도 모두 제 손으로 쓸고 화초에 물주는 것도 모두 제 손으로 해 왔지요. 가끔은 영감님께서 내려오셔서 정원에 앉아 책도 읽고 쉬기도 하셨구요. 뭐, 그것도 다 그만 두시게 됐지만….”

창문 쪽에 있던 프랭크린씨가 다시 책상 쪽을 향하면서 말했습니다. “당신 말을 믿고 싶습니다. 챈스씨. 그러나 아시다시피 당신 말이 사실이라면, 아마 말 못할 어떤 이유가 있어서 당신이 이 집에 거주해 온 사실과 또 고용됐던 사실이 현존하는 어떤 서류에도 기재할 수가 없었던 걸 겁니다.” 그는 여직원을 쳐다보며 낮게 중얼거리듯 말했습니다.

사실 “이 집에는 고용되어 있는 사람이라곤 거의 없었지…. 고인은 일흔 둘의 나이에 은퇴했는데 그 때 그분은 엉치뼈가 부러져 거동을 할 수가 없게 되었어. 그래서 우리 사무소에서 은퇴하게 된 거야…. 그러나 고령에도 불구하고 고인은 항상 자기 일은 자기 혼자 주관 했었어…. 그분이 고용한 고용인의 봉급, 보험관계 일체가 우리 법률사무소 명부에 올라 있지만…. 그런데 미스 루이즈가 떠난 후로는 수입해 들어온 하녀 한 사람의 기록만이 있을 뿐이란 말이야….”

“루이즈 할멈은 저도 압니다. 그 할멈이라면 제가 여기 살면서 일해 왔다는 걸 증명해 줄 수 있을 겁니다. 할멈은 제가 꼬마 때부터 여기 있었으니까요. 매일 매일 제 방으로 식사를 날라다 주고 가끔씩 저하고 같이 정원에 앉아 소일하곤 했지요.”

“루이즈는 죽었습니다. 챈스씨.”

프랭클린이 말을 가로챘습니다.

“할멈은 자메이카로 떠났는데요….”

챈스가 말했습니다.

“네, 맞아요. 그러나 병이 들어 최근에 죽었어요.” 미스 헤이즈가 설명했습니다.

“루이즈가 죽었다는 건 모르고 있었군요.” 챈스가 나지막하게 말했습니다.

“어째든.” 프랭클린이 계속 말을 이어 나갔습니다. “고인 생전에 영감에게 고용됐던 사람들은 모두 제대로 봉급을 받아왔고, 또 우리 법률사무소는 지금까지 이런 모든 문제를 완벽하게 처리해 왔습니다. 아울러, 이 분 유산에 관한 완벽한 증빙서류도 모두 갖고 있구요.”

“저는 이 집에서 일하는 다른 사람들이 또 있었는지 모르고 있었습니다. 저는 항상 제 방에 있다가 정원이나 돌보는 게 제 일이었으니까요.”

“당신 말을 믿고는 싶습니다. 그러나, 당신이 이 집에 살고 있었다는 문제에 관한 한 도대체 아무런 증거가 없지 않습니까? 새로 온 하녀는 우리에게 당신이 여기 온지 얼마나 됐는지 알 수 없다고 말하고, 과거 50년간의 관계서류, 수표, 보험증서는 우리 법률사무소에 모두 구비되어 있는데.” 프랭클린씨는 미소를 짓기 시작했습니다. “고인이 우리 법률사무소의 동업자로 있던 당시는 우리들 중 어떤 한 사람은 아직 태어나기도 전이었죠.” 미스 헤이즈가 웃음을 터뜨렸습니다.

챈스는 그 여자가 왜 웃는지 영문을 알 수 없었습니다.

프랭클린은 서류로 되돌아갔습니다.

“챈스씨, 당신이 이 집에서 고용되어 생활해 온 동안 어떤 서류에 서명한 기억은 있습니까?”

“없습니다.”

“그러면 어떤 형식으로 봉급을 받았습니까?”

“저는 지금까지 돈은 한 번도 받은 적이 없습니다. 그 대신 언제나 식사는 아주 고급으로 마음껏 먹을 수 있었고, 욕실이 딸린 제 방을 별도로 받았지요. 제 방은 정원으로 창이 나 있고, 정원으로 곧장 나갈 수 있게끔 문을 새로 짜 달아주었지요. 거기다 라디오를 받았고 나중엔 TV까지 받았습니다. 리모트 컨트롤이 딸린 커다란 컬러 TV인데, 아침에 제가 제 시간에 깰 수 있도록 자명종까지 붙어 있지요.”

“어떤 걸 말씀하시는지 알겠습니다.” 프랭클린씨가 말했습니다.

“저는 또 다락방에 올라가 영감님의 옷 중에서 아무 옷이나 마음대로 골라 입을 수도 있었습니다. 영감님의 옷은 모두 치수가 제 몸에 꼭 맞았지요. 보십시오.” 챈스는 자신이 입고 있는 양복을 가리켜 보였습니다. “저는 또 그분의 코트도, 좀 꼭 끼기는 하지만 그분의 구두도, 목이 좀 조이긴 하지만 와이셔츠도, 넥타이도….”

“알겠습니다.” 프랭클린씨가 말했습니다.

“댁의 양복이 아주 유행에 앞선 것이어서 깜짝 놀랐어요.” 미스 헤이즈가 갑자기 끼어들었습니다.

챈스는 그녀를 향해 미소 지었습니다.

“요즘 남성 패션이 20년대식으로 되돌아간 걸 보면 정말 놀라워요.” 그녀가 덧붙였습니다.

“좋습니다, 좋아요.” 프랭클린씨가 화제를 가볍게 받아넘기며 말했습니다. “그럼 내 옷은 유행이 지났단 말인가 보죠?” 그는 다시 챈스를 향했습니다.

“그러니까 당신이 해 온 일에 관한 한 고인과 아무런 계약도 없었단 말입니까?”

“그런 것 같습니다.”

“고인이 봉급이건, 다른 어떤 형식이건 급여에 관한 어떤 약속도 한 일이 없다는 말이지요?” 프랭클린씨가 다시 질문을 시작했습니다.

“예, 아무도 저에게 뭘 약속한 사람은 없었습니다. 사실 저는 영감님을 개인적으로 만나 뵐 기회조차 거의 없었습니다. 그 분은 정원 왼편에 관복을 새로 심은 후 나무가 어깨 높이까지 자라도록 한번도 정원에 나오시질 않았으니까요. 물론 아시겠지만, 그걸 심었을 때는 아직 TV는 없고 라디오만 있을 때였죠. 제가 라디오를 틀어 놓고 정원에서 일하고 있는데, 루이즈가 아래층으로 내려와 영감님이 주무시고 계시니 소리를 좀 낮추라고 하던 게 기억납니다. 영감님은 그때 벌써 아주 늙으셔서 앓고 계셨답니다.”

프랭클린씨가 의자에서 벌떡 일어섰습니다.

“챈스씨, 내 생각으로는 당신 주소가 기재되어 있는 무슨 개인 증명 같은 것을 나에게 보여 주실 수 있으면 일이 간단해질 것 같습니다. 거기서부터 일을 시작해 볼까요? 뭐, 수표책이나 운전 면허증, 의료 보험카드라든가…. 그런 게 있지 않겠습니까?”

“저는 그런 것은 전혀 없는데요.” 챈스가 말했습니다.

“당신의 주소, 성명, 나이가 기재된 거면 아무 거라도 좋습니다.”

챈스는 말이 없었습니다.

“그럼 당신의 호적이나 출생증명은 있지 않겠어요?”

미스 헤이즈가 부드럽게 물었습니다.

“저에 대해 설명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우린 당신이 이곳에서 살아왔다는 증거가 꼭 필요한 겁니다.” 프랭클린씨가 딱딱한 어조로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챈스가 말을 받았습니다.

“제가 증거지요. 제가 여기 있지 않습니까? 다른 어떤 증거가 더 있어야 하는 겁니까?”

“혹시 병을 앓은 적이 있습니까?….” 다시 말해서 병원이나 의사를 찾은 적도 없습니까? 우리 입장을 이해해 주시오.” 프랭클린씨가 억양 없는 어조로 나지막이 말했습니다. ”우리가 찾는 건 오직 당신이 여기 고용인으로 거주해 왔다는 어떤 증거일 뿐입니다.”

“저는 병을 앓아 본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프랭클린씨는 미스 헤이즈가 정원사에게 감탄 어린 눈빛을 보내는 것을 놓치지 않고 보았습니다. “알겠소. 그럼, 당신의 치과 의사 성함은요?”

“전 지금까지 의사를 차아간 적이 없습니다. 저는 이 집밖으로는 나가 본 일도 없고, 아무도 저를 찾아올 수도 없었지요. 루이즈는 가끔 외출을 했지만 저의 경우는 달랐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려서.” 프랭클린씨가 못마땅한 어조로 말했습니다. “당신은 이곳에 살아온 기록이나, 당신의 봉급이나 의료 보험에 관한 어떤 기록도 없습니다.” 갑자기 그가 말을 멈추었습니다.

“세금을 낸 일은 있습니까?”

“없습니다.” 챈스가 말했습니다.

“군복무는 하셨습니까?”

“아닙니다. TV에서 군대를 보기는 했습니다만….”

“그럼, 당신은 어떤 연고로 고인과 친척이라도 되십니까?”

“아닙니다.”

“당신 말이 모두 사실이라고 할 때.” 프랭클린이 잘라 물었습니다.

“당신은 고인의 유산에 대해 어떤 권리 청구라도 하실 계획은 있는 건가요?”

챈스는 이 말의 뜻을 잘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저는 뭐, 아무래도 좋습니다.” 그가 조심스럽게 한 말이었습니다.

“전 괜찮습니다. 이곳 정원은 아주 훌륭 합니다…. 자동 살수기도 몇 년밖에 안된 거구요.”

“그렇다면.” 미스 헤이즈가 몸을 곧게 하면서 머리를 뒤로 젖힌 듯한 자세로 끼어들었습니다. “지금 당신의 계획은 무엇입니까? 다른 댁 일이라도 하실 계획인가 보지요?”


챈스는 썬글라스를 고쳐 썼습니다. 그는 지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습니다. 왜 자신이 이 정원을 떠나야만 하는 지  그는 이해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저는 이곳에 있으면서 정원 일을 돌보고 싶습니다.”

챈스는 나지막하게 말했습니다.

프랭클린씨는 책상 위에 있는 문서들을 들쳐보면서 작은 글씨가 깨알같이 박혀 있는 서류한 장을 뽑아 들었습니다. “이건 단순한 형식에 불과한 겁니다만.” 그가 챈스에게 서류를 넘겨주며 말했습니다. “지금 이걸 읽어보시고, 내용에 동의하신다면 서명란에 싸인을 좀 해 주십시오.”

챈스는 서류를 집어 들었습니다. 그는 서류를 두 손으로 받쳐 들고 뚫어지게 들여다보았습니다. 챈스는 한 페이지를 읽는데 소요되는 시간을 가만히 계산해 보았습니다. TV에서 보면 사람이 법적 서류를 읽는데 드는 시간이 일정한 것을 아니었습니다. 챈스는 자신이 읽지도 쓰지도 못한다는 사실이 여기서 탄로 나면 안 된 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습니다.

TV에서 보면 읽고 쓰지 못하는 사람들은 대개 남의 놀림감이 되거나 우롱당하기가 예사였습니다. 그는 이마를 찌푸리고 상을 찡그려가며, 엄지와 검지로 턱을 만지작거리면서, 정신을 집중하고 있는 듯한 표정을 지었습니다.

“지금 서명을 해 드릴 수는 없는데요.” 변호사에게 서류를 돌려주며 챈스가 말했습니다. “지금은 도무지 서명할 마음이 내키지 않는군요.”

“알겠습니다.” 프랭클린씨가 말했습니다. “그러면 당신의 청구권을 치하하실 의사가 없다는 뜻입니까?”

“저는 다만 지금 서명할 수가 없다는 것뿐이지, 다른 뜻은 없습니다.” 챈스가 말했습니다.

“좋으실 대로 하십시오.” 프랭클린씨가 말했습니다. 그는 서류를 챙기기 시작했습니다.

“챈스씨, 이건 꼭 알려 드려야겠는데.” 가방을 챙기며 그가 말했습니다. “이 집은 내일 정오에 폐쇄됩니다. 그 시각에 모든 문과 정원에 자물쇠가 채워집니다. 만약 당신이 정말 앞으로도 여기 살고 싶다면 늦어도 내일은 짐을 챙겨가지고 일단 이 집을 나가셔야 됩니다.” 그는 주머니에서 작은 명함 한 장을 꺼냈습니다. “여기 이 명함에 내 이름과 우리 법률사무소의 주소 그리고 전화번호가 있습니다.”

챈스는 명함을 받아 조끼 주머니에 넣었습니다. 그는 이제 이 서재를 떠나 자기 방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사실 챈스는 항상 빼놓지 않고 보는 오후 TV프로를 놓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는 의자에서 일어나 변호사와 작별 인사를 하고 서재에서 나왔습니다. 계단을 내려오며 챈스는 명함을 꺼내 던져버렸습니다.


★ 셋


화요일 아침 일찍 챈스는 벽에 걸린 초상화들을 마지막으로 훑어본 뒤 다락방으로 올라가 커다랗고 튼튼한 가죽 가방을 끌어냈습니다. 가방에 옷을 챙겨 넣은 다음 그는 자기 방을 나왔습니다. 그리고 나서 정원에 들어 선 순간 그는 갑자기 정원과 작별을 미루고 정원 안으로 들어가 잠시나마 몸을 감추고 싶은 충동이 치밀었습니다. 그는 옷가방을 잠시 내려놓고 정원에서 서성거렸습니다.

그곳은 모든 것이 평화로웠습니다. 꽃들은 곧고 날씬한 모습으로 서 있었습니다. 자동 살수기가 관목 위로 아롱거리는 물안개를 뿜어내고 있었습니다. 챈스는 손가락 끝으로 따가운 솔잎과 울타리 나무의 자라나는 가지들을 쓰다듬었습니다. 그것들은 마치 그에게 몸을 뻗치려는 듯이 느껴졌습니다.

한동안 그는 아침 햇빛 속의 정원에 멈추어 서서 한가롭게 주위를 돌아보았습니다. 그러고 나서 그는 자동 살수기를 잠그고 조용히 자기 방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는 TV를 켠 후 침대에 걸터앉아 여기저기 채널을 바꿔 보았습니다. 그때마다 전원의 집들과 마천루, 새로 지은 아파트촌이며 교회들이 화면 위를 쏘듯 지나갔습니다. 챈스가 TV를 끄자 영상들이 죽어버렸습니다. 다만 화면 한가운데 파란 점 하나가 조그맣게, 마치 세상으로부터 잊혀진 듯 남아 있을 뿐이었으나, 곧 그것마저 사라져 버렸습니다. 화면은 회색으로 변했습니다. 어떻게 보면 그건 마치 회색 석편처럼 보였습니다.

챈스는 일어나 문으로 되돌아 가다가, 그의 방 옆으로 나 있는 복도의 벽에 걸린 채 몇 년간 아무도 건드리지 않은 낡은 열쇠를 벗겨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는 정원 문으로 걸어 나가 열쇠를 꽂았습니다. 문을 열고 문지방을 넘어 선 챈스는 열쇠를 자물통에 꽂아 둔 채로 문을 걸어 닫았습니다. 이제 그는 다시는 정원으로 돌아갈 수 없었습니다.

챈스는 이제 처음으로 거리로 나왔습니다. 햇볕이 눈에 따가웠습니다. 좌우의 보도가 행인들을 옮겨놓고 있었으며, 주차 중인 승용차들이 열기 속에 번쩍이고 있었습니다. 챈스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거리며 승용차며 건물이며 사람들, 그리고 멀리 들리는 소음까지도 이미 그의 머리 속에 깊이 찍혀 있는 이미지들과 꼭 같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지금까지의 풍경만으로는 문 밖의 모든 것이 이미 TV에서 본 것들과 너무나 흡사했습니다. 다른 게 있다면 다만 사물이나 사람들이 훨씬 크면서도 느렸으며, 훨씬 조잡하면서도 거추장스러웠다는 점이었습니다. 챈스는 이미 모든 것을 보아 버렸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습니다.

챈스는 걷기 시작했습니다. 햇빛 속을 걷고 있자니 거리 중간쯤에서부터 가방의 무게와 대기의 열기가 느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가 길모퉁이에 주차해 있는 승용차들 사이의 좁은 틈을 발견하고 몸을 돌려 보도를 내려서는 순간, 갑자기 승용차 한 대가 빠른 속도로 그를 향해 후진해 오기 시작했습니다.

챈스는 후진 GODS 차의 뒷 범퍼를 피해 순간적으로 몸을 날렸으나 가방의 무게가 그를 둔하게 만들었습니다. 승용차에 부딪치는 것을 피하려고 그가 껑충 뛰었을 때는 이미 때가 늦었습니다. 후진한 차에 갑자기 들이받힌 챈스는 멈추어 서 있는 뒷 차의 헤드라이트 사이에 몸이 끼었습니다. 챈스는 한쪽 다리는 간신히 움직일 수 있었으나 다른 한쪽 다리가 승용차와 승용차 사이에 꼭 끼인 채 꼼짝할 수가 없었습니다. 온몸에 진땀이 흘렀습니다.

챈스는 앞 승용차의 트렁크를 주먹으로 두드리면서 비명을 질러 댔습니다. 앞차의 운전기사가 리무진에서 뛰쳐나왔습니다. 운전기사는 흑인이었으며 제복을 입고 손에 모자를 벗어 들고 있었습니다. 우물쭈물 변명을 늘어놓으려던 운전사는 챈스의 다리가 아직도 차 사이에 끼어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겁이 덜컥 난 그는 운전석으로 뛰어가 차를 조금 앞으로 몰아 챈스의 다리를 자유롭게 했습니다. 겨우 몸을 뺀 챈스는 두 발로 서 보려고 애를 썼으나, 그만 보도 모퉁이에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즉시 리무진의 뒷문이 열리면서 날씬하고 서늘한 눈매를 한 여인이 당황한 듯 차에서 내리더니 쓰러져 있는 챈스 위로 몸을 굽히고 물었습니다. “크게 다치지는 않으셨어요?”

챈스는 그녀를 올려다보았습니다. 그는 TV에서도 이 여자처럼 잘 생긴 여인은 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저 다리가 좀….” 그는 태연함을 가장했으나 목소리가 저절로 떨려 나왔습니다. “다리가 망가진 것 같습니다.”

“오, 하느님 맙소사!” 여인이 쉰 듯한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제가 좀 살펴 볼 수 있게 바짓단을 조금 올려 주시겠어요?”

챈스는 왼쪽 바짓단을 걷어 올렸습니다. 장딴지가 벌써 시퍼렇게 부어올라 있었습니다.

“부러진 데나 없으셔야 할 텐데….” 여인이 말했습니다. “너무 너무 죄송해서 뭐라고 말씀드려야 할 지 모르겠어요. 제 운전사는 그 동안 사고라곤 내 본적이 없는 사람이었는데….”

“괜찮습니다.” 챈스가 말했습니다. “이제 좀 나아진 것 같습니다.”

“제 남편은 지금 몹시 앓고 있답니다. 그래서 집에 주치의와 간호원을 상주시키고 있는데 제 생각으론 선생님을 얼른 저의 집으로 모시는 게 제일 좋을 것 같아요. 물론, 선생님 댁 주치의께 보이고 싶다면 당연히 그래야겠지만 말이에요….”

“글세 저는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럼, 우리 의사 선생님께 먼저 보여도 상관없으시겠어요?”

“전 아무래도 좋습니다.” 챈스가 말했습니다.

“그러면, 먼저 저의 집으로 가세요.” 여인이 말했습니다. “물론 의사 선생님이 큰 병원으로 모시라면, 그땐 곧장 큰 병원으로 모셔다 드리겠어요.”

챈스는 여인의 부축을 받으며 그녀의 팔에 몸을 기대었습니다. 리무진 안에 타고 난 후에도 여인은 챈스에게서 떨어지지 않고 그를 돌보는 것이었습니다. 운전기사가 챈스의 가방을 트렁크에 넣고, 차는 소리 없이 아침의 자동차 대열에 끼어들었습니다.

여인이 자신을 소개했습니다. “전 벤자민 랜드 부인입니다. 가까운 친구들은 절 EE라고 부르기도 해요. 세례명이 엘리자베스 이브거든요.”

“EE.” 챈스가 점잖은 목소리로 불러 보았습니다.

“네, EE에요.” 부인이 재미있어 하며 되풀이 했습니다.

챈스는 TV를 보면, 남자들이 이 같은 상황에 처하게 되면 으레 자기소개를 하던 것이 생각났습니다.

“저는 챈스….” 더듬거리며 입을 뗀 챈스는 TV에 나오는 등장인물들의 이름이 모두 두 마디(성과 이름)로 되어있던 것을 상기하고는, “가드너(정원사)입니다.” 라고 재빨리 덧붙였습니다.

“초온시 가디너.” 그녀가 되풀이했습니다. 챈스는 어느새 그녀가 자신의 이름을 바꾸어 버렸음을 알았습니다. 마치 TV에서처럼, 이제부터 그는 새 이름으로 행세해야 하는 것으로 짐작한 챈스는, 그녀가 자기 이름을 잘못 부르고 있는 것을 전혀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제 남편과 저는 베이질 가디너씨 집안과는 친분이 아주 오랜 사이에요.” 여인이 말을 이었습니다. “가디너씨는 혹시 이분들과 친척이…?”

“아닙니다.” 챈스가 대답했습니다.

“위스키나 꼬냑을 좀 드시겠어요?”

챈스는 잠시 말분이 막혔습니다. 영감님은 전혀 술을 하지 않으셨고, 하인들 누구에게도 술을 마시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하녀 루이즈는 가끔 부엌에서 몰래 술을 마셨으며, 챈스도 한두 번 그녀의 성화에 못 이겨 알콜 맛을 본 적은 있었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럼 꼬냑으로 좀.” 그가 말했습니다. 갑자기 다리에 통증이 느껴졌습니다.

“몹시 고통스러우신가 봐요.” 여인이 염려스러운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그녀는 재빨리 자석 앞쪽에 장치되어 있는 소형 빠를 열고 은빛 플라스크에서 짙은 액체를 꺼내 모노그램이 새겨진 조그만 글라스에 따랐습니다. “전부 마셔야 해요.” 그녀가 말했습니다. “그럼 좀 나아질 것 이예요.” 술이 목구멍을 넘어가자 기침이 터져 나왔습니다. 여인이 미소 지었습니다. “좀 어떠세요? 곧 집에 도착할 거예요. 그럼 우리가 잘 보살펴 드릴 거예요. 조금만 참으세요.”

챈스는 조금씩 술을 목구멍으로 넘겼습니다. 몹시 독한 술이었습니다. 그는 우연히도 차 안의 소형 바(BAR) 위에 깜찍하게 장치되어 있는 소형 TV세트를 발견했습니다. 그는 TV를 켜보고 싶은 생각이 치밀었습니다. 차가 혼잡한 거리를 천천히 빠져나가는 동안 챈스는 다시 조금 술을 입에 대며, “혹시 저 TV 볼 수 있는 겁니까?” 라고 물었습니다.

“네, 물론이지요.”

“그럼 좀 켜 봐 주시겠습니까?”

“그럼요, TV를 보시면 잠시 고통을 조금은 잊으실 수 있겠네요.”

그녀는 앞으로 몸을 숙여 버튼을 눌렀습니다. 화면에 TV 영상이 채워졌습니다.

“뭐 특별히 보시고 싶은 채널이나 프로그램이 있으신가요?”

“아뇨, 지금 것도 좋습니다.”

작은 화면과 TV 효과음이 그들을 거리의 소음에서 떼어 놓았습니다. 갑자기 승용차 한 대가 그들 앞으로 끼어들었고, 운전수가 급브레이크를 밟았습니다. 챈스가 갑자기 앞으로 쏠리는 몸을 가누려 하자 엄청난 통증이 그의 다리를 꿰뚫었습니다. 모든 것이 그를 둘러싸고 빙빙 돌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마치 갑자기 꺼진 TV처럼 챈스는 의식을 잃어 버렸습니다.


챈스는 햇빛이 쏟아져 들어오는 방안에서 조용히 깨어났습니다. EE가 그곳에 있었습니다. 주위를 돌아보니 자신이 무척이나 큰 침대에 누워 있었습니다.

“가디너씨” 그녀가 또박또박한 말씨로 그에게 일러주었습니다. “댁은 정신을 잃었어요. 그 사이 집에 도착했답니다.”

문을 노크하는 소리가 났습니다. 문이 열리자 굵은 검정색태 안경을 쓰고 하얀 가운을 입은 남자가 불룩한 가죽 가방을 들고 나타났습니다. “난 당신의 의사 되는 사람이올시다.” 그가 말했습니다. “당신은 매혹적인 우리 여주인에게 혼줄이 난 뒤 납치돼 온 가디너씨 임에 틀림없겠지요?” 챈스는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의사는 농담을 계속했습니다. “당신의 희생자는 대단한 미남이군요. 그건 그렇고, 저는 이제 이 양반을 자세히 진찰해야 하니까, 어디 우리 둘만의 시간을 갖게 해주실까요?”

EE가 방을 나가기 전, 의사는 그녀에게 랜드씨께서 잠이 들었으니 오후 늦게까지 수면을 방해해서는 안 될 것 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챈스의 다리는 살이 짓물러 있었습니다. 자주 빛 타박상이 장딴지를 온통 덮고 있었습니다.

“진찰하려면 다리를 누르게 되는데 또 기절하지 않도록 주사를 놓아야겠군.” 의사가 말했습니다.

의사가 가방에서 주사기를 꺼냈습니다. 그가 주사약을 뽑고 있는 동안 챈스는 TV에서 본 온갖 주사 놓던 장면을 그려보았습니다. 그는 주사가 아프리라고 짐작하지만, 겁이 나는 것을 알려야 할 지 어쩔 지 알 수 없었습니다.

의사는 이러한 챈스의 마음을 읽고 있었습니다. “자, 자.” 그가 달래듯 말했습니다. “당신은 그저 가벼운 쇼크 상태에 있을 뿐입니다. 뼈가 조금 상했을 가능성이 있긴 하지만, 그렇게 염려할건 아닙니다.” 주사는 놀랄 정도로 짧은 시간이 걸렸을 뿐이며, 챈스는 아무런 아픔도 느끼지 않았습니다. 몇 분 후 의사는 뼈에는 아무런 이상이 없다고 확언했습니다.

“그러나 당신이 꼭 지켜야 할 일은 오늘 저녁까지 안정을 취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후에는 뭐 내키시면 저녁 식사를 하러 올라 가셔도 좋습니다. 다만 다친 다리에 너무 체중을 많이 싣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 그동안 나는 간호원에게 주사 처방을 해 놓을 테니까, 메 세 시간마다 한번씩 맞으시고, 식사 때 알약 하나씩만 드시면 됩니다. 필요하게 되면 내일 엑스레이를 찍도록 합니다. 자, 그럼, 푹 안정을 취하시오.” 의사는 방을 나갔습니다. 챈스는 나른하게 졸음이 왔습니다. 그러나 EE가 돌아오자 챈스는 번쩍 눈을 떴습니다.


사람이란 남이 지켜보고, 친절하게 말을 걸어 주면 안정감을 느끼는 법이었습니다. 그렇게 되면 그가 무엇을 하든, 남들은, 그가 남들의 행동을 자기 나름대로 풀이하듯, 그의 행동을 그들 나름대로 풀이하게 되는 법이니까 말입니다. 그리하여 남들 역시 그가 그들에 대해 아는 것 이상으로 그를 알 수 없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부인.” 챈스가 입을 열었습니다. “깜박 잠이 들 뻔했습니다.”

“방해가 됐다면 미안합니다.” 그녀가 말했습니다. “하지만 방금 의사 선생님과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선생님 말씀이 안정을 취하기만 하면 된다고 하셨습니다.….저, 가디너씨….”그녀는 침애 옆에 놓인 의자에 앉았습니다. “전 이번 사고에 너무너무 죄책감을 느끼고 있어요. 제가 책임감을 깊이 느끼고 있는 걸 꼭 말씀드려야 할 것 같았어요. 저 때문에 크게 어긋난 약속이나 없으셔야 할 텐데…”

“걱정하지 마십시오.” 챈스가 말했습니다. “도움을 주신데 대해 깊이 감사하고 있습니다. 저….저는.”

“제가 할 수 있었던 최소의 일을 했을 뿐이어요. 혹시 꼭 알려 드려야 할 분이 계신 건 아닌가요? 부인께나, 가족들 에게라고?”

“저에겐 아내나 가족이라고는 없습니다.”

“그럼 혹 사업상 관계되시는 분은요? 저의 집 전화나 케이블이나 텔랙스든 무어든 마음 놓고 이용하셔서 연락을 취하도록 하세요. 혹시 비서가 필요한 게 아니세요? 저의 남편이 몸져누운 지 오래라서 요즈음 남편의 참모진도 할 일이라곤 거의 없는 편이랍니다.”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저에게 지금 필요한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감사합니다.”

“틀림없이 연락을 취하셔야 할 분이 계실 텐데…..부담 갖지 마세요.”

“정말 아무도 없습니다.”

“가디너씨, 그렇담….지금 뭐 말씀드리는 건 그저 예의상 해보는 말은 아닙니다. 지금 당장 꼭 돌봐야 할 사업상 일이 없으시다면 상처가 완전히 아물 때까지 여기 계셔 주셨으면 합니다. 지금 상태로선 혼자 몸을 돌보시기가 어려우시지 않겠어요? 저희는 방도 많고, 항상 최상의 치료를 언제나 받으실 수도 있구요. 저는 거절하시지 않으리라 믿겠어요.”

챈스는 이 초대를 승낙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EE는 그에게 감사를 표했습니다. 얼마 후 챈스는 하인들에게 그의 가방을 풀도록 지시하는 EE의 목소리를 들었습니다.


두꺼운 커튼 사이로 한줄기 햇볕이 새어 들어와 얼굴을 환히 비추는 바람에 챈스는 잠에서 깨어낫습니다. 늦은 오후였습니다. 그는 어지러움을 느꼈습니다. 다리의 통증이 새삼스럽게 느껴졌고 한동안은 그가 어디에 와 있는지 잘 생각이 나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챈스의 머리에 사고 당시의 일이며 호화롭던 리무진과 여인 그리고 의사의 모습이 차례로 떠올랐습니다.

침대 가까이 그의 손이 닿을 수 있는 자리에 TV가 놓여 있었습니다. 챈스는 TV를 켜고 화면을 가꾸어 가는 이미지들에 친근함을 느끼며 TV를 응시했습니다. 조금 후 일어나 커튼을 젖히려고 했을 때 전화벨이 울렸습니다. EE이었습니다. 그녀는 챈스의 다리 상태를 묻고 난 뒤 홍차와 샌드위치를 방으로 날라 오게 해도 좋겠는지. 또 그녀가 지금 올라가도 좋겠는지 물었습니다. 그는 좋다고 말했습니다.

잠시 후 하녀가 쟁반을 받쳐 들고 들어와 침대에 내려놓았습니다. 챈스는, TV에서 본대로 맛있는 요리를 천천히 먹었습니다.

EE가 그의 방에 나타난 것은 그가 베개에 기대어 TV를 보고 있을 때였습니다. 그녀가 침대 가까이 의자를 끌어와 챈스는 마지못해 TV를 껐습니다. 그녀는 먼저 그의 다리 상처가 어떤지 알고 싶어 했습니다. 그는 아직도 다리의 통증이 가시지 않았음을 시인했습니다. 그녀는 챈스의 방에서 전화를 걸어, 의사에게 챈스의 상태가 약간 호전되고 있는 것 같다고 알렸습니다.

EE는 챈스에게 남편인 랜드씨는 자신보다 훨씬 나이가 많으며 칠순을 넘긴지도 꽤 오래된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얼마 전 병석에 눕기 전까지만 해도 남편은 대단한 정력가 이었어요…. 지금도 나이나 병에 아랑곳없이 사업에 대한 열의는 여전하지요…. 그녀는 또 그 그들 사이에 아이가 없는 것, 게다가 랜드씨가 전처와 이젠 어른이 된 전처 아들과의 모든 관계를 끊어 버린 것이 못내 안쓰럽다고 했습니다. EE는 남편 랜드가 전처와 이혼하게 된 것도 자기와 결혼하기 위해서였기 때문에, 아버지와 자식간의 관계 절연이 언제나 자기책임으로 느껴진다고 고백했습니다.

EE가 하는 말에 흥미를 느끼는 것처럼 행동해야 한다고 생각한 챈스는 TV에서 본대로 그녀의 말 중 특히 그녀에 관계된 부분을 되풀이하는 식으로 응대했습니다. 챈스가 그녀의 말에 맞장구를 칠 때마다 EE는 표정이 밝아지며 무언지 모르겠지만 어떤 자신을 얻어가는 듯 했습니다. 이제 그녀는 점차 긴장에서 벗어나 더욱 세세한 이야기까지 털어놓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얼마 안가 아주 포근한 상태에 빠져든 듯, 강조해야 할 부분이 되면 가끔씩 그의 어깨나 팔을 어루만질 정도가 되었습니다.

챈스에게는 그녀의 말들이 마치 그의 머리 속을 떠도는 부초처럼 느껴졌습니다. 챈스는 마치 그녀가 TV화면에 비쳐진 이미지인 것처럼 바라보기 시작했습니다. EE는 편안하게 의자에 몸을 기대었습니다. 그때 노크소리가 나서 그녀의 말 중간을 가로막았습니다.

주사를 놓으러 온 간호원이었습니다. 방을 나가기 전 EE는 남편인 랜드씨가 조금 차도를 보여 함께 저녁을 같이 하자고 말했습니다.

챈스는 랜드씨가 그에게 이 집을 나가라고 종용하지 않을지 갑자기 불안해졌습니다. 그러나 이 집을 떠나야 한다는 생각이 그를 당장 괴롭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언젠가는 떠나야 한다는 것, 다음에는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는 것, 이 모두가 TV극과 다를 바가 없었으니까. 새로운 프로의 등장인물들이 또 다른 미지의 인물들일 것이라는 것은 챈스도 알고 있는 터였습니다. 걱정할 필요는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프로에는 속편이 따르는 법이었고,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의 길이란 다음 출연 때까지 끈기 있게 기다리는 것뿐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가 막 TV를 다시 켰을 때 흑인 하인이 말끔히 세탁하고 다리미질을 한 그의 의복들을 가져왔습니다. 흑인 하인의 미소는 루이즈 할멈의 사람 좋던 미소를 연상시켰습니다.


EE가 챈스에게 다시 전화를 걸어, 남편과 함께 저녁식사를 하기 전 술을 한잔 하지 않겠느냐고 물어 왔습니다. 방을 나오자 층계 밑에서 기다리고 있던 하인이 EE와 나이가 많이 들어 보이는 남자가 기다리고 있는 객실로 챈스를 안내했습니다. 챈스는 EE의 남편이 돌아가신 영감님만큼이나 늙은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는 마르고 열기에 뜬 노인의 손을 잡았습니다. 악수하는 손에는 힘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가 챈스의 다리에 눈을 주며, 또렷한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무리하지 마시오. 그래 기분은 어떠시오? 사고 전말을 EE한테 들었소. 정말 창피한 일이었소! 변명의 여지가 없는 실수였어!”

챈스는 한순간 머뭇거렸습니다. “뭐, 별일 아닙니다. 벌써 상당히 좋아 졌습니다. 아무튼 사고를 당하기는 제 일생 처음입니다.”

하인이 샴페인을 따랐습니다. 그러나 챈스가 그의 잔에 입을 댔을 때 저녁식사 준비가 완료되었다는 연락이 왔습니다. 두 남자는 EE 뒤를 쫓아 세 사람만의 식탁이 마련된 식당으로 들어갔습니다. 챈스는 번쩍이는 은제 식기들과 식당 구석구석에 서 있는 조각들을 바라보았습니다.

처신하는데 있어 챈스는 직장의 상사와 그의 따님을 모시고 가끔 저녁을 함께 하는 젊은 비즈니스맨이 주인공으로 나오는 TV프로를 흉내 내기로 했습니다.

“가디너씨, 당신은 무척 건강해 보이는군.” 랜드씨가 말했습니다.

“그건 대단한 재산이지. 헌데, 사고 때문에 사업에 무슨 지장이 생긴 게 아니오?”

“부인께 이미 한번 말씀드렸습니다만.” 챈스는 천천히 입을 열었습니다. “제 집은 이미 문을 닫았고, 급한 일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는 아주 조심스럽게 음식을 잘라 입에 넣었습니다.

“저에게 사고가 났을 때는 사실 무슨 일이 일어나기를 기다리고 있을 때였습니다.”

랜드씨는 안경을 벗어 들고 입김을 불어 손수건으로 안경을 닦았습니다. 그리고 나서 다시 안경을 쓰고는 무슨 말을 더 기다리는 듯한 표정으로 챈스를 바라보았습니다. 챈스는 자신의 답변이 만족할 만한 것이 못되는 것임을 알아챘습니다. 올려다보니 EE 또한 그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있었습니다.

“사람이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으면서 일할 수 있고, 계절과 함께 변화해 갈 수 있는 게 아닙니다. 그런 기회란 이제 그리 많이 남아 있지 않지요. TV에서는….” 그는 잠시 다음 할 말을 찾아 머뭇거렸습니다.

“…. 저는 그런 정원을 한 번도 보지 못했습니다. 뭐. 숲이나 정글. 때로는 나무 한두 그루 정도 것들을 자기 힘으로 심고, 자기 손으로 가꾼 것들을 자기 눈으로 살펴 볼 수 있는 정원이라곤….” 챈스는 갑자기 서글픔을 느꼈습니다. 랜드씨가 식탁 위로 몸을 기울여 왔습니다.

“가디너씨, 거 참 말씀 잘 하셨소. 초온시라 불러도 상관없겠소? 정원사라! 진정한 사업가를 한마디로 표현하기에 그보다 더 적합한 단어가 어디 있겠소? 애써 자신의 손으로 거친 땅을 일구어 비옥하게 바꾸어 놓는 사람, 그 땅에 자신의 이마에서 솟은 땀으로 물을 주고, 가족과 사회를 위해 가치 있는 곳으로 창조하는 사람…. 정말 그렇군. 초온시, 그 얼마나 멋진 비유인가! 생산성을 아는 사업가란 정말 자신의 정원을 가꾸는 일꾼이지!”

랜드씨의 흥분된 반응에 챈스는 얼마간 마음이 놓였습니다. 모든 것이 잘 돼 가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감사합니다.”

“자, 날 그저 벤이라고 불러주게.”

“벤” 챈스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습니다. “제가 떠나온 정원이 바로 그런 곳이었죠. 저는 그렇게 멋진 곳은 아마 다시 찾을 수 없을 겁니다. 그곳에서 자라는 모든 것이 다 제 손으로 가꾼 것이었죠. 씨앗을 뿌리고 물을 주고, 자라는 걸 보살핀 게 모두 제 손으로 이뤄진 것이었으니까요. 그러나 이제 모든 게 끝났습니다. 이제 저에게 남은 거라곤 저 위에 있는 것뿐이니까요.” 그는 천장을 가리키며 말을 맺었습니다.

랜드씨가 다정한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았습니다. “초온시군, 자넨 아직 젊어. 저 위 얘기는 갑자기 왜 꺼내나? 머지않아 저 위에 갈 사람은 자네가 아니고 나야. 자넨 내 아들 나이 정도가 될 것 같은데 자넨 아직 멀었어. 자네나 EE나 둘 다 아직 한창 좋은 나이야.”   

“벤, 당신 또….” EE가 말을 가로막았습니다.

“알아, 알아.” 그가 오히려 EE의 말을 가로막았습니다. “내가 나이 얘기 꺼내는 걸 당신이 싫어하는 건 알고 있어. 그러나 내게 남은 건 정말 저 위 뿐이라는 걸 숨길 순 없잖아.”

챈스는 랜드씨가 곧 저 윗방에 가게 될 것이라는 말뜻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챈스 자신이 이 집에 묵고 있는 동안 어떻게 랜드씨가 윗방으로 옮길 수 있다는 말입니까?

그들은 침묵 속에 식사를 했고 챈스는 와인은 거들떠보지도 않은 채 음식만을 꼭꼭 씹어 먹었습니다. TV를 보면 술은 가끔 사람들로 하여금 스스로를 가눌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끄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랜드씨가 다시 입을 열었습니다. “곧 좋은 기회를 다시 만나지 못하면 당신 가정은 어떻게 하나?”

“저에겐 가정은 없습니다.”

랜드씨의 표정이 어두워졌습니다.

“이해할 수 없군. 자네처럼 젊고 잘 생긴 청년에게 가정이 없다니…. 어쩌다 그리됐나?”

“저에겐 시간이 없었습니다.” 챈스가 말했습니다. 랜드씨는 깊은 인상을 받은 듯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자네가 맡은 일이 그렇게 대단한 것이었나?”

“벤, 제발 ~” EE가 끼어들었습니다.

“초온시는 내가 캐묻는 걸 싫어하지 않을 것이야. 그렇지 않나, 초온시군?”

챈스는 고개를 끄덕여 보였습니다.

“그럼…. 자넨 정말로 가정을 바라지 않았나?”

“전 가정을 갖는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도 모릅니다.”

“그럼 자넨 정말 홀몸 이었구먼….” 랜드씨가 중얼거리듯 말했습니다.

잠시 침묵이 흐르는 동안 하인들이 새 요리들을 들여왔습니다. 랜드씨가 챈스를 넘겨보았습니다.

“자넨 어딘가 내 마음에 드는 데가 있네. 이 나이로 솔직한 얘기네만, 자넨 시원해서 좋아. 판단이 빠르고, 뭘 술술 풀어 낼 줄도 알고…. 알고 있겠지만.”

랜드씨가 말을 계속했습니다.

“난 「First American Financial Cooperation(FAFC)」의 이사장이라네. 우린 인플레니, 중과세니, 파업이니, 요즘 꼴사나운 일들로 압박이 심한 미국의 비즈니스계를 돕기 위한 프로그램을 새로 시작한, 말하자면 업계를 이끌어가는 선의의 정원사들을 이해 팔 걷고 나섰다고나 할까? 결국, 그들이야말로 재벌이나 카르텔 등, 우리의 기본권과 중산층의 복지를 위협하는 말일세. 이 문제는 언제 한 번 자세히 의논해 보자구. 자네가 일단 일어나 돌아다닐 수 있게 되면 이사회의 다른 사람들을 만나 볼 수 있을 거야. 그러면 자네는 우리의 프로젝트와 목표를 더욱 잘 알 수 있게 되겠지.”

챈스는 랜드씨가 다음과 같이 덧붙이자 매우 마음이 놓였습니다.

“나는 아네, 알아. 자넨 일시적 충동으로 행동할 사람은 아닌 것 같아.

그러나 오늘 내가 한 말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앞으로 얼마나 더 내가 버텨 낼 수 있을 지도 모르는 판국이니 말일세….”

EE가 또 다시 항변을 시작했으나 랜드씨는 아랑곳없이 말을 계속했습니다. “난 이제 병이든지 오래 됐고, 나이도 지겹도록 먹었다네. 마치 뿌리가 땅 위로 드러난 고목나무 같다고나 할까….”

챈스는 더 이상 듣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는 갑자기 그의 정원이 그리워졌습니다. 영감님 댁 정원에는 뿌리가 드러나거나 시는 나무라고는 없었습니다. 그곳에는 모두 싱싱하고 손질이 잘 돼 있는 나무들뿐이었습니다…. 챈스는 그를 중심으로 점점 넓게 퍼져 가는 침묵을 알아채듯 얼른 말을 바꾸었습니다.

“어르신네 말씀은 생각해 보겠습니다. 그러나 아직은 다리가 쑤셔서 제가 지금 어떤 결정을 내리기는 어렵습니다.”

“좋아, 초온시군. 서둘지 말게나.”

랜드씨는 몸을 굽혀 챈스의 어깨를 정답게 두드렸습니다. 그들은 함께 일어나 이번에는 서재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 넷


수요일. 챈스가 옷을 갈아입고 있을 때 전화벨이 울렸습니다. 수화기를 통해 랜드씨의 목소리가 울려왔습니다. “잘 잤나, 초온시. EE가 오늘 집을 비우게 되겠다고, 대신 인사를 전해 달라는군. 덴버에 볼일이 있다는 거야. 그러나 내게도 용무가 전혀 없는 건 아닐세. 오늘 대통령께서 미국 재정문제연구소 연례총회에서 중대 연설을 하기로 돼 있네. 뉴욕에 오시는 도중 대통령 전용기에서 나에게 직접 전화를 하셨어. 내가 몸이 영 안 좋아서 회장 자격으로 직접 회의를 주재할 수 없다는 걸 아시구서 말일세. 그러나 오늘은 좀 차도가 보인다고 했더니 오찬회 직전에 몸소 날 찾아오시기로 결정 하셨네.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케네디 국제공항에 도착하시게 되면 거기서 맨하탄 까지는 헬리콥터를 이용하신다는 거야. 그러니 우린 한 시간 내에 그 분을 맞이하게 될 거야.” 그는 잠시 말을 멈추었습니다. 챈스는 수화기를 통해 랜드씨의 거친 숨소리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초온시군, 자네도 그 분을 만나 보기 바라네. 자네에게 아주 좋은 챈스일거야. 대통령은 아주 대단한 인물일세. 내 생각에는 대통령께서 자넬 좋아 하실 것 같아. 정말 대통령께서는 자네의 인물됨을 알아보실 거야. 잘 듣게. 대통령 비밀 경호원들이 이곳을 미리 살펴보기 위해 곧 이리로 올 걸세. 대통령께서 무슨 일을 하시던 어디에 가시던 그들은 늘 그렇게 하니까 말 일새, 그들이 도착하면 내 비서가 통지해 줄 테니 크게 신경 쓸 일은 없을 거야.”

“알겠습니다, 벤자민. 정말로 감사합니다.”

“아, 그리고 한 가지 더 있네. 역시 자네가 신경 쓸 일은 아니네만․ ․ ․ ․. 그들은 자네 몸수색을 하게 될 거야, 요즈음엔 대통령 신변 가까이 있게 되는 사람은 누구나 날카로운 건 아무 것도 소지할 수 없다는 건 자네도 알겠지? 그러니 자네 머리가 날카롭다는 걸 이 사람들에게 들키지 않도록 조심하게. 그들이 알면 그것마저 압수하려 들 테니까 말이야, 자 그럼, 곧 만나세.” 랜드씨가 전화를 끊었습니다.

날카로운 건 안된다…. 챈스는 급히 넥타이핀과 머리빗을 테이블 위에 꺼내 놓았습니다. 그러나 내 날카로운 머리란 무슨 뜻일까…? 챈스는 거울에 자신의 모습을 비추어 보았습니다.

그는 거울 속에 비쳐진 자기 모습이 마음에 들었습니다. 머리카락은 윤기가 흐르고, 피부는 혈색이 좋았으며, 새로 다려 놓은 짙은 색깔의 양복은 마치 나무껍질이 나무를 싸듯 몸에 꼭 맞았습니다. 기분이 좋아진 챈스는 TV를 켰습니다.

얼마 안 있어 랜드씨 비서가 대통령 경호원들이 위 층 으로 올라갈 준비가 돼 있다고 알려 왔습니다. 남자 네 사람이 미소 띤 얼굴로 챈스의 방에 들어와 서로 말을 주고받으며 정밀한 기계들을 사용해 조사를 시작했습니다.

 

챈스는 조용히 책상 앞에 앉아 TV를 켰습니다. 채널을 바꾸나 Central Park가 거대한 헬리콥터가 내려앉는 광경이 비치고 아나운서가 지금 이 순간 미합중국의 대통령이 뉴욕 시 도심지 중앙에 착륙하고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비밀 경호원들도 일손을 멈춘 채 화면에 시선을 집중했습니다. “보스께서 도착하셨군.” 그들 중 누군가가 조용히 말했습니다. “빨리 다른 방들도 체크해야겠어.”

랜드씨 비서가 대통령의 도착이 임박했음을 전화로 알려 왔을 때는 챈스만 홀로 방에 있게 된 후였습니다. “고맙소.” 챈스가 말했습니다. “그럼 지금 곧 내려가야겠지요?” 그의 목소리가 약간 더듬거렸습니다.

“네, 도착 시간이 다 된 것 같습니다.”

챈스는 아래층으로 내려갔습니다. 비밀 경호원들이 소리 없이 복도와 현관, 그리고 엘리베이터 입구 주위를 돌아다니고 있었습니다. 몇몇 경호원은 서재 창문근처에, 또 다른 몇 명은 식당과 거실, 그리고 서재 입구에 각각 서 있었습니다. 경호원 한 명이 재빠른 솜씨로 챈스의 몸수색을 마친 후 사과의 말과 함께 서재의 문을 열어 주었습니다.

 

랜드씨가 다가와 챈스의 어깨를 두드렸습니다. “자네에게 이 나라 국가 원수와 자리를 함께 할 기회가 오다니 정말로 기쁘구먼. 대통령은 법의 정신을 바탕으로, 정의감이 강하실 뿐만 아니라, 선거인단의 맥과 주머니 사정을 정확히 짚어 내는 데는 정말로 판단력이 뛰어난 분이라네. 대통령께서 지금 직접 나를 찾아오는 건 정말 사려 깊은 데가 있는 포석이라네. 그렇지 않은가?”

챈스는 이의가 있을 수 없었습니다.

“마침 EE가 집에 없는 참으로 안됐어.” 랜드씨가 말했습니다. “EE는 대통령의 열광적인 팬이고, 대통령을 매우 매력적인 분으로 생각하고 있지. 오늘 덴버에서 전화를 해왔어.”

챈스는 EE가 전화를 걸어 온 것은 알고 있다고 대꾸했습니다. “자네는 EE와 말 한마디 안 나누었나? 뭐, 다시 전화가 올 테지. EE는 대통령에 대한 자네의 인상과, 자네가 그분과 무슨 얘기를 나누었는지 알고 싶어 못 견딜 거야…. 초온시, 만약 내가  자고 있을 때 전화가 오면 자네가 전화를 받아 회담 내용을 얘기해주려나?‘

“기꺼이 하겠습니다. 회장님께서 빨리 건강이 좋아지셨으면 합니다. 지금은 꽤 좋아 보이시는데요.”

그러나 랜드씨는 불편한지 의자에 앉은 몸을 움직거렸습니다. “모두가 억지 분장이지. 초온시군, 모두가 정말로 분장일 뿐이야. 내 간호원이 밤을 꼬박 새우고, 아침에도 내내 내 곁에 붙어 있었다네. 간호원에서 내가 무슨 약을 먹어도 상관없으니 내가 대통령과 함께 있는 동안 내가 죽어가고 있다는 인상이 들지 않도록 극약처방이라도 해 달라고 부탁했지. 초온시군, 누구도 죽어가는 사람을 좋아할 수는 없어. 그건 누구도 죽음이 무언지 모르기 때문이라네. 우리 모두 알고 있는 건 다만 죽음의 공포 일 뿐이지. 초온시군, 물론 자넨 예외일 테지, 난 그걸 알고 있네. 자네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걸 나는 알고 있네. EE나 내가 자네를 높이 평가하는 것도 그 때문일세. 자네의 그 놀랍게 균형 잡힌 성품 말일세. 자넨 공포와 희망 상에서 비틀거리질 않고 있어.

자네는 정말 평화로운 사람이야. 아니, 거북해 할 것 없네. 난 자네 아버지뻘이 될 만큼 나이를 먹었어. 나는 지금까지 떨기도 무척 떨면서, 꽤나 오랜 세월을 살아온 셈이지. 우리 모두는 이 세상에 벌거숭이로 왔다가 벌거숭이로 간다는 사실을 망각한 소인배들과 인생의 이중장부를 꾸며 보았자 결국 소용이 없다는 것을 잊고 있는 작가들에게 둘러 싸여 있지.”

랜드씨의 얼굴이 창백해 보였습니다. 그는 알약을 하나 집어삼키고 물을 한 모금 마셨습니다. 여러 대의 전화 중 하나가 울렸습니다. 랜드씨가 수화기를 들고 생기 찬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가디너씨와 난 준비가 다 됐네,. 곧장 대통령을 서재로 안내하게.” 그는 수화기를 내려놓고 책상 위의 글라스를 책장 위  보이지 않는 곳으로 치웠습니다. “초온시군, 대통령이 이곳에 도착 하셨다네, 지금 이리로 오시고 있는 중이지.”

챈스는 최근의 TV 프로에서 대통령을 본 일이 상기되었습니다. 구름 한 점 없는 화창한 햇빛 속에서 분열식이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대통령은 번쩍이는 훈장을 주렁주렁 단 군복을 착용한 장성들과 짙은 썬글라스를 쓴 민간인들에 둘러싸여 사열대에 서 있었습니다. 그 아래 탁 트인 넓은 연병장에는 병사들이 끝없이 대오를 이어, 손을 흔드는 그들의 지도자 쪽으로 얼굴을 돌려 바라보면서 행군해 가고 있었습니다. 대통령의 눈은 가엾은 상념에 잠시 가리어 진 듯 했습니다. 대통령의 사열을 받는 이들 수천 명의 행렬은, 챈스의 축소된 TV 화면에는 마치 바람에 날려가는 생명 없는 잎 새 더미처럼 보일 뿐이었습니다. 난데없이 하늘로부터 비행기 편대가 지상을 향해 내리 꽂혔습니다. 사열대 위의 장성과 민간인들이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을 때는 이미 비행기 편대는 벼락같은 폭음만을 남긴 채 번개처럼 대통령의 머리 뒤를 지나간 뒤였습니다. 대통령의 얼굴이 다시 한번 화면을 덮었습니다. 그는 사라져가는 비행기 편대를 응시하고 있었습니다. 희미한 미소가 그의 얼굴을 부드럽게 스쳐 갔습니다.

 

“이렇게 각하를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대통령 각하.”

랜드씨가 미소 지으며 방으로 들어서는 중키의 남자를 맞이하기 위해 의자에서 일어서며 말했습니다. “죽어가는 사람을 찾아보려고 굳이 여기까지 오다니 참으로 영광스럽습니다.”

대통령은 랜드씨를 포옹한 뒤 의자로 그를 부축해 갔습니다. “무슨 소리요, 벤자민, 자 어서 좀 앉으시구려. 어디 좀 봅시다.” 대통령은 소파에 자리를 잡으며 챈스 쪽을 바라보았습니다.

“대통령 각하,” 랜드씨가 말했습니다. “저와 친분이 두터운 초온시 가디너씨를 소개하겠습니다. 가디너씨, 미합중국 대통령이십니다,” 랜드씨는 대통령의 함박웃음을 띠우며 손을 내미는 모습에 눈길을 준채 의자에 몸을 묻었습니다. 대통령이 TV기자회견 때면 시청자 쪽을 뚫어지게 바라보곤 하던 것이 생각나 챈스도 대통령의 눈을 똑바로 들여다보았습니다.

“만나서 기쁘오, 가디너씨.” 대통령이 말했습니다. “우리 함께 두문불출하고 있는 벤자민을 본 받읍시다.” 그는 랜드씨 쪽으로 몸을 구부렸습니다. “벤자민 이 나라는 아직 당신을 필요로 하고 있소, 그리고 당신의 대통령인 내가 아직 당신의 은퇴를 허락하지 않고 있음을 잊지 마시오.”

“저는 언제고 잊혀질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대통령 각하.” 랜드씨가 부드럽게 말했습니다. “저는 지금 은퇴를 한다 해도 아무런 불만도 없습니다.…, 세상이 랜드와 작별을 고하고 또 랜드가 세상과 작별을 고하는 것은 아주 공평한 거래가 아니겠습니까? 그때에는 안정과 평화와 휴식이란 보상을 제값을 쳐서 받는 거니까 제가 일생동안 추구해온 목표가 달성되는 셈이지요.”

“자, 벤, 존 좀 진지해집시다.‘ 대통령이 손을 저으며 말했습니다. ”당신이 철학자인 거야 누구나 아는 사실이지만, 그보다 먼저 벤은 강력하고 활동적인 비즈니스맨이 아니겠소? 삶에 대해 이야기 합시다 그려! “그는 담배에 불을 붙이기 위해 잠시 말을 멈췄습니다. 듣자 하니 오늘 개최될 재정문제연구소 개막 연설을 취소했다던데 어떻게 된 거요?”

"지금 저는 연설을 할 수 없게 됐습니다. 대통령 각하.” 랜드씨가 말을 했습니다. ” 그건 의사의 지시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가 덧붙었습니다. ”제 통증에는 이 랜드도 복종할 수밖에 없습니다.” 

“음…좋소 …뭐 이번 총회 역시 그저 하나마나의 회의에 불과한 거니까. 다음번 총회가 있지 않소? 그리고 당신이 몸소 참석하지 않더라도 당신의 마음이야 항상 그곳에 있을 것이 아니겠소. 연구소 창립부터 당신의 작품이고, 거기 업적이라면 모두 당신 인생을 통한 헌신이란 도장이 찍혀있는 거니까.”


그들은 긴 대화를 시작했습니다. 가끔 그들은 챈스의 동의를 구하는 듯 챈스 쪽으로 눈길을 주기도 했지만 그는 아무 것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챈스는 그들이 기밀을 지키기 위해 일부러 그들끼리만 통하는 암호를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때 갑자기 대통령이 그에게 말을 걸어왔습니다. “그럼 당신은, 가디너씨? 당신은 이 윌스트리트의 악천후를 어떻게 생각하시오?”

챈스는 가슴이 움찔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상념의 뿌리들이 갑자기 촉촉한 땅에서 뽑혀 나와 마구 얽힌 채 적의에 가득한 환경에 처박히듯 느껴졌습니다.

그는 잠시 카페트에 눈길을 돌리고 있다가 마지못해 입을 열었습니다.

“정원에서는.” 챈스가 말을 시작했습니다. “성장에도 계절이 있습니다. 봄, 여름이 있는 가하면 또 가을과 겨울이 있는 법이지요. 그 후에는 또 봄과  여름이 돌아오게 마련이구요. 그러니 뿌리가 뽑히지 않는 한 모든 게 섭리에 따라 잘 되어 가게 마련이지요.”

챈스는 눈을 들었습니다. 랜드씨가 고개를  끄덕이며 흐뭇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습니다. 대통령은 퍽 기분이 좋은 것처럼 보였습니다.

“가더니씨, 방금 하신 말씀은 정말 무척 오랜만에 들어보는 신선하고 낙관적인 발언 입니다” 대통령은 자리에서 일어나 벽난로를 등지고 허리를 쭉 폈습니다.

“우리들 대다수가 평소에 자연과 사회는 하나라는 사실을 잊고 있소! 그렇소. 우리가 아무리 자연으로부터 자신을 격리시키려 해도 우린 여전히 자연의 일부지요. 우리의 경제체제 역시 장기적으로 보면 자연과 마찬가지로 결국 안정되기 마련이라는 자연의 섭리 위에 서있는 것이오. 그런즉, 우리는 섭리 즉경제적 섭리의 손에 모든 것을 맡기는 걸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는 이유가 여기 있는 셈이지.”

대통령은 잠시 말을 멈추고 랜드씨를 향했습니다.

“우리는 피할 수 없는 자연의 계절적 순환에는 참을성과 불평 없이 순응 하면서도 경제의 계절적 순환에는 참을성 없이 짜증을 내곤 하지! 정말 우리는 어리석은 존재야!”

그는 챈스에게 미소를 보냈습니다.

“나는 가디너씨의 그 단호한 배짱이 정말 부럽소. 미국 의회에 부족한 게 있다면 바로 그런 배짱이지.”

대통령은 손목시계를 홀깃 본 뒤 랜드씨가 일어서려는 것을 황급히 손을 저어 말렸습니다.

“아니, 아니 벤, 그냥 쉬구려. 당신이 곧 쾌유되어야 할 텐데…. 좀 건강이 좋아지면 EE와 함께 워싱턴에 오구려. 그리고 가디너씨… 당신 역시 우리 가족 날 방문해 주는 영광을 베풀어 주시겠지? 기다리고 있겠소.”

그는 랜드씨를 포옹한 뒤 챈스와 급히 악수를 나누고 성큼성큼 방문을 나갔습니다.

랜드씨는 서둘러 물 컵부터 찾아 알약을 하나 더 삼킨 뒤 의자에 털썩 몸을 던졌습니다.

“정말 품위 있는 분이야. 대통령 말일세. 그렇지 않은 것 같나?” 그가 챈스에게 물었습니다.

“그럼은요.” 챈스가 말했습니다. “TV에서는 더 커 보이시던데….”

“오 , 그야 물론이지!” 랜드씨가 말했습니다. “그러나 대통령이란 정치적 존재임을 잊지 말게. 그분이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든 자신이 지나가는 길가에 난 풀이라면 모두 외교적인 물을 빠짐없이 골고루 뿌리는 거지. 단 그러한 그 분을 정말로 좋아 한다네!”

“그건 그렇고, 초온시군. 대통령에게 피력한 신용과 긴축 금융에 관한 내 입장에는 자네도 의견을 같이 하나?”

“저는 제대로 이해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입을 다물고 있었지요.”

“이보게 초온시. 자네가 한 말은 대단한 거야. 대단하고말고. 대통령께서 그렇게 기분 좋아하신 건 순전히 자네의 견해와 자네의 표현방식 때문이었다네. 내 방식대로의 분석이야. 대통령이라면 누구한테나 듣고 있지. 그러나 불행하게도. 자네의 견해 같은 건…들을 기회가 있다 해도 정말 드물게 들을 수 있는 거였네.”

전화가 울렸습니다. 랜드씨가 전화를 받더니 챈스에게 대통령과 경호원이 떠났으며 간호원이 주사를 놓기 위해 지금 대기 하고 있는 중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챈스를 포옹한 뒤 자리를 떴습니다.

챈스는 위층으로 올라갔습니다. 그가 TV를 켜자 대통령의 자동차 행렬이 5번가를 지나고 있는 광경이 방영 되고 있었고 보도 양쪽에 군중들이 모여 서 있었습니다. 대통령이 리무진 창 밖으로 손을 흔들고 있었습니다. 챈스는 바로 조금 전 그는 그 손을 잡고 악수했다는 사실이 실감이 나지 않았습니다.


재정문제 연구소의 연례 총회는 전국 실업률이 유례없이 높은 수준을 기록했다는 그 날 아침의 언론 보도에 따라 기대와 긴장이 엇갈린 분위기 속에서 개막 됐습니다. 행정부 관련 부처의 관계자들은 대통령이 더욱 악화된 경기 침체에 대처하기 위해 어떤 조치를 취할 것인지 밝히기를 꺼려했습니다. 모든 뉴스 매체들은 비상이 걸렸습니다.

대통령은 초청 연설에서 생산성의 지속적인 격감에도 불구하고 연방정부의 과도한 개입은 있을 수 없다고 못 박았습니다. “우리에게는 분명히 봄의 시기도 있었고 여름의 시기도 있었습니다. 대통령의 연설은 계속되었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한 가정의 정원에서와 마찬가지로 한 국가의 경제에도 서리와 폭풍의 가을, 그리고 눈보라치는 겨울의 시기가 따른다는 엄연한 사실을 우리는 피할 수 없는 것 입니다.” 대통령은  또 기간산업이라는 씨앗이 국가의 생명력 깊숙이 묻혀 있는 한 경제는 반드시 다시 번영하고 말 것임을 강조 했습니다.

짧고 비공식적인 질의응답을 통해 대통령은 “관계 작료 및 의회 지도자들은 그리고 기업계의 영향력 있는 경영자들과 다각적 협의”를 가졌음을 밝혔습니다. 여기서 그는 병환으로 말미암아 불참한 재정문제 연구소 회장 벤자민 터언불 랜드씨에게 경의를 표한 뒤, 오늘 랜드씨 자택에서 초온시 가드너씨와 함께 인플레의 긍정적 효과에 관해 극히 의미 있는 토론을 가졌었다고 덧붙였습니다. “실제로 인플레는 과도한 부의 축적이라고 하는 불필요한 가지를 치는 역할을 하는 것이며 따라서 산업이라는 줄기에는 다시없는 활력소 역할도 하게 되는 것 입니다.”

챈스의 이름이 갑자기 뉴스 미디어의 주목을 받게 된 것은 이러한 대통령의 회견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날 오후 랜드씨 비서가 챈스에게 전화를 걸어 왔습니다. "뉴욕 타임지의 톰 코트니씨 전화인데요, 잠깐 그 분과 통화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챈스씨에 관해 몇 가지 인적 사항을 알고 싶어 하는가 봐요.”

“전화를 받겠습니다. 챈스가 말했습니다.

비서가 코트니를 연결해 주었습니다. “방해가 돼서 죄송합니다. 가디너씨. 랜드씨께 말씀은 드렸습니다마는….” 그는 이 말의 효과를 기다리듯 말을 멈추었습니다.

“랜드씨는 지금 몸이 몹시 불편하십니다.” 챈스가 말했습니다.

“아, 예…. 어쨌든 그분 말씀으로는 가디너씨의 인격이나 비전을 감안할 때 가디너씨께서 곧 FAFC이사진에 기용될 가능성이 있다고 하던데, 이 점에 대해 한 말씀 해주실 수 있습니까?”

“아니오.” 챈스가 말했습니다. “지금은 안 됩니다.”

그러자 잠시 침묵이 흘렀습니다. “우리 뉴욕 타임즈는 대통령의 연설 및 뉴욕방문 보도에 있어 가능한 한 자세하고 정확한 기사를 보도하려는 방침을 세우고 있습니다. 가디너씨, 랜드씨 댁에서 대통령과 가지셨던 토론의 성격에 관해 설명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아주 흥미로웠습니다.”

“네, 좋습니다. 대통령께서도 그렇게 말씀하신 것 같더군요. 그러나 가디너씨,” 코트니가 격의 없는 어조를 가장하며 말을 이었습니다. “우리 뉴욕타임즈는 선생님에 관한 인사기록을 이번에 보충갱신 했으면 합니다. 다 아시겠지만….” 그는 신경질적으로 웃었습니다.

“예를 들면, 선생님 사업과 FAFC와의 관계는 정확하게 어떤 것인가부터 시작해 볼까요?"

“그건 랜드씨에게 물어보는 게 좋겠습니다.” 챈스가 말했습니다.

“네, 물론입니다. 그러나 그분이 지금 병환 중이시니까 실례를 무릅쓰고 선생님께 묻는 겁니다.”

챈스는 잠시 말이 없었습니다. 코트니는 대답을 기다렸습니다.

“저는 더 이상 말할 것이 없군요.” 챈스는 이렇게 말하며 전화를 끊었습니다.

코트니는 이마를 찌푸리며 의자에 기댔습니다. 마감시간이 너무 지체되고 있었습니다. 그는 기자들을 소집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모이자 그의 장기인 격의 없는 말투를 다시 찾았습니다. “여러분, 우선 대통령의 방문과 그의 연설에서부터 시작합시다. 랜드씨와 방금 통화해 봤는데, 대통령이 언급한 초온시 가디너는 비즈니스맨이자, 재정정문가인 것 같고, 또한 랜드씨 말대로라면 FAFC 이사진의 공석을 메울 강력한 후보자라는 겁니다.” 그는 말없이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기자들을 둘러보았습니다.

“가디너씨와도 통화해 봤는데….” 코트니는 잠시 말을 멈췄습니다. “그 양반 너무나 말을 아끼는 분이더군, 아주 사무적이야, 어쨌든 우리가 가디너씨에 관한 정보를 모두 입수하기에는 시간이 허락하지  않으니 그와 랜드와의 밀착된 관계, 그리고 FAFC 이사 취임 설, 대통령의 자문역을 맡고 있는 점 등등에 초점을 맞추어 일면 톱으로 뽑기로 합시다.”


챈스는 자기 방에서 TV를 보고 있었습니다. 재정문제연구소 오찬 후 석상에서의 대통령의 연설이 거의 모든 채널을 통해 방영되고 있었습니다. 나머지 몇 안 되는 프로들은 그저 가족게임이나 어린이 모험연극을 방송하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챈스가 방에서 점심을 먹으며 계속 TV를 보던 중 깜박 잠이 들었을 때, 랜드씨의 비서가 다시 전화를 걸어왔습니다.

“TV 프로 ‘오늘 저녁을 화제’ 제작진으로부터 방금 전화가 걸려 왔습니다.” 그녀는 흥분한 어조로 말했습니다. “챈스씨, 방송국에서 오늘 밤 프로에 꼭 좀 출연해달라는 겁니다. 너무 촉박한 부탁이라 심심한 사과를 표한다면서, 부통령께서 오늘의 대통령 연설에 대해 직접 해설하기로 예정되어 있었는데 갑자기 나오실 수 없게 된 연락을 지금에야 받아서 어쩔 수 없었답니다. 물론 랜드씨 께서도 와병 중이시라 출연하실 수 없겠고, 재정 전문가이시니까, 좀 대신 나와 주십사는 내용이었습니다.

챈스는 TV에 출연하려면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물론 그는 자신의 모습을 TV 화면 크기에 한 번 맞추어 줄여 보고 싶었습니다. 하나의 영상이 되어 TV 화면 속에 살아보고 싶었습니다.

비서는 전화를 끊지 않고 기다렸습니다.

“좋습니다.” 챈스가 말했습니다. “어떻게 하면 될까요?”

“아무 것도 안 하셔도 되요.” 그녀가 밝은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방송국에서 프로듀서 자신이 시간에 맞추어 모시러 온답니다. 생방송이라서 프로 시작 반시간 전까지는 거기 가 계셔야 된답니다. ‘오늘 저녁의 화제’ TV 프로에 나가시면 선생님은 틀림없이 스타가 될 거예요. 방송국 사람들한테 지금 전화하겠어요, 선생님이 응낙하셨다고 하면 그들은 한숨들 돌릴 거예요.”

챈스는 TV를 켰습니다. 그는 사람이 한번 화면에 나오기 위해서는, 그리고 출연 후 다시 제 크기로 돌아오기 위해서는 어떻게 둔갑해야 하는지 궁금했습니다. 영원히 변하고 마는 것일까, 아니면 단지 출연 중에만 변하는 것일까? 그리고 또한 프로가 끝나면 두 사람의 챈스가 존재하게 되는 건 아닐까? TV를 보는 챈스와, TV에 출연하는 챈스 말입니다.


그날 저녁 일찍 챈스는 ‘오널 저녁의 화제’ 담당 PD의 방문을 받았습니다. 검정 양복을 입은 키가 작달막한 사람이었습니다. 먼저 프로듀서는 대통령의 연설이 국가 경제의 현황에 대해 국민들의 관심을 제고시켰다고 설명했습니다.”…. 그리고 부통령께서 오늘 밤 저희 프로에 나오실 수 없게 된 이상.” 그가 말을 계속 했습니다. “저희들은 가디너씨께서 우리 시청자들에게 이 나라 경제가 정확히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건지 말씀해 주셨으면 합니다. 가디너씨처럼 대통령 측근에 계신 분이야말로 이 나라 국민들에게 현재의 경제 상황에 대한 권위 있는 해설을 제공하시기에 아주 이상적인 위치에 계신 게 아니겠습니까? 일단 프로에 나오시면 사회자가 함부로 끼어드는 일은 절대 없겠지만, 사회자가 꼭 필요한 경우엔 왼쪽 검지손가락을 자기 왼쪽 눈썹위에 대는 것으로 신호할겁니다. 그러면 그건 사회자가 가디너씨에게 새로운 질문을 하고 싶거나, 하신 말씀을 다시 한번 강조하겠다는 뜻으로 알면 되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챈스가 말했습니다.

“그럼 준비되셨으면 가보실까요? 얼굴은 방송국의 분장사가 조금만 손보면 되겠군요.” 그는 미소 지었습니다. “아, 그리고 사회자가 프로시작 직전에 가디너씨를 미리 한 번 뵐 수 있으면 더욱 좋겠습니다.”

방송국에서 보낸 커다란 리무진 내부에는 작은 TV세트가 둘이나 있었습니다. 파크 애비뉴를 지날 때 챈스는 TV를 켤 수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는 프로듀서와 함께 말없이 TV를 시청했습니다.


방송국의 스튜디오 내부는 챈스가 TV에서 보아 온 여느 TV스튜디오나 다를 바 없었습니다. 그는 즉시 스튜디오에 딸린 커다란 사무실로 안내되었습니다. 권하는 술을 거절한 챈스는 대신 커피를 들었습니다. 사회자가 나타났습니다. 챈스는 즉시 그를 알아보았습니다.

평소에 그는 TV 좌담 프로를 별로 시청하지 않았지만 ‘오늘 저녁의 화제’ 프로를 주재할 사회자는 그가 그 동안 수없이 보아 온 터였습니다.

사회자가 끝없이 그에게 말을 늘어놓는 동안 챈스는 다음에 그에게 무슨 일 이 일어날 것인지 그리고 정말로 언제 그가 TV에 방영되게 될 것인지에 온통 정신이 쏠려 있었습니다.

마침내 사회자가 입을 다물었고,  프로듀서가 서둘러 분장사를 데리고 왔습니다. 챈스는 거울을 마주 보고 앉아 분장사가 엷은 갈색 빛이 도는 분을 귀 얼굴에 얇은 갈색 빛이 도는 분을 그의 얼굴에 얇게 발라가는 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보았습니다.

“TV에는 많이 출현에 보셨나요? ” 분장사가 물었습니다.

“아니오.” 챈스가 말했습니다. “줄곧 보고 있기는 합니다만.”

분장사와 프로듀서는 점잖게 웃었습니다. “됐습니다.”

분장사가 화장 케이스를 닫으며 말했습니다. “행운을 빕니다.” 이 말과 함께 그는 돌아서서 방을 나갔습니다.

챈스는 사무실에 딸린 옆방에서 기다렸습니다. 한쪽구석에 커다랗고 육중한 TV가 한 대 놓여 있었습니다. 그는 사회자가 나타나 프로소개를 하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방청객들이 박수를 치자 사회자가 하얀 이빨을 모두 드러내며 미소를 지었습니다. 카메라들이 무대 주위를 소리 없이 돌기 시작했습니다. 음악이 시작되고 밴드 지휘자가 싱긋 웃는 모습으로 잠깐 화면에 나타났습니다.

챈스는 텔레비전이 스스로의 모습을 잡을 수도 있다는 사실에 놀랐습니다. 이 자화상은 스튜디오의 관중들을 위해 무대위에 설치된 커다란 TV화면에 비쳐져 있었습니다. 이 세상의 삼라만상 모든 것들-나무든, 풀이든 꽃이든, 전화기든, 라디오든, 엘리베이터든, 무엇이든- 오직 TV만이 끊임없이 고체도 액체도 아닌 자신의 얼굴 앞에  거울을 받쳐 들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갑자기 프로듀서가 나타나 챈스에게 따라오라는 신호를 보냈습니다. 그들은 문을 지나두터운 커튼사이를 빠져 나갔습니다. 챈스는 사회자가 자신의 이름을 알리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러나 프로듀서가 뒷걸음쳐 사라지고 챈스는 휘황찬란한 불빛 아래 홀로 서 있는 자신을 발견했습니다. 그는 자기 앞의 청중들을 보았습니다. 그가 TV를 통해 보아오던 청중들과는 달리 그에게는 청중들 속의 개개인의 얼굴은 분별이 되지 않았습니다.

대형카메라 세대가 작고 정방형으로 설치된 무대 위에 서있었습니다. 오른쪽으로 사회자가 가죽을 씌운 책상 앞에 앉아 있었습니다. 그는 챈스를 향해 미소를 지으며 점잖게 일어나 그를 소개했습니다. 방청객들이 우렁찬 박수를 보내왔습니다. TV에서 수없이 보아 온 대로 챈스는 책상 앞 빈 의자를 향해 걸어갔습니다. 그 카메라들이 소리 없이 그들을 싸고돌며 이미지를 잡아 갔습니다. 사회자가 책상 너머 챈스 쪽으로 상체를 기울였습니다.


스튜디오의 배경에서는 거의 보이지 않는 카메라와 방청객을 마주하고, 챈스는 앞으로 벌어질 일들에 자신을 맡겨 버렸습니다. 그에게는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으며 현재 자신이 그곳에 있으면서도 자신이 멀리 떨어져 있는 느낌이었습니다. 카메라들이 사방에서 그의 몸을 훑어보고 있었고 그의 동작 하나 하나를 놓치지 않고 촬영해가면서 방과 자동차와 보트와 비행기와 거실과 침실을 막론하고 세계 곳곳에 흩어져 있는 수 백 만대의 TV화면에 영상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그는 그의 전 생애를 통해 만날 수 있는 사람 수와는 비교도 안될 만큼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에게 보여 지게 될 것입니다.

TV 화면을 통해 그를 보고 있는 시청자들은 그들이 마주보고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알 수 없었습니다. 그를 만나본적이 없는 이상 그들이 어찌 그를 알 수가 있겠습니까? TV는 다만 사람의 겉모습만을 비춰줄 뿐 이었습니다. 그것은 또한 사람의 몸에서 이미지들을 벗겨내는 작업을 그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마침내는, 영원히 복구될 가능성이 없는 시청자들의 동공 속으로, 완전한 사라져 버려 없어질 때까지 말입니다….

무감각한 삼중 렌즈를 돼지주둥이처럼 들이대고 있는 카메라들을 마주 대하게 되자, 챈스는 어느덧 수백만의 살아있는 사람들을 위한 하나의 영상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의 생각이 지금 화면에 방영되지 않기 때문에 시청자들은 그가 얼마나 생생하게 살아있는 사람인지 지금은 알 도리가 없습니다.

그리고 챈스 에게도 시청자들이란 그 자신의 생각이 투영된 이미지로 존재할 뿐이었습니다. 챈스 또한 그들이 얼마나 생생한 삶을 영위하는 존재들인지 만나 본 적도 없고, 그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도 없기 때문에, 쌍방은 서로가 알 도리가 없는 것입니다.

챈스는 사회자가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이곳, 스튜디오에 나와 있는 우리 모두가 오늘 밤 초온시 가디너씨를 모시게 된 것을 커다란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매일 밤 ‘오늘 저녁의 화제’시간을 고려하시는 4천만 시청자 모두 마찬가지일 것으로 생각됩니다. 특히 갑작스러운 사정 때문에 부득이 저희들과 자리를 함께 할 수 없게 되신 부통령 각하를 대신하여, 촉박한 시간에도 불구하고 흔쾌히 나와 주신 점에 대해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사회자는 여기서 잠시 말을 멈추었습니다. 스튜디오가 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습니다.

“가디너씨, 곧 바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우리 경제에 대한 대통령 각하의 견해에 대해 같은 생각이신지요?”

“어떤 견해 말씀이십니까?” 챈스가 물었습니다.

사회자가 이미 예상했다는 듯 미소를 띠었습니다. “오늘 오후 대통령께서 ‘미국 재정문제 연구소’에서 행하신 주요 연설을 통해 피력하신 그 견해 말입니다. 연설 직전 대통령께서는 여러 고문들 중 특히 가디너씨와 협의 하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예…?” 챈스가 말했습니다.

“제 말은….” 사회자는 머뭇거리며 자신의 메모를 흘깃 보았습니다. “에…. 예를 하나 들까요? 대통령께선 이 나라의 경제를 하나의 정원에 비유하시면서, 현재의 침체 시기가 지나면 자연스럽게 성장의 시기가 따르기 마련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정원이야기라면 제가 잘 압니다." 챈스가 확고한 어조로 말했습니다.

“저는 일생을 정원 속에서 일해 왔거든요, 멋있고 싱싱한 정원이란 별게 아닙니다. 제때 가지를 쳐주고 제 때 제 때 물만 제대로 주면, 나무고 덤불이고 꽃이고 모두 싱싱하게 자라는 법이죠. 그러나 정원이란 손이 많이 가는 법입니다. 저는 이 문제에 대해 대통령과 의견을 같이하고 있습니다. 즉, 모든 것이 때가 되면 튼튼하게 성장해 갈 수 있다는 거죠. 뿐만 아니라 정원엔 갖가지 새로운 나무와 새로운 꽃이 자라날 수 있는 공간이 아직 충분히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청중 일부가 박수를 쳐대는가 하면 또한 일부는 야유를 보내는 통에 tm튜디오 안은 잠시 소란스러워졌습니다. 그의 오른편에 설치된 TV화면을 통해 챈스는 자신의 얼굴이 화면을 가득 채우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어 관객들의 얼굴 표정이 화면에 나타났습니다. 그의 말에 찬성하는 빛이 분명한 사람들, 또 분노한 듯한 표정들이…. 다시 사회자의 얼굴이 화면에 나타나자 챈스는 고개를 돌려 그를 마주했습니다.

“가디너씨,” 사회자가 말했습니다. “정말 적절한 비유였습니다. 확실히, 항상 불평불만에 빠져 있거나 비관적인 예측만을 즐겨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우리들로서는 정말로 힘을 북돋아 주는 후원자 같은 말씀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럼 가디너씨, 좀더 문제에 접근해볼까요? 그렇다면 가디너씨의 견해로는 경제의 침체, 증권시장의 하락세, 실업률의 증대…. 이 모든 것이 단지 하나의 단계, 다시 말해 경제라는 정원을 지나가는 하나의 계절적 현상과 같은 것인 지요….”

“정원에서는 모든 것이 성장해 가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먼저 시드는 것도 있습니다. 나무들이 새잎을 내기 위해서는 먼저 낙엽이 져야 하는 것이고, 그러고 나서 새잎은 더 무성하고 더 튼튼하고 더 크게 자라나게 되는 법이죠. 물론, 어떤 나무는 죽기도 합니다. 그러나 싱싱한 묘목이 자라나 이들을 대치합니다. 정원이란 많은 보살핌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누구나 정원을 사랑하게 되면 정원에서 일을 하거나 때를 기다리는 것쯤은 싫어하지 않게 되죠. 때가 되어 계절이 적절히 지나고 나면 틀림없이 정원이 번성해지는 것을 보게 마련이니까요.”

챈스의 마지막 말들은 청중들의 흥분된 속상임 속에 묻혀 거의 들리지 않았습니다. 그의 뒤에서는 악사들이 악기를 만지기 시작했습니다. 큰 소리로 “브라보!” 하고 외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챈스가 다시 자기 옆 TV세트로 몸을 돌리자 한쪽에 시선이 팔려있는 자신의 얼굴을 발견했습니다. 사회자는 청중들을 진정시키기 위해 한 손을 쳐들었으나 박수갈채는 여기저기서 가끔씩 섞여 나오는 야유로 인해 더욱 촉발되는 듯 그칠 줄을 몰랐습니다,

사회자는 천천히 일어나면서 챈스에게 중앙 무대로 나오라는 뜻의 몸짓을 보낸 후 과장된 몸짓으로 챈스를 포옹했습니다. 그러자 박수갈채가 우뢰처럼 폭발했습니다. 챈스는 불안한 자세로 서 있었습니다. 박수갈채가 가라앉자 사회자는 챈스의 손을 잡으며 말했습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가디너씨. 당신의 말씀은 지금이 이 나라가 가장 필요로 하는 정신이기도 합니다. 이 같은 가디너 정신이 우리 경제의 봄을 재촉하는 원동력이 되기를 우리 다같이 기원합시다. 탁월한 재정 전문가이시며 대통령 특별고문이신 진정한 정객 초온시 가디너씨에게 다시 한 번 감사를 드립니다!”

사회자는 프로듀서가 대기하고 있는 커튼 쪽으로 챈스를 안내해 갔습니다. 프로듀서가 힘차게 챈스의 손을 잡았습니다. “대단하십니다. 가디너씨, 정말 대단했어요!” 프로듀서는 감탄을 금치 못했습니다. “제가 이 프로를 맡아 제작해온지 3년이 다 되어 가지만 오늘 같은 반응은 처음입니다! 대통령께서도 깊이 공감하셨을 거라는 것은 보지 않아도 짐작이 갑니다. 대성공입니다. 대성공이에요!” 그는 챈스를 스튜디오 뒤로 안내했습니다. 몇몇 직원이 그에게 다정스레 손을 흔들었고 또 몇몇은 그에게 냉담한 표정으로 등을 돌려댔습니다


아내와 자녀들과 함께 저녁식사를 마친 후 토마스 프랭클린은 일을 계속하기 위해 서재로 돌아갔습니다, 직원 미스 헤이즈가 마침 휴가 중이어서 혼자 사무실에서 일을 마무리 짓기가 어려웠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더 이상 일에 정신을 집중할 수 없을 때까지 일을 처리한 후에야 침실에 들었습니다. 아내는 벌써 침대에 누워 대통령 연설에 관한 TV해설을 보고 있었습니다. 프랭클린은 옷을 벗으며 TV를 넘겨보았습니다. 지난 2년간 그가 보유한 주식지분은 액면가의 1/3로 떨어졌고 예금은 바닥이 났으며 법류 사무소의 이익배당 또한 최근엔 감소일로에 있었습니다.

그는 대통령의 연설에 그다지 깊은 인상을 받지 못했으나, 부통령의 불참으로 인해 대신 등장한 이 가디너란 친구가 그의 암울한 마음을 조금이라도 위로해 주길 원했습니다. 그는 어설픈 솜씨로 바지를 벗어 던졌습니다. 아내가 생일선물로 선사한 바지걸이는 일부러 무시하기로 했습니다. 그는 침대에 걸터앉아 이제 막 시작된 「오늘 저녁의 화제」란 프로에 시선을 돌렸습니다.

사회자가 초온시 가디너를 소개했습니다. 초대 손님이 앞으로 걸어 나왔습니다. 화면의 영상은 뚜렷했으며 색깔도 선명했습니다. 화면에 출연자의 얼굴이 완전히 나타나기도 전에 프랭클린은 이 사람을 어디선가 본적이 있다고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것이, 카메라들이 끊임없이 출연자의 얼굴과 몸을 여러 각도에서 잡아 주는 TV 심층보도 프로 중의 하나에서였는지, 아니면 이 가디너란 사람을 자신이 실제로 만났던 것인지는 확실치 않았습니다. 그에게는 특히 이 남자의 옷맵시가 몹시 낯익은 데가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실제로 이 남자를 만났었는지, 그리고 그것이 언제였는지, 머리를 짜는데 정신이 팔려 가디너의 말은 전혀 귀에 들어오지 않았으며 정확하게 무엇이 그처럼 청중의 반응을 열광적으로 끌어내는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여보 저 친구 뭐라고 말했소?” 그는 아내에게 물었습니다.

“대단했어요!” 아내가 말했습니다. “어떻게 그런 분의 이야기를 놓칠 수가 있어요. 그래? 방금 우리 경제가 아무 이상 없이 잘 돌아간다는 거예요.

경제란 정원하고 다를 바가 없다는 거예요. 경제란 것도 자라고, 시들고 또 자라고 하는…. 가디너 얘기론 모든 것이 OK라는 거예요. “그녀는 침대에 일어나 앉아 안됐다는 표정으로 남편의 얼굴을 바라보았습니다.

“글쎄 내가 뭐랬어요. 버몬트주 땅도 포기할 필요가 없고, 요트여행도 연기하지 말라고 그렇게 얘기했는데도…. 당신 하는 일이란 늘 그렇다니깐…. 항상 봐도 그저 남보다 앞서면 겁부터 집어먹으니, 뭐! 그러게 무어랬어요! 그저 경제라는 정원에 된 서리 한 번 내린 것에 불과한 걸 가지고 말이에요!”

프랭클린은 아내의 잔소리에는 개의치 않고 다시 한번 TV화면을 뚫어지게 응시했습니다.

“저 가디너란 분이, 보통 사람이 아니에요.” 아내가 뭔가를 음미하듯 말했습니다.

“정말로 남자답고, 잘 다듬어진데다, 목소리는 또 얼마나 그럴 듯한지…. 꼭 테드 케네디하고 케리 그런트를 혼합해 놓은 것 같다니까. 그 분은 현실 감각이 없는 엉터리 이상주의자나 IBM에서 옮겨 앉은 박식하다는 테크노크라트들하곤 아주 차원이 다른 것 같아요.”

프랭클린은 수면제 약병으로 손을 뻗쳤습니다. 벌써 밤이 깊어 가고 있어, 그는 피곤함을 느꼈습니다. 아마 내가 변호사가 된 건 큰 실수였는지도 몰라…. 비즈니스…. 재정…. 윌스트리트…. 그쪽이 나았는지도 모르지. 그러나 마흔이 다 된 지금 또다시 챈스를 노린다는 건 너무 늦었어…. 그는 가디너의 용모, 그의 성공, 그의 자신만만함이 부러웠습니다. “그래, 정원 같단 말이지?” 그는 소리 내어 한숨지었습니다, 그런 말을 믿을 수만 있다면야, 얼마나 좋겠어….


방송국 스튜디어에서 들어오는 도중에 챈스는 홀로 방송국 리무진 속에 앉아 사회자가 다음 초대 손님으로 거의 속이 다 비치는 가운만을 걸친 관능적인 여배우를 맞이하는 장면을 TV를 통해 보았습니다. 그리고는 챈스는 사회자와 여배우, 둘다 자신의 이름을 들먹이는 것을 들었습니다. 여배우는 계속 활짝 웃어 보이며 챈스가 정말 멋지고 아주 남성적인 분이었다고 말했습니다,

랜드씨의 저택에 리무진이 도착하자 곧장 하인 한명이 쫓아 나와 문을 열었습니다,

“정말 말씀 잘 하시던데요, 가디너씨,” 하인은 엘리베이트까지 그를 따라 왔습니다,

또 다른 하인 하나가 엘리베이터 문을 열었습니다. “감사합니다, 가디너씨.” 그가 말했습니다. “세상 못볼꼴 다 본 이놈이 처음으로 ‘감사합니다’ 했습니다요.”

엘리베이터 안에서도 챈스는 한쪽 벽에 설치된 소형포터블 TV를 통해 아직 방송 중인 ‘오늘 저녁의 화제’ 프로를 보았습니다. 이제는 사회자가 턱수염을 잔뜩 기른 남자 가수를 새로 맞아 이야기를 시작하고 있었고 챈스는 다시 한 번 자신의 이름이 거론되는 것을 들었습니다.

위층에 이르자 랜드씨 비서가 챈스를 맞이했습니다.

“정말 잊을 수 없는 연설이었어요, 가디너씨.” 여자가 말했습니다. “그렇게 여유있고 진실하게 자신을 표현하는 분을 저는 처음 보았어요. 아직 우리나라에 가디너씨 같은 분이 계시다니 정말 놀랍지 뭐예요. 그리고, 랜드쎄게서 TV를 보시더니 아직 몸이 불편하신데도 가디너씨가 돌아오시면 꼭 좀 방으로 들르시라고 말씀 하셨어요.”

챈스는 곧 랜드씨 침실로 들어섰습니다. “초온시군.” 거대한 침대에 누워 있던 랜드씨가 몸을 일으키려고 안간힘을 쓰며 입을 열었습니다. “정말로 자네에게 진심으로 축하의 말을 하고 싶네. 자네 답변은 훌륭했어, 정말 아주 훌륭했어. 국민 전체가 자네 모습을 보았더라면 정말 좋았을걸.” 그는 덮고 있는 모포를 쓰다듬어 폈습니다. “자넨 사람들 앞에서 아주 자연스러운 태도를 보여 주는데 천부의 재질을 타고 났더군. 초온시군, 그건 아무나 흉내낼 수 없는 뛰어난 재능이야. 극히 드문…. 진정한 지도자의 징표라고나 할까. 자넨 단호하고 용감했어. 학자인체 하지도 않고 말야. 자네가 말한 건 모두 요점만 강조하는 것이었지.”

두 사람은 서로 마주 보았습니다.

“초온시, 자넨 내 진정한 친구야.” 랜드씨는 진지하면서도 거의 존경에 찬 어투로 말을 이었습니다. “자넨 EE가 ‘UN본부 봉사위원회’ 위원장이라는 사실에 흥미를 느낄 거야. 그녀는 내일 UN주재의 리셉션에 참석하게 돼 있어, 내일 내가 그 행사에 EE를 에스코트할 수 없는 건 뻔한 일이야 그래서 자네가 좀 대신 해줘야겠어. 자네 연설이 많은 사람들 뇌리 속에 최우선 순위를 점하고 있을 거라는 건 쉽게 짐작이 가는 일이고, 따라서 자네를 꼭 만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무척 많을 거야. 초온시. 자네가 내일 EE를 에스코트해 주겠나?”

“물론이지요. 부탁하신대로 하겠습니다.”

한 순간 랜드씨의 얼굴이 마치 내부에서부터 얼어버리는 듯 흐려졌습니다. 그는 입술을 축였습니다. 그리곤 그의 눈이 정처없이 방을 훑었습니다. 얼마 후 그는 다시 챈스에게 초점을 맞추는 듯싶었습니다. “고맙네, 초온시군. 그리고…. 지금 말해 두네만.” 그가 차분한 어조로 말했습니다. “만약 내가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자네가 그녀를 잘 좀 돌봐 주게, EE는 자네 같은 사람이 무척…. 아쉬운 사람이니까.”

그들은 악수를 나눈 뒤 서로 작별을 고했습니다. 챈스는 자기 방으로 돌아갔습니다.


덴버에서 뉴욕으로 돌아오는 비행기 속에서 EE는 자꾸만 가디너 생각에 몰두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깜짝 놀랐습니다. 그녀는 지난 이틀 동안 일어난 일을 통해 마치 고치에서 실을 뽑듯 분명한 맥락을 찾아내려고 애썼습니다.

EE는 사고가 난 직후 처음 챈스를 보았을 때 그가 별로 놀란 표정이 아니었던 것이 기억났습니다. 그의 얼굴엔 아무 감정도 나타나 있지 않았고, 아주 침착하고 어딘가 대범한 모습이었습니다…. 마치 그런 사건을 예견하고 있었던 것처럼…. 육체적 고통도, 또 나의 출현까지도 말이야….

이틀이 지났건만 그녀는 아직 그가 누구이며 어디서 온 사람인지조차 알 수 없었습니다.

그는 자신에 관한 이야기는 일체 피하려는 것 같아…. 전날 EE는 하인들이 부엌에서 식사를 하고 있고 챈스가 한동안 잠들어 있는 동안 그의 소지품 일체를 샅샅이 뒤져 보았지만 그에 관한 증명서나 수표, 돈, 심지어는 크레디트 카드조차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사실 그의 주머니에서는 극장표에서 떼난 좌석권하나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가 이런 식으로 여행을 할 수 있다는 사실에 그녀는 슬며시 어안이 벙벙해졌습니다.

어쩌면 그 사람 지시 한마디에 신변의 모든 일들을 척척 처리해 주는 회사나 은행이 있음에 틀림없어…. 잘사는 사람이는 건 첫눈에 알아 볼 수 있었으니까…. 그의 양복은 최고급 옷감을 사용한 맞춤 양복이었고, 와이셔츠 또한 가장 섬세한 비단을 사용한 고급 수제품이었으며, 구두 역시 가장 부드러운 고급 가죽을 사용한 수제품이었습니다. 그의 여행 가방도 모양이나 자물쇠 디자인은 약간 구식이었지만 거의 신형이나 다름없으니까.

몇 번인가 기회를 잡아 EE는 그의 과거에 대해 넌지시 질문해 보았습니다. 그때마다 그는 그가 즐겨 보는 TV 나 자연의 비유를 들어 대답할 뿐이었습니다.

아마 사업의 실패나 파산으로 곤경에 빠져 있는 사업가일지도 몰라. 요즘엔 뭐 흔한 일이니까. 어쩌면 여자한테 실연 당했는지도 모르지. 아니면 순간적 충동으로 여자를 버렸다가, 이젠 돌아갈까 망설이고 있는지도 모르지. 이 나라 어딘가에 그가 살아온 동네. 그의 집, 그의 회사와 그의 과거가 얽혀 있는 곳이 있는 것만은 틀림없을 거야.

그는 누구의 이름도 자신의 입에 올리는 법이 없었고 어떤 특정 장소나 특정 사건을 들먹이지도 않았습니다. 정말 그이처럼 자기 자신에게나 의존하는 사람을 그녀는 지금까지 만나 본 기억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 매너로 보면 사회적으로 자신감 있고 경제적으로 안정된 사람 같기도 하고….

그녀는 챈스가 자기 마음속에 불 지른 감정을 무엇이라 정의해야 좋을지 몰랐습니다. 단지 그와 가까이 있기만 하면 그녀는 맥박이 줄달음질치며, 그의 모습이 그녀의 머리 속을 온통 차지해 버리는 것. 그리고 그에게 말을 걸 때면 왠지 차분하고 침착한 어조로 말하기가 어렵다는 것만을 뚜렷이 의식할 뿐이었습니다.

그녀는 정말로 그를 알고 싶었고 그러한 앎 속에 자신이 이끌려지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그로 인해 그녀 내부에서 그에 대한 눈뜨기 시작하는 무수한 분신들이 생겨났지만, 그녀는 그의 행동에서 단 하나의 동기도 발견해 낼 수가 없었습니다. 그녀는 이따금 그가 무서워지기까지 했습니다. 그를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녀는 그가 EE자신이나 다른 사람 또는 다른 일에 대해 자신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드러나지 않도록 극히 조심하는 것을 눈치 채고 있었습니다. 사실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무엇 하나 드러나는 법이 없었습니다.

정말로 그녀가 친하게 알고 있는 대부분의 남자들과는 달리 가디너에게는 그녀를 억압하거나 혐오감을 일으키는 점이 전혀 없었습니다. 언젠가 그녀를 유혹하여 자신의 침착성을 그가 송두리째 흔들어 놓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자 그녀는 갑자기 심한 흥분을 느꼈습니다. 겉으로 자기가 몸을 사리면 사릴수록 챈스가 더욱 자기를 관심 있게 지켜보며 그가 그녀의 욕정을 슬며시 받아들이고, 기꺼이 그에게 몸을 맡길 하나의 여자로 생각해 주었으면 하는 욕망도 커져 갔습니다. 그녀는 그와 사랑을 나누는 자신의 모습, 욕정을 못이겨 송두리째 그에게 몸을 내맡긴 채, 음탕한 쾌락에 빠져 신음하는 자신의 모습을 그려보았습니다.


그날 저녁 늦게 집에 도착하자 그녀는 챈스에게 전화를 걸어 그의 방에 들려도 좋은지 물었습니다. 그는 흔쾌히 승낙했습니다.

그녀는 몹시 피곤한 모습이었습니다. “아무말도 없이 떠나서 미안했어요. 당신이 TV에 출연하신 것도 못보고…. 저는 당신이 보고 싶었어요.” 그녀가 수줍게 속삭였습니다.

그녀는 침대 모서리에 걸터앉았습니다. 챈스는 그녀에게 자리를 내주기 위해 몸을 침대머리로 끌어올렸습니다. 그녀는 이마를 가린 자신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어 올리고는 정다운 눈매로 챈스를 보고는 그의 팔에 살며시 손을 얹었습니다.

“가만… . 피하지 마세요…. 전….”

그녀는 다소곳이 앉아 챈스의 어깨에 머리를 얹었습니다. 챈스는 어리둥절해졌습니다. 그가 몸을 피할 곳이 없었으니까요.

그는 기억 속을 뒤져 여자가 안락의자나 침대 위에서 또는 차 속에서 남자에게 접근할 때의 TV장면들을 기억해 내려고 애썼습니다. 그런 상황이 벌어지면 보통은 잠시 후 두 남녀는 서로 몸을 아주 가까이 접근시키기 마련이었고 곧 이어 서로가 옷을 훌훌 벗어버리는 것도 예사였습니다. 그러고 나서 그들은 서로 입을 맞추고 뜨겁게 포옹을 나누곤 했습니다.

그러나 TV에서는 그 다음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는 언제나 어물쩍 넘어가 버렸습니다. 그리고는 전혀 새로운 장면이 화면에 나타나 남자와 여자의 포옹은 까맣게 잊혀지게 마련이었습니다. 그러나 챈스도 그처럼 은밀한 장면 속에서는 좀 더 다른, 더욱 친밀한 동작, 더욱 심한 행동이 따를 것이라는 것쯤은 알 만했습니다.

챈스의 기억에는 아주 오래 전 영감님 댁 쓰레기 소각 장치를 고치러 오던 수리공의 모습이 스쳐 갔습니다. 언젠가 한번 그의 일을 끝낸 후 정원에 나와 앉아 맥주를 마시며 챈스에게 완전히 옷을 벗어버린 남녀누드 사진첩을 보여준 적이 있었습니다. 그 사진들 중 하나는 여자가 부자연스럽게 길고 부푼 남자의 그것을 손에 쥐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또 다른 사진 하나에서는 남자의 그것이 여자의 다리사이로 사라지고 없었습니다.

수리공이 누드사진을 보여주며 일일이 설명하는 동안 챈스는 세밀히 그 사진들을 살펴보았습니다. 인화지 위의 모습들은 어딘가 사람을 혼란시키고 있었습니다. 부자연스럽게 확대된 남자의 은밀한 부분이나 그들간의 괴이한 포옹 따위는 그가 TV에서 본 적이 없었으니까요.

수리공이 가고 난 뒤 챈스는 일부러 몸을 굽혀 자신의 그 부분을 살펴보았습니다. 그의 물건은 작고 볼품없이 축 늘어져 있었습니다. 수리공의 말로는 이 물건 속에는 씨앗이 숨겨져 자라고 있으며 남자가 쾌락을 맛볼 때면 그 씨앗들이 뿜어져 나온다는 것이었습니다. 챈스는 그 부분을 쿡쿡 건드려 보기도 하고 슬슬 쓰다듬어 보기도 했지만 수리공 말과는 달리 자신은 아무것도 느낄 수 없었습니다. 가끔 아침 일찍 일어나 보면 그것이 약간 커져 있을 때가 있기도 했지만 그의 기관은 뻣뻣이 커지기를 거부했으며 그에게 쾌락이라는 것을 느끼게 해주는 법이 없었습니다.

그 뒤로 챈스는 여성의 은밀한 부분과 아기의 출생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 연결지어 보려고 열심히 머리를 짜 보았습니다. 의사와 병원 그리고 수술을 주제로 한 몇몇 TV씨리즈를 보면 출산의 비밀은 대강 이렇게 묘사돼 있었습니다.

-산모의 고통과 아픔을 참는 모습, 그리고 나면 아버지의 기쁨에 찬 표정, 그리고 새로 태어난 아기의 우는 모습- 그러나 왜 어떤 여자는 아기를 낳으며, 왜 어떤 여자는 아기가 없는지 아무리 TV를 보아도 풀어낼 도리가 없었습니다. 한두 번 챈스는 루이즈에게 물어볼까 했었지만 결국 그만두고 말았습니다. 대신 그는 더욱 열심히 TV를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끝내 그것들을 잊고 말았습니다.


EE가 챈스의 셔츠를 조용히 매만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녀의 손은 무척 따뜻했습니다. 이제 EE의 손은 그의 턱을 쓰다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챈스는 꼼짝도 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알고 있어요…. EE가 속삭였습니다.” 당신도 우리가, 당신하고 내가, 더욱 가까워지기를 바라고 있다는 걸…. 당신이 당연히 알고 계시리라는 것을“

갑자기 그녀는 마치 어린애처럼 울기 시작했습니다. 코를 훌쩍이며 그녀는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닦아 냈으나, 울음을 멈추지는 않았습니다. 챈스는 그녀의 슬픔에 자신이 책임이 있다고 짐작을 할 수 있었지만 그러나 무엇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습니다.

그는 EE의 몸에 팔을 둘렀습니다. 그러자 그녀는 마치 그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그의 몸에 온 체중을 실어 기대 왔으며, 두 사람은 함께 침대 위로 쓰러져 버렸습니다. EE가 그의 가슴 위에 몸을 얹었습니다. 그녀의 머리카락이 그의 얼굴을 간지럽게 했습니다. EE는 그의 목과 이마에 입을 맞추었습니다.

그리고 그 입술은 곧 그의 눈과 귀로 옮겨갔습니다. 그녀의 눈물이 살며시 그의 살갗을 적시고 그녀의 향기가 그를 감싸는 동안 그는 내내 다음에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를 궁리했습니다. 이제 챈스는 EE의 손이 자신의 허리를 쓰다듬고 그리고는 그의 허벅지 사이를 더듬어 오는 것을 느꼈습니다. 얼마 후 그 손은 다시 어딘가로 사라졌습니다. EE는 이제는 울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조용히 그의 옆에 누워 있었습니다. 아무런 움직임도 없이 평화롭게….

“초온시, 고마워요,” 그녀가 말했습니다. “당신은 정말로 절제하실 줄 아는 분이에요. 당신의 손길 한번, 단 한번의 손길만으로도 내 몸이 당신께 완전히 열릴 것임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말이에요…. 하지만 당신은 절 이용만 하실 분이 아니군요.” 자신은 상념에 취한 듯 말을 이었습니다. “당신은 미국인 같지가 않아요. 오히려 훨씬 유럽사람 같아요. 당신은 알고 계시지요?” 그녀는 조용히 미소 지었습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내가 지금까지 알아 온 남자들하고는 다르게 당신은 미국식 애무, 미국식 수작을 부리지 않는다는 뜻이에요. 남자들의 그 모든 손가락 장난, 키스, 간지럼, 쓰다듬어 껴안고 하는 수작, 자신의 표적을 향해 수줍어하는 척하면서 음흉하게 욕정에 불타 있어 은근히 조심스러워하는 트릭은 당신과는 거리가 먼 것 아니겠어요?” 그녀는 잠시 말을 멈추었습니다.

“초온시, 당신은 정말 두뇌 파예요. 당신은 우선 여자를 내부에서부터 철저하게 정복하려는 것 같아요. 여자 마음 속 깊은 곳에서부터 당신의 사랑을 필요로 하게하고, 갈망하며, 애타게 기다리게 하는 심정을 심어버리려는 분 같아요….”

챈스는 그가 미국인이 아니라는 그녀의 말에 어리둥절해졌습니다. 왜 그녀는 그런 말을 할까? 챈스는 TV에서 공개적으로 자신들을 반 미국인이라고 선언하는 더럽고, 머리가 길고, 이상한 독설을 쏘아대는 남녀들을 자주 보아 왔습니다. 자신이 알기로는 반 미국인이 라는 말은 경찰이나 정부관리, 기업가, 그리고 스스로를 미국인이라 부르는 말쑥한 차림을 한 사람들이 이들을 지칭하는 말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TV에서 보면 이들의 상호 충돌은 폭력이나 유혈사태 그리고 죽음으로 끝나기가 예사였습니다.

EE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조용히 자신의 옷매무새를 고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는 챈스를 바라보았습니다. 그녀의 눈매에는 챈스에 대한 적의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었습니다.

“초온시, 이 말을 하지 않고는 못 견딜 것 같아요.”

그녀가 말했습니다. “난 솔직히 당신에게 말했어요. 난 당신을 사랑해요. 그리고 난 당신을 원해요. 당신이 내 마음을 알고 있다는 걸 난 알고 있어요. 그리고 당신이 오늘 참아주신 걸 정말 고맙게 생각해요…. 앞으로 그때까지…. 정말 그때까지 말이에요.” 그녀는 좀더 말을 계속할 듯 했으나 적당한 표현을 찾지 못하는 것 같았습니다. EE는 방을 나갔습니다.

챈스는 자리에서 일어나 헝클어진 머리를 매만졌습니다. 그는 책상 옆으로 가서 TV를 켰습니다. 즉시 이미지들이 화면 위에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 다섯


목요일이었습니다. 챈스는 눈을 뜨자마자 TV를 켰습니다. 그리고는 전화로 부엌을 불러 아침 식사를 시켰습니다. 하녀가 정갈하게 차린 아침식사를 쟁반에 차려 왔습니다. 그녀는 랜드씨의 병세가 다시 악화되어 의사가 두 명 더 불려 왔으며, 자정부터 의사들이 랜드씨 곁을 떠나지 못하고 있다고 알려 주었습니다. 그녀는 챈스에게 조간신문들과 함께 깨끗하게 타이프 된 쪽지 하나를 전했습니다. 챈스는 누가 그 쪽지를 보냈는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EE가 전화를 걸어왔을 때는 그가 막 식사를 끝냈을 때였습니다. “초온시 -다알링- 내 쪽지 받았지요? 오늘 아침 조간신문들도 보셨지요?” 그녀가 다정한 목소리로 물었습니다.

  “당신이 대통령 정책 연설의 주요 입안자로 보도되어 있더군요. 당신이 ‘오늘 저녁의 화제’ 프로에서 한 말씀들이 대통령 연설하고 나란히 실려 있었어요. 당신 초온시, 정말 대단해요. 대통령께서도 당신한테서 깊은 감명을 받으셨다는 거예요!”

“저는 대통령을 좋아합니다.” 챈스가 말했습니다.

“어제 TV에 출연한 당신 모습이 그렇게 멋있었다고 야단들이에요! 내 친구들 모두가 당신을 만나보고 싶다고 안달이지 뭐예요! 초온시, 오늘 오후 UN본부의 리셉션에 같이 가기로 한 약속 잊지 않으셨지요?”

“그럼요.”

“어머, 고마워라! 사람들 북새통에 싫증나지 않으셔야 할 텐데. 우리가 그곳에서 오래 있어야 할 이유는 없어요…. 리셉션 후엔 좋으시다면 제 친구들이나 몇몇 만나지요 뭐. 아주 성대한 디너파티가 기다리고 있어요.”

“함께 가게  되어 저도 기쁩니다.”

“오, 어쩜! 이렇게 행복할 수가!” EE는 환희에 찬 탄성을 냈습니다. 그리고는 목소리를 아주 낮추었습니다.

“지금 당신을 뵐 수 있나요? 난 당신이 너무 너무 보고 싶어 견딜 수가 없어요.….

“물론이지요.”

잠시 후 그녀는 상기된 얼굴로 방에 들어섰습니다. “저에게는 아주 중요한 이야길 해야겠어요. 지금 이렇게 당신을 마주 보면서 말이에요.” 그녀는 숨이 찬 듯. 말머리를 찾으려는 듯, 잠시 헐떡였습니다. “초온시, 우리 집에서 우리들과 함께 좀더 머무시는 게 어떨지, 한 번 생각해 봐 주시겠어요? 조금만 더 말이에요. 이런 부탁은 벤의 뜻이기도 하답니다.”

그녀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습니다. “꼭 좀 생각해 보세요! 당신이 저희랑 이 집에 함께 사시는 것 말이에요! 초혼시 제 부탁을 제발 거절하지 마세요! 남편 벤자민도 자신이 이렇게 앓고 있는데 당신이 한 지붕 밑에 같이 있어 준다면 자기도 한결 마음이 놓이겠다는 게예요.” 그녀는 두 팔을 내밀며 그를 끌어안으며 몸 전체로 그를 꼭꼭 눌러 댔습니다. “초혼시, 귀여운 내 사랑, 꼭 제 부탁을 들어 주시는 거죠? 꼭?” 그녀가 정답게 속삭였습니다. 그녀의 목소리는 숨김없는 떨림으로 마구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챈스는 승낙했습니다.

그러자 EE는 그를 부둥켜안고 그의 뺨에 열정적으로 입을 맞추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그의 몸에서 떨어져 나가 방안을 맴돌기 시작했습니다.

“전 알고 있어요! 우선 당신 비서부터 구해야겠어요. 이제는 당신이 대중의 눈앞에 노출됐으니 당신 사무를 돕고, 방문객들을 알아서 처리하고, 굳이 만날 필요가 없는 사람들로부터 당신을 보호할 노련한 사람이 있어야 되니까요. 혹시 이미 마음에 있는 사람이라도 있나요? 지금까지 당신 일을 보아 온 사람이 있나요?”

“없습니다!” 챈스가 말했습니다. “아무도 없습니다.”

“그럼 당장 사람부터 구해야겠네.”

그녀가 잠긴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점심 전 챈스가 TV를 보고 있을 때 EE가 다시 전화를 걸어 왔습니다.

“초온시, 방해가 안 되는지 모르겠군요.” 그녀가 자로 잰 듯한 어조로 말을 꺼냈습니다.

“지금 서재에 와 있는 오브리 부인을 만나 주셨으면 합니다. 정식 비서가 결정될 때까지 임시로 비서직을 맡기려고 하거든요. 지금 만나실 수 있겠지요?”

“그럼요, 지금 만나겠습니다.” 챈스가 말했습니다.

챈스는 서재에 들어서며 EE와 나란히 소파에 앉아 있는 잿빛 머리의 여인을 보았습니다.

EE가 두 사람을 서로 소개했습니다.

챈스는 악수를 나눈 뒤 자리에 앉았습니다. 오브리 부인의 호기심에 찬 눈초리를 받자 챈스는 무심코 손가락으로 책상을 두들겼습니다. “오브리 부인은 다년간 FAFC에서 랜드씨의 신임을 받은 비서로 일해 온 분입니다.” EE가 먼저 말을 꺼냈습니다.

“알겠습니다.” 챈스가 말했습니다.

“오브리 부인은 현재 퇴직하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그럴 분이 아니니까요.”

챈스는 무엇도 할 말이 없었습니다. 그는 말없이 엄지손가락을 뺨에 문질렀습니다. EE는 손목을 타고 내려온 손목시계를 추켜올렸습니다.

“좋으시다면,” EE가 계속했습니다. “오브리 부인은 즉시 업무를 시작할 수 있답니다. 초온시….”

“좋습니다.” 마침내 그가 입을 열었습니다. “오브리 부인께서 이곳에서 일하는 것이 마음에 드시기를 바랍니다. 이곳은 아주 좋은 가정이더군요.”

EE가 책상 너머로 그를 바라보며 말했습니다. “그럼 결정됐습니다. 전, 그럼 먼저 가봐야겠어요. 리셉션을 위해 드레스를 입어야 하니까요. 초온시, 그럼 이따 이야기해요.”

 

챈스는 조용히 오브리 부인을 쳐다보았습니다. 그녀는 한편으로 고개를 돌린 채 생각에 잠긴 듯 했습니다. 그녀의 모습은 마치 들판에 외롭게 핀 민들레꽃과 흡사 했습니다.

그는 그녀가 맘에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습니다. 그래서 그는 오브리 부인이 먼저 말문을 열기를 기다렸습니다. 마침내 그녀가 그의 시선을 의식하고는 부드럽게 말했습니다. “지금 일을 시작해도 좋을 까요…. 선생님의 업무 및 사회 활동의 전반적 아우트라인에 대해 먼저 저에게 설명해 주시면….”

“그 점은 먼저 랜드씨 부인께 물어 보시오” 챈스가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습니다.

오브리 부인도 함께 서둘러 일어섰습니다.

“잘 알겠습니다. 필요할 때 언제든지 저를 불러 주세요. 제 사무실은 랜드씨 비서 바로 옆방이랍니다.”

챈스는 “고맙소.”란 말을 남기고 방에서 걸어 나왔습니다.


UN본부의 대 연회장에 함께 도착한 챈스와 EE는 ‘UN본부 봉사위원회’ 임원들의 영접을 받으며 가장 눈에 뛰는 중앙 테이블로 안내되었습니다. UN 사무총장이 다가와 EE의 손에 입을 맞춘 뒤 랜드의 건강 상태에 대해 물었습니다. 챈스는 TV에서 이 사람은 한 번도 본적이 없었습니다.


“이 분은,” EE가 사무총장에게 말했습니다. “벤자민의 절친한 친구인 초온시 가디너씨입니다.”

그들은 서로 악수를 나눴습니다. “이 분은 저도 알고 있습니다.” 사무총장이 미소 지으며 말했습니다. “어제 밤 TV를 보고 저는 가디너씨에게 무척 감탄했습니다. 이렇게 나와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가디너씨.”

그들은 모두 자리에 앉았습니다. 웨이터들이 철갑 상어알, 연어, 계란, 카나페들을 날라 왔으며 샴페인 글라스로 가득 찬 쟁반을 연달아 내오기 시작했습니다. 사진 기자들이 여기저기 배회하며 스냅 사진들을 찍어 댔습니다.

큰 키에 혈색이 좋은 남자가 테이블로 다가왔습니다. 사무총장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말했습니다. “아이구 대사님, 이렇게 일부러 찾아 주시니 영광입니다.” 그러면서 EE쪽을 향해 말을 계속했습니다. “소비에트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 블라디미르 스크라피노프 대사를 소개하게 되어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저는 대사님을 전에 한 번 뵌 적이 있습니다.” EE가미소지었습니다. “2년 전 워싱턴에서 있었던 핸드씨와 스크라피노프 대사님간의 우정 어린 대화들이 저에게는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답니다.”

그녀는 잠시 말을 멈추었습니다. “불행하게도, 랜드씨가 현재 와병 중이셔서 오늘 대사님을 접대할 기회를 잃고 말았습니다.” 대사는 정중히 인사를 한 뒤 자리에 앉자 커다란 목소리로 EE와 사무총장을 향해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챈스는 입을 다문 채 모여든 사람들을 훑어보았습니다. 얼마 후 사무총장이 일어나 챈스를 만나게 되어 반갑다는 말을 되풀이 한 후 작별인사를 하고 자리를 떴습니다. EE 역시 오랜 친구인 베네주엘라 대사가 지나가는 것이 얼핏 눈에 뛰자 잠시 실례한다는 말을 남기고 그의 좌석으로 건너갔습니다.


소련 대사가 챈스에게 바짝 다가앉았습니다. 사진 기자들의 플래시가 계속 터졌습니다. “제가 좀 더 일찍 만나 뵙지 못한 것이 유감스럽습니다.” 그가 먼저 말을 꺼냈습니다. “오늘 저녁의 화제 프로에서 이제 가디너씨를 처음 뵈었는데, 대지에 뿌리박은 귀하의 철학에 저는 커다란 흥미를 느꼈습니다. 귀국 대통령의 인정을 쉽사리 얻을 수 있었던 것도 당연하다고 생각했지요.” 그는 의자를 더욱 가까이 끌어 당겼습니다. “자, 가디너씨 우리 두 사람 공동의 친구인 벤자민 랜드 이야기나 해 볼까요? 실제로 그 친구 병세가 상당히 심각하다고 듣고 있습니다만, 랜드씨 부인 앞에서 이런 이야길 꺼내서 기분을 상하게 할 수는 없었지요.”

“그분은 병환이 심하십니다.” 챈스가 말했습니다. “지금 건강은 아주 좋지 않으시지요.”

“저도 알고 있습니다. 그렇게 듣고 있구요.”대사가 챈스를 빤히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가디너씨, 솔직히 말씀드릴까요? 귀국의 심각한 경제상황을 고려할 때 귀하께서 행정부의 중요 요직을 맡게 되리라는 건 명백한 사실입니다. 나는 귀하께서 정치적 문제들에 대해서는 상당히 과묵하시구나…. 라고 느꼈습니다. 그러나 가디너씨, 우리와 같은 외교관들과 귀하 같은…. 비즈니스맨은 좀 더 자주 만나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 같은 사람들 사이의 거리란 사실 그렇게 먼 게 아니니까요, 절대로 먼 게 아니거든요!”

챈스는 이마로 손을 가져갔습니다.

“그래요, 우리는 서로 멀리 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사실 우리 자리는 거의 맞닿아 있으니까요.”

대사는 껄껄 웃었습니다. 사진 기자들이 사진을 찍어 댔습니다. “브라보! 아주 재미있는 표현입니다.” 대사가 소리쳤습니다. “정말 우리는 서로 자리가 맞닿아 있군요. 그리고…. 뭐랄까…. 우린 모두 자기 자리에 계속 앉아 있기를 바라고 있는 게 아니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좋습니다! 한쪽이 물러나게 되면 다른 한쪽도 -그렇게 되면, -우린 둘 다…. -그런데 누구도 때가 되기 전에 물러나고 싶지 않은 것 이지요. 암!” 챈스는 미소를 지었습니다. 그러자 대사는 다시 한 번 커다란 소리로 크게 웃어댔습니다.

갑자기 스크라피노프가 챈스쪽으로 몸을 굽혔습니다. “가디너씨, 혹시 러시아의 크릴로프 우화들을 좋아하십니까? 귀하에게 크릴로프적인 풍취가 느껴져서 물어 보는 겁니다만.”

챈스가 주위를 둘러보니 카메라맨들이 자기와 스크라피노프대사를 계속 촬영하고 있었습니다. “저에게 크릴로프적인 면모라구요? 정말입니까?” 그가 미소를 띠며 대꾸했습니다.

“알고 계셨군요. 아실만도 하시지!” 스크라피노프가 소리치듯 말했습니다. “귀하께서 크릴노프를 알고 계시군요!” 대사는 잠시 말을 멈추더니 곧 빠른 말씨의 외국어로 바꾸었습니다. 챈스의 귀에 들려오는 낯선 외국어는 부드러운 어감을 주었으나 오히려 대사의 표정은 동물의 그것을 닮아 있었습니다. 외국어로 말을 걸어오는 사람을 난생 처음 만난 챈스는 처음엔 눈이 휘둥그레졌으나 곧 웃음을 터뜨렸습니다. 대사는 깜짝 놀란 표정이었습니다.

“그래…. 맞아! 내가 맞았다니까! 귀하께서는 크릴로프를 러시아어로 읽으셨군요! 가디너씨, 저는 그렇게 짐작했었습니다. 정말로 교양 있는 분은 한눈에 알아 볼 수 있다니까….” 챈스가 당황하여 그의 말을 부인하려 했으나 대사는 한쪽 눈을 질끈 감아 보였습니다. “귀하의 신중함은 제가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또다시 그가 외국어로 말을 걸어왔습니다. 이번에는 챈스는 잠자코 있었습니다.

바로 그때 EE가 외교관 두 사람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테이블로 돌아왔습니다. 그녀는 파리에서 온 고프리디 대사와 서독의 폰 브록부르크 -슐랜도르프 백작 두 사람을 소개했습니다. “벤자민과 전,” 그녀가 회상을 더듬듯 말했습니다. “뮤니히에 있는 백작의 아름다운 고성에서 즐거운 한때를 보낸 적이 있습니다.”

그들이 자리 잡은 곳에 사진기자들이 계속 사진을 찍어 댔습니다. 폰 브록부르그 -슐랜도르프 백작은 미소를 띤 채 소련대가사 입을 열기를 기다렸습니다. 스크라피노프도 미소로 응할 뿐이었습니다. 그러자 고프리디가 EE와 챈스를 번갈아 보았습니다.

“가디너씨와 저는,” 스크라피노프가 입을 열었습니다. “조금 전까지 러시아 우화에 관한 열정을 함께 나누고 있었지요. 가디너씨는 우리 조국의 많은 시를 탐독하시는 분이더군요. 그것도 러시아 원어로 말입니다.”

그러자 서독 대사가 챈스쪽으로 의자를 당겨 왔습니다.

“가디너씨 저는 어제 밤 TV에서 말씀하신 귀하의 정치경제에 대한 자연주의 적 어프로치에 정말로 크게 탄복했습니다. 거기에다가, 이제 귀하의 문학적 배경까지 알게 되니 귀하의 논평을 더욱 잘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는 소련대사를 흘깃 쳐다본 후 시선을 천장으로 옮겨가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러시아 문학은 우리 시대의 위대한 정신들에게 상당한 감화를 끼쳐 왔지요.”

“그러면 독일 문학은 어떻습니까!”

스크라피노프가 외쳤습니다. “존경하는 백작님, 귀국의 문학에 대한 푸쉬킨의 전 생애에 걸친 숭배를 새삼 말씀드릴 필요가 있을까요? 그리고 푸쉬킨이 파우스트의 러시아어 번역을 끝내자 괴테가 평소 가장 아끼던 자신의 펜을 직접 보내오지 않았던가요! 후에 독일에 정착한 투르게네프야 말할 필요도 없고, 쉴러에 대한 톨스토이와 도스토예프스키의 열정 또한 대단했지요.”

폰 브록부르그 -슐레도르프가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러나 러시아의 거장들을 탐독함으로써 하우프트만이나 니체 그리고 토마스 만 등이 받은 영향력을 누가 감히 추측이라도 할 수 있겠습니까? 릴케는 또 어떻습니까? 영구적인 것은 모두가 낯선 것뿐이며 러시아적인 것은 모두가 자기 마음의 고향 같다고 기회 있을 때마다 입버릇처럼 말하진 않았던가요…. ?”

고프리디가 성급하게 샴페인 잔을 비웠습니다. 그의 얼굴은 이제 벌겋게 상기돼 있었습니다. 그는 스크라피노프 쪽으로 몸을 기울이며 말했습니다. “우리가 처음 2차 대전 중에 만났을 때, 귀하와 난 군복 차림으로 우리 공동의 적, 우리 두 민족에게 역사상 가장 잔인했던 적에 대항해 싸우고 있을 때가 아니었던가요? 문학적 영향을 함께 하는 것과 피를 함께 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가 아닐까요?”

스크라피노프는 미소를 지으려 애썼습니다. “그러나 고프리디씨.” 그가 말했습니다. “귀하는 전쟁을 이야기 하고 있군요. 오랜 세월 전의, 시대가 달랐던 때의 이야기 말이요. 오늘날, 이제 우리들의 군복과 훈장은 박물관에 진열되어 있지요. 오늘 우린…. 우린 평화의 병사들이지요.” 그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폰 브록부르그 -슐레도르프가 의자를 옆으로 밀치며 뻘떡 일어나더니 먼저 자리를 뜨게 되어 죄송하다는 사과의 말과 함께 EE의 손에 입을 맞추고 스크라피노프와 챈스에게 악수를 나눈 후 블란서인에게는 목례를 보낸 후 자리를 떴습니다. 사진 기자들이 계속 플레시를 터뜨렸습니다.

EE가 블란서인과 자리를 바꿔 앉아 이제는 그녀가 챈스 바로 옆에 앉게 되었습니다. “가디너씨,” 불란서대사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부드럽게 말을 꺼냈습니다. “대통령 각하께서 귀하의 자문을 받아 행하신 연설을 저도 경청했습니다. 저는 귀하에 관한 신문기사도 읽었고 다행히 TV에 출연하신 모습도 보았으며 TV에서 하신 말씀도 들었습니다.”

그는 길고 가느다란 담배를 꺼내 물뿌리에 정성스레 꼽은 후 불을 당겼습니다. “저는 오늘 스크라피노프 대사의 말씀을 듣고 나서 귀하의 다재다능한 면모 중에 문학가다운 재능도 무시  못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는 날카로운 눈매로 챈스를 쏘아 보았습니다.


“친애하는 가디너씨, 때로는…. 우화를 현실로 받아들일 때 우리에게는 권력과 평화의 좁은 길에서 전진이 가능할 때가 있는 법이지요….” 챈스는 잔을 들었습니다. “귀하께서는 당연하다고 생각하시겠지만,” 그가 계속 말했습니다. “우리나라의 많은 산업, 재정 관계자들, 그리고 정부 인사들 대다수가 FAFC의 발전에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우리들 모두의 친구인 벤자민이 병으로 누운 후부터는 FAFC의 향방에 대한 이들의 전망이…. 약간…. 불안하다고나 할까요?” 그가 말을 멈췄으나 챈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벤자민의 유고시 귀하께서 그의 자리를 승계할 것이라는 말을 듣고 우리는 정말로 안도의 한숨을 쉬게 되었습니다.”

“벤자민은 곧 회복될 겁니다.” 챈스가 말했습니다. “대통령께서도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럼 우리 다같이, 벤자민씨의 회복을 기원합시다.” 불란서대사가 말했습니다. “그래야 되지요. 그러나 우리 누구도, 어쩌면 대통령까지도, 확신은 할 수 없는 게 아니겠습니까? 죽음은 항상 우리 가까이 떠돌며 언제라도 우리를 칠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이니까….”

고프리디의 말은 소련 대가사 자리에서 일어나는 바람에 중단됐습니다. 덩달아 모두가 자리에서 일어섰습니다. 스크라피노프는 챈스를 향해 다가섰습니다. “최근 모임 중 저에게는 가장 흥미로웠던 만남이었소, 그런데 가디너씨.” 그가 은근하게 말했습니다. “가르침을 주실만큼 아시는 것이 무척 많으신 분이라고 할까요? 우리 조국을 방문하실 기회가 있다면 우리 본국 정부는 귀하의 영접에 최선을 다할 것임을 말씀드립니다.” 촬영기가 계속 돌아가고 사진기자들이 여기저기에서 사진을 찍어대는 동안 그는 챈스의 손을 힘주어 잡았습니다.

고프리디는 챈스와 함께 다시 자리에 앉았습니다.

“초온시,” EE가 입을 열었습니다. “당신이, 저 확고한 우리 러시아 친구를 흠뻑 반하게 만드셨군요. 벤자민이 오늘 올 수 있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 양반은 정치 이야기라면 사족을 못 쓰지요!” 그녀는 챈스와 거의 머리를 맞대듯이 하며 말을 계속했습니다. “오늘 보니까 다신은 스크라피노프대사와 러시아어로 이야기 한 게 분명해요. 당신이 러시아어의 대가인건 저는 정말 몰랐어요! 오, 믿을 수가 없어!”

고프리디가 끼어들었습니다. “요즘은 러시아어를 할 줄 알면 퍽 유리하지요. 가디너씨, 다른 외국어도 능통하신가요?”

“가디너씬 겸손한 분이랍니다.” EE가 톡 쏘았습니다. “이 분은 가신의 역량을 광고하고 다닐 분이 아니에요! 아는 건 그저 가슴속에만 간직하고 있을 뿐이지요!”

키가 훤칠한 신사 한 분이 EE에게 인사를 하기 위해 다가왔습니다. 영국 BBC방송 회장 보클러크 이었습니다. 그는 먼저 챈스에게 말했습니다.

“어젯밤 TV에서의 당신의 대담한 표현에 나는 크게 공감했소이다. 대단한 묘수라고나 할까? 정말 묘수였소! 보통 사람들에게 자세한 설명을 해봐야 별로 도움이 되는 건 아니니까…. 물론 ‘바보상자’에 메인 보통 인간들을 두고 하는 말이지만…. 그들이 소화할 수 있는 건 아직도 신이 내리는 벌이지 결점 투성이 인간의 책임은 아니니까….그렇지 않소?”

 

그들이 연회장을 떠나려 하자 챈스와 EE는 녹음기, 촬영기, 그리고 TV 카메라를 들이대는 기자들에게 거의 포위되다시피 했습니다. 마침내 EE가 그들을 챈스에게 소개했습니다. 그러자 젊은 한 기자가 앞으로 나섰습니다. “가디너씨, 수고스럽지만, 몇 가지 질문에 응해 주시겠습니까?”

EE가 챈스를 가로막고 나섰습니다.

“먼저 한 가지 확실히 해 둘 게 있어요. 가디너씨는 여기 오래 지체하실 수 없답니다. 지금 곧 떠나야만 해요. 아시겠지요?”

기자 한 명이 큰 소리로 물었습니다.

“대통령 연설에 관한 뉴욕타임지의 사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챈스가 EE를 바라보자 그녀는 눈으로 묻는 그의 시선을 잠자코 받아들이기만 했습니다. 챈스는 무슨 말이든 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뉴욕타임지 사설을 읽지 않았습니다.” 그가 잘라 말했습니다.

“아니, 대통령 연설에 관한 뉴욕타임지 사설을 안 읽었다구요?”

“읽지 않았소.” 그가 대꾸했습니다.

 몇몇 기자들이 비웃는 표정을 지었습니다. EE 역시 약간 놀란 표정으로 챈스를 바라보았으나 그녀의 시선은 독 경단의 빛으로 반짝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가디너씨,” 다른 기자가 차가운 어조로 따졌습니다. “최소한 한 번 훑어는 보았을 게 아닙니까?”

“뉴욕타임지는 읽지를 않았소.”그가 되풀이했습니다.

“Post지는 당신의 ‘특이한 낙관론’에 대해 언급했는데,” 다른 기자가 말했습니다. “그건 읽었습니까?”

“그것도 읽지 않았습니다.”

“그럼,” 기자가 다그쳤습니다. “‘특이한 낙관론’이란 말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무슨 뜻인지 모르겠습니다.” 챈스가 대답했습니다.

이때 EE가 자랑스레 앞으로 나섰습니다. “가디너씨는 과중한 업무에 시달리고 계십니다.” 그녀가 말했습니다. “특히 랜드씨가 병석에 누운 후로는 신문기사는 모두 스태프 브리핑을 통해서만 듣고 계십니다.”

나이가 많은 한 기자가 앞으로 나섰습니다. “끝까지 물고 늘어지는 것 같아 죄송합니다. 가디너씨. 그러나 당신이 스태프 브리핑을 통해 듣고 계시는 신문 종류나 알고 넘어갑시다.”

“나는 신문은 상대 안 합니다. 난 TV만 봅니다.” 챈스가 말했습니다.

기자들은 말문이 막혀 조용히 서 있을 뿐이었습니다. 마침내 한 명이 입을 떼었습니다. “그럼 TV보도가 신문보도에 비해 보다 객관적이라는 뜻입니까?”

“조금 전에 말했듯이,” 챈스가 다시 설명했습니다. “난 TV를 볼 뿐입니다.”

나이든 기자가 반쯤 돌아서며 말했습니다. “감사합니다, 가디너씨. 공직자로서 이렇게 솔직 대담하게 사실을 사실대로 털어놓는 분을 만나보기는 오늘이 처음입니다. 공직을 가진 사람으로서 신문을 무시할 만한 용기가 있는 사람이란 거의 없지요. 사실 신문을 안 읽는다고 배짱 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겠소!”

EE와 챈스가 UN본부 건물을 막 떠나려 할 때 젊고 발랄한 처녀 사진기자가 그들을 쫓아 왔습니다. “여기까지 쫓아 와서 죄송해요, 가디너씨.” 그녀는 숨찬 듯한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사진 한 장만 더 찍어도 되죠, 네? 사진을 너무 잘 받는 분이셔서 ”

챈스는 예의바른 미소를 지었습니다. EE가 약간 멈칫했습니다. 챈스는 갑작스레 화난 그녀의 모습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는 무엇 때문에 그녀가 심통을 부리는지 알 수 없었습니다.


대통령은 집무실에서 전날 신문기사들이 요약된 노트를 간단히 훑어보았습니다. 모든 주요 일간지들이 그가 미국 ‘재정문제 연구소’에서 행한 연설 전문과 함께 벤자민 랜드와 초온시 가디너에 대한 자신의 코멘트를 싣고 있었습니다. 갑자기 대통령의 머리에 가디너에 대해 좀 더 알아야 하겠다는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그는 공보 비서를 불러 가디너에 관해 얻을 수 있는 모든 정보를 수집하도록 지시했습니다. 그리고는 스케줄 사이 잠시 틈이 나자 그는 다시 공보 비서를 집무실로 불렀습니다.

대통령은 그녀가 넘겨 준 서류철을 손에 들었습니다. 서류철을 열자 먼저 랜드에 관한 안전한 인사 기록이 나왔습니다. 대통령은 즉시 한 옆으로 이를 제쳐놓고 가디너의 승용차 사고에 관한 랜드 운전사와의 간단한 인터뷰, 그리고, ‘오늘 저녁의 화제’ 프로에서의 가디너의 대담 내용을 읽어 갔습니다.

“더 이상의 다른 정보는 없는 것 같습니다. 각하.” 공보 비서가 머뭇거리며 말했습니다.

“내가 바라는 것은 백악관에서 누군가를 초청하면 지금까지 해 오던 것처럼, 백악관 초청 인사에 관해 나에게 보고해 오던 관례적인 사전 정보형식이면 충분하오.” 대통령이 말했습니다.

공보 비서는 거북한 듯 몸을 꼬았습니다. “각하, 물론 가능한 모든 정보 소스들을 통해 제 나름대로 탐문해 보았지만 초온시 가디너씨에 대한 정보는 전혀 구비돼있질 않았습니다.”

대통령이 이맛살을 찌푸리며 말했습니다. “이봐, 초온시 가디너씨도 우리들처럼 부모가 있을 것이고, 특정장소에서 출생해서 성장해 왔을 것이며, 특정한 인간관계를 맺고 있을 것이고, 누구나처럼 납세를 통해 이 나라의 부강을 도왔을 게 아닌가? 그의 가족도 역시 마찬가지일 테고…. 그런 기초 자료만이라도 가져  오라니까.”

공보 비서는 몹시 당황한 표정이었습니다.

“각하, 죄송합니다. 방금 드린 자료 이외엔 아무 것도 더 이상 찾아낼 수 없었습니다. 말씀드렸듯이, 통상적인 정보 채널을 모두 거쳤는데도 별 도리가 없었습니다.”

대통령은 들고 있는 서류철을 가리키며 날카롭고 신중한 어조로 물었습니다. “그럼 겨우 이게 나에게 제출할 수 있는 정보의 전부란 말이요?”

“그렇습니다, 각하.”

“대통령인 내가 개인적으로 얼굴을 맞대고 반시간이나 함께 있었고, 게다가 그의 이름과 그가 한 말을 내 연설문 속에 인용한 사람에 대한 정보가 그 많은 우리 정보기관들 중 어디에도 비치돼 있지 않단 말이오? 그럼 인명록이라도 뒤져봤소? 거기에도 없으면 맨하탄 전화번호부라도 뒤져 보란 말이야!”

공보 비서가 마지못해 웃었습니다. “네, 계속 조사해 보겠습니다. 각하.”

“그래 주면 극히 고맙겠어.”

비서는 방을 나갔습니다. 대통령은 탁상용 달력으로 손을 뻗어 여백에 낙서하듯 이렇게 써 넣었습니다. ‘가디너?’


UN빌딩의 리셉션에서 돌아온 스크라피노프 대사는 즉시 가디너에 관한 비밀 보고서를 작성했습니다. 이 보고서에서 그는 초온시 가디너는 빈틈이 전혀 없는 인간이며 최고의 수준 높은 교육을 받은 자라고 기록했습니다. 그는 또한 러시아어 및 러시아 문학에 대한 가디너의 해박한 지식을 강조하면서, 가디너는 “날로 심각해져 가는 경제 불황과 더욱 넓게 확산돼 가고 있는 사회적 불안에 직면, 현상 유지를 위해서는 소비에트 블록에 대한 정치적 경제적 양보까지도 불사할 미 실업계의 새로운 대변인”으로 지목했습니다.

뉴욕의 UN주재 소련대표부 내에 있는 자신의 관저에서 스크라피노프는 워싱턴 주재 소련 대사관에 전화를 걸어 특수반 반장에게 지급으로 가디너에 관한 모든 정보는 요청했습니다. 그것은 가디너의 가족관계, 교육, 교유관계, 사교인사 명단 및 랜드와의 관계, 그리고 특히 미 대통령이 그 많은 경제고문 중 특별히 그를 선택하게 된 정확한 배경과 이유를 포함한 상세한 내용의 것이었습니다. 특수반 반장은 다음날 아침까지 가디너에 관한 완전한 인사기록을 제공할 것을 약속했습니다.


다음으로 대사는 손수 가디너와 랜드에게 보낼 선물을 골랐습니다. 두 사람에게 따로 보낼 최고급 벨루가 철갑상어 알젓 몇 파운드씩과 특별주문으로 제조된 고급 보드카 몇 병을 준비했습니다. 특별히 챈스에게 보내는 선물 포장 속에는 크릴로프가 자필로 여백 여기저기에 단상들을 써넣은 극히 진귀한 크릴로프의 『우화집』초판이 들어 있었습니다. 이 진귀한 책은 최근 체포된 유태인계 레닌그라드 학술원 회원의 개인 소장품을 정부에서 압수한 것이었습니다.


면도를 하다가 문득 소크라피노프는 한번 모험을 해보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는 그날 저녁 필라델피아에서 개최되는 ‘국제 무역협회’ 총회에서 행하기로 된 그의 연설문 속에 가디너의 이름을 삽입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이미 모스크바의 상급자들로부터 내용을 승인 받은 그의 연설문 속에 그가 즉흥적으로 추가 삽입한 이 구절은 ‘미국 내에서 상반되는 두 정치체제의 지도자들이 좀 더 자리를 가까이 좁히지 않는 한 그들 모두가 급격한 정치 사회적 변화로 인해 자기 자리를 지킬 수 없게 되리라는 것을 명백히 인식하고 있는, 초온시 가디너씨로 대표되는, 일단의 새로운 정치인들’이 등장하고 있음을 찬양하는 내용의 것이었습니다.


스크라피노프의 연설은 대성공이었습니다. 가디너에 대한 그의 찬양은 곧 주요 뉴스 미디어들에 의해 대서특필 되었습니다. 거의 자정이 될 무렵 TV를 켜자 스크라피노프는 자신의 연설이 인용됨과 함께 가디너의 얼굴이 화면에 클로즈업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아나운서는 챈스에 대해 “48시간 사이에 미국 대통령과 UN주재 소련 대사에 의해 각각 인용되고 언급된 바 있는” 화제의 인물이라는 설명을 해주고 있었습니다.

크릴로프 『우화집』안 표지 삽화위에 스크라피노프는 다음과 같은 헌사를 썼습니다.

“우리는 이 우화를 더욱 알기 쉽게 표현할 수도 있다. 그러나 바보 거위들을 더 이상 화나게 할 필요야 있겠는가? (크릴로프)” 초온시 가디너씨에게, 존경하는 마음으로 다시 만나 뵙기를 기원하며, 스크라피노프.


UN본부의 연회장에서 나온 EE와 챈스는 EE 친구의 집에 도착해 천정 높이가 보통 3층 건물 높이만큼이나 돼 보이는 널따란 홀에 들어섰습니다. 높다란 벽을 따라 예술적으로 장식된 장소마다 이 집 소장 미술품들이 아름답게 전시돼 있었습니다. 그 넓은 홀이 온통 격조 있는 조각품들과 화려한 귀금속류들이 들어 있는 멋있는 유리 상자들로 덮여 있었습니다. 황금 사슬에 매달려 있는 샹델리아는 마치 촛불이 가지마다 무성하게 피어 있는 울창한 나무처럼 보였습니다.

초대 객들이 홀 안 여기저기 모여 서 있었고 웨이터들이 쟁반에 술잔을 받쳐 들고 홀 안을 돌고 있었습니다. 드러난 가슴 위에 보석 목걸이를 치렁치렁 늘어뜨리고, 녹색 가운을 입은 뚱뚱한 여주인이 팔을 벌리며 EE와 챈스쪽으로 몸을 옮겨왔습니다. 여주인과 EE는 포옹을 하고 함께 서로의 뺨에 입을 맞추었습니다.

먼저 EE가 챈스를 소개했습니다. 여인이 손을 내밀어 챈스의 손을 잡고는 조용히 그를 바라보았습니다. “드디어,” 그녀가 즐거운 탄성을 올리며 말했습니다. “드디어, 그 유명한 초온시 가디너씨를 뵙게 되는군요! EE 말로는 댁은 프라이버시를 무엇보다도 소중하게 생각하신다면서요.” 그녀는 갑작스러운 영감이라도 떠오르듯, 문득 말을 멈추더니 턱을 올리며 그를 아래위로 훑어보고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런데 내가 보니 너무 미남이셔, 알고 보니 프라이버시를 아낀 건 댁보다 EE가 더 했던 것 같아, 댁 같은 미남을 감춰 두느라고 말이야….”

“소피, 제발….” EE가 수줍게 항의 했습니다.

  “알았어, 알았다니까 얘. 새삼스럽게 부끄러워하기는! 누구나 프라이버시를 아끼는 건 잘못된 것이 아니야!” 그녀가 깔깔대며 챈스의 팔에 손은 얹고는 즐거운 표정으로 말을 이어갔습니다. “죄송해요, 가디너씨. 용서하세요. EE와 전 만나기만 하면 항상 농담을 한답니다. 그런데 댁은 사진보다 실물이 훨씬 더 멋진 것 같아요. 난 ‘여성 의상지’가 오늘 가장 센스 있게 옷을 입은 남성으로 당신을 선정한 것에 전적으로 동감이에요. 그야 뭐 댁의 훤칠한 키, 떡 벌어진 어깨, 작고 귀여운 엉덩이, 곧게 쭉 뻗은 다리를 한번 보기만 하면….”

“소피, 어쩌면 그런 말까지….” EE가 얼굴을 붉히며 말을 가로막았습니다.

“그래 내가 입 다물게. 그럼 두 분, 절 따라 오시지요? 재미있는 친구들을 모아 놨으니 좀 만나 보시라 구요. 지금 가디너씨와 대화를 나누고 싶어 안달이 난 사람이 한둘이 아니라니까.”

챈스가 초대 객들에게 소개되었습니다. 그는 수많은 남녀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일일이 악수를 나누곤 자신의 이름을 댔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이름은 기억할 틈도 주지 않고 사라지곤 했습니다. 키가 작달막하고 대머리인 남자가 서둘러 다른 사람들을 제치고 육중한 가구 한쪽으로 그를 몰아넣는데 성공했습니다.

“저는 아이돌론 출판사의 로날드 스티글러입니다. 이렇게 만나 뵙게 되어서 영광입니다.” 대머리가 손을 내밀었습니다. “우리는 TV 인터뷰를 보고 큰 흥미를 느꼈습니다.” 스키글러가 말을 이었습니다. “저는 이곳에 오는 도중에 차 속에서 다시 소련대가사 필라델피아 연설에서 귀하를 인용했다는 뉴스를 라디오를 통해 들었습니다만….”

“라디오라구요? 차에 TV가 없습니까?” 챈스가 물었습니다.

스티글러는 흥미있는 표정을 꾸미며 말했습니다. “전 사실은 라디오도 거의 안 듣는 편이지요. 요즘의 교통지옥 속에서는 보통 신경을 써서는 안 되거든요.” 그는 마침 지나가는 웨이터를 불러 세우고 오렌지 즙을 짜놓은 보드카 마티니 온더록스를 한 잔 시켰습니다.

“이건 저 혼자 생각해 본 것입니다,” 스티글러가 벽에 몸을 기대며 말했습니다. “물론 우리 편집진도 마찬가지 의견이겠지요. 저희 회사를 위해 가디너씨께서 저서를 한 권 내시지 않겠습니까? 귀하의 특수 분야에 관한 것으로 말입니다. 백악관에서 보는 견해는 학계나 노조의 견해와는 분명히 다를 게 아니겠습니까?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는 쥐고 있던 잔을 꿀꺽꿀꺽 마신 후 쟁반을 받쳐 든 급사가 지나가자 또 다시 한잔을 집어 들었습니다. “자, 한 잔 하시겠습니까?” 그가 챈스를 향해 상냥하게 웃으면서 말했습니다.

“아닙니다. 저는 술은 못합니다. 감사합니다.”

“가디너씨, 이건 제 생각입니다만, 귀하의 독특한 철학을 전국에 널리 보급 한다는 건 우리나라의 국익을 위해서도 너무 당연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아이돌론 출판사는 귀하를 위해, 또 전체 국익을 위해, 기꺼이 이일을 맡을 용의가 있습니다. 지금 당장 이 자리에서 전 로열티 선불조건으로 여섯 자리 숫자를 약속드릴 수 있고, 또 로열티 및 판권 조항도 최대한 편의를 보아 드리겠습니다. 뭐, 계약서 초안을 잡고, 서명을 끝내는데 하루 이틀이면 충분합니다. 원고는 뭐 일, 이년 안에 저희들에게 넘겨주시면 되지 않겠습니까?”

“저는 쓸 줄 모릅니다.” 챈스가 말했습니다.

스티글러는 예상한 듯 미소를 띠었습니다. “요즈음 제대로 글을 쓸 줄 아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전혀 문제될 게 없지요. 저희 회사의 정상급 편집진과 연구전담 직원들을 부쳐드리면 되지 않겠습니까? 저는 자식들한테 엽서 한 장 제대로 써 보낼 줄 모른답니다. 그렇지만 그게 어떻습니까?”

“저는 읽을 수도 없는데요.” 챈스가 말했습니다.

“물론, 알고 있습니다.!” 스티글러가 강조했습니다. “요즘 한가롭게 모든 것을 읽을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그저 대충 훑어보고, 얘기하고 듣고, 보고, 다들 그저 그러는 거죠. 가디너씨, 사실 출판업자로서 이런 말씀드리기가 쑥스럽지만…. 요즘 출판업이란 뭐랄까, 꽃피는 정원이라곤 할 수 없는 형편이랍니다.”

“그럼 어떤 정원입니까?” 챈스가 흥미를 느끼며 물었습니다.

“어쨌든…. 이전과는 아주 다릅니다. 물론 지금도 출판업계는 계속 성장하고 있기는 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출판되는 책이 너무 많은 거예요. 거기다 설상가상으로 불황에, 스테그플레이션에, 실업사태까지 겹쳐서…. 아시다시피 최근에는 책이 전혀 나가질 않습니다. 저희 사정을 말씀드렸지만, 가디너씨 크기 만한 나무라면 얘깃거리는 많을 것 같습니다. 그래요, 초온시 가디너씨가 아이돌 론의 표지 아래 꽃피는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이 눈에 보이는 듯합니다. 저희들 계획과 그럴 뒷받침하는 숫자를 적은 쪽지를 곧 보내 드리겠습니다. 아직 랜드씨 댁에 그냥 머물고 계신가요?”

“예, 그렇습니다.”

급사장이 저녁식사 준비가 끝났음을 알려 왔습니다. 초대 객들은 품위 있게 배치된 작은 식탁들 주위에 둘러앉았습니다. 챈스의 식탁에는 열 명의 좌석이 마련돼 있었습니다. 그의 양쪽 옆으로는 여자 둘이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화제는 어느 사이엔가 정치문제로 옮겨 갔습니다. 챈스 건너편에 앉은 나이 지긋한 남자가 먼저 말을 걸어왔습니다. 챈스는 거북함을 느끼고 자세를 바로 했습니다.

“가디너씨, 정부에서 공업 부산물을 공공연히 유해 약품이라고 부르는 태도를 언제쯤 버릴 것 같습니까? 문제의 DDT 살포금지 결정엔 나도 군소리 없이 따라 갔소. 그건 DDT가 실제로 유해 약품이었고 대용품으로 새로운 화학물질을 개발하는데 아무 어려움이 없었기 때문이었소. 그러나 예를 들어 등유를 분해하면 그 부산물이 문제가 있다고 해서 난방용 등유 생간을 중단하라는 건, 이건 정말 한심한 경우가 아니오!” 챈스는 말없이 노인을 바라보기만 했습니다. “석유 횟가루와 살충제 가루를 같이 취급하다니, 원, 세상에…. 바보짓도 어는 정도지!”

“저는 실제로 횟가루나 살충제 가루 모두 다뤄 봤습니다. 그래서 정원에는 둘 다 좋지 않다는 걸 알고 있지요.”

“들으셨어요? 모두 들으셨지요?” 챈스의 오른쪽에 앉아 있던 여인이 소리쳤습니다. “정말 이 분은 놀라우신 분이예요.” 그녀가 작은 목소리이지만 주위의 모든 사람이 들으라는 듯, 옆 사람에게 속삭였습니다. 그리고는 이어서 다른 사람들을 향해 계속해서 말했습니다. “가디너씨가 아주 어렵고 복잡한 문제도 보통 사람이 할 수 있는 말 중 가장 쉽고 간단한 한마디 말로 정의해 내는 걸 보고 있노라면 거의 두려움을 느낄 정도에요. 정말로 허공에 뜬 것처럼 실감이 안 나는 이슈들도 가디너씨가 한번 내 집, 내 정원 안으로 끌어들이고 나면 우리 같은 여자들도 아! 그게 그런 문제구나 하고 금방 알 수 있잖아요? 여기 계신 가디너씨나, 이 분 말씀을 자주 인용하시는 대통령 같은 분들이 어려운 민생문제 해결에 얼마나 부심하고 있는지 이제 알 것 같아요.” 몇몇 초대 객들이 미소 띤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습니다.

이번에는 코안경을 걸친 근엄해 보이는 남자가 챈스를 향해 말했습니다. “가디너씨, 대통령의 연설은 정말 고무적인 것이었소. 그러나 국내의 실업률이 유례없는 파국으로 치닫고 있고 시장경기는 1929년의 대공황 수준으로 위험스럽게 곤두박질치고 있으며 이 나라의 유명한 대기업들이 줄줄이 붕괴되고 있는 사실은 엄연히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현실이 아니겠소? 귀하께서는 대통령의 능력으로 이렇게 침체되어 있는 하향세를 만회할 수 있다고 보십니까?”

“랜드씨 말씀이 대통령은 자시 일은 알아서 하시는 분별력이 훌륭한 분이라더군요.” 챈스가 천천히 말했습니다. “대통령과 랜드씨 두 분이 말씀하실 때 저도 함께 있었는데, 두 분 이야기가 끝나고 나서 랜드씨가 그렇게 말씀하셨지요.”

“그렇다면 귀하께서는 전쟁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챈스 왼쪽에 앉아 있던 젊은 여인이 그에게 기대를 거는 듯 물었습니다.

“전쟁? 어떤 전쟁 말씀이긴가요?” 챈스는 되물었습니다. “나는 TV에서 본 전쟁이 하도 많아서요.”

“어머나,” 그녀가 말했습니다. “이 나라에서 우리가 우리만의 현실을 꿈꾸고 있을 때 TV는 우리를 꿈에서 일깨워 주고 있지요. 수백만 시청자에겐 전쟁이란 또 하나의 TV 프로일 뿐이지만…. 그러나 실제의 전선에서는 실제로 많은 젊은이들이 생생하게 죽어가고 있지요.”


챈스가 식당에 맞붙어 있는 객실에서 커피를 마시고 있을 때 초대 객 중 하나가 조심스럽게 그에게 접근해 왔습니다. 그 남자는 자기소개를 끝내자 챈스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아 챈스를 뚫어지게 응시했습니다. 그는 챈스보다 나이가 들어 보였습니다. 챈스는 그가 TV에서 자주 본 어떤 남자를 많이 닮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의 비단결 같은 잿빛 머리는 이마에서 곱게 넘겨 목덜미를 치렁치렁 덮고 있었고 감정이 풍부한 듯 보이는 그의 큰 눈은 유난히 긴 속눈썹에 그늘져 있었습니다. 그는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고 가끔씩 짧게 건성웃음을 터뜨렸습니다.

챈스는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전혀 알 수가 없었고 아울러 그가 왜 웃는지도 알 수 없었습니다. 챈스는 그저 그 남자가 꼭 무슨 대답을 듣고 싶어 하는 느낌이 들면 눈치껏 예측  하고 응대했을 뿐, 대개는 미소를 지으며 함께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알아듣는 체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그 남자가 챈스에게 상체를 숙이며 꼭 확답을 해달라는 듯이 나지막하면서도 힘주어 무어라고 질문을 해왔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도 챈스는 그 남자가 던지는 질문의 뜻을 확실히 알 수 없어서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은 채 가만히 있었습니다. 남자가 같은 질문을 또 다시 되풀이했지만 챈스는 역시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자 남자는 더욱 가까이 그에게 몸을 기대오며 챈스의 눈을 차분히 바라보았습니다. 그 남자는 챈스의 눈빛에서 무언가를 꼭 읽어 낸 것 같았습니다. 그는 차갑고 억양 없는 목소리로 챈스에게 물었습니다. “당신 지금 하고 싶지 않소? 위층에 가면 지금이라도 할 수 있는데.”

챈스는 그 남자가 자기에게 무엇을 원하는지 도대체 알 수 없었습니다. 만약 챈스가 할 수 없는 일이라면 낭패가 아니겠는가? 결국 그는 이렇게 말하고 말았습니다. “보는 거라면 좋소….”

“보는 거? 그럼 당신은 날 보기만 하겠단 말이오? 아니, 혼자서 하는 걸?” 그 남자는 당혹감을 감풀 수 없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요,” 챈스가 말했습니다. “나는 보는 것만 좋아하지요.”

남자가 이윽고 눈길을 피하는 듯, 싶더니 다시 챈스를 뚫어지게 쳐다보며 대담하게 말했습니다. “보는 것만 좋아한다면 할 수 없지, 좋습니다.”

술잔을 비우고 나서 남자는 다시 한 번 챈스의 눈 속을 들여다보고는 채근하듯 성급한 몸짓으로 그의 손을 챈스의 팔에 끼었습니다. 놀랄 정도로 힘이 센 팔로 챈스를 끌어당기며 남자가 속삭였습니다. “자, 우리만의 시간이오. 2층으로 갑시다.”

챈스는 EE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자리를 떠나도 되는 건지 알 수 없었습니다.

“나는 EE에게 알려야 하는데요.” 챈스가 말했습니다.

남자는 깜짝 놀란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습니다. “EE에게요?” 그는 잠시 말문이 막힌 듯 더듬거리며 말했습니다. “알았소, 하지만…. 마찬가지 아니요?…. 그녀에겐 나중에 알려주어도….”

“지금 아닌 나중에?”

“제발 부탁이요,” 남자가 애원했습니다. “그냥, 갑시다. EE는 지금 사람들 속에 파묻혀 있어서 당신을 찾지는 않을 거요. 우리끼리 슬그머니 뒤 켠 엘리베이터 쪽으로 가서 곧장 올라갑시다. 자, 날 따라와요.”

두 사람은 살며시 사람들 틈을 헤치고 방을 나왔습니다. 챈스가 주위를 둘러 봤으나 마침 EE는 눈에 뛰지 않았습니다.

엘리베이터 안은 좁고 부드러운 진홍색 천으로 장식돼 있었습니다. 챈스 옆에 가만히 서 있던 남자가 갑자기 챈스의 사타구니 사이로 손을 가져 왔습니다. 챈스는 어떻게 해야 할 지 알 수 없었습니다. 남자의 표정이 다정하고 열띤 모습으로 바뀌었습니다. 그의 손이 계속 챈스의 바지 위를 더듬고 다녔습니다. 챈스는 가만히 있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엘리베이터가 멈췄습니다. 남자가 챈스의 팔을 끌어당기며 앞장을 섰습니다. 위층은 뜻밖에도 너무나 조용 했습니다. 그들은 제일 구석진 방으로 들어섰습니다. 남자가 챈스에게 앉기를 권했습니다. 그는 벽 속에 장치된 빠를 열고 술병을 꺼내 챈스에게 술을 권했습니다. 챈스는 전에 승용차 속에서 EE가 권했을 때처럼 술을 마시면 정신을 잃는 것이 아닌가, 겁이 났습니다. 그가 술을 거절하자, 남자는 이번에는 이상한 냄새가 나는 담배를 권해 왔으나 챈스는 그것도 거절했습니다. 남자는 큰 잔에 술을 가득 따라 단숨에 들이켰습니다. 그 리고 나서 남자는 챈스 쪽으로 다가와 그를 포옹한 후 자신의 넓적다리를 챈스의 넓적다리에 꼭 붙여 왔습니다. 챈스는 가만히 있을 뿐이었습니다. 남자는 다시 그의 목과 뺨에 입을 맞추며 그의 머리털에 손을 쑤셔 넣어 마구 헝클어 놓았습니다. 챈스는 도대체 자신이 무슨 말이나 무슨 행동을 했기에 이 남자가 자기에게 정신없이 애정을 쏟는지 알 수 없었습니다. 그는 TV에서 지금 자신이 처해 있는 상황과 비슷한 장면을 본 적이 있는지 기억해 보려고 머리를 짜 보았으나, 단지 명화극장 프로를 통해 남자끼리 입 맞추는 장면을 딱 한번 본 기억이 있을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때도 실제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는 확실치 않았습니다. 그는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있을 뿐이었습니다.

남자는 챈스의 태도에 전혀 아랑곳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눈을 감은 채 입을 반쯤 벌리고 챈스의 윗옷 속으로 손을 넣어 챈스의 온 몸을 더듬었습니다. 그리고는 눈은 여전히 챈스를 향한 채 한발 물러서더니 서둘러 옷을 벗기 시작했습니다. 먼저 구두를 벗어 던진 남자는 침대에 벌거벗은 몸을 누이면서 챈스에게 손짓을 했습니다. 챈스는 침대 옆으로 다가가 엎드려 있는 남자의 몸을 내려다보았습니다. 놀랍게도 남자는 자신의 손으로 샅을 쥐고는 마구 흔들어 대며 온몸을 떨고 신음소리도 냈습니다.

남자는 어딘가 몸이 아픈 것이 분명했습니다. 챈스는 TV에서 환자들이 발작을 일으키는 것을 많이 보아 왔습니다. 그가 몸을 굽히자 남자가 갑자기 그를 끌어안았습니다. 챈스는 균형을 잃고 하마터면 벌거벗은 남자의 몸 위로 쓰러질 뻔 했습니다. 그러나 남자는 이번에는 챈스의 다리를 끌어안고 갑자기 그의 딱딱해진 그것에 챈스의 구두 밑창을 눌러 댔습니다.

그리고는 그의 아랫배에서부터 곧바르게 뻗쳐 나온 남자의 그것이 자신의 구둣발 밑에서 더욱 커지면서 빳빳하게 뻗쳐 나온 것을 보고 있자니 영감님 댁에서 수리공이 보여준 남녀의 벌거숭이 사진 생각이 그의 머리에 떠올랐습니다. 그러자 챈스는 불안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는 남자의 사타구니에 한 발을 빌려준 채, 남자가 온 몸을 꿈틀대며 벌거숭이 다리를 버둥거리고 몸부림 칠 때 그 남자가 깊은 곳에서부터 솟아나는 듯한 고뇌의 오열을 터뜨리는 모습을 말없이 바라보았습니다. 남자는 이제 더욱 힘을 주어 챈스의 구두 밑창에서부터 아래로 젖빛 액체가 간헐적인 경련과 더불어 분출되어 나왔습니다. 남자의 얼굴이 갑자기 창백해진 듯 보였으며 그는 자기 머리를 좌우로 흔들어 댔습니다. 마지막 경련이 지나가자 그 동안 몸부림치며 떨던 남자의 몸은 갑자기 에너지원으로부터 플러그를 뽑아 버린 것처럼 근육이 이완되고, 챈스의 구두 아래서 요동치던 남자의 그것도 한숨은 내쉬듯 조용히 가라 앉았습니다. 남자는 한동안 눈을 감고 있었습니다. 챈스는 잡혀 있던 발을 살며시 빼내고 말없이 방을 빠져 나왔습니다.


그는 조용히 아래층으로 내려와 사람들의 소리가 나는 곳으로 조심스럽게 되돌아가 눈에 띄지 않게 초대 객들의 무리 속에 끼어 들 수 있었습니다. 그가 EE를 찾아 두리번거리고 있을 때 누군가 그의 어깨를 톡톡 두드렸습니다. 돌아보니 바로 EE였습니다.

“따분해지셔서 먼저 나가신 건가 걱정했어요.” EE가 말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누구한테 납치라도 당하신건가 걱정했어요. 여긴, 뭐 초온시 당신 같은 분이라면 무슨 짓이라도 하려는 여자들이 많으니까요.”

챈스는 여자들이 무엇 때문에 자기를 납치하려는지 알 수 없었습니다. 그는 잠시 말없이 있다가 엉뚱한 말을 했습니다. “난 여자와 있었던 게 아니고 어떤 남자와 함께 있었습니다. 우리는 위층으로 올라갔는데 그 사람, 어디 아픈 것 같아서 나만 도로 내려 왔습니다.”

“위층에요? 초온시, 당신은 가엾게도 그저 토론, 토론, 토론뿐이군요. 당신, 긴장 좀 푸시고 파티 분위기도 즐겨 보세요.”

“난 그 사람하고 제법 오래 있었는데, 그 친구, 갑자기 병이 난 것 같아요.” 챈스가 말했습니다.

“당신처럼 건강한 사람은 정말 드물어요. 정신없이 마시고, 떠들다 보면 어디 견딜 장사가 있나요, 뭐?” EE가 말했습니다. “당신은 나의 천사에요. 아직도 세상에 당신처럼 제가 마음 편하게 의지할 수 있는 남자가 있다니 전 하나님께 감사드리고 싶어요.”


디너파티에서 돌아온 챈스는 침대에 누워 TV를 보고 있었습니다. 방안은 어두웠고 화면에서 비쳐 나오는 파르스름한 불빛이 사방 벽을 불안하게 물들이고 있었습니다. 그때 조용히 방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면서 EE가 멋있는 나이트가운 차림으로 들어와 챈스가 누워 있는 침대 쪽으로 다가 왔습니다.

“왠지, 잠시 오질 않아요, 초온시.” 그녀가 말했습니다. 그녀의 손이 부드럽게 그의 어깨를 어루만졌습니다.

챈스는 TV를 끄고 불을 키려 했습니다.

“어머, 안돼요.” EE가 말했습니다. “이대로가 좋아요.”

그녀는 침대 위에 올라 챈스 옆에 무릎을 끌어안은 채 웅크리고 앉았습니다. “전 당신이 보고 싶어 견딜 수가 없었어요.” 그녀가 가쁜 숨을 몰아쉬며 토막토막 끊어지는 소리로 말했습니다. “당신 방에…. 이렇게…. 이렇게 제가 찾아오는 거 당신 괜찮죠?”

“괜찮습니다.” 챈스가 대답했습니다. 이윽고 그녀가 조금씩, 조금씩 다가와 그녀의 머리카락이 그의 얼굴을 간지럽힐 정도가 되었습니다. 그 순간, 그녀는 가운을 벗어 던지고 침대 속으로 기어들었습니다.

그녀가 그에게 몸을 꼭 붙여 왔습니다. 챈스는 그녀의 부드러운 손이 그의 맨 가슴과 엉덩이 위를 끊임없이 쓰다듬고 눌러대다가 아래로, 아래로 내려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이제 그는 그녀의 손가락들이 그의 살갗 위를 뜨겁게 눌러 대고 있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도 덩달아 자신의 손을 뻗어 그녀의 목과 가슴과 배를 부드럽게 쓰다듬었습니다. 그녀의 몸이 마구 떨리고, 그녀의 두 다리가 저절로 벌어지는 것이 느껴졌습니다. 그는 이제 더 이상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라 손을 거두었습니다.

그녀는 지속적인 떨림과 경련을 억제하지 못하고 챈스의 머리와 얼굴에 촉촉이 젖은 그녀의 살을 마구 눌러 댔습니다. 마치 자기 몸을 삼켜 주기를 바라는 듯, 부서질 듯 신음 소리와 함께, 가끔 기쁨에 넘치는 듯 탄성을 지르며, EE는 마디마디 끊어진 말을 채 맺지 못한 채, 짐승의 포효를 닮은 흐느낌을 토해 내곤 했습니다.


챈스는 그녀의 모습을 보는 것이 그녀를 만지는 것보다 그에게는 더 좋다는 것을, 오직 보는 것만이 그녀를 기억 속에 남게 하고, 그녀를 소유하고, 그녀를 점령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음을 어떻게 그녀에게 알릴 수 있을까 도무지 생각이 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손보다는 눈이 더욱 세밀하고, 더욱 완벽하게, 그녀에게 닿을 수 있다는 것을 그녀에게 설명하고 싶었으나 그 방법을 알 수 없었습니다. 만지는 것 보다 그에게 본다는 것은 동시에 모든 것을 포용하는 것이었습니다. 만지는 것은 사실 한 번에 한 곳으로 국한되기 때문이었습니다. EE의 경우도 TV화면이 만져 주기를 바라지 않듯, 챈스에게 EE를 만져 주기만 해서는 안될 일 이었습니다.

격렬하게 온 몸을 요동치는 EE에게 챈스는 아무런 움직임도,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았습니다. 갑자기 EE의 몸에서 힘이 빠져나가고 그녀의 머리가 푹 꺾이며 그녀가 챈스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었습니다. “당신은 절, 원하지 않는군요.” 그녀가 말했습니다. “당신은 저에게 아무런 감정도 느끼시지 않는군요. 전혀 아무 감정도 말이에요.”

챈스는 부드럽게 그녀를 밀어내고 침대 머리에 천천히 일어나 앉았습니다.

“전 알아요, 제가 당신을 완전하게 흥분시킬 수 없다는 걸 !” 그녀가 울먹였습니다.

챈스는 그녀의 말뜻을 알지 못했습니다.

“제 말이 맞지요, 초온시?”

챈스는 고개를 돌려 그녀를 보았습니다. “난 당신을 보는 게 더 좋습니다.” 그가 말했습니다.

EE가 멍한 눈초리로 챈스를 발라보았습니다. “절 본다고요?”

“그럼요, 난 당신을 보는 게 더 좋습니다.”

그녀는 제대로 숨도 쉬지 못하고 헐떡이며 일어나 앉았습니다. “당신은, 그래서 그럼…. 그럼 보는 것만으로.”

“그래요 난, 보는 것만으로.”

“도대체 당신은 흥분이 되지 않나요?” EE는 갑자기 손을 내리 뻗어 늘어진 채로 있는 챈스의 그것을 잡고 손에 꼭 쥐었습니다. 챈스도 손을 뻗어 그녀를 어루만졌습니다. 챈스의 손가락이 그녀 속으로 들어가자 그녀는 다시 몸부림치며 머리를 돌려, 불길처럼 치솟는 욕정을 억제하지 못하고, 만지고 있던 챈스의 그것을 잡아당겨 그녀의 입에 물고, 혀로 핥고, 이빨로 잘근잘근 씹어 대며 결사적으로 그것에 생명을 부어 넣으려 안간힘을 다했습니다. 챈스는 그녀가 애무를 중단할 때가지 끈기 있게 기다렸습니다. 마침내 그녀가 비통한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당신은 날 사랑하지 않는군요. 전 당신을 뜨겁게 사랑하는데 당신은 저와 호흡을 맞추지 않는군요.”

“난 당신을 보는 게 좋을 뿐이요.” 챈스가 말했습니다. “난 당신 말을 못 믿겠어요. 내가 당신에게 온갖 애무를 퍼부어도 당신을 흥분시킬 수가 없었어요. 난 미칠 지경인데. 당신은 저한텐 전혀 관심이 없는 거지요. 말로는 날 보는 게 즐겁다면서…. 본다구요?  그럼…. 그럼…. 저 혼자서만 하란 말인가요?”

 “정말이지, 난 당신을 보는 게 즐겁습니다.”

TV의 푸르스름한 불빛 속에서 EE는 멍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습니다.

 “결국 저 혼자 즐기는 걸 보고 싶다는 건가요?”

챈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제가 혼자 즐기고 있는 것을 보셔야만 당신은 흥분 되나 보죠? 그래야만 사랑할 수 있는 건가요?”

챈스는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난 당신을 보았으면 좋겠소.” 그가 되풀이 했습니다.

“이젠 알 것 같아요.” 그녀는 침대에서 내려와 알몸으로 TV화면 앞을 가로질러 빠른 걸음으로 방안을 이리저리 거닐기 시작했습니다. 가끔 그녀의 입에서 어떤 한마디 말, 그녀의 숨결만큼이나 낮은 한마디 말이 튀어 나왔습니다.

그녀는 침대로 돌아왔습니다. 침대에서 몸을 쭉 펴고 누운 채 그녀는 손을 뻗어 자기 자신의 몸을 어루만지기 시작했습니다. 맥없이 늘어진 몸 위를 더듬다가, 그녀는 양다리를 쫙 벌렸습니다. 그녀의 두 손이 그녀의 배 아래를 개구리처럼 움직여 갔습니다. 파도처럼 출렁이는 그녀의 몸이 이따금씩 날카로운 풀잎에 찔리기라도 한 듯 움칠움칠 했습니다. 그녀의 손가락들이 젖가슴과 엉덩이 허벅지 위를 애무하기 시작했습니다. 눈 깜짝할 사이, 그녀의 팔과 다리가 넝쿨처럼 챈스를 감고 힘껏 조여 댔습니다. 그녀의 몸이 거칠게 흔들렸습니다. 그러자 섬세한 선율이 그녀의 체내를 부드럽게 흘러가는 것 같았습니다. 그녀는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EE,는 이제 깜박 잠이 들어 있었습니다.

챈스는 가만히 그녀 위에 모초를 덮어 주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그는 TV소리를 죽이고 몇 번인가 채널을 바꾸었습니다. 그녀와 함께 침대에 누워 휴식을 취하는 동안 챈스는 꼼짝도 하지 않고 TV를 보았습니다.


얼마간의 시간이 흐르자 EE가 잠에서 깨어 나 입을 열었습니다. “당신과 함께 있으면 난 너무너무 해방감을 느껴요. 당신을 만나기 전까지, 남자들은 누구도 날 알려 하지 않았어요. 언제나 멋대로 빼앗고, 꿰뚫고, 더럽히기만 했지요…. 그저 날 일종의 노리개로 취급하는 남자들 뿐 이었어요. 난 남자들이 사랑이라고 부르는 동정의 한쪽에 불과했어요. 제 말 무슨 뜻인지 아시겠어요?”

챈스는 그녀를 바라볼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당신은 나에게 가장 소중한 분이에요…. 당신은 제 욕망의 실타래를 풀어 주시는 분이죠…. 당신이 제 곁에 있으면 사랑의 욕망이 몸속을 흐르고, 당신이 절 만지기라도 하면 전 욕정 속에 제 몸이 녹아내리고 말아요. 당신이 날 해방시키면, 난 내 자신을 스스로에게 들어내면서 사랑으로 내 몸이 흠뻑 젖어 씻겨 간답니다.”

챈스는 침묵을 지켰습니다.

EE가 몸을 쭉 뻗으며 미소 지었습니다.

“초온시, 당신에게 이 말을 하려고 제가 얼마나 별렀는지 모르시죠? 벤이 당신더러 저하고 내일 함께 워싱턴에서 열리는 국회 무도회에 참석해 달라고 부탁했어요. 꼭 참석하셔야 돼요. 제가 ‘국회 모금위원회’ 회장이거든요. 당신 저하고 같이 가시는 거죠?”

“같이 가고 싶소.” 챈스가 대답했습니다. 그녀는 챈스의 겨드랑 밑으로 파고들며 다시 새근거리기 시작했습니다. 챈스는 잠이 몰려 와 눈꺼풀이 무거워질 때까지 TV를 보았습니다.


★ 여섯


아침 일찍 오브리 부인으로부터 챈스에게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선생님, 오늘 아침 신문들을 방금 정리했는데. 선생님이 신문에 안나온 데가 없어요. 사진들도 너무 잘 나왔구요! 한 장은 스크라피노프 대사아 함께 있는 거구요. 또 하나는 사무총장과 함께…. 또 한 장은…. 독일의 무슨 백작이라는 분과 함께 찍은 사진이더군요. 데일리 뉴스지엔 선생님이 랜드씨 부인과 함께 찍은 사진이 전면에 게재됐고, 빌리지 보이스까지도….”

“난 신문을 읽지 않소.” 챈스가 말했습니다.

“하지만. 어쨌든 주요 방송국들이 모두 선생님의 단독 TV 출연을 요청해 왔어요, 포춘, 뉴스위크, 라이프, 루크, 보그, 하우스 앤드 가든지에서는 선생님에 대한 특집 기사를 다룰 계획이랍니다. 아이리쉬 타임즈, 스펙테이터, 선데이 텔리그라프, 더 가디안지 등은 합동 기자회견을 하면 어떻겠느냐고 연락해왔어요.

보클러크경이란 분은 선생님께서 BBC에 특별 TV출연을 해 주신다면 런던까지 전세 비행기를 내겠다고 알려 왔습니다. 아울러 선생님의 숙박도 자기 저택을 이용해 달라는 전갈이었습니다. 쥬르 드 프랑스, 데어슈피겔, 로세르 바토레 로마노, 프라우다, 노이에 취리히 자이퉁 등 외국 신문들의 뉴욕지사에서도 각각 면담시간을 내어 달라는 요청이 있었고, 폰 크록부르그 -슐렌도르프 백작이 방금 서독 슈테른지가 선생님 사진을 표지 화보로 내기로 결정했다고 전화로 알려 왔습니다. 슈테른지는 또 TV에서의 담화 내용 일체에 대한 세계 독점 판권 문제에 대해서도 선생님측 조건을 알고 싶답니다. 불란서 렉스프레스지는 원탁 토론을 통해 「미 경제 불황에의 도전」이란 제목으로 선생님과 특별 회견 내용을 싣고 싶답니다. 물론 경비 일체는 자사 부담이랍니다.

또한 고프리디씨가 선생님의 프랑스 체재 중에는 자신이 호스트가 되겠다고 두 번이나 전화가 왔답니다. 거기다가 동경 국제증권거래소 이사진에서는 일본에서 새로 개발된 데이터 처리 컴퓨터를 한번 검토해 주셨으면 하는 요청이 있었습니다…."

“그런 사람들을 만나고 싶은 생각은 없는데.” 챈스가 말을 막았습니다.

“알겠습니다. 두 가지만 더 말씀드려야겠어요. 하나는 윌스트리트저널지에서 선생님이 FAFC이사로 취임하는 것은 현재 시간문제라고 예상하기 때문에 선생님의 특별 논평을 듣고 싶다는 요청이 왔습니다. 제 생각도 예상되는 고견을 한마디 해 주시면 증권가를 크게 우양 시킬 수 있을 것 같아요.”

“난 아무 것도 해줄 수가 없소.”

“알겠습니다. 선생님. 다른 한 가지는, 이스트 쇼어 대학교에서 다음 졸업식 때 선생님께 명예 법학박사 학위를 수여하고 싶다면서 사전에 수락 여부를 알고 싶다는 거예요.”

“난 박사는 필요 없소.” 챈스가 말했습니다.

“혹시 재단 측과 이야기해 보시겠어요?”

“아니오.”

“알겠습니다. 그러면 신문사 요청들은 어떻게 할까요?”

“난 신문은 좋아하지 않습니다.”

“외국 특파원들은 만나시겠습니까?”

“TV에서 보는 것만으로 충분하오.”

“네, 알겠습니다…. 어머, 내 정신 좀 봐. 랜드씨 부인께서 전용기가 4시 정각에 워싱턴으로 출발한다고 알려주셨어요. 그리고 위싱턴에 가시면 선생님께서는 초대하신 여주인 댁에 묵게 되신답니다.”


특수정보반 반장 카르파토프가 금요일 소크라피노프대사를 찾아왔습니다. 그는 즉시 대사의 집무실로 안내 되었습니다.

“가디너에 관한 인상정보 철에는 더 이상 첨부할 만한 추가 정보가 없습니다.” 대사의 책상에 얇은 문서철을 내밀며 그가 말했습니다.

스크라피노프는 책상 한 켠으로 서류철을 옮겨 놓고 “다른 건 어디 있어?” 라고 깐깐한 목소리로 물었습니다.

“저희는 어디에서도 그에 관한 기록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스크라피노프 동무.”

“카르파토프, 내겐 변명이 중요한 게 아니라 사실이 필요해!”

카르프토프가 더듬거리며 말했습니다. “대사 동무, 우리가 가디너에 관해 알고 있는 것에 대해 백악관에서도 상당한 관심을 보이고 있다는 사실을 간파했습니다. 이 사실은 바로 가디너의 정치적 비중이 제 1급에 속한다는 것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스크라피노프는 카르파토프를 한참 노려 본 뒤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책상 뒤를 서성이기 시작했습니다. “동무의 특수정보반에 바라는 것은 가디너에 관한 보다 정확한 진상 조사, 이 한가지 뿐이오.”

카르파토프는 우울한 표정으로 묵묵히 서 있을 뿐이었습니다. “대사 동무.” 그가 입을 열었습니다. “죄송하지만 저희는 그에 관한 가장 기초적인 정보조차 입수할 수 없었던 것을 보고 드립니다. 마치 이전까지는 전혀 존재하지 않았던 인간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갈 정도입니다.”

화가 난 대사가 주먹으로 책상을 내리쳤습니다.

그러자 작은 조각품 하나가 바닥에 나뒹굴었습니다. 카르파토프가 벌벌 떨며 몸을 구부려 조각품을 집어 정성껏 책상 위에 다시 올려놓았습니다.

대사가 독살스럽게 내뱉었습니다. “자네, 그따위 수작이 내게 통하리라고 생각해? 마치 ‘존재하지 않았던 인간’이라구? 누구앞에서 허튼 수작이야! 가디너가 이나라 정상급 인사 중의 하나라는 것, 여기가 소비에트 연방공화국이 아니라 세계 최대의 제국주의국가인 미합중국이라는 것을 잊지 말란 말이야! 가디너 정도되는 위치에 있으면 매일 수백만명의 운명을 결정짓고 있는거야! 뭐, 그가 존재하지 않았다구? 동무, 돌지 않았소? 연설 속에 그 자를 들먹였던 나는 그럼 뭐란 말인가?” 그는 잠시 말을 멈추고 카르파토프를 향해 몸을 구부렸습니다. “동무의 특수정보반원들과는 달리 나 스크라피노프는 20세기의 ‘망령’은 믿질 않아. 그리고 미국 TV프로에 나오는 외계 인간설 따위를 믿을 수가 없어! 4시간 안에 초온시 가디너에 관한 모든 자료를 제출해 줄 것을 다시 한번 명령하네!”

카르파토프는 축 늘어진 모습으로 방을 나왔습니다.


4시간이 지나고도 카르파토프로부터 아무런 연락이 없자 스크라피노프는 그에게 단단히 겁을 주어야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표면상으로는 소련대표부의 하급 관료에 불과하나 사실상 외무성 내부의 막강한 실력자 중의 하나인 술킨을 그는 자기 집무실로 소환했습니다.

스크라피노프는 술킨에게 카르파토프의 무능함을 신랄하게 비판하며 가디너에 관한 정보 입수의 중대성을 거듭 강조한 뒤, 기다너의 과거 행적에 대한 명확한 자료 조사를 정중하게 요청했습니다.


점심식사 후, 술킨은 스크라피노프와 단독 비밀회의를 가졌습니다. 그들은 대표부 건물에서 ‘지하실’이라 불리우는 완벽한 보안시설과 최첨단 도청방지 장치가 돼 있는 특수공작실로 들어갔습니다. 술킨은 자신의 극비 서류가방을 열고 아주 정중한 격식을 차리며 검은 서류철 안에서 아무 것도 기재돼 있지 않은 백지 한 장을 꺼내 보였습니다. 스크라피노프는 기대에 부풀어 긴장해졌습니다.

 “친애하는 대사 동무. 이것이 바로 가디너의 과거에 관한 백서입니다!” 술킨이 씹어 뱉듯 말했습니다.

스크라피노프는 술킨이 집어 든 백지에 아무 것도 기록되어 있지 않은 것을 보고는 종이를 책상 위에 던지며 술킨을 노려 본 채 말했습니다. “난 이해할 수가 없소, 술킨 동무. 이건 백지가 아니오? 가디너에 관한 정보 수집은 내가 관여할 수 없는 성질의 것이란 뜻이오?”

술킨이 자리에 앉아 담배 불을 붙힌 뒤 천천히 성냥을 흔들어 껏습니다.

“친애하는 대사 동무. 가디너씨의 배후 조사는 특수정보반 요원들에게도 힘겨운 임무임에 틀림없습니다. 벌써 가디너의 과거를 탐문 중이던 요원 하나가 아무 성과도 없이 희생됐다는 보고를 받았습니다!” 술킨이 담배를 깊숙이 빨아 들였습니다. “아무튼 수요일 밤 내가 예방 조치로 가디너가 출연했던 ‘오늘 저녁의 화제’ TV프로 테이프를 모스크바로 전송했던 것만도 다행이오. 이 테이프의 정신 의학, 신경의학 및 음성학적 분석 결과에 대해 흥미를 느끼지 않소? 우리의 최신형 컴퓨터를 동원, 가디너의 어휘, 구문, 억양, 몸짓 및 표정 등을 정밀 분석한 특수조사반의 결론이란, 놀라지 마시오, 스크라피노프 동무. 그의 민족적 출신성분 뿐만 아니라 억양까지도 미국 내 어느 지역의 방언에 속하는지조차 결정할 수 없다는 것이오.” 스크라피노프는 몹시 당혹스런 표정으로 술킨을 바라보았습니다.

술킨이 머쓱한 미소를 지으며 계속했습니다. “게다가, 가디너는 최근 수년간 나타난 미국 정객들 중 정서적으로 가장 안정돼 있는 인물인 것 같다는 결론이오. 흥미롭지 않소? 어쨌든, 당신의 초온시 가디너씨는, 무슨 의도와 목적이든,” 여기서 그는 책상 위에 놓인 종이를 들어 보이며 이렇게 말을 맺었습니다. “여전히 백지 상태로 남아 있소.”

“백지 상태로?”

“그렇소 백지 상태로 말입니다!” 술킨이 되풀이 했습니다. “그래서, 백지! 백지가 가디너의 암호명이오!”

스크라피노프가 글라스로 손을 뻗어 냉수를 꿀꺽 들이켰습니다. “죄송합니다, 동무.” 스크라피노프가 입을 열었습니다. “그러나 제가 목요일 저녁 필라델피아 연설 석상에서 본국정보의 지령에도 없는 가디너의 이름을 들먹였을 대는 저는 그가 윌스트리트 증권가 출신의 뛰어난 엘리트일 것으로 단정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미국 대통령 자신이 공식 석상에서 언급한 사람이 아니었습니까? 그런데, 이제 보니 말입니다….”

술킨이 손을 들어 제지했습니다. “무슨 말을 하려는 겁니까? 초온시 가디너가, 동무가 방금 묘사한 인물이 아니라는 어떤 근거라도 발견했다는 건가요?”

스크라피노프가 말을 더듬거렸습니다. “백지… 정보 부재….”

또 다시 술킨이 말을 가로막았습니다. “대사 동무, 내가 여기 온 이유는 사실은 동무의 그 예리한 감각을 축하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에게는 가디너가 지금까지 수년간 극비리에 쿠데타 음모를 추진해 온 미국내 특수엘리트그룹의 지도적 인물일거라는 확신이 섰다는 것만

알려 두겠소. 이 그룹 내부에서의 그의 비중으로 보아 화요일의 돌연한 출현이 결정될 때까지 그가 신원 일체를 위장, 파기하는데 총력을 기울였을 것도 쉽게 짐작할 수 있는 일이요."

“금방 쿠데타라고 하셨습니까?” 스크라피노프가 반문했습니다.

“그렇소.” 술킨이 대꾸했습니다.

“대사께서는 가능성 자체에 의심이 가시나요?”

“아니, 절대 아닙니다. 그건 레닌께서 이미 예견했던게 아닙니까?”

“좋소, 아주 좋습니다.” 술킨이 서류 가방을 철컥 잠그며 말했습니다. “동무의 뛰어난 직관은 분명한 근거가 있는 것 같소. 가디너를 포섭하기로 한 동무의 일차적 결정은 정당한 것이요. 동무의 본능적 감각이 아주 좋소, 스크라피노프 동무. 진정한 막시스트적 본능 말이오!” 술킨이 자리를 뜨며 말했습니다. “가디너에 대해 취해야 할 태도에 대한 특별 지시가 곧 있게 될 것이요.”

술킨이 나간 뒤 스크라피노프의 머리에는 이런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정말 믿을 수 없군! 최신 일제 도청장치 구입비며, 일급 스파이 훈련과 위장전술, 또 통신위성, 대사관, 통신 사절단, 문화 교류, 뇌물 및 선물 등 정보비조로 매년 수십억 루불이 지출되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 결국 문제의 관건은 막시스트적 본능에 귀착된다는 것인가! 가디너에 대해 이런 저런 생각이 미치자 스크라피노프는 그의 젊음, 그의 침작성, 새로운 지도자로서의 그의 미래에 대한 부러움이 치솟았습니다.

백지, 백지라니 -백지라는 가디너의 암호명은 2차대전 중 그가 빨치산으로서 거둔 혁혁한 승리에 대한 추억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이 외교관이란 직업은 아무래도 잘못 들어 선 것 같아…. 내겐 군대가 더 낫지 않았을까…. 그러나 이제는 난 너무 늙었어….


금요일 오후, 대통령은 공보 비서의 보고를 받았습니다. “죄송합니다. 각하. 어제 이후 지금까지 가디너에 관한 정보는 몇 개의 신문 기사를 추가로 스크랩할 수 있었던 게 고작입니다. 거기다 가디너에 대해 언급한 소련 대사 연설문과 가디너가 UN본부에서 기자회견을 한 것, 이것이 전부입니다.”

대통령은 불쾌감을 감출 수 없었습니다. “할 수 없군 그래! 그럼 벤자민 랜드에게 가디너에 관해 알아보기는 했나?”

“랜드씨 댁으로 전화를 했는데, 불행하게도 랜드씨가 다시 위독한 상태이고 이미 강력한 안정제를 투입한 후라서 말을 할 수 없답니다.”

“그럼 랜드씨 부인에게는?”

“네, 통화해 봤습니다, 각하. 그런데 부인은 랜드씨 병상을 떠날 수 없다는 겁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씀이 가디너씨는 본래 프라이버시를 남달리 중요시하는 분이고 그 분의 이런 성격의 일면은 존중되어야 한다는 거예요. 부인의 말은, 이건 단지 느낌일 분이라고 강조하면서, 랜드씨가 위독한 상태인 만큼 앞으로 가디너씨가 훨씬 적극적인 역할을 담담할 것 같다는 거였어요. 그러면서도 가디너씨가 담당할 역할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는 밝히지 않더군요.”


“그따위 보고는 뉴욕타임즈지에 난 것보다도 훨씬 못하지 않나! 도대체 정보기관들은 무얼 하고 있는거야? 스티븐과는 이야기해 봤나?”

“네, 각하. 그분도 아무 것도 알아낼 수 없다는 군요. 물론 각하께서 랜드시 저택을 방문하시기 직전 가디너의 사진과 지문을 조사했었지만 아무런 전과도 없고, 또 랜드씨의 손님이었기에 문제가 없는 것으로 통과됐었답니다. 이상이 전부입니다.”

“그렇다면, 할 수 없지. 그럼 윌터 그런만에게 연락해. 그에게 자네가 아는 바 전부를 들려주고, 아니 오히려 모르고 있는 점들을 모두 이야기해 주고, 가디너에 대해 조사가 끝내는 대로 내게 즉시 보고하도록 전해.”


얼마 되지 않아 그런만에게서 전화가 왔습니다. “각하, 여기 있는 우리 모두가 필사적인 노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만, 가디너에 관해서는 단 한 가지도 찾아 낼 수가 없습니다. 그 사람, 3일 전 랜드씨 댁으로 옮기기 전까지는 이 세상에 전혀 존재하지 않았던 사람이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들 정도입니다.”

“난 그 문제로 몹시 기분이 상해 있네. 이건 대단한 충격이란 말일세.” 대통령이 말했습니다. “수고스럽지만 다시 한번 탐문해 보도록 하게. 계속해서 말일세. 무슨 말인지 알겠지? 아, 그리고 윌터, 그 왜 TV 프로 중에, 아주 평범한 미국인이었는데 알고 보니 다른 혹성에서 온 침입자이더라 하는 거 있지 않나? 난 내가 뉴욕에서 그런 외계의 침입자 중의 하나와 이야기했다고 알려 지기를 거부하네! 난 자네가 가디너에 관한 두툼한 자료철을 들고 찾아오기를 기대하겠네. 그렇지 못하면, 윌터 자네에게 직접 경고하는 건데, 우리 보안 체제에 이런 충격적인 허점이 있게 된 원인에 대해 내가 직접 즉각적인 진상규명을 통해 관계자들을 엄중 문책하게 될 걸세!”


얼마 후 그런만이 다시 전화를 걸어왔습니다. “각하,” 그가 낮은 목소리로 말을 꺼냈습니다. “저희들이 애초 염려했던 대로입니다. 이 사람의 출생관계, 부모 또는 연고자에 대한 기록이 어디에도 없습니다. 이 사람이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한 번도 어떤 개인이나 기관하고도 법적 문제를 일으킨 적이 없다는 것만 확실합니다. 여기에는 주 정부 및 연방정부 기관 그리고 수사기관도 포함됩니다. 그가 지금까지 어떤 사고의 원인이었거나 남에게 피해를 준 일이 없다는 것은 제가 자신있게 보증할 수 있습니다. 물론, 랜드씨 부인과의 교통사고는 제외하고 말씀입니다만….

그는 지금까지 병원에 입원한 적도 없고, 보험에도 전혀 가입한 데가 없을 뿐만 아니라, 다른 어떤 문서나 자신의 신원을 증명할 서류조차 지니고 있지 않습니다. 승용차도 없고 비행기도 몰지 않으며, 그에게 어떤 면허도 그의 명의로 나간 일이 없고, 크레디트카드도 개인수표도, 심지어는 자기 명함조차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미국내에 재산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고…. 뉴욕에서는 도청도 해 봤습니다만, 전화로건 집안에서건 정치나 사업이야기를 하는 법도 없었습니다. 그가 하는 일이라곤 TV를 보는 것뿐입니다…. 그런데 그의 방에는 항상 TV가 켜져 있습니다."


“그가 뭘 한다고?” 대통령이 물었습니다. “월터, 지금 뭐라고 했어?”

“TV를 본다고 했습니다. 거의 항상 -TV의 모든 채널을 -랜드씨 부인이…. 그와 침실에 함께 있는 동안에도 말입니다….”

대통령이 날카롭게 말했습니다. “월터, 그따위 조사는 난 용서할 수 없네! 내가 그따위 것을 알고 싶다고 생각해! 그래 가디너가 자기 침실에서 무슨 짓을 하든 나와 그게 무슨 상관인가?”

“정말 죄송합니다, 각하. 저희는 나름대로 모든 노력을 쏟아 부은 게 사실입니다.” 그가 목청을 가다듬었습니다. “각하, 우리는 이 가디너라는 사람에 대해 점점 더 불안감을 느낍니다. UN리셉션에서도 그의 대화를 비밀리에 녹음해 봤는데, 거의 말이 없더군요. 솔직하게 말씀드려서, 어느 외국의 첩자가 아닌가 하는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습니다. 문제는, 첩자들이란 오히려 증명서도 필요 이상으로 완벽하게 갖추고 있고, 미국인보다 더 미국적이기 마련이죠. 저희 국장의 평소 의견대로, 그들 중의 하나가 아직 이 나라 수반으로 선출된 적이 없었다는 것은 어쩌면 하나의 기적이라고 할 수도…” 그것만은 황급히 말을 멈추었으나 그의 말을 쓸어 담기에는 이미 때가 늦어 버렸습니다.

“그건 농담치곤 저질이군 그래, 월터.” 대통령이 불쾌한 어조로 말했습니다. “죄송합니다, 각하. 그런 뜻으로 한 말이…. 정말 죄송합니다.”

“보고나 계속해 보게.”

“예, 각하. 먼저, 저희는 가디너가 그런 첩자는 아닐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소련 측에서도 현재 그의 배후 정보수집을 위해 비상이 걸려 있다는 것이 하나의 반증이 될 수 있죠. 각하, 이처럼 전례 없는 소련 측의 활동에도 불구하고 그들 역시 계속 실패하고 있음을 알려 드립니다. 각하, 이건 농담이 아닙니다. 그들 역시 우리나라 신문기사들을 스크랩하는 것 이외에 다른 정보라곤 일체 구하지 못했을 뿐더러, 너무 열을 올리는 바람에 그들의 가장 유능한 정보원 하나를 노출시켜, 우리들에게 잃는 어리석음을 범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다른 8대 강대국들이 모두 가디너의 이름을 그들의 일급 첩보대상자 명단에 올려놓고 있습니다. 따라서, 각하! 현재로서는 그저 계속 추적하겠다는 말씀밖에 드릴 게 없습니다. 24시간 계속 철두철미하게 말입니다. 무엇이든 발견되면 즉시 그때마다 다시 보고 드리겠습니다.”


대통령은 휴식을 위해 위층으로 올라갔습니다. 정말 믿을 수 없군, 믿을 수 없어. 정보기관들에 매년 할당되는 예산이 수백만 달러가 넘는데도 이 나라 최대의 영향력을 행사하는 사업가의 손님으로 뉴욕에서도 가장 큰 호화 저택에 머물고 있는 사람에 대해 단 한 가지 기본 자료조차 뽑아 볼 수 없다니…. 연방정부의 능력이 이 정도로 약화돼 있단 말인가? 누구에 의해? 그는 잠시 긴 한숨을 내뿜으며 TV를 켰습니다. 그리고는 이내 잠이 들었습니다.


★ 일곱


소파에 앉아 있던 남자가 방에 모여 앉은 사람들을 둘러보았습니다. “여러분,” 그가 천천히 입을 열었습니다. “여러분 중 몇 분은 이미 덩컨이 나와 함께 뛰지 않게 된 것을 알고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현재로서는, 나에게 런닝메이트가 없게 됐소. 그래서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우리는 조속한 시일 내에 새로운 후보자를 발표해야만 하오. 적어도 덩컨 정도는 될만한 인물로 말입니다. 우리를 난처하게 만든 덩컨의 과거가 표면에 드러나게 된 것은 큰 유감이지만 말이오….”

슈나이더가 말을 꺼냈습니다. “사실 덩컨만한 인물을 내세우기도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이제…. 좀 솔직해져 봅시다. 시기가 이처럼 늦었는데 도대체 누굴 새로 추대할 수 있단 말입니까? 쉘먼은 자기 사업을 포기하면서까지 출마하지는 않을 것이고, 또, 프랭크는 대학총장으로서 그의 말썽 많았던 경력 때문에, 고려해 볼만한 입장도 안 되고….”

“그럼 조오지는 어떨까?” 다른 사람이 끼어들었습니다.

“조오지는 최근 새로운 수술을 받았답니다. 벌써 석 달 사이에 두 번째 수술이지요. 그의 건강으로 보아 모험을 할 수는 없다고 봅니다.”

방안에는 침묵이 흘렀습니다. 바로 그 때 오플래어티가 입을 열었습니다. 나에게 머리에 떠오르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초온시 가디너가 어떨까?” 모든 사람이 커피를 마시고 있는 소파 위의 남자 쪽을 향했습니다.


“가디너?” 소파에 앉아 있던 남자가 반문했습니다. “초온시 가디너라? 우리는 그에 관해서 아는 게 아무것도 없지 않은가? 우리 측에서 그에 관해 제대로 알아낸 게 뭐가 있나? 스스로가 뭐 도움 될 만한 말 한마디 한 것도 없고…. 나흘 전 랜드네 집으로 옮겨온 뒤로 그는 자신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한 것이 없었으니 말이야….”

“그렇다면,” 오플래어티가 말했습니다. “그런 점이 오히려 가디너를 더욱 높이 추켜세울 수 있는 이유가 되지 않을까요?”

“어째서?” 여러 사람의 목소리가 합창하듯 튀어나왔습니다.

오플래어티는 분명하게 말을 이어갔습니다. “덩컨의 문제가 뭐였소? 크랭크나 쉘먼의 문제는 뭐였습니까?, 모두 마찬가지였습니다. 그 동안 우리가 추대하려고 했던 사람들 모두가 한결같이, 그들 모두가 그들의 과거, 너무나 많은 과거를 짊어지고 있다는 것 때문이 아니었습니까? 한 사람의 많은 과거는 스스로를 묶는 법이오. 사람의 과거란 언젠가 늪으로 변해 사람을 삼켜 버리니까요.”

그는 흥분한 듯 팔을 내저었습니다. “그러나 가디너를 보시오. 가장 권위 있는 분의 말을 인용하자면, 가디너에겐 특별한 과거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걸 다시 한 번 강조하고 싶습니다. 가디너에겐 문제가 될만한 과거가 없습니다. 그러니 누구도 그에게 쓸데없는 시비를 걸 수가 없지 않겠소! 사귐성도 있고, 구변도 좋으며 게다가 TV도 아주 잘 믿고 있으니 말입니다! 게다가, 적어도 그의 사고방식만은 우리 편이라고 할 수 있는 것 아니오? 그럼 된 거지, 뭐. 가디너야말로 우리의 마지막 챈스라고 생각됩니다.” 슈나이더가 시가를 눌러 껐습니다.

“방금 오플래어티 말은 어딘가 강하게 때리는 구석이 있군.” 그가 말했습니다. “강하게 때리는 데가 있어. 음…. 가디너, 가디너라….”

웨이터가 펄펄 끓는 커피포트를 새로 들여왔고 토론은 그 동안에도 계속되었습니다.


챈스는 쌍쌍이 춤추는 무리 속을 헤집고 출구로 나왔습니다. 그의 망막에는 아직도 대 무도회장의 화려함, 뷔페의 맛깔스런 음식들, 다양한 색깔의 아름다움을 빛내는 꽃 더미들, 번쩍이는 술병과 테이블 위에 열을 지어 있는 멋있는 술잔들의 이미지가 흐릿하게 머물고 있었습니다. 그는 EE가 어떤 키가 크고 훈장을 가슴 가득 늘어뜨린 장군의 품에 안기는 모습을 흘깃 보았습니다. 그는 사진 기자들이 터뜨려대는 플래시의 섬광 속을, 구름 속을 지나오듯 빠져 나왔습니다. 그가 살던 그의 정원 밖으로 나온 이래 그가 보아 온 모든 이미지들이 기억 속에 가물가물 사라져 갔습니다.

챈스는 당황했습니다. 그는 빛이 바래 가는 초온시 가디너의 이미지를 되살리며 다시 한 번 붙잡으려 했습니다. 그러나 이미지는 흐르지 않는 빗물 웅덩이 속에 돌멩이를 던져 넣었을 때처럼 깨어져 나갔습니다. 이제 그에게는 그 자신의 이미지조차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챈스는 혼자서 홀을 가로질렀습니다. 차가운 공기가 열린 창문을 통해 흘러 들어왔습니다. 챈스는 두터운 유리문을 열어젖히고 정원으로 나왔습니다. 새롭게 움트기 시작하는 봉오리들로 더욱 싱싱해 보이는 나뭇가지들과 흙을 밀치고 나오는 여린 싹들이 모두 위를 향해 솟아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정원은 조용한 휴식 속에 평온하게 누워 있었습니다. 구름조각들이 연달아 흘러가며 달을 씻어주고 있었습니다. 가끔씩 나뭇가지가 흔들리며 물방울을 흘려 내리고 있었습니다. 가벼운 산들바람이 정원의 나뭇잎 속으로 파고들며 촉촉한 잎사귀들 사이로 스며들고 있었습니다. 챈스의 머리 속에는 단 한 가지 상념도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평화로움만이 그의 가슴을 가득 채우고 있었습니다.

 

 

작가소개

 

                

Jerzy N. Kosinski


작가 저지 코진스키는 1933년 6월 14일 폴랜드의 로드즈에서 출생했다. 1939년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 폴란드가 나치 독일에 의해 점령되면서 유태인들에 대한 박해가 시작되자 유태인으로서 생명의 위협을 느낀 부친은 가족을 분산시킨다. 외아들 코진스키를 살리기 위해 그의 아버지는 소련 국경 근처의 한 시골농부 부인에게 피난을 보내어 코진스키를 보호해 달라고 부탁했으나 그 부인이 곧 사망하자 그때부터 여섯 살 짜리 어린 코진스키는 홀로 정처 없는 유랑길에 나서게 되고, 전쟁이 끝나 11살이 되는 1945년까지 6년 동안 참혹한 전쟁의 피해자로 끊임없이 생명의 위협과 박해를 받는 비참한 떠돌이 생활을 하게 된다.

이러한 유랑생활 중 폴란드의 농촌을 떠돌던 어느 날 심술궂은 한 농부가 그를 변기통 속에 집어 던져 버린다. 간신히 목숨을 건져 살아나기는 했지만 이때의 충격으로 그는 실어증에 걸려 말 못하는 벙어리가 되어버린다. 고달프고 처절한 삶 속에서 그에게 새로운 전기가 닥쳐왔으니 마침내 전쟁이 끝난 것이다.

그러나 말 못하는 벙어리 소년이었던 그는 부모를 스스로 찾지 못하여 고아로 전전하던 중 어느 소련 장교의 주선으로 ‘고아 피난민 보호소’에 수용되어 지내게 된다. 그때 어머니의 얼굴을 빼다 닮은 그의 모습이 우연히도 어머니를 알고 있던 사람에게 발견되어 그가 부모에게 연락하자 수용소를 찾아온 그의 어머니는 겨드랑이 밑의 사마귀 점으로 코진스키가 자신의 아들임을 확인한다. 이처럼 천신만고 끝에 다시 부모를 만나게 된 코진스키는 벙어리가 되어 버렸기 때문에 특수학교에 보내진다. 그러나 오랜 떠돌이 생활로 너무나 허약해 진 아들의 건강회복을 위해 코진스키 부모는 벙어리 스키강사가 운영하는 산악휴양소에 보내 코진스키로 하여금 요양생활을 하도록 하게 한다. 그러다가 스키를 배우던 1947년 몹시 추운 어느 날 코진스키는 스키장에서 뜻밖의 사고를 겪어 두개골이 파열되는 중상을 입는다. 3주 동안 혼수상태에 빠져 있다가 기적적으로 살아나고, 우연히 언어기능을 다시 회복하여 말을 할 수 있게 된다. 정말로 감내하기 어려운 시련과 우연의 운명이었다.

제 2차 세계 대전이 끝나면서 폴란드에서 유대인을 대량 학살했던 나치정권은 물러갔지만 곧 이어 폴란드는 소련 스탈린의 통치를 받는 공산 위성국가가 되어 버린다. 스탈린식의 공산주의 체제를 확립하기 위한 공포의 숙청과 처형에 따른 무서운 탄압이 시작되고 폴란드에는 철의 장막에 갇혀 버린 공산주의 공포정치가 새롭게 등장한다.

코진스키는 1950년부터 1955년까지 로드즈 대학에서 역사와 정치학을 전공하여 두 개의 석사학위까지 받고 22세 때에 폴란드 육군에 입대하여 저격수로 복무한다. 제대 후 그는 본격적으로 소련에 관해 연구활동을 하고 마침내 폴란드 과학아카데미에서 교수생활을 하게 된다.

공산주의 이데올로기만 존재 할뿐 인간의 자유가 처참하게 말살되어 버린 공산주의 체제에 저항감을 갖게 된 젊은 코진스키는 공산당 사회에 요령 있게 적응하지 못한다. 공산당의 일상적인 집회 참석과 충성적인 행동, 강요적인 자아비판, 타인에 대한 감시와 공격에 소홀하다는 당과 청년동맹의 계속되는 견책과 비판을 감당해 내기 어려워 그는 공산주의 체제의 조국 폴란드를 탈출할 계획을 세운다.

코진스키는 자신의 이상적인 목적지인 미국으로 망명하기 위해 2년에 걸쳐 치밀한 준비를 한다. 미국으로 가는데 필요한 서류, 초청장, 재정보증서 등 필요한 모든 서류의 위조에 성공하여 24세가 되던 1957년 그는 마침내 미국으로 망명하는 운명을 맞이한다.

이처럼 목숨을 건 필사적인 모험 끝에 그는 미국 뉴욕에 도착하였고, 그로부터 그의 자유로운 인생이 새롭게 시작된다. 그러나 그에게 다가온 미국과 새로운 나라에서의 생활은 행복의 낙원이 아니었고 새로운 고난과 시련의 생활이었다. 한동안 미국 정부의 보호를 받기는 했지만 영어를 모르는 그는 당장의 생활비를 벌기 위해 닥치는 대로 일을 해야만 했다. 주차장 안내원, 트럭 임시운전사, 페인트 공, 청소부, 식당 종업원 등 그는 그야말로 미국 사회의 밑바닥 인생을 살면서 미국 자본주의 사회의 하층사회에 대한 적나라한 체험을 하게 된다.

1958년코진스키는 포드제단에 컬럼비아대학의 박사과정에서 공부할 수 있는 장학금을 신청하여 허락을 받는다. 미국에서 그는 점차 자유로운 삶을 누리기는 했지만 물질만능주의적인 미국사회의 많은 문제점을 발견하게 된다. 나치체제와 공산주의 체제의 처절한 체험을 겪은 코진스키는 새로운 미국생활의 체험과 더물어 자신의 인생체험을 진지하게 문학작품으로 표현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작가가 되려는 본격적인 준비에 들어간다.

1960년 Joseph Novak이라는 가명을 사용하여 첫 작품으로 ‘The Future Is Ours'라는 넌픽션을 발표한 코진스키는 1962년 두 번째로 ’No Third Path'라는 소련 공산주의 체제의 독재성을 비판하는 넌픽션을 발표한다.

코진스키의 작품을 읽고 호감을 느낀 철강 재벌 어네스트 웨어의 미망인 메리 웨어가 적극적으로 그에게 관심을 기울이며 교제를 하게 되어 두 사람은 1962년 마침내 결혼을 하게 되는데, 이 또한 그에게는 우연의 사건이다. 당시 메리는 40세였고 그는 29세였는데 부인인 재벌 미망인의 엄청난 재력에도 불구하고 코진스키는 화려한 상류생활을 피하고 부인에게 전적으로 의지하지 않는 소박한 생활을 고집했다. 그러나 우연의 행복을 즐기던 그들의 결혼생활은 4년 만에 파경을 맞고 메리는 2년 후 사망한다.

마침내 제2차 세계대전 동안 자신이 겪은 소년시절의 비극적인 체험을 생생하게 표현한 처녀작 ‘The Painted Bird'를 1965년 발표하여 코진스키는 미국에서 작가로서의 첫발을 내딛는다. 다행스럽게도 이 작품은 성공을 거두어 그 해 프랑스의 최우수 '외국소설상' 까지 받게 된다. 그의 두 번째 작품인 'Step' 은 1968년에 발표되었는데 이 작품은 미국 최고의 문학상인 'National Book Award'를 수상하여 코진스키는 소설가로서의 명성이 확고해진다.

여기 번역한 ‘Being There' 는 1971년 발표된 코진스키의 세 번째 작품으로 그가 미국에 망명하여 체험한 현대 미국사회의 매스컴의 위력과 미국 정치사회에 대한 작가로서의 느낌을 풍자적으로 표현한 작품이다. 그는 작가로서 인간사회는 역사적으로 종교와 정치제도 그리고 이데올로기에 너무 속박되어 왔다고 주장하면서, 오늘날 공산주의 체제이건 TV, 라디오, 신문 등 대중매체에 의해 국민 대중으로 하여금 선동적이고 획일적인 집단사고를 유발시켜 강요하는 현대사회의 모습을 코진스키는 통렬하게 풍자하고 있다.

1969년 8월 그는 친구인 폴랜스키와 샤론 데이트의 집에서 열리는 파티에 초대를 받았으나 LA로 가는 비행기를 놓치게 된다. 그런대 그 날 챨스 맨슨갱단은 샤론과 파티에 참석한 사람들을 총으로 무차별 학살하는 끔찍한 만행을 저질렀고 코진스키는 샤론집에 늦게 도착한 덕택에 우연히 목숨을 건진다. 그에게 있어서 인생은 너무도 우연의 연속이었던 것이다.

코진스키는 콜롬비아 대학에서 사회학 박사과정을 수료하여 예일대와 프린스턴대에서 교수 생활을 하기도 했다. 그는 1973년 ‘The Devil Tree' 1975년에 ’Cockpit', 1977년에 ‘Blind Date', 1979년에 ’Passion Play', 1982년에 ‘Pinball', 1988년에 ’The Hermit of 69Street'를 연속적으로 발표하여 작가로서의 충실한 창작활동을 하였다.

1989년 이후 코진스키는 소설보다 영화에 관심을 기울이게 된다. 그는 Warren Beatty의 소개로 ‘Reds'라는 영화에 소련군 장교로 출연하기도 했다. 그의 소설인 ’어느 정원사의 일생‘은 미국에서 영화화되어 대단한 인기를 끌기도 했다. 코진스키는 이 때 자신의 소설을 영화 각본으로 구성하여 1970년 미국 극작가협회와 영국영화 및 TV예술아카데미로부터 그 해의 최우수 영화각본상을 수상하기도 하였다.

자신의 자서전적 요소가 많은 그의 초기 작품들은 영어능력에 대한 일부 시비에도 불구하고 문단에서 좋은 평판을 받았고 일반 독자들에게서도 호평을 받았지만 그의 후기 작품들은 별로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그는 한동안 폴란드계 유태인들의 권익을 옹호하는 단체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다가 1973년부터 1975년까지 국제 PEN클럽 미국대표로 선출되어 활약하기도 했기 때문에 명실공히 미국 사회의 저명인사가 된 것이다. 이처럼 다재다능한 재능을 발휘하면서 사회 활동에도 적극적이었던 코진스키는 심장질환으로 고통을 겪다가 1991년 58세의 나이에 자택의 욕실에서 감행한 자살로 파란만장했던 그의 생애를 마감했다. 그가 그동안 이루어 놓은 사회적 명성 때문에 그의 자살은 미국 사회에 커다란 파문을 일으켰다. 그러나 사망 이후 포스트모던 작가로서의 그의 명성은 더욱더 높아가고 그의 작품에 대한 문학적 가치도 더욱 더 확고해지고 있다.



작품해설


이 작품을 읽으면 가장 먼저 연상되는 것이 헤밍웨이의 하드보일드 문체일 것이다. 왜냐하면 간결하고 평이한 문체에 상황을 설명하는 장황한 수식어가 절제된 표현양식을 보여 주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전통적 소설형식에서 벗어 난 자의적 표현 기법 때문에 일반 대중 독자가 읽고 이해하기 어려운 일부 포스트모더니스트 작가들의 다른 작품과 비교하면 대표적 포스트 모더니스트 작가중 하나인 코진스키의 「어느 정원사의 인생」은 독자가 읽기에 아주 평이한 느낌을 준다. 그렇다고 코진스키가 헤밍웨이의 모더니즘을 모방하거나 추종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이 작품에서 작가는 인간은 들판에 자라고 있는 식물처럼 이 세상에 우연히 태어난 존재라고 주장하고 인간과 식물은 외형적으로 성장해 가면서 질병과 죽음으로부터 자신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 누군가의 보살핌을 받아야 하는 필요성에서 상호 공통점을 지니고 있지만 인간은 생각하는 이성적 존재이기 때문에 결국 식물과는 다르다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은 우연의 세계를 생각하는 실존의 세계로 만들어 가는 존재이며 동시에 인간은 공동사회의 구성원으로 활동해야 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인간은 자유롭고 평화롭게 살아갈 수 있는 생존 환경과 사회의 보호가 필요한 존재이지만 개인적인 삶보다는 집단을 이루는 공통체 사회에서 인간은 항상 종교나 정치적 이데올로기의 지배를 받아 왔던 것이다. 교통 통신수단의 눈부신 발전으로 하나의 지구촌이 되어 버린 현대 사회에서도 대중매체인 신문, 방송, 컴퓨터통신은 이제 일반 국민을 움직이는 막강한 존재가 되어 버렸다.

외부 세계와 철저하게 차단된 철의 장막에 갇혀 있는 공산주의 체제도 대중매체인 매스컴은 국가가 독점하여 국민에게 공산주의 이데올로기를 선전하고 세뇌시켜 공산주의 체제를 지탱해 나가는 최고의 통신수단이었지만 자본주의 체제에서도 신문, TV등 대중매스컴은 일반 국민의식을 일방적으로 이끌어 감으로써 국민 대중을 교묘하게 수동적으로 통치체제 이끌려 가게하고 있다. 두 체제를 모두 생생하게 체험한 코진스키는 대중 매스컴과 정치체제의 상관관계에 대하여 작가의식으로 현대사회를 통렬하게 풍자하고 있다.

주인공 챈스는 그 이름이 ‘우연’을 뜻하는 것처럼 우연의 인생 속에 묻혀 있던 존재이다. 그는 아주 어린 시절부터 한 노인의 집에서 정원사로 일해 오면서 오직 정원 속에 갇혀 살아 왔기에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이라곤 정원일 뿐이다. 그는 현실세계와 단절된 채 자기 방에서 홀로 시청하는 TV화면을 통해 인간의 삶을 이해하고 있을 뿐이어서 이 세상에 실존하면서도 실제로 존재하지 않음이나 다름없는 어쩌면 비존재의 삶을 영위해 왔다.

그는 자신이 일하고 있는 정원-자신의 세계가 아주 안락하고 평화로운 곳으로 여겨 왔고 자신이 스스로 집밖으로 나가 본 적이 없었기에 그가 바깥 세계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오직 텔레비전을 통해 본 표면적인 사회의 허상뿐이었다. 그는 인간사회의 구성원답게 주의 사람들과 어울리며 생활하는 인생을 살아오지 않았기 때문에 인간사회의 리얼리티(reality)와 동떨어진 ‘무존재’의 삶을 영위해 온 하나의 공허한 존재이기도 했다.

그가 항상 외부 세계와 단절된 생활을 해 온 것은 공산주의 체제하의 그의 조국 폴랜드를 연상시킨다.

이러한 챈스의 인생에 새로운 변화가 닥쳐 온 것은 집 주인 노인의 죽임이다. 노인의 재산 관리인이었던 변호사는 챈스가 노인의 재산상속자로서 아무런 관계나 권리가 없다고 판정하여 아주 어린 시절부터 살아 온 노인의 집에서 챈스를 축출해 버린다. 다라서 챈스는 이제 전혀 낯선 실존의 세계 아니 새로운 체제의 세계로 들어 선 것이다.

새로운 세상으로 나선지 얼마 되지 않아 챈스는 우연히도 랜드부인의 고급 승용차에 부딪쳐서 부상을 입게 되자 우선 랜드부인의 집으로 이송된다. 미국의 대표적 기업가이며 대통령의 친구이기도 한 랜드씨와 그 부인은 노인이 입던 고급 옷차림과 잘 생긴 외무, 신분을 나타내는 아무런 소지품도 없는 챈스를 부유한 사업가로 단정하고 정원일에 관한 챈스의 정확한 의견 표현을 품위있고 뛰어난 정치적 비유로 오해하여 챈스를 아주 훌륭한 인물로 대우한다.

챈스 가드너란 이름이 랜드부인에 의해 ‘초온시 가디너’란 이름으로 바뀌어 진 이후 그는 새로운 인물로 탈바꿈된다. 마침 랜드씨 저택을 방문한 대통령과의 대화에서 그는 자신이 알고 있는 정원 일에 관해 솔직한 의견을 말했지만 대통령은 챈스의 말을 정치적 비유의 뜻이 숨겨 있는 재치 있는 방언으로 해석하여 자신의 연설문 속에 챈스의 말을 인용하자 매스컴에 일대 정치적 센세이션을 일으킨다. 따라서 챈스는 요란한 매스컴에 의해 갑자기 대통령 고문으로 부상하고 매스컴에 의한 정치적 스타가 되어 버린다. 마침내 챈스는 차기 부통령 후보로 추대된다.

챈스에게 새로운 삶의 터전이 된 활동 공간은 자본주의 체제를 상징하는 미국사회의 모형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가 겪는 상황은 현대 미국사회를 상징하는 것처럼 보인다. 챈스는 대중 매스컴이 좌우하는 현대사회의 현대판 영웅이 되지만 이는 하나의 허상에 불과할 뿐이다. 이처럼 현대 사회에서 대중 매스컴의 조종에 의해 좌우되는 미국 사회의 경박한 정치 풍토에 대해 작가는 신랄한 풍자로 자신의 작가의식을 나타내고 있다.

지금까지의 전통적인 소설의 플롯(plot)은 인생에서 발생하는 우연성을 배제하는 것으로 인간의 운명은 인과관계에 의해 개연성 있게 작가가 의도적으로 이끌어 갔던 것이다. 그러나 코진스키는 전통적인 소설 기법에 의한 플롯의 전개를 배제하고 인간의 운명을 조물주의 백일몽이라 할 수 있는 우연의 지배를 받는 존재로 부각시키면서 삶의 진수는 인생이란 드라마에서 우연히 겪게 되는 순간순간 속에 내재되어 있는 것이 아닐까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