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rallel poetics"를 직역하면 “병치시학,” “병렬시학”이 되겠지만, 그 의미의 개시성으로 보아 "後素詩學"으로 번역하는 것이 낫겠다. 後素는 後功, 餘白, 餘韻, 토운, 神話體系, 深層構造, 氷山技法(iceberg technic)이라는 유의어를 가지고 있는데, 어원적으로는 繪事後素와 素以爲絢, 素其位而行에 근거한다. 素는 文質彬彬의 質과 “素 猶見在也”의 보이는 것이 유예된 在, 그리고 “素富貴 行乎富貴”의 “어떤 처지에 놓이다”라는 뜻의 素이다. 鄭司農은 素란 회화의 質 즉 색채의 정신적 표현으로써 後功이라고 한다. 朱熹는 絢과 대비하여 보이지 않는 質이라고 한다. 예를 들면 四君子인 梅蘭菊竹은 絢이며 眞善美貞은 素, 즉 梅=善, 蘭=美, 菊=眞, 竹=貞이다. 그러나 이것도 보편성이므로 보다 더 개별성이 있는 것을 찾아야 할 것이다. 화가는 이 後素의 원리를 알아야 하고 이 원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자연의 진의를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後素는 老子의 “谷神의 玄牝”과 莊子의 “渾沌의 七竅” 또는 禪에서의 “見山祗是山”의 경지와도 통하는 것으로 보아도 될 것이다. (역주) * 鄭司農과 朱熹는 質과 素를 변별하지 않고 있어, 필자가 바로 잡았다. *鄭司農-鄭衆은 字가 仲師이며, 東漢時代에 河南開封人으로 경학가인 鄭興의 아들이다. 章帝때에 그는 大司農[財政業務를 管轄이란 관직을 지냈기 때문에, 경학가들은 모두 그를 鄭司農이라고 칭했다. 東漢末年에 이르자 鄭玄이라는 경학가가 출현하자 후인들은 이 두 사람을 구별하기 위해 鄭衆을 先鄭, 鄭玄을 後鄭이라고 불렀다. 그는「易」「詩」「三統曆」을 망라해서「春秋難記條例」라는 저작을 남겼는데 이는 당시에 매우 유명했던 책이었다. 그의 생평에 대해서는「後漢書, 鄭衆傳」을 참고.
後素의 美學
朱 根玉
(대전시단 창간호 1989. 12. 18)
금년에 상재된 두 분의 시집을 펼쳐놓고 보니 흐뭇하다.
任剛彬의 “조금은
쓸쓸하고 싶다”와 朴商一의
“이 계절이 가고나면”이
그것이다. 좋은 시를 만나는 즐거움.
돌멩이 골라내어 두어 평 밭을 일구다 들깨 모종을 하다 아기 손 바닥 만하게 건강하게 자라서 잎 사이사이 꽃가루에 다닥 피어 보일 듯 말 듯 부는 바람에 안간힘 쓰다 작아서 부끄러운가 더러는 일찍 그늘에 숨다 이 꽃보다 우리는 얼마나 작아 보이나 아직은 따가운 햇볕 공터 언저리 하얀 들깨 꽃 잔잔한 외로움 ―들깨 꽃, 任剛彬
任剛彬의
시는 개성적이다. 그렇다면 그는 로맨티스트인가? 이
물음에 답하기 위해 그의 시를 하나씩 헤쳐 볼 필요가 있다. 우선 눈에 띄는 제목부터 보면 ‘들’ ‘깨’
‘꽃’과 같이 더 이상 어휘적 의미를 지닌 말로 분석할 수 없는데,
말하자면 3가지 조어성분으로 이루어진 합성어라고 볼 수 있다.
이 단어에는 접두사나 접미사가 덧붙어 있지 않으므로 복합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단어의 구성상으로
본 것이고, 여기에 음운까지 언급하게 되면 시니피앙의 분석이 되는 것이니 질문의 핵심을 벗어나는 것이 되겠으므로 시니피에의 영역으로 넘어가기로 한다.
‘꽃’이라는 의미는 ‘깨’와 그 밖의 꽃들을 포함하고,
깨꽃은 다시 “들깨 꽃”과 “참깨 꽃”을 포함한다. 여기서 깨꽃과 그 밖의 꽃들은 꽃의 하위성분이 되고 들깨 꽃과 참깨 꽃은 깨꽃의 하위성분이 된다. 언어는 상위개념이 될수록 내포적 영역은 크지만 지시성은 약해지는데, 최하위의
단계까지 내려가면 언어는 없어지고 사물만 남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의 계층적 대립관계를 코르지브스키(A.
Korzybski)는 추상의 사닥다리(abstract ladder)로 나타내고,
의미를 설명하는 경우에는 되도록 추상의 단계를 한 단계씩 낮추어 줄 것을 요구한다. ‘깨꽃’의 의미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들깨 꽃이나 참깨 꽃 따위를 열거하는 것이 바람직하며 그 반대로 올라가서 식물의 일종이라고 답하면 오히려 개념을 막연하고 흐리게 할 뿐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그는 정확한 하위어의 구사를 선호하는 듯하다. 다음으로 이들 언어의 배치상황을
살펴보자. “밭―깻잎―꽃자루―깨꽃”과 같이 형체가 큰 것으로부터 차츰 작은 형체로 시선이 옮겨짐을 살필 수 있다. 이는
자아를 초월하려는 원심적 세계관보다는 자아를 지상의 현세에 묶어두려는 구심적 세계관이 그를 지배하고 있는 듯하다. 그렇다면 그는 자아를 비인간화하여 객관적 상관물로 제시하고 있는 것이겠으므로 모더니스트에 더 가깝지 않겠는가? 엘리어트(T. S. Eliot)에
의하면, 시는 정서적 방출이 아니라 정서로부터의 도피이며 그것은 개성의 표현이 아니고 개성으로부터의 도피라고 한 말에 덧붙여 예술가의 진보란 끊임없는 자기희생이요 끊임없는 개성몰각이라고 하였으니,
任剛彬의 시는 몰개성적인가? 그의 내면 깊이 숨겨져 있는 이기호발(理氣互發)의 사상을 은밀히 가슴 두근거리며 훔쳐보는 즐거움을 아는 이는 알까?
아이들이 소풍을 갑니다. 고무풍선 같이 들뜬 마음들이 철둑길을 걸어서 봄소풍을 갑니다.
손에 손을 잡고 선생님을 따라 등에는 과자와 먹을 것 엄마가 싸준 점심밥이 유난히 따수하기만 합니다. 물기 오른 나뭇가지 파릇한 이파리마다 햇살이 가득 힘을 줍니다.
근심 모르는 아이들 속으로 뻐꾸기 울음소리가 함께 흘러갑니다. ―뻐꾸기 울음소리, 朴商一
朴商一의
시를 읽고 있노라면 리차즈(I. A. Richards)의 포괄의 이론이 떠오른다. 朴商一은 우리의 내적 감정과 객관적 실재의 속성간의 부당한 연관을 맺도록 하는 물활론적 습성을 알소하고 있다. 미적
경험이나 미적 정서 같은 특수한 정신활동이 별도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일상 체험 속에서 얻은 경험이나 예술작품 속에 함께 융해되어 그것이 더 나아가 공감각에 의해 성취된다는 확신을 보여준다. 공감각은 자극과 균형의 조화인바 여기에서
포괄의 이론이 도출된다. 경험이 포괄, 곧
통합에 의한 체계화가 이루어질 때 안정된 최고의 시가 이룩되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그의 시는 아이들,
풍선, 철둑길,
등, 과자,
점심밥, 햇살 등의 언어를 한 공간에 모아놓고 서로 부딪게 하다가 뻐꾸기 울음소리로 포괄하는 고도의
은유를 구사하고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시각에서 시각으로 반복해서 전이시키다가 마지막으로 사물을 의외의 청각으로 전이시키면서 任剛彬처럼 그 또한 객관을 주관 속으로 받아들인다. 화해의 순간이다.
만만치 않은 내면의 세계를 그는 살며시 내뵈고 있는 것이다.
참고자료 구조의미론(Structural Semantics); A.J.Greimas/주근옥 역 의미론선집(On Meaning); A.J.Greimas/주근옥 역 정념의 기호학(The Semiotics of Passions); A.J.Greimas, Jacques Fontanille/주근옥 역
한국 현대시사에 대한 철학적 고찰의 빛나는 성과_장수익(한남대 국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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