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形の變遷と昭和詩風槪說
(한맥문학 통권 제353호, 2020. 01. 25)
하기와라 사쿠타로우(萩原朔太郞, はぎわら さくたろう) 주근옥 역 현대시(신일본시)의 발생이래, 최근에 이르기까지의 변천사에 있어서는, 앞의 서문에서 말했지만, 거듭 이것을 시형의 變轉으로 고증하려면, 다음 표와 같이, 대체로 六期의 중요한 사건이 있었던 시대(epoch)를 경과하고 있다.
(1)의 定律詩는, 5⦁7조와 7⦁5조의 정율을 규칙 바르게 지켰던 純正 운문시로서, 메이지(明治, 1868〜1912) 개명기의 군가, 가요류로부터 일어나, 메이지(明治) 중엽의 로맨티시즘의 신타이시(新體詩) 시대까지 유행했다. 그 대표적인 시인은 시마자키 토우송(島崎藤村, しまざき とうそん, 1872〜1943, 시인, 소설가), 도이 반스이(土井晩翠, どい ばんすい, 1871〜1952, 시인, 영문학자), 요코세 야우(橫瀨夜雨, よこせ やう, 1878〜1934, 시인) 등이었다. (2)의 破調 定律詩는, (1)의 신타이시가 약간 불규칙적으로 파조를 섞어서, 운율적으로 얼마간 복잡하게 되었던 것으로, 다음에 오는 文語 자유시의 선구가 되고 있다. 이 시형의 창시자는, 스스키다 큐우킨(薄田泣菫, すすきだ きゅうきん, 1877〜1945, 시인), 칸바라 아리아케(蒲原有明, かんばら ありあけ, 1876〜1952, 시인) 등이었다. (3)의 不定律)는 즉 “文語 자유시”이고, 메이지(明治) 말기부터 타이쇼우(大正, 1912〜1926) 초년에 걸쳐, 일본의 시단을 독점했던 소위 상징파의 시라고 칭하는 것이지만, 대체로 모두가 이 不定律詩로 쓰여졌다. 이 세대의 대표자는, 키타하라 하쿠슈우(北原白秋, きたはら はくしゅう, 1885〜1942, 시인, 歌人), 미키 로후우(三木露風, みき ろふう, 1889〜1964, 시인) 등의 시인이었지만, 조금 늦게 나온 히나쓰 코우노스케(日夏耿之介, ひなつ こうのすけ, 1890〜1971, 시인, 영문학자), 사이죠우 야소(西條八十, さいじょう やそ, 1892〜1970, 시인), 호리구치 다이가쿠(堀口大學, ほりぐち だいがく, 1892〜1981 시인), 사토우 하루오(佐藤春夫, さとう はるお, 1892〜1964, 시인, 소설가) 등도, 때때로 이 문어 자유시를 사용했다. 이 상징파를 일기(一期)로 해서, 일본의 시단은 文語와 결별하고, 이후는 오로지 口語를 사용하고, 소설과 마찬가지로 언문일치를 사용하게 되었다. 그러나 口語詩는, 그 이전에도 일찍이 일부에서 試作되었었지만, 그들은 흔히 7⦁5조 등의 定律 口語詩였고, 혹은 文語로 된 시의 일부분을 부자연스럽게 口語化한 것 같은 것이었다. 진짜 일상 구어로서, 진짜 口語體의 자유시가 만들어진 것은 타이쇼우(大正) 중기 이후의 시단이고, 그 선구자는 카와지 류코우(川路柳虹, かわじ りゅうこう, 1888〜1959, 시인), 후쿠시 코우지로우(福土幸次郞, ふくし こうじろう, 1889〜1946, 시인), 야마무라 보쵸우(山村暮鳥, やまむら ぼちょう, 1884〜1924 시인), 무로우 사이세이(室生犀星, むろう さいせい, 1889〜1962 시인, 소설가), 센게 모토마로(千家元麿, せんげ もとまろ, 1888〜1948, 시인), 타카무라 코우타로우(高村光太郞, たかむら こうたろう, 1883〜1956, 조각가, 시인), 하기와라 사쿠타로우(萩原朔太郞, はぎわら さくたろう, 시인, 1886〜1942) 등의 시인이었다. (실제 이 시대에 있어서 자유시라고 칭하는 것은, 단순히 보통의 산문을 실행했던 것으로서, 인쇄의 체제상으로부터, 겨우 시의 체면을 유지하는 정도 같은 것이 적지 않았다) 시가 이렇게 비예술적으로 떨어진 것은, 앞의 서문에 쓴 바와 같이, 민중파 이래의 잘못된 자유주의가, 타이쇼우(大正) 연대의 스스로 추락한 사회 사조에 편승해서, 시단의 저널리즘으로 횡행했었기 때문이랄 수밖에 없다. 이 점에 대한 반동은, 과거에 계몽운동이라 하는 것으로서 신흥 쇼우와(昭和, 1927〜1989) 시단의 초두에 부르짖었다. 이 표어는 “시를 올바른 예술로 되돌려라.”라고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 표어에는 내용과 형용상의 것, 양면의 요구가 함축되어 있다. 즉 내용상의 이데올로기로서는 앞의 서문에서 말했던 바와 같이 문학을 정치운동으로부터 단절하고, 사회주의를 위한 도구가 아니고, 예술을 위한 예술로서, 본래의 문학으로 되돌려 놓으라고 하는 부르짖음이며, 문단에 대해서는 르네상스의 조류와 호응해서, 일본 로맨티시즘 등의 시인들이 최초로 과거에 열심히 이것을 부르짖었다. 그러나 로맨티시즘 이외의 시단인은, 오히려 형식의 문제에 열심이었고, 자유시의 산문적 해체를 구하기 위하여, 새로운 시형을 발견하기 위하여 초조하였다. 그들은 과거의 “지나친 자유주의”에 대한 반동으로서, 당연히 스토아주의적(Stoic)인 고전주의(classicism)로 기울었다. 그런데도 고전주의의 본질은, 원래 주지적인 것이므로, 이점에 쇼우와(昭和) 시단의 새로운 시형은, 자연히 일정의 이데올로기로 범주가 붙여졌다. 즉 소위 “형식주의”라고 하는 “新散文詩”라고 하는 “주지주의”라고 하는 “구성주의”라고 하는, 혹은 “초현실파”라고 하는, 대체로 쇼우와(昭和) 시단의 시학이, 제출했던 것은, 과거의 자유주의에 대한 반동으로서 이고, 본질의 정신에 있어서 스토아주의의 것(따라서 또 주지주의적, 형식주의적 경향의 것)이었다. 일반적으로 시대에 속하는 문예사조는, 말할 것도 없이 시대의 사회 사조를 반영한다. 전의 타이쇼우(大正) 시대의 자유시가, 당시의 사회 사조를 반영했던 것처럼,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은 쇼우와(昭和) 시단의 신시형이며 신주장도 물론 이 시대의 새로운 사회 사조를 반영했던 것이랄 수밖에 없다. 즉 일본의 사회 정세는 이 쇼우와(昭和) 7, 8년이래, 점점 종전의 무궤도적 자유주의를 혐오해서, 보다 스토아주의적 정신을 불러일으키고, 질서와 법칙의 로고스적인 건설의식을 향해 왔던 것이다. 그래서 때마침 시인의 예언자적 감수성이 민감하게도 그 시회 사조를 예감했다고 하는 것이었다. 위에 언급한 표에 의해서, (6)의 쇼우와(昭和) 시단을 “신형식시시대”라고 불렀던 것은 이 때문이다. 형식주의라고 하는 말은, 포말리즘(formalism) 또는 클래시시즘(classicism)이라고 하는 말의 번역이고, 자유주의에 대해서, 스토아주의적인 규범주의를 가리키고 있다. 그 때문에 시단의 일부에서는 전대의 산문적인 구어시를 가리켜 ‘자유시’라 부르고, 특히 쇼우와(昭和)의 신흥시와 구별하도록 하고 있는 사람이 있지만, 이 언어상의 구분법은 타당하지 않다. 왜냐하면 신흥 시단의 시라고 하더라도, 역시 일종의 산문시, 혹은 구어 자유시이고, 별도로 규약이 붙여진 운율형식에 의한 것도 아니며, 그 점 전대의 시와 다른 점은 없기 때문이다. 다만 약간 다른 점은 표현정신의 본질에 있어서, 전자가 무절조한 자유주의적 자유시임에 반해, 후자가 예술적 절조의 규범과 형식을 이 뜻에 따라서 이념화하고 있는 것으로서, 이른바 후자의 형식주의적 자유시와 전자는 다른 것이다. 편자가 후자를 “신형식시시대”라고 이름을 붙인 의도 또한 이점에 있는 것이다. 초래했던 쇼우와(昭和) 시단의 시의 조류는 서로 조금씩 그 모티브를 다르게 하는 것으로서, 두 부류의 대표적인 시인 군에 있어서 제창되었다. 즉 그 한쪽의 주장으로는 시를 純正詩의 서정시로 돌려보내야만 하고, 리릭(liric)의 본질이라고 할 만한 음악성의 충만함(그리고 그것을 위한 운율형식의 요구)이 주장되었다. 다른 한쪽의 시인 군으로부터는 시를 완전히 운율로부터 해방시켜, 산문형체의 문장 가운데, 미의 새로운 형상적 형식을 구성하도록 의도되었다. 전자는 즉 신 로맨티시스트(일본 로맨티시스트)의 주장이고, 후자는 즉 초현실파와 신 산문시파의 운동이었다. 그러나 이 양파가 모순관계였던 시운동은, 요컨대 그 본질 정신에 있어서는 결국 같은 미의식의 회복(상실되었던 예술성으로의 르네상스)이라고 하는, 공통의 일원적 이념으로 묶여지고 말았던 것이다. 그래서 바로 이 일원적 이념은 쇼우와(昭和) 신흥시단이 추구했던 최초의 필연적인 모럴이었다. 결국 시에 있어서 일체의 표현 양심은 참으로 ‘美意識’의 소유라고 하는 한 가지 일에 이르는 것이다. 시가 숭고한 예술적 미의식을 상실할 때, 그것은 필연적으로 산문화 하고, 문학의 지평선 아래에 매몰되고 만다. 시가 소설 등의 산문학과 구별되고, 본질상으로 운율을 요구하기도 하고, 특수한 형식을 약속하기도 하고, 말의 인상적인 미적 감성을 필수로 하는 것은, 시라고 하는 문학 그것이, 본래 다른 산문학과 다른 것으로서, 고귀한 미의식과 예술성과를, 본질상의 에스프리화 하기 때문에 이랄 수밖에 없다. 시에 있어서 이 에스프리를 없애는 것은, 이제 시라고 하여야만 하는 문학이 아니고, 시인에 있어서 그 미의식을 갖지 못하는 것은, 실로 시인이라 할 수 없는 것이다. 그 로맨티시스트들의 시운동도, 이른바 초현실주의파와 신 산문시파의 시운동도, 요컨대 하나의 계몽운동이며, 타이쇼우(大正) 이래의 혼란했던 일본시단이 확실히 상실했던 “시의 양심”과 “시인의 모럴”을, 엄격하게 큰 소리로 꾸짖었던 것이랄 수밖에 없다. 이 의미에 있어서 쇼우와(昭和) 시단은 문학상의 윤리학적 명제를 등에 짊어진 것이다. 예술시 부흥시대의 쇼우와(昭和) 시풍과, 전대 자유주의 시대의 시풍이 서로 다름은 본서에 편집했던 각 작가의 시를 통하여 보아도, 대체로 구체적으로 분명해 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서문에서 단정한바와 같이, 본서에 편집했던 시인 중에는, 최근 예술시대의 쇼우와(昭和) 시인과 전대 사회주의 시대의 시인이 섞여있지만, 그 각각의 작가에 있어서, 시풍의 시대적인 변이를 이해하는 것이다. 즉 2, 3의 예외를 제하고 말하면, 일반적으로 가까운 시대의 시는, 전대의 것에 비해 형식주의적이고, 표현의 정신에 있어서 엄격주의적이다. ―(「昭和詩鈔」 쇼우와(昭和) 15. 3=1940. 3.) 각주 1. 萩原朔太郎(はぎわら さくたろう, 1886∼1942): 일본의 詩人, 評論家. 大正時代에 近代詩의 새로운 地平을 개척한 “日本 近代詩의 아버지”라 불리고 있다. 代表作 「月に吠える」(1917) 「青猫」(1923) 「純情小曲集」(1925) 「氷島」(1934年) 「猫町」(1935, 小説) 受賞 제8회 文学界賞(1936) 제4회 透谷文学賞(1940) 2. “新散文詩への 道(키타가와 후유히코, 北川冬彦, きたがわ ふゆひこ), 安田保雄•木林勝夫•송井利彦 편집, 「近代文學評論大系 8 詩論•歌論•俳論」(東京: 昭和 48=1973 초판, 昭和 57=1982 4판), pp. 173〜175.”을 보라. 3. 安田保雄⦁木林勝夫⦁㩳井利彦 편집, 「近代文學評論大系 8 詩論⦁歌論•俳論」(東京: 昭和 48=1973 초판, 昭和 57=1982 4판), pp. 217〜220.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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