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니카와 데츠조우(谷川徹三)에게 있어서, 혼미가 극에 달했던 형식주의 논쟁이 정확한 출발점에 들어가는 정리가 된 것이지만, 정리가 마무리됨과 동시에, 형식논쟁 그것이 종식되었는가의 의문점(觀)을 나타낸 것은, 이유가 없는 것 또한 아니다.

(계간 한국시학, 통권3호, 2005 여름호, 2005. 6.1)

 

우스이 요시미(臼井吉見) / 주근옥 역

 

프롤레타리아 문학에 있어서의 형식의 탐구

쿠라하라 코레히토(蔵原惟人, 1902~1991, 문예평론가)의 『예술운동이 당면한 긴급문제』(『戰旗』 쇼우와[昭和] 3년[1928] 8월호)의 후반은, 나카노 시게하루(中野重治, 1902~1979, 시인·소설가)의 『이른바 예술대중화론의 잘못에 대해서』의 비판이 있었고, 동시에, 그 전반의 카지 와타루(鹿地亘, 1903~1982, 소설가)의 『소시민성의 설침에 저항해서』의 비판에 향해진 것에 대해서는, 이미 언급했던 대로이다. 후자에 있어서는, 예술의 기술(技術)은 어디에서 오는가하는 문제에 관해서였다. 카지 와타루(鹿地亘)의 의견이라고 하는 것은 이렇다.

 

우리의 기술(技術)은, 과거의 사회가 구축한 기술(技術)의 체계로 인해 치환되는 것을 결코 허용하지 않는다. 과거의 사회에 있어서 감정의 조직화에 봉사했던 기술(技術)이, 어떠한 감정의 조직화에만 가장 적당하게 형성되어 있다는 것은 자명하다.

 

이는 과거의 기술(技術)에 대한 전면적인 부정론밖에 되지 않는다. 그러면, 프롤레타리아 예술의 기술(技術)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카지 와타루(鹿地亘)는 계속해서 언급한다.

 

우리의 기술(技術)은 프롤레타리아와 함께 앞으로 나아가는 도중 프롤레타리아의 성장과 함께 성장한다. 따라서 우리의 기술(技術)은 지금 프롤레타리아로 진입하는 것에 의해서 가장 합리적으로 해결된다. 대중 속으로 진입하는 것에 의해서 대중의 의욕을 알고, 대중의 의욕을 아는 것에 의해서 대중 속으로 진입하는 기술(技術)을 알 수가 있다.

 

대중의 의욕을 알게 됨으로써, 프롤레타리아 예술의 기술(技術)은 마치 자연발생적인 것을 가져온다고 하는 것 같은 카지 와타루(鹿地亘)의 의견에, 쿠라하라 코레히토(蔵原惟人)는 당연히 반대했다.

 

우리는 우선 첫 번째로, 과거의 인류가 축적했던 예술적 기술(技術)을 프롤레타리아의 견지에서 비판적으로 수용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는 감히 언급할 것이다. ―과거의 유산을 없애고서 프롤레타리아 예술은 있을 수 없다고.

 

게다가 계속해서 다음과 같이 논단했던 것이다.

 

예술은 이데올로기인 동시에 기술(技術)이다. 내용인 동시에 형식이다. 그래서 형식이 내용에 의해 결정될 수 있는 것이 사실이라면, 그 형식이 내용으로부터 자연발생적으로 생겨나지 않는 것도 사실이다. 예술작품의 형식은 새로운 내용에 의해 결정되었던 과거의 형식이 발전하는 것으로만 발생한다. ―그것이 마르크시즘의 견지에서 본 유일의 정확한 예술 발달의 법칙이다. 이것도 이해하지 못하고서, 예술운동이란 어떤 것이라고 철저하게 조사하여 밝혀낼 수 있겠는가.

 

또, 예술의 대중화에 대해 이루어졌던 쿠라하라 코레히토(蔵原惟人)와 나카노 시게하루(中野重治)의 논쟁은 나카노 시게하루(中野重治)의 『해결된 문제와 새로운 일』(『戰旗』 쇼우와[昭和] 3년[1928] 11월호)에서, 중단되고 말았지만, 이 논문에서 나카노 시게하루(中野重治)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예술을 대중화하기 위하여 여러 가지 방법을 강구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는 점으로서는 문제가 여전히 남아있다. 그래서 이것은 주로 형식의 탐구에 전념하여 철저히 밝혀내는 것이지만, 이것이 이후 우리가 착수해야만 하는 큰 문제가 되는 것이다.

 

요코미츠 리이치(橫光利一)의 공격

그렇지만, 「형식의 탐구」가 계속 프롤레타리아 문학에서 착수되기 전에, 제3자의 입장에서, 이것을 유일절호의 문제로서, 역으로 프롤레타리아 문학의 이론에 대항하려는 것이 요코미츠 리이치(橫光利一)였다.

요코미츠 리이치(橫光利一)는 쇼우와(昭和) 3년[1928] 11월호 『文藝春秋』의 『文藝時評』에서, 히라바야시 타이코(平林たい子, 1905~1972, 소설가) 작 『구타하다(毆る)』를 예로 들었다. 이것은 동년 10월호 『改造』에 발표되었던 것. 빈농에서 태어난 처녀를 주인공으로 해서, 남자는 여자를 구타하기 위하여 태어나고, 여자는 남자에게 구타당하기 위하여 태어나는 것인가 하고 생각할 정도로 가난 때문에 처와 딸을 구타하고, 아비와 남편에게 구타당하는 사회의 일면을 생동감 있게 묘사해내고 있다. 요코미츠 리이치(橫光利一)에 의하면, 이 작품에 나타나고 있는 작자의 인생관은 고풍스럽고 평범한 것에 지나지 않는데도, 강력한 역동감을 갖고 독자에게 다가오는 것은, 「작자 히라바야시 타이코(平林たい子)씨의 예술적 표현이 형식주의에 침입(侵入)해왔기 때문이다」라고 하는 것이다. 따라서 「히라바야시 하츠노스케(平林初之輔, 1892~1931, 평론가)」씨와 쿠라하라 코레히토(蔵原惟人) 씨가 언급한 것처럼, 내용이 형식을 결정한다고 하는 이론은, 이 작품에서 완전히 전복되어 적용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이다.

『구타하다(毆る)』로부터 얻게 된, 즉 문득 떠오른 생각은, 요코미츠 리이치(橫光利一)의 언급 가운데서, 갑자기 한 생각이 강렬하게 일어나 독자적인 이론과 변화된 오덕(五德, 유교에서 말하는 온화·양순·공손·검소·겸양), 작품의 평으로부터 일전(一轉)하여 히라바야시 하츠노스케(平林初之輔)와 쿠라하라 코레히토(蔵原惟人)의 형식이론에 대한, 과감한 공격으로 이동해갔다.

 

루나차르스키(Anatori Vasil'evich Lunacharski)의 형식론을 둘러싸고

프롤레타리아 문학에 있어서 예술대중화에 관한 논쟁이, 형식의 문제로 좁혀진 것은, 동년 9월호의 『戰旗』에 번역 게재된 루나차르스키(Anatori Vasil'evich Lunacharski)의 『마르크시즘 문예비평의 임무에 관한 테제』의 시사에 의한 것이었다. 이 논문이 계기가 되어, 히라바야시 하츠노스케(平林初之輔)의 마르크시즘 문학론에 대한 2원론적 회의가, 확실하게 표명되었던 사정에 있어서는 기왕에 언급한대로이다. 즉, 『문예비평가의 임무에 대해서』(『新潮』 쇼우와[昭和] 3년[1928] 10월호)라고 하는 글이 이것이지만, 그 언급 중에서, 히라바야시 하츠노스케(平林初之輔)는 루나차르스키(Anatori Vasil'evich Lunacharski)의 형식론에 대해서도, 또 약간의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형식에 대한 루나차르스키(Anatori Vasil'evich Lunacharski)의 의견이라고 하는 것은 간단명료하다.

 

내용은 자신으로부터 일정한 형식을 향해 노력한다. 이른바 부여되고 있는 내용에는 단지 하나의 최후의 형식만이 적응한다고 할 수 있다. 작가는 많든 적든 그를 감동케 하는 사상, 현상 및 감정을 좀더 명쾌하게 나타내고, 그 작품을 당연시하고 있는 경우의 독자에게 좀더 강한 인상을 부여하는 것과 같은 표현형식을 발견할 수 있다.

 

결국, 형식은 내용에 최대한으로 적응해서, 그것에 최대의 표현력을 부여하고, 그 작품을 당연시하고 있는 경우의 독자의 범위에 가장 강한 영향을 부여하는 것과 같은 형식을 발견하게 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히라바야시 하츠노스케(平林初之輔)에 의하면, 이것은 매우 자연적이지만, 문제는 어느 작품이 제작될 때, 여기서 보면 독자의 범위가 사전에 작자에 있어서 예상되고 한정되어 있지 않으면 안 되는 것과 같이 보이는 경우가 있다. 즉, 같은 내용을, 예상되는 독자에 걸맞게 다른 형식으로 표현하는 것이 필요하게 되지만, 이것은, 어느 내용이 필연적으로 일정한 형식을 요구한다고 하는, 전반의 명제와 모순이 된다. 이곳에 루나차르스키(Anatori Vasil'evich Lunacharski)의 「예술가의 기질(temperament)과 정치가의 융통성이 분열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는 것이, 히라바야시 하츠노스케(平林初之輔)의 회의적 의견인 것이다. 히라바야시 하츠노스케(平林初之輔)는 계속해서 언급하고 있다.

 

형식의 독자성에 대한 주장은, 내용의 독자성이 필연적으로 형식의 독자성을 요구하는 것이므로 여기서 논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자명한 진리이다. 따라서 형식의 경화(硬化) 및 형식을 구사(驅使)하는 능력의 빈약 등이, 작자의 중대한 결점인 것은 물론이다. 그와 동시에 일부러 형식의 신기를 밝게 했던 말은 형식이 내용에 선행하는 것도 경계하지 않으면 안 된다. 내용과 형식은 결코 분리되어서는 안 된다.

 

형식에 대한 요코미츠 리이치(橫光利一)의 독단

전에 있었던 요코미츠 리이치(橫光利一)의 견해는, 히라바야시 하츠노스케(平林初之輔)의 후반에 언급한 말을 받아들여 공격한 것이었다. 「형식이 내용에 선행한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요코미츠 리이치(橫光利一)에 의하면, 형식이라고 하는 것은 「리듬을 갖고 있는 의미를 통한 문자의 나열」에 지나지 않는다. 문자의 나열로 만들어진 형식을 없애고 내용이 있을 수 있을 리 없고, 따라서 「형식이 내용에 선행한다」는 것은 전혀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즉, 히라바야시 하츠노스케(平林初之輔)가 언급하고 있는 내용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을 쓸 것인가 이며, 무엇이 쓰일 것인가가 아니다. 「무엇이 쓰일 것인가는 형식을 통해서 볼 수 있는 독자의 환상」이라고 하는 것이다. 「리듬을 갖고 있다」고 하는 조건이 왜 필수적인 것일까, 발견할 수는 없지만, 이정도, 혹시 이것 이상의 애매와 독단은, 요코미츠 리이치(橫光利一)의 이후의 이론에 속출하고 있는 것이다.

어쨌든, 「의미를 통한 문자의 나열」과 요코미츠 리이치(橫光利一)가 언급한 것은, 이 경우, 문학의 형식으로서도 아무 것도 없고, 작품 그것을 의미하는 것 이외는 없으며, 「형식을 통해서 볼 수 있는 독자의 환상」이라고 하는 것은, 내용으로서도 아무 것도 없으며, 독자의 인상에 지나지 않을 정도의 것은, 자명하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렇지만 요코미츠 리이치(橫光利一)는 게다가 계속하고 있다.

 

내가 한 마디 하겠다. 여기에 히라바야시 하츠노스케(平林初之輔)라고 하는 이름을 취한다. 혹시 이 이름의 첫머리의 한 자인 「平」을 「山」과 바꾸어보자. 곧, 히라바야시 하츠노스케(平林初之輔)는 야마바야시 하츠노스케(山林初之輔)로 변형된다. 좌우지간, 이미 이 야마바야시 하츠노스케(山林初之輔)는 결코 훌륭한 비평가 히라바야시 하츠노스케(平林初之輔)가 아닌 것이다. 즉, 문자 하나가 쓴 오득(悟得)의 내용을 변형한다고 하는 것은 전부 형식이 내용을 결정한다고 하는 현실상의 사실이다.

 

요코미츠 리이치(橫光利一)는 결코 농담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자기 딴은 아주 진지한 모양인 것이다. 그 진지함으로 다음은 쿠라하라 코레히토(蔵原惟人)를 향해 비판을 하고 있다.

 

원래 유물론은 객관으로서 주관이 발동한다고 하는 원칙을 갖고 있다. 그렇지만 마르크시즘의 문학이론은 형식이 내용에 의해 결정된다고 단정한다. 문학의 형식이라고 하는 것은 문자의 나열이다. 문자의 나열이라고 하는 것은 문자 그것이 용적(容積)을 갖고 있는 물체이므로 객관물의 나열이다. 객관이 있어 주관이 발동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즉, 문학의 형식이 문학의 주관을 결정한다고 하는 것은 당연하지 않은가. 주관이라고 하는 것은 객관으로부터 만들어진 형식이 독자에게 부여하는 환상으로서 이미 앞에서 언급했다. 거기서 쿠라하라 코레히토(蔵原惟人)씨 이 우수한 마르크시스트는 마르크시즘의 원칙인 유물론에 일대 혁명을 부여했던 것이다. 가라사대, 「주관이 객관을 결정한다」고.

 

다시 말해서 그 마르크스를 통해서 완전하게 칸트의 유심론에 예배를 한 것은, 1928년 8월의 『戰旗』에서였다.

1928년 8월의 『戰旗』에는 『예술운동이 당면한 긴급문제』가 게재되어 있었으며, 요코미츠 리이치(橫光利一)가 여기서 비판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 것은 앞에서 언급한 「예술은 이데올로기임과 동시에 기술(技術)이다. 내용임과 동시에 형식이다. 그리고 형식이 내용으로부터 결정된다고 하는 것이 사실이라고 한다면, 그 형식이 내용으로부터 자연발생적으로 태어나는 것도 사실이다」든가, 「예술작품의 형식은 새로운 내용에 의해 결정되는 과거의 형식의 발전으로서만 발전한다. ―그것이 마르크시즘의 견지로부터 본 유일의 정확한 예술발달의 법칙인 것이다」든가, 라고 언급했던 그것이다.

요코미츠 리이치(橫光利一)의 쿠라하라 코레히토(蔵原惟人)에 대한 비판을 보면, 형식이라고 하는 것은 「리듬을 갖고 있는, 의미를 통한 문자의 나열」이라고 규정된 경우인 것이지만, 이번은 「문자 그것이 용적(容積)을 갖고 있는 물체이므로 객관물의 나열」이라고 하는 비약적인 질적 변경이 행해지고 있는 것이다. 말의 의미가 문자 또는 활자 그것에 치환되고 또는 혼동되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그곳으로부터 형식이 객관으로, 내용이 주관이라고 하는 독단적인 치환으로까지 발전하고 있는 것이다.

어쨌든 신감각파인 한 유파의 대표격, 소장기예(小壯氣銳)의 혁신적 문학자의 일인자로 불려지고 있지만, 이러한 생각의 비약적인 비논리보다 오히려 반논리를 우롱하고 있는 것에, 지금에 와서는 의아하게 여기는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리고 유치하고 비약적인 사고력을 비웃기 전에 일종의 경이를 느끼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이것은 요코미츠 리이치(橫光利一)라고 하는 개성적인 작가에게만 한정된 것은 아니고, 요코미츠 리이치(橫光利一)로 대표하는 신감각파의 작가들에 있어서, 왁자지껄하게 논의된 형식주의문학론의 전체의 성격이, 실은 그런 것일 것이다. 요코미츠 리이치(橫光利一)가 상징적으로 지금까지 그것을 대표하고 있다고 보아야만 할 것이다. 이러한 것은 그들의 문학상의 임무가 어떤 성질의 것이었던가, 프롤레타리아 문학운동의 급격한 진출을 선두로 해서, 그들이 이것에 대항하고, 자신을 주장하기에 이르기까지 무엇이 있었던가를 이정도로 명료하게 언급하는 것은 아니다. 다음의 요코미츠 리이치(橫光利一)의 소리 높여 언급하는 것 등은 그것을 노골적으로까지 증명하고 있는 것일 것이다.

 

마르크시즘 문학의 새로운 항로는 자연발생론으로부터 목적의식문학으로의 도달까지, 게다가 선전문학으로부터 예술문학으로 흘러가고, 예술문학으로부터 대중문학으로, 좌우지간, 최후의 난관(難關)이 된 형식론으로 올라탔다. 그렇지만 마르크시즘의 문학은 여기서 처음으로, 이로부터 분파한 것으로 일컫는 부르주아 문학과 가장 최초의, 게다가 마르크시즘 문학이 문학으로 존재하기 위하여, 싸움다운 싸움을 개시하기까지 이른 것으로 철저히 밝혀낼 것이다. 지금까지 마르크시즘 문학의 싸움은 싸움도 무엇도 아니다. 다만 그것은 이 분파의 한 사람이 싸움이라고 일컬었던 환각이었던 것에 지나지 않았다. 즉 마르크시즘의 문학자들은 그 제멋대로 생각하는 비마르크시즘적 문학론 때문에, 기꺼이 받아들이기만 하는 환각으로부터 각성하지 않으면 안 될 시기가 도래한 것으로 철저히 밝혀낼 것이다. 좌우지간 이 환각을 때려 부수는 것 바로 그것이 형식론이다.

 

자신으로부터 유물론이라고 자랑해 과장하고 있는 요코미츠 리이치(橫光利一) 등의 형식이론이 유치하고 공허하며 생각함이 지리멸렬한 것이라면 지리멸렬할 뿐, 그러한 것으로, 유일한 정열과 자신감을 어떤 형식을 빌려 나타내지 않으면 안 되는 경우로, 이 전환기에 있어서, 그들 문학의 실체가 여러 가지라고 간취(看取)할 수가 있을 것이다. 이론 그것은 지금 바꾸어 읽을 만한 가치가 있는 것 따위가 전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나카가와 요이치(中河與一)의 형식론

『文藝春秋』 11월호의 문예시평에서, 요코미츠 리이치(橫光利一)가 형식론을 가지고 프롤레타리아 문학에 대한 공격을 시작했다고 간파하고, 그의 동료 신감각파에 속한 젊은 작가들은 일제히 이것에 동조했다. 먼저 나카가와 요이치(中河與一)는 『東京朝日新聞』(쇼우와[昭和] 3년[1928] 11월 22일~24일)에 『형식주의 문학의 일단(一端)』을 게재하고 있다. 나카가와 요이치(中河與一)는 이 글의 모두(冒頭)를 다음과 같이 시작하고 있다.

 

「문학세계에 있어서 무엇이 강력한 것일까. 또 보통 일반적인 생활에 있어서, 무엇이 가장 강력한 것일까. 나는 그것에 대해 답하고 싶다. ―무엇보다도 형식이라고.」

계속해서, 나카가와 요이치(中河與一)는 문학에 있어서의 소재, 형식, 내용을 교차관계라고 적고 있다. ① 먼저 소재가 존재한다. ② 작가가 이것에 형식을 부여한다. ③ 내용이라고 하는 것은 형식과 소재를 통해서 제3자에게 접촉되어 오는 것이다. 그리고 작가가 작품에 부여할 수 있는 범위로서는 형식이 최후에 존재하며, 그래서 최대라고 하는 것이다.

 

요코미츠 리이치(橫光利一)가 「문자의 나열」을 형식이라고 생각했던 것에 대해, 이것은 소재를 가지고서 작품을 글쎄 자기 것으로 만드는 것을 의미하고 있는 것 같다. 또 나카가와 요이치(中河與一)가 형식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는 경우를 더듬어 본다면,

 

형식이라고 하는 것은 작가가 작품에 부여하여 얻는 최대의 것이다. 가장 강력한 것이다. 형식이라고 하는 것은 작품에 있어서의 하나의 정점이다. 구조를 갖고 있는 것이다. 연속된 생활의 부분적으로 잘라 떨어져서는 안 된다. 하나의 존재하는 형태이다. 그것은 발전한 것의 정점에 존재하고, 그 안에는 발전하는 줄거리가 압축되어 존재하고 있는 것이라고 하는 것이므로, 확실히 알지 못한다.

 

소재를 가지고서 작품을 글쎄 자기 것으로 만드는 것이 형식일까 생각하고 있다면, 이것은 또 난해한 것이라고 언급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작품의 정점에 존재하고, 구조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존재하고, 발전하는 줄거리가 압축되어 존재하는 것이라고 하므로, 점점 더 모를 일이다.

또 가라사대,

형식―형식에 대한 관심은 판단이 한쪽으로 치우쳐 불공평한(片手落ち) 내용주의를, 정치에 의지해서 문학작품을 만들려고 하는 오류를 완전하게 정복(征服)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사상(思想)의 부정

자신으로부터 불씨가 당겨진 형식주의문학론이 지금까지 프롤레타리아 문학의 위압감 하에 있었던 신감각파에 이상한 해방감과 자신감을 야기시켰던 것을 간파한 요코미츠 리이치(橫光利一)는 『讀賣新聞』의 『형식과 사상(思想)(쇼우와[昭和] 3년[1928] 11월 27일, 28일)에서 다음과 같은 기이하고 익살스런 말로 조롱하고 있었다.

 

나에게는 가장 빨리 지구가 태양을 돌고, 태양이 지구를 돌고, 그런 사정에는 움직여질 수 없는 것뿐인 지식이 준비되어 있다, 그것은 왜일까, 그것은 사상(思想)이라고 하는 것이 어떤 사상(思想)이라 하더라도 한가한 사람이 생각한 한가한 사람의 유희에 지나지 않는다고 깨닫기 시작했던 것에 기인하고 있다.

 

이러한 골계(滑稽)적인 것으로 사상을 부정함이 반프롤레타리아 문학파의 기대와 신뢰를 모으고 있는 신예작가에 따라서 행해졌다고 하는 점이 중요하다. 문학에 있어서 형식과 사상(思想, 내용)을 상즉(相卽, 하나로 융합되어 구별할 수 없음)적인 것으로 해서, 구체적이며 통일적으로 파악하는 것을 거부하고, 형식 바로 그것이 전체라고 하는 극론(極論)이 진하게 열렬하게 주장된다고 하는 것, 이것은 그것 이외에 그들로서는 프롤레타리아 문학에 대항하는 방법을 알지 못했다고 하는 사정을 언급하는 것이다.

 

이누카이 타케루(犬養健)의 수정론

이런 의욕만 남고, 이론은 없고, 지리멸렬한 형식주의문학론에 하나의 수정론을 첨가하려고 시도했던 것이 이누카이 타케루(犬養健)의 『형식주의문학론의 수정』(쇼우와[昭和] 3년[1928] 12월 16일~20일, 『東京朝日新聞』)이었다.

이누카이 타케루(犬養健)는 요코미츠 리이치(橫光利一)가 「문학에 있어서 형식에 대한 둔감자, 게으름뱅이, 부정자」에 대해 도전했던 의미를 높이 평가하고 있다. 그리고 요코미츠 리이치(橫光利一)의 형식론이 논리적이라기보다도 암시적, 효과적, 프로테스탄트적이며, 무엇보다 소박하고, 열렬한 점을 지적한다. 이리하여, 요코미 리이치(橫光利一)는 「최초로 확실했던 요코미츠 리이치(橫光利一)다운 문학론적 광맥의 첨단을 맨손으로 움켜쥐었다」는 것을 인정한다.

다음에, 한 시대에 획을 그을 정도의 작가는 예외 없이 신선한 형식을 손에 들고 출현함으로써, 실제로, 「내용주의자」의 대명사처럼 보이고 있는 「무시야노코우지 사네아츠(武者小路實篤)」가 그것이라고 한다. 「무시야노코우지 사네아츠(武者小路實篤)」의 독자에게 있어서 무엇보다도 그 매력은 당시 작가의 신선한 표현형식이었다. 내용을 신선하게 끌어낼 수 있는 신선한 형식이었다. 시가 나오야(志賀直哉, 1883~1971, 소설가)의 경우는 이것이 전적으로 확실했던 것이다,

그렇지만 이누카이 타케루(犬養健)의 주요한 요지는 다른 데 있다. 이누카이 타케루(犬養健)는 요코미츠 리이치(橫光利一)가 형식의 중요함을 강조한 나머지 「유무(有無)를 우격다짐으로, 다시 말해서 퇴거를 우격다짐으로 명했던 경우의 내용의 전이(轉移), 그로부터 일신상의 경향으로」에 대해서, 보충과 수정을 가해 이론으로서의 체재를 정비하려는 것이라고 한다.

인간은 어느 순간에 작가가 될까? 이누카이 타케루(犬養健)의 수정론은 여기서부터 출발한다. 이누카이 타케루(犬養健)에 의하면, 작가가 창작을 시작하자마자, 그 순간부터 그는 형식의 매력과 지배 안에 그 몸을 던지는 것으로서, 그 외의 활동은 모두 인간으로서의 활동인 것이다.

 

나는 좋게 평가하겠다. 어느 작가가 어느 작품을 쓰기시작하며, 문자를 나열하기 시작하고, 나의 이른바 작가활동의 범위에 들어가, 곧바로, 유쾌하게, 철저하게 형식의 지배에 몸을 던지고, 자신이 형식주의자라는 것을 고창(高唱)하기 위해서는, 나의 이른바 인간 활동의 범위에 있을 때 항상 인내심 강하게, 항상 현명하게, 내용주의자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작가는 일상적인 인간 활동에 있어서, 강력한 「내용주의자」로 살아감에 있어서, 처음으로 「내용의 원형」에 충실하게 된다. 이렇게 하여, 작가활동에 있어서 쏜살같이 곧장 강력한 「형식주의자」가 될 수 있다. 이곳에 기초를 두지 않는다면, 어떤 형식주의문학론도 모래 위에 집을 짓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전에 요코미츠 리이치(橫光利一)가 히라바야시 타이코(平林たい子)의 『구타하다(毆る)』를 예로 들어, 작자의 표현이 「형식주의에 침입(侵入)해 들어온」 것으로서, 내용이 형식을 결정한다고 하는 히라바야시 하츠노스케(平林初之輔)와 쿠라하라 코레히토(蔵原惟人)의 이론은 이 작품이 원인이 되어 전복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는 것에 대해서, 작자 히라바야시 타이코(平林たい子)가 『新潮』 12월호에서 이렇게 답한다. 자신의 작품에 대해 내용이 형식을 결정한 것이라고 하는 측의 항의를 받고, 답변이 없는 것은, 즉 인간 활동에 있어서 「내용의 원형」에 있어서의 관심의 문제를 제외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하는 것이다.

동시에 또 「문학의 세계에서 또 보통의 생활에 있어서, 무엇이 강력한 것일까? ―즉 형식」이라고 하는, 나카가와 요이치(中河與一)의 선언에 있어서도, 이런 종류의 논법은 일상생활에 있어서도, 작가는 형식주의자이여야만 한다고 하는 것과 같은 연상(聯想)을 부여해서는 안 된다. 게다가 또 「예술에 있어서 가장 중대한 것은 형식이다. 다음은 감상(感想). 그 다음은 사상(思想)」이라고 언급했던 이케타니 신사부로우(池谷信三郞, 1900~1933, 소설가․극작가)는 오히려 이렇게 강조했다. ―「사상(思想)의 구조! 감상 또한 좋다. 다만 쓰기시작하자마자 작가는 형식을!」이라고. 이상이 이누카이 타케루(犬養健)의 수정론의 골자이다.

인간 활동과 작가 활동과의 기계적인 구분방법에 근본적인 문제가 남아있지만, 이누카이 타케루(犬養健)의 수정론은 형식주의의 주장에 있기보다는 오히려 그들이 말하는 「내용주의」의 중요성의 강조도 해야만 하는 인상의 강력함은 주목하기에 충분하다. 특히 최후의 「우리는 무엇보다도 사상(思想)의 선택을 필요로 하는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인생에 있어서 형식주의자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한다면, 그것은 너무 비참한 것은 아닐까」라고 언급하고 있는 조목에는 오히려 형식주의자가 된 것의 본심을, 무심코 토로하고 있는 것 같음을 볼 수 없는 것도 아니다.

 

이케타니 신사부로우(池谷信三郞)의 이누카이 타케루(犬養健) 비판

이케타니 신사부로우(池谷信三郞)는 『작가활동의 범위』(쇼우와[昭和] 3년[1928] 12월 24일 『東京朝日新聞』)라고 하는 제목으로, 이누카이 타케루(犬養健)의 수정적 비판에 답했다. 이누카이 타케루(犬養健)가 인간 활동과 작가 활동을 엄격히 구별했는데, 그 한 가닥을 어디에 둘 것인가 하는 것이 문제이다. 이누카이 타케루(犬養健)는 작가가 붓을 쥐려고 하는 그 순간을 가지고, 양자의 활동을 구별하려는 것이었다. 이케타니 신사부로우(池谷信三郞)의 의문은 한 사람의 인간이 창작의식을 가지고 소재에 임해 붓을 들기 전에, 「단순한 인간 활동과 다른 색깔이 강한, 창작적 내면 활동이 일어난 시간에 있어서도, 게다가 사람은 형식주의자가 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인가」하는 것이다. 그 때 이미 그는, 이누카이 타케루(犬養健)에 의하면, 「형식의 매력 중에 형식의 지배 안에 몸을 던지는 것이다」라고 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것이다. 이누카이 타케루(犬養健)는 이에 대해서, 『내면형식의 문제』(쇼우와[昭和] 4년[1929] 1월 11일, 12일, 『東京朝日新聞』)에서, 「문자의 나열이 시작된다면」이라고 하는, 명확한 유물적 범위 이전까지 거슬러 올라가게 되면, 심리학의 영역으로 밟고 들어가는 것이 되며, 입론(立論)을 유심론으로 맑게 밝힐 위험이 있다고 답하고 있다.

또 이케타니 신사부로우(池谷信三郞)는 이누카이 타케루(犬養健)가 자신을 인간 생활에 있어서도 형식주의자와 같이 단정하는 것은 이누카이 타케루(犬養健)가 「경망한 것」이라고 변명하고 있다.

 

「인간 활동, 즉 형식 활동」

여기에 이르면, 나카가와 요이치(中河與一)는 『형식주의의 이론은 생활적 근거를 갖고 있다』(쇼우와[昭和] 4년[1929] 2월 6일 『東京日日新聞』)라고 하는 표제에서도 관찰되는 것처럼, 형식주의문학은 생활에 있어서도 형식이 우선한다고 하는 점에 논거를 두고 있는 것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이누카이 타케루(犬養健)처럼 작가의 형식 활동을 인간 활동과 분리하게 되면, 결국은 기교 제일주의에 지나지 않고, 예술지상주의의 에서도 허무한 것이 되는 것 아닐까. 인간 활동 바로 그것이 하나의 형식 활동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하여야만 하는 것은 아닐까. 인간 활동은 형식을 통해서 행해지는 생활이며, 「존재가 의식을 결정해가면서 진행해 가는 생활」이라고 하는 것이 나카가와 요이치(中河與一)의 의견이다. 최후로는 이런 것까지 언급하고 있다.

 

보라, 우리의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것은, 책상일 것이며, 펜일 것이며, 담배일 것이며, 다완(茶碗)일 것이며, 책일 것이며, 벽일 것이며, 전화기일 것이며, 가래(鍬)일 것이며, 돈일 것이며, 사회생활일 것이며, 그보다도 가까이 갖고 있는 것은 우리 자신일 것이며 ―모두 하나의 형식일 것이다. 게다가 이 형식의 집합 중에, 우리의 사상(思想)이 발생한다. 또한 이따위의 형식은 끊임없이 고도의 형식으로 발전하려고 한다. 문학 활동도 또 이따위의 활동 가운데 한 종류이다.

 

나카가와 요이치(中河與一)는 이보다 전에, 『형식주의 이론의 방향』(쇼우와[昭和] 3년[1928] 12월 26일, 『讀賣新聞』)에서, 이누카이 타케루(犬養健)의 수정론에 대해서, 형식주의이론은 내용도 중요하지만 그 이상의 형식이 중요하다고 하는 것은 아니고, 「내용을 형식이 왜 결정하는 것일까. …왜 루나차르스키(Anatori Vasil'evich Lunacharski)를 향해 돌격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일까. …우리의 실제생활에 우리가 문예가로서 왜 형식주의를 주입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일까」라고 언급했을 정도이지만, 전기(前記) 『東京日日新聞』에서의 언급에 이르면, 인간 활동 즉 형식 활동, 인간 즉 형식주의자도 라고 하는 경우까지 돌진하고 있다. 작가, 제작, 작품이라고 하는 것처럼 예술창조의 특수성은 완전히 무시되고 말았다. 이 점, 이누카이 타케루(犬養健)가 형식주의 문학론의 우익이라고 한다면, 나카가와 요이치(中河與一)는 극좌익이라고 하여야만 할지도 모른다.

나카가와 요이치(中河與一)는 『콧노래에 의한 형식주의 이론의 발전』(『文藝春秋』 쇼우와[昭和] 4년[1929] 2월호)의 장론(長論)이 있는데, 거기서 「우리의 형식주의는 단지 기교기법의 문제에 머물지 않고, 생활 의지력까지 진전(進轉)하고, 따라서 현대적 강점을 갖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우리는 생활에 이로운 형식을 부여함으로써, 사회주의자가 되고, 또 유물론자가 되고, 또 형식주의를 주장한다」든가, 「마르크스 파의 문학자는 무엇보다도 먼저 형식주의로 개종하지 않는다면, 위험하다고 생각한다」든가, 라고 언급하고 있다.

요코미츠 리이치(橫光利一)는 『형식론의 비판』(쇼우와[昭和] 4년[1929] 2월 16일, 17일, 『東京日日新聞』)에서, 나카가와 요이치(中河與一)의 설에 동의를 표하면서, 다만 「나카가와 요이치(中河與一)씨의 그 작품과 작자와의 고찰 방법은, 그 형식주의와는 반대로 매우 유심적이다」라고 하는 비평을 가하고 있는 것은 흥미를 자아낸다. 매우 지나치게 아부(他愛)적인 의론(議論)이라고 할 수밖에 없지만, 이런 종류의 의론(議論)에 문학자로서의 모든 정열을 경주했다는 것, 그것이 또 유력한 신문잡지에 계속해서 게재되었다고 하는 것, ―이 사실을 묵과할 수는 없다.

 

쿠라하라 코레히토(蔵原惟人)의 예술형식의 탐구

이렇게 고찰한 바와 같이, 이른바 형식주의자들 사이에서조차, 예를 들어, 중요한 형식이 되는 말의 개념규정과 용어법을 무시하고, 애매함이 한 가지 합일점의 의론(議論)을 엇갈리게 하고 있는 상태이니까, 형식주의에 의한 그들의 공격에 대해서, 프롤레타리아 문학의 측면에서 보면, 그 이론이 되지 않는 논법에, 손을 댈 필요도 없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치적 가치와 예술적 가치라고 하는, 그들에게 있어서는 보다 본질적으로 존재하고, 보다 중요한 것으로 존재하는 문제의 논의에 관심을 빼앗기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쿠라하라 코레히토(蔵原惟人)는 11월 28일의 『東京日日新聞』에서, 예술의 형식에 대해서 이것저것 발언을 하고 있다.

 

가라사대, 「우리가 이해하고 있는 바로서는, 예술 그것의 전체가, 즉 그 내용도 형식도 모두 물질적인 것―사회의 물질적 생활의 반영이며, 물질 그 자체가 아니다.」

가라사대, 「마르크시스트는 형식이 내용으로부터 발생한다고는 하지 않는다. 내용과 형식은 헤겔의 표현을 빌려 언급하면, 상호간에 발견하고 합치하는 것이다.」

가라사대, 「인간생활의 필요는, 인간의 생활(물질적 및 정신적)이 가장 높이 표현형식을 나타내는 것을 요구한다. 예술에 있어서도 이 생활―즉 예술작품의 내용은 항상 최고의 형식을 향해 노력한다.」

 

그러나 예술형식에 있어서의, 쿠라하라 코레히토(蔵原惟人) 이들의 생각이, 예를 들어, 요코미츠 리이치(橫光利一)에 있어서, 어떻게 받아들여 어느 정도로 이해되었는가는, 쇼우와[昭和] 4년[1929] 1월호 『文藝春秋』의 문예시평 『마르크시즘 문학의 전개』를 보는 것이 좋다. 여기서는 그들에 대해 자질구레하게 쓸 필요가 없다. 결국, 상대의 의견을 이해할 수 없는 정도로 무적(無敵)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 쿠라하라 코레히토(蔵原惟人)는 이후 형식주의자에 대한 논과는 관계없이 독자로서의 프롤레타리아 예술의 형식론을 적극적으로 탐구했다. 쇼우와[昭和] 4년[1929] 2월호 『戰旗』의 『프롤레타리아 예술과 형식』이 이것이다.

그 논문에서 쿠라하라 코레히토(蔵原惟人)는 예술형식을 고쳐서 규정하고 있다.

 

예술에 있어서 형식은 생활적 노동과정에 있어서 미리 만들어진 형식적 가능과, 그 예술의 내용을 위한 곳의 사회적 계급적 필요와의 변증법적 상호작용을 하는 가운데 결정된다.

 

예술의 내용과 형식의 관계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예술의 내용은 결코 형식주의자가 언급하는 것처럼 그 형식으로 인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반대로 예술의 사회적 계급적 내용이 생산과정으로 인해 미리 만들어진 형식적 가능의 범위 내에서, 그 예술적 형식을 결정하는 것이다.

 

최후에 프롤레타리아 예술형식을 어디서 구해야만 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미래파, 입체파, 입체파 이전으로 돌아가는 것으로서가 아니라 이들 모두의 예술적 기술적 형식을 이용함으로써, 그 위에 세워지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쿠라하라 코레히토(蔵原惟人)는 게다가 동년 12월호 『改造』에 게재된 『예술형식의 탐구』에서, 지금까지 우리나라의 프롤레타리아 문학의 형식은, 자연주의적인, 표현주의적인, 신감각파적인 것이 어떤 비판도 없이 사용되고 있는 사실을 지적하고, 근대적 프롤레타리아트의 심리상에 기초를 두고 있는 새로운 예술형식의 탐구 바로 그것, 무엇보다도 먼저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을 주장하고 있다. 이리하여, 도회주의, 기계주의, 미래파, 구조주의 등의 제형식이 마르크시즘의 관점에서 검토되고 있다. 쿠라하라 코레히토(蔵原惟人)의 이상의 두 논문은 어느 쪽도 정밀한 역작으로서, 프롤레타리아 문학의 형식론으로서, 지금 고전적인 것이 되고 있다.

 

카츠모토 세이이치로우(勝本淸一郞)의 형식주의자를 향한 반박

쿠라하라 코레히토(蔵原惟人)가 이른바 형식주의자들의 논의에 개입하는 일 없이, 독자적으로, 프롤레타리아 예술의 형식을 적극적으로 탐구하고 있을 때, 카츠모토 세이이치로우(勝本淸一郞, 1899~1967, 문예평론가)는 오로지 형식주의자들의 독단론을 반박 비판했다. 『형식주의문학설을 배제하다』(『新潮』 쇼우와[昭和] 4년[1929] 2월호) 등은 그 대표적인 것이다.

「형식주의자여, 그대들이 단지 문학론만을 제조하려고 하고 있는 동안은, 결코 우리에게 승리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다. 근본적인 세계관에 대해서는 별도의 근본적인 세계관을! 그리고 그곳에서 부분적인 문제의 해결을 도입해내지 않으면 안 된다.」―이것이 그 요점이다.

카츠모토 세이이치로우(勝本淸一郞)에 의하면, 이누카이 타케루(犬養健)가 「인간활동」과 「작가활동」을 구분한 것은 이것으로 인해서, 작가의 이른바 내적 노력을 모두 「인간활동」의 범위로 이관하지 않고, 그들은 관할 외에 존재하므로, 예술론으로서는 알바가 아니고, 비평가에 있어서도, 작가에 있어서도, 문제는 다만 형식에 대한 관심뿐이라고 언급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또 이케타니 신사부로우(池谷信三郞)의 재비판에 있어서도 밝혀진 것처럼, 이누카이 타케루(犬養健)가 이끌어낸 양활동의 구분선은 어떤 방향에서도 움직이는 성질의 것으로, 원래 그 정확한 장소를 나타낼 수 없는 선이다. 카츠모토 세이이치로우(勝本淸一郞)가 「인간활동과 작가활동은 전혀 직접적인 관계가 없는 경우일까, 모두 관계가 있어 하나가 되는 경우일까, 그러나 이 두 가지만 있을 수 없다」고 하는 지적은 정확한 것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

카츠모토 세이이치로우(勝本淸一郞)는 게다가 형식주의자들이 범하고 있는 기초적인 오류의 얼마간을 지적하고 있다. 그 지적은 다름이 아니라 소재와 일반적인 예술의 대상 간 정확한 구별을 형식주의자들이 모르고 있다는 점에 관해서이다. 이누카이 타케루(犬養健)에 대해서 말한다면, 이러한 혼란은 「여기 하나의 문예작품의 소재가 있다. 한 사람의 작가, 또는 몇 사람의 작가가 골라내고 골라내지 말아야 하는 것을 찾아내야만 하는 그것이 존재한다」고 하는 것과 같은 말로 표현하고 있다. 소재는 원래 그런 의미의 자연적 존재물일까? 이 점에 대한 오해는 나카가와 요이치(中河與一)가 더욱 명료하게 나타내고 있다는 것이다. 나카가와 요이치(中河與一)류의 안목은, 카츠모토 세이이치로우(勝本淸一郞)에 의하면, 작품을 생산해내기 이전에 작자의 표상(表象) 안에 「내용」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라고 하는 점에 있다. 그렇지 않고서는 형식이 내용을 결정하는, 형식주의의 명제가 성립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내용」대신에 무엇을 넣어놓았을까? 「소재」가 어떤 과정을 통해서 작품 또는 「형식」에 도달할 수 있는 것일까? 이것이 카츠모토 세이이치로우(勝本淸一郞)의 반문이다.

카츠모토 세이이치로우(勝本淸一郞)는 이 반문에 스스로 답하고 있다. ―현상(現像, 일반적인 예술대상)이 「소재」라고 하는 역할을 연기하기 위해서는, 그것이 상당한 기술(技術)의 발달로 인해 획득되지 않으면 안 된다. 「소재」는 결코 자연적 존재물이 아니다. 「작가활동」의 소산이다. 예를 들어, 공간에 있어서 「음영(陰影)」이라고 하는 현상(現像)은 시각적 예술대상이지만, 인류 발전 이전부터 자연계에 존재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현상(現像)이 회화와 조각의 「소재」로서의 도움이 되기 위해서는, 그것을 획득하기 위한 예술적 기술(技術)의 발달이 필요했던 것이다. 렘브란트(Rembrant)의 회화에서는 「음영(陰影)」이 차츰 소재로 획득되고 있지만, 그것은 유화용구라고 하는 예술용구의 발명과 그것과 함께 기술(技術)의 발달로 인해 처음으로 가능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처럼 「소재」로서의 「음영(陰影)」은 어디에서도 기술(技術)에 의한 「작가활동」의 소산이라고 하는 것이다.

「문학의 형식이라고 하는 것은 문자의 나열이다. 문자의 나열이라고 하는 것은 문자 그것이 용적을 갖고 있는 물체이기 때문에, 객관물의 나열이다」라고 하는, 예문의 요코미츠 리이치(橫光利一)의 발언에 대해서는, 문자가 문자로 존재하기 위해서는, 관념―내용을 나타내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관념―내용을 나타내기 위해서는, 그 문자에 관해서 일정한 사회생활을 영위하는 사람들의 조직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 이 조직과 떨어진 문자의 나열은 무의미한 존재에 지나지 않는다. ―카츠모토 세이이치로우(勝本淸一郞)의 반박은 이러한 것이었다.

 

타니카와 데츠조우(谷川徹三)의 『문학 형식문답』

용어의 개념을 정확하게 규정하지 않으면, 말이 말로서 통하지 않을 것 같은 형식주의문학론 때문에, 알맞은 계몽과 정리의 역할을 떠맡고 나온 것이 타니카와 데츠조우(谷川徹三)의 『문학 형식문답』(『改造』 쇼우와[昭和] 4년[1929] 2월호)이다. 이 글은 시의 적절했고, 게다가 뛰어난 것이었다.

타니카와 데츠조우(谷川徹三)는, 먼저 매우 중요한 것이 되고 있는 「형식」의 개념에, 미학 상 3종류의 구별이 있는 것을 립스(Theodor Lipps)를 인용하여 해설한다. 제1은 내용의 상관개념으로서의 그것으로, 내용과 형식이 상호 다른 것을 포함하는 것으로서, 처음으로 의미를 얻는 것. 제2는 정돈되어있다든가, 정돈되어있지 않다든가 하는 성질의 규정을 가지고, 예술에 있어서 그것이 존재하는 것과 존재하지 않는 것이 존재하는, 따라서 내용이라든가 소재라든가가 대립된 의미를 갖고 있는 것. 그러므로 형식주의라고 하는 것 같은 주장은 이 제2의 형식개념을 근본으로 해서 성립되는 것이며, 제1의 형식개념을 근본으로 해서는 성립되지 않는다. 그러나 제2의 개념을 근본으로 한 것으로서는, 그 형식주의가 천박하게 될 위험이 있다. 여기서 타니카와 데츠조우(谷川徹三)는 제3의 형식의 개념을 갖고 나오고 있다. 즉 괴테(Goethe)의 "innere Form"에 상응하는 내면형식의 개념이다. 타니카와 데츠조우(谷川徹三)의 말을 빌리면,

 

내면형식은 내면적 충일(充溢)을, 내면으로부터 용솟음치는 힘을, 내면적 긴장을 중요시한다. (중략) 그러나 동시에 그것은 그 내면적 충일(充溢)을 단지 충일(充溢)시키는 것만 해서는 안 된다. 용솟음치는 힘을 제어하고, 주문의 힘으로 꼼짝 못하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적당한 형식으로 결정(結晶)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게 제어하고, 주문으로 꼼짝 못하게 하고, 결정(結晶)되게 함으로써, 내면적 형식은 처음으로 내면형식이 되는 것이다. (중략) 이렇게 하여 내면적 형식의 입장은 잘못된 형식주의에도 잘못된 내용주의에도 대립한다. 그리고 그것은 형식이 안에서, 소재의 필요성에서, 유기적으로 전개되면 안 된다고 하는 것을 설명하는 의미에서 내용주의라고도 하지만, 형식의 제어를, 주문으로 꼼짝 못하게 하는 것을, 결정(結晶)되게 하는 것을 중요시한다는 점에서 분명히 형식주의인 것이다.

 

이상의 일반론을 타니카와 데츠조우(谷川徹三)는, 게다가 구체적인 문제에 대해서 명쾌한 해명을 부여하고 있다. 이누카이 타케루(犬養健)가 어떤 시대에도 하나의 판단중지(epoche)를 만들 정도의 작가는, 예외 없이 신선한 외면형식을 내걸고 섰다든가, 「오늘날 내용주의자의 대명사처럼 되고 있는 무시야노코우지 사네아츠(武者小路實篤)」를 예로 들어, 당시의 독자에게 있어서 무엇보다도 매력은 작자의 신선한 외면형식, 내용을 신선하게 끌어내려고 하는 것만의 신선한 형식이었다든가, 라고 언급하고 있는 것에 대해서, 타니카와 데츠조우(谷川徹三)는 이렇게 언급하고 있다.

 

결국 이누카이 타케루(犬養健)는 무시야노코우지 사네아츠(武者小路實篤)씨와 시가 나오야(志賀直哉)씨를 내면적 형식주의자로서 인정하는 것이다. 즉 형식의 가장 깊은 의미에 대한 형식주의자로서, 따라서 또 진짜 내용주의자로서,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되지 않으면 논지가 서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즉 센스(sense) 위에서는 무시야노코우지 사네아츠(武者小路實篤)씨와 시가 나오야(志賀直哉)씨가 형식에 대해 언급한 것도 느끼면서, 그 형식을 문자의 나열로서의 외면형식과 연결하려고 하니까 무리가 있는 것이다.

 

타니카와 데츠조우(谷川徹三)에게 있어서, 혼미가 극에 달했던 형식주의 논쟁이 정확한 출발점에 들어가는 정리가 된 것이지만, 정리가 마무리됨과 동시에, 형식논쟁 그것이 종식되었는가의 의문점(觀)을 나타낸 것은, 이유가 없는 것 또한 아니다.

 

형식주의의 주장의 근거

타니카와 데츠조우(谷川徹三)가 말한 것처럼, 센스의 위에서는 타니카와 데츠조우(谷川徹三)의 이른바 「내면형식」에 가까운 것을 느껴가면서, 그것을 문자의 나열로서의 외면형식에 연결하려고 했던 경우에 무리가 있었던 것은 이누카이 타케루(犬養健)에 한했던 것만은 아니다. 형식주의문학론자의 누구라도 많든 적든 그러했다. 특히 요코미츠 리이치(橫光利一)가 그렇다. 왜 그런 무리를 강행했을까는 이미 밝혀진 것처럼 프롤레타리아 문학에 대한 대항 때문이라고밖에 생각되지 않았다. 예술파의 진영을 고수하려고 했던 작가에 있어서, 당시의 프롤레타리아 문학의 압력이 어느 정도 강력했던가를 모르고서는 이 수수께끼는 풀리지 않는다. 그들은 어떻든지 간에 형식이 내용을 결정하는 것에 의하지 않고서는, 이데올로기 그 일점(一點)만의 프롤레타리아 문학에 대항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요코미츠 리이치(橫光利一)가 『형식과 메커니즘에 대해서』(『創作月刊』 쇼우와[昭和] 3년[1928] 4월호)에서, 최근 독자가 「창작물의 형식을 중심으로 해서가 아니라, 독자의 사상(思想)을 중심으로 해서 읽는」 경향이 있다는 것을 지적하고, 「형식주의 운동의 제1의 목적은 독자를 향해서 독자의 사상(思想) 중심이 아닌, 그 창작물의 형식을 중심으로 해서 가치를 결정해야만 한다고 언급하기도 하는, 즉 작품가치의 결정방법이 형식주의의 최대의 목적이다」라고 언급하고 있는 경우를 보더라도, 형식주의의 주장에서 나왔던 근거를 고찰할 수가 있을 것이다.

 

「내면형식」을 향한 요구

게다가 또, 타니카와 데츠조우(谷川徹三)가 『문학형식문답』에서, 「나는 예술가가 한 가지 입장에―자신이 믿고 있는 입장에 차분하게 있으면서 돌진하는 것을 존중한다. 그 입장에서의 독단까지 존중한다. 그것은 비유해서 어떻든지 틀린 것이 있어도 항상 그 안에 한두 가지 보석을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비평가다. 나는 인식을 요구하는 것이다」라고 언급하고 있는 것은, 확실하기도 하고, 이 경우에는 특히 중요하기도 하다. 왜냐하면, 형식주의 문학논쟁에 있어서 요코미츠 리이치(橫光利一)의 발언이 확실히 이 경우에 속하기 때문이다. 요코미츠 리이치(橫光利一)의 발언이 어떻게 직감적 반이론적으로서, 지리멸렬한 독단이었던가는, 이미 보았던 대로이다. 그렇지만 요코미츠 리이치(橫光利一)의 발언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누카이 타케루(犬養健)가 평했던 것처럼 소박하고 열렬하며, 암시적, 프로테스탄트적이다. 또 이 이전, 타이쇼우(大正) 15년 1월의 『文藝時代』에 게재된 『내면과 외면에 대해서』에서 「내면의 빛과 외면의 빛을 동시에 비추게 하고 싶은 것이다」라든가, 「신(神)은 낡아빠졌어도 항상 내면을 깨우치게 함으로써 외면을 부여하고 있다. …외면의 전체에 내면이 존재하고, 외면이 있어서 내면이 존재하며, 좌우지간, 다만 내면은 외면에만 존재할 뿐이다」든가 하는 것 같은, 한 사람의 합일점이라고 하는 독단어(獨斷語)도, 실은 그 경우 이미, 타니카와 데츠조우(谷川徹三)가 언급하는 「내면형식」을 향한 요구를 느꼈던 빛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그 말이 지리멸렬하게 존재하고, 독단적이라면 독단적일 뿐, 내용주의, 형식주의를, 보다 높은 차원에서 통합했던 「내면형식」을 향한 요구가 격심함을 언급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것이 『上海』에서 결실하고, 거기서 『鳥』 『機械』의 거듭 새로운 「내면형식」으로 진전했던 것이다.

한편, 프롤레타리아 문학은 형식의 탐구가 오로지 대중화의 요구에 입각해서 진전된 것이지만, 나카노 시게하루(中野重治)의 『鐵의 話』, 코바야시 타키지(小林多喜二, 1903~1933, 소설가)의 『不在地主』는, 그 방향에 있어서 태어난 작품이라고까지는 말할 수 없다.

이와 같이 본다면, 형식주의 문학논쟁은 예술대중화와 예술 가치를 에워싼 두 논쟁의 파생물로서, 경시할 수 없는 의미를 갖고 있는 것이다.

 

나카가와 요이치(中河與一)에 대한 히로츠 카오즈(廣津和郞)와 코바야시 히데오(小林秀雄)의비판

쇼우와(昭和) 5년(1930)이 되자, 형식주의 문학논쟁이 문단적으로는 종식되었으므로, 나카가와 요이치(中河與一)는 『형식주의의 예술이론』이라고 하는 한 권의 책을 출판했다. 이 논에 대해서는, 히로츠 카오즈(廣津和郞, 1981~1968, 소설가·평론가)가 5월호 『改造』의 문예시평에서, 「형식이 비약하고 있다고 하는 문제. 그 비약이 유물론적이라고 하는 문제, 형식이 의지와 정열과는 다른 메커니즘이라고 하는 문제, 이런 것들에 대해서는 결론만 있어서 논증의 접근이 부족하다고 생각한다.」고 평하고 있다.

코바야시 히데오(小林秀雄)는 또 5월호 『文藝春秋』의 시평, 『アシルと 龜の子』에서 마찬가지로 통렬한 비판을 가하고 있다. 나카가와 요이치(中河與一) 설(說)의 결론과 함께 응당 보아야 할 「형식의 동적 발전성 도식(圖式)」에 대한 비판이다.

 

「형식의 동적 발전성 도식(圖式)」이 세계의 발전도식이라면, 형식의 발전에는 씨의 말처럼 의지와 개성이 참가하지 않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의지와 정열의 발전이 이 도식으로부터 불거져 나와서는, 이것은 도식도 무엇도 되지 않는다. 이른바 존재가 도식으로부터 조금도 도망치지 못한다고 하는 성질이 도식이라고 하는 것의 성질인 것이다. 다음에, 소재에 형식을 부여한다고 하는 작가의 활동도 엄연히 존재하는 한 운동이므로 이것에도 이 도식을 적용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 거기서 이 운동은 무의식이 되고, 비약이 된다고 판단된다. 이것으로서는 작자가 바라는 것, 역으로 인상(impression)이 제멋대로 뻗어나가 위세를 부릴 뿐이다. 도대체 왜 작자는 정열이든가 의지든가 하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일까. 이들 물질의 계량적 성질은 불분명하지만, 하여간 계량되어 얻는다고 생각하기에 결코 지장이 없는 것은 아닐까. 형식의 발전 도식 안에 부수고 들어가는데 전혀 지장이 없는 것은 아닐까. 다만, 어려운 것은 의지와 정열을 형식이라고 생각하지만 물질이라고도 생각하지만, 의지와 정열은 여전히 의지와 정열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들을 경시한다고 하는 것은 이들을 과신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좀 어수룩하고 모자란다고 생각된다.

(중략) 형식의 발전도식에 있어서, 예술창조과정이라고 하는 운동존재를 계량하려고 하는 시도 없이는, 도식은 신소리(洒落)에 지나지 않는다. 근세 유물변증법은, 나카가와 요이치(中河與一)씨의 도식과 비교해서 대개 비교를 할 수 없을 정도로 정밀한 것이지만, 젊은 마르크스의 손에서 이것이 상품의 계량에 사용될 수 없었다면 또 신소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 일반적이다. 씨는 자신의 논문이 방법론에 중점을 두지 않았다고 할 수 있을는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형식의 동적 발전성이라고 하는 것을 근본규정으로 해서 인정하고 있는 이상, 방법론을 제외하고 예술이론에 관해서는 한 마디 언급하는 것조차 불가능한 것이다. 이 논문집이 「형식은 매우 중요하다」고 언급하고 있는 것 이외에 어느 것도 언급될 수 없는 요설(饒舌)로 끝난 소이이다.


 

참고자료

게오르르 루카치: 총체성의 개념-파스칼( Roy Pascal) / 김대웅 역

러시아 형식주의의 기본개념들-빅토르 어얼리치(Victor Erlich) / 박거용 역

기술(技術)로서의 예술-빅토르 슈클로프스키(Victor Shklovsky) / 문학과 사회연구소 역

상호 텍스트성-츠베탕 토도로프(Tzvetan Todorov) / 최현무 역

 

年譜

臼井吉見(うすい よしみ、1905年6月17日~1987年7月12日)は、日本の編集者・評論家・小説家。

 

1. 来歴・人物

長野県南安曇郡三田村(現・安曇野市)に、父貞吉・母きちの次男として生まれる。 旧制松本中学(現長野県松本深志高等学校)、旧制松本高校を経て、東京帝国大学文学部卒業。 松本中学では後に筑摩書房の創業者となる古田晁、俳優・演劇評論家の松本克平が同級であった。

教員を務めた後、1946年創刊の総合雑誌『展望』(筑摩書房)の編集長を務め、文芸評論家としても活躍。『日本文学全集』『現代教養全集』などを編集した。1964年から代表作となる大河小説「安曇野」の執筆を始め、1974年に完結し、谷崎潤一郎賞を受賞した。

1977年、『展望』に発表した『事故のてんまつ』は、川端康成の孤独な生い立ちから自殺までの背景を描いた作品だが、その中で川端家の家系が旧・被差別階級であるかのような憶測を含む記述をしたことに対して川端の遺族が抗議し、販売差止めの訴訟沙汰になった(臼井の謝罪により和解)。

NHKのクイズ番組『それは私です』に、解答者として出演していたこともある。

道の駅・アルプス安曇野ほりがねの里に臼井吉見文学館の展示がある。

 

2. 主な著作

近代文学論争(1956年)

どんぐりのへた(1958年)

15年目のエンマ帖(1961年)

安曇野(1964年-1974年)

臼井吉見評論集 ~ 戦後(1966年)

蛙のうた ~ ある編集者の回想(1972年)

教育の心(1976年)

田螺のつぶやき(1976年)

肖像八つ(1976年)

ものいわぬ壷の話(1976年)

展望 ~ 或る編集者の戦後(1977年)

作家論控え帳(1977年)

事故のてんまつ(1977年)

文芸雑談(1978年)

獅子座(1979年-1981年)

草刈鎌(1980年)

そのひと ~ ある出版者の肖像(1980年)

 

3. 主な編集

戦後十年名作選集(1955年)

現代教養全集(1956年-1960年)

現代の教養(1966年-1967年)

柳田国男回想(1972年)

碌山荻原守衛全作品集(1975年)

土とふるさとの文学全集(1976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