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e texte est traduit avec la langue Coréenne. This text is translated with the Korean language.

 


 

(문학마을 통권 40호, 2009·가을호)  

휘트먼(Walt Whitman)/주근옥 역

 

우주에 있어서 자연의 위대한 교훈은 변화와 자유의 교훈일 것이다. 마찬가지로 신세계에서의 위대한 교훈 또한 정책과 진보일 것이다. 예를 들어, 만약 어떤 사람이 현대 유럽과 미국 그리고 중국과 터키에서 아직 후손에게 전해지는 것이 지연되는 것으로서의 고대 아시아의 의례와 같은 또 다른 세상과 조화를 이루는 특이점에 대해서 질문을 받는다면, 그는 미래의 자유에 기초한 John Stuart Mill1)의 심오한 에세이에서 그러한 것들의 가치를 발견할는지도 모른다. 진실로 위대한 애국심을 위하여 John Stuart Mill은 두 가지 주요 성분 또는 근본을 요구한다. 첫째로 개성의 다양성, 둘째로 수없이 충돌되는 문제 속에서 스스로 확대시키고 있는 인간의 본성을 위하여 벌이는 모든 활동이 그것이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경향과 권력, 공헌, 기질, 반대의 목적, 복제가 복제를 낳는 이 영속 행위는 끝없는 복원과 생명력을 가져와 변천이라고 일컫는 영향력처럼 보편적 인간성이 되는 듯하다. 이러한 생각은 나로 하여금 사색하도록 하며 이러한 생각은 결코 혼자만도 아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은 강요하고 뒤에서 잡아당긴다.

봉건주의를 포함하여 과거를 유쾌하게 받아들이고, 가장 위대한 활약과 문제들로 채워져 있는 미국은 내가 미래를 거의 전적으로 정당화하고 성공적이라고 평가하는 것으로 중요시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히 누구를 위한 성공이라고 주장하는가? 부당한 희망은 없다. 오늘날 그리고 앞으로 아직은 희미하지만, 우리는 풍부하고 건전하고 거대한 결과로서의 전경(前景)을 바라볼 수 있다. 왜냐하면 우리의 신세계를 위하여 나는 앞으로 다가올 결과보다 과거에 무엇을 했는가 현재의 신세계가 무엇인가를 더 중요하게 생각하기 때문이다. 많은 국가 중에서 유일한 이 연방은 민주주의 공화국 원리와 자유의지의 기본 그리고 자존으로 이루어진 발전과 완벽성의 이론이 실천된 실재적 세계의 운영과 윤리적 정치적 사색에 충분히 맞서는 부분에서 영속적인 권력과 실용성의 형식 안에 놓여진 과업을 떠맡았다. 사실 이제까지는 이 연방이외의 역사 속에서 무의식적인 신뢰를 어느 누가 받아왔으며, 그리고 우리가 지금 전망하고 자립하고 행동하고 방위하는 이 모든 것들을 어느 누가 받아들여왔는가?

그러나 서두에 짧게 다음과 같은 기질의 요점을 쓰자. 첫째, 각기 폭넓게 다른 시대에 쓰여져 왔던 추이를 전제로 한다. (사실 그것은 미래를 설계하는 사람이나 이해하는 사람들의 몫일 것이다) 그리고 일부 반박하는 또 다른 책망으로 개방될는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여러 가지 커다란 여느 의문과 마찬가지로 민주주의에 대하여 품고 있는 커다란 의문의 반대편도 있기 때문이다. 나는 나 자신의 성취와 신념 안에서 조화롭게 융합된 일부분을 느낀다. 그리고 이러한 일치 안에서 각각의 사건과 각각의 주장과 다른 사람들에 의해 수정되고 조율된 주장만이 읽혀지도록 그것들을 표현한다. 역시 마음속에 품고 있는 그러한 주장들은 정치적 통찰 안에서 연구된 결과가 아니고, 오직 관망과 사람들 속에서의 방황과 이들 연방 그리고 전쟁과 평화가 소용돌이치는 세월 속에서 얻은 근본적인 인식이다. 나는 미국에서 실시되고 있는 보통선거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는 위험에 대하여 아전인수 격으로 주석을 달지 않을 것이다. 사실 그것은 내가 이 글을 쓰고 있는 위험을 인정하고 직면하기도 한다. 그들의 사고 안에는 전쟁과 진보와 민주주의적 신념과 포부, 그리고 국민적 천성과 부도덕과 자유분방하고 공상적이며 순간적인 충동을 모든 사람에게 불러일으켜 들끓게 하는 열망이 들어있다. 나는 주로 이러한 에세이를 쓸 것이다. 나는 전환될 수 있는 양식으로서의 미국과 민주주의라는 어휘를 사용할 것이다. 일반적으로 민주주의라고 하는 것은 논쟁거리가 아니다. 미연방은 봉건제도의 호화로운 역사와 시대의 가장 엄청난 실패로 판명된 것까지도 극복해야 할 것으로 운명 지워졌다. 그들이 실질적으로 성공하리라고 하는 전망에 대해서 나는 티끌만큼도 의심하지 않는다. 지리적 또는 생산적 부문에서 그들의 직업적으로 성공을 거두리라고 예상되는 미래는 전보다 규모가 크고 더 다양하리라는 것이 확실하다. 이러한 점에서 민주주의 공화국은(이미 실행하지 않았다면) 지금까지 공급된 모든 역기능의 실례들을 즉시 제거해야만 한다. 그리고 세계를 제압해야만 한다.    

나로서는 비록 정치적이고 직업적인 독자와 일반적으로 훌륭하다고 믿어지는 법령과 실재적으로 풍요롭고 성실하다고 믿어지는 정치제도를 자유로이 조직하는 것과 그들이 가지고 있는 바람직하고 중요한 우월성을 그들 스스로 실행하고 결정하고 민주주의의 체험이 성공의 결실을 낳는 것과 같이 폭넓게 퍼져있는 현혹에 반하여 이러한 것들이 최대로 넓은 범위를 차지하고 있을지라도 경고하고 주의를 환기시키지 않을 수 없다. 현재 이러한 우월성, 일찍이 두려웠던 적들과 싸워 쟁취한 바로 그 승리로부터 유래한 연방(즉, 그 안에 내재된 우월성)과 전례가 없는 물질적 진보로서의 사회를 완전하게 거의 완전하게 소유한 우월성은 해독이 끼쳐지고 비참해지고 미신적이게 되고 부패하게 된다. 정치적 또는 법치사회는 개인적이거나 또한 자유의지를 가진 사회이다. 어느 면에서, 미연방과 개인의 가장 중요한 척추로서의 도덕적 양심의 기본은 나에게 전적으로 부족하거나 심각하게 악화시키거나 성장을 억제시키는 것처럼 보일는지도 모른다.

의사가 어느 깊은 질병을 진단하는 것처럼 우리는 이러한 형세에 처해있는 우리의 시대와 국토를 면밀하게 그리고 주의 깊게 관찰해 왔다고 믿는다. 어쩌면 미연방의 외관보다 내심이 더 공허했는지도 모른다. 미연방의 기본 원리는 지혜롭게 믿어지지 않고 (왜냐하면 이 모든 것들은 흥분되어 있고 멜로 드라마와 같이 야하기 때문이다) 스스로도 믿어질 만한 휴매니티가 없다. 통찰의 눈은 그 얼굴을 통하여 어디든지 무엇이든지 바라볼 수가 없지 않은가? 그 광경은 간담이 서늘할 만큼 굉장하다. 우리는 위선의 분위기 안에 살고 있다. 사내는 계집 안에 계집은 사내 안에 존재함을 사람들은 믿지 못한다. 경멸로 꽉 차있는 거만은 문학을 규제한다. 모든 문학의 목적은 흥미를 만들어내는 어떤 것을 찾아내는 것이다. 수많은 교회와 종파는, 내가 알고 있는 가장 음침한 환상은, 종교의 명성을 박탈한다. 설교는 야유의 덩어리이다. 정신 속의 허위와 모든 오류 행위의 근원으로부터 발생된 결과는 이미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워싱톤의 세수국에서 근무하고 있는 예리하고 솔직한 사람들은 비위를 조사하기 위하여 동서남북 사방의 도시들을 정기적으로 방문하는 점검과정에 의해 지도 받고, 그들의 적발에 대해 국민과 함께 많은 이야기를 나누어 왔다. 우리 나라의 관료계층의 비행은 상상했던 것보다 적지 않지만, 실제는 그보다 수없이 더 많다. 사법부를 제외한 모든 분야에 있어서 국가, 주, 그리고 시에서 근무하고 있는 미국의 공무원들이 제공하는 서비스는 타락, 뇌물수수, 기만, 失政 속에 흠뻑 젖어있다. 그리고 사법부도 오염되어 있다. 대도시들은 도덕적으로 존경받을 수 없는 강탈과 갱들만큼이나 실제적으로는 존경의 범벅이가 된다. 세속의 생활 속에는 경박스럽고 열의 없는 연애사건이나 연약한 무신앙인이나 하찮은 목표 또는 아예 목표가 없어 오직 시간만을 죽일 뿐. 현대의 어휘 비즈니스를 게걸스럽게 먹어치우는 이 모든 것으로서의 직업 속에서 유일한 목표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어느 의미에서는 황금의 획득이다. 동화 속에 나오는 마법의 사탄이 다른 사탄을 모두 먹어치우고, 황금을 만드는 것은 오늘날 그 분야에 유일하게 남아있는 주인 마법의 사탄이다. 우리가 보여주는 최상류층은 세속적으로 투기꾼과 속물로 옷 입혀진 한 무리일 뿐이다. 사실, 이러한 환상적 코미디 뒤에 숨어있는 진실은 사회의 실재적 무대 위에서 고정적인 사건과 엄청난 고통이 발견되고, 자연 그대로 존재하고 시대 안에서 그들 자신을 약진시키고 언급하는 배경 속에서 계속 진보한다는 것이다. 아직까지도 그 진실들은 고통을 감소시키지는 않는다. 그러나 나는 우리가 성취한 신세계의 민주주의가 물질적 성장과 생산 속에서, 그리고 완벽하게 고도로 현혹시키는 허울뿐인 민중의 지성 속에서, 이제까지 사회적 관점과 실제로 위대한 종교 윤리 문학 그리고 심미적 결과로서의 거의 완벽한 실패 속에서, 민중이 그들의 허물을 벗고 정신적으로 앙양된 것은 위대한 성공이라고 언급한다. 우쭐거리며 우리는 식민지적인, 고대 알렉산더의 지배를 뛰어넘어 또는 로마의 가장 자랑스러운 지배를 뛰어넘어 보다 뛰어난 통치를 향하여 전례가 없는 활보로 전진한다. 우쭐거리며 우리는 합병된 텍사스 캘리포니아 알래스카 북쪽 캐나다로부터 남쪽 쿠바에 이르기까지 점유하게 된다. 여하튼 우리가 거대하고 점점 더 완벽하게 명명된 육체를 부여하고, 따라서 거의 적게 또는 전혀 정신을 뒤에 남겨두지 않는 것처럼. 

윤리적 또는 현미경으로밖에 볼 수 없을 정도로 미세한 인간성을 사용하는 엄격한 양심의 눈앞에 이미 앞에서 언급한 것들을 고해하라. 메마르고 평평한 사하라와 같은 사막이 나타나는 것과 같은 성질의 이 도시들은 사소한 우스꽝스럽고 기이한 모습과 환상으로 꽉 차 있고, 무의미한 어릿광대의 모습을 연기한다. 상점에서 그리고 거리와 교회와 극장과 술집과 사무실의 의자이든 어디에서든지 경박함과 야비함과 얕은꾀와 불의와 연약한 유약성과 뻔뻔스러움과 멋을 부리는 것과 조숙하게 무르익은 청년기의 어디에서든지, 비정상적인 성적 충동 비건강한 형식 남성 여성 그려지고 덧붙여지고 염색된 속발의 머리채와 진흙투성이의 외관과 불순한 피와 더럽히거나 더럽혀진 위대한 아메리카를 위한 속된 꾀, 아름다움에 대한 피상적인 관념, 예절의 한계 또는 반대로 예절의 결핍(지금까지 누려왔던 이점을 고려해서) 세계 속에서 십중팔구는 가장 뒤져 보이는 후진성과 같은 이 모든 것을 어느 곳에서든지 고해하라.

합리적이고 용감한 삶으로 회복시키는 숨결을 이 모든 것들 그리고 이 한스러운 상황들에 불어넣기 위하여, 단지 복사하거나 존재의 표면을 반영하는 것이 아닌 또는 취미로 불리는 단지 위안뿐만 아니라 시간을 초월해서 아름다움과 고상함과 과거를 찬양하기 위하여, 표면상의 기교적 운율적 문법적 교묘함이라고 불리는 것들을 선동하기 위하여, 나는 새로이 발견된 문학에 대하여 언급한다. 그러나 삶과 종교의 밑바닥에 깔려있는, 과학과 모순 되지 않는, 기본원칙을 조종하고 유능한 힘으로 강제하며 사람을 가르치고 훈련시키는 문학, 그리고 이들의 놀라운 결함과 우둔 또는 여자들의 모자와 같은 빈 껍데기를 버리고 전 국민의 구원을 성취시키는 십중팔구 가장 중요한 결과로써, 여러 종류의 소화불량성의 소멸은(따라서 강력하고 상냥한 국민의 대표, 완벽한 미국의 대표를 국정에 참여시켜 책임을 지게 하는) 필요한 것이다.

그리고 이제 이러한 사실과 관점으로 충만 된 개념 속에서, 그리고 그들의 찬성과 반대(아직 兩性과 개인적인 사고까지도 포용된 미국의 민중이 활동하는 본래의 영역 안에서의 명백한 신념과 함께, 그리고 그들 속에서 가장 훌륭한 문학과 윤리적 인식의 폭넓은 기본적 인식까지도)를 암시하는 모든 것을, 나는 나의 사색과 전망과 함께 출발한다.

이제부터 문명의 땅은 유일한 억압과 유일한 권위가 없고, 신분 높은 작가가 선호하는 기준에 의해, 가장 훌륭한 사람의 법에 의해, 타고난 영웅과 종족의 우두머리(일찍이 또는 백년전의 어느 시대에 중요한 지위와 선거나 역동성을 마치 지배했던 것처럼), 그러나 가장 높고 권위가 있는 법보다도 더 높은, 개인과 함께 시작하고 그들 자신의 법으로 다시 끝을 맺는 그들의 모든 지위를 통하여 공동체를 단련시킨다. 주로 그리스도는 절대 정신을 존경하는 인류를 위하여 심미적 정신적 분야에서 각각 단순히 개인적으로 나타난다. 그런 소유 목록 안에 매우 초월적이고 변화에 매우 무감각한(인생처럼) 어떤 무엇이 있다. 그 범주 안에 그것은 이지, 미덕, 신분, 또는 어느 정점 또는 겸손한 무엇과 전적으로 관계가 없는 일반적인 수준에 모든 존재를 위치시킨다. 사람, 국가, 그리고 삶의 정체성이 보편적으로 결집된 것처럼 속세의 성공과 행복과 성장을 위한 공평한 기회와 시민정신의 보호를 위하여, 자유를 위하여, 각각의 분류와 완전한 주제를 부여하는 민주주의의 원리에 의하여, 이곳에 또 다른 분야가 습관처럼 부합된다. 그리고 선거권과 투표의 정치적 한계가 있어야만 한다. 만약 더 이상 없다면, 개체 또는 전체 안에 하나의 명백한 기초와 보편과 일반 강령이 자리 잡게 된다. 

또한 민주주의는 가장 엄격하고 가장 폭이 넓은 특성을 가지고 있는 원리이다. 사람들은 그 안에 결점이 있다고, 그리고 민주주의는 법칙을 버리고 혼란을 야기하는 것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간단히 말해서 민주주의는 우수한 원리이며, 단지 물리적 힘이나 껍데기의 육신만이 아니며, 여기에 더하여 정신으로 대신 채워져 있는 것이다. 민주주의의 원리는 영원히 흔들리지 않는 질서이며, 모든 것들의 원리 모든 원리들의 원리이며, 상속된 원리인 것이다. 이 시대에 있어서 우수한 원리로서의 이 민주주의는 일반적으로 열등한 것들을 압도하고 그 지위를 대신한다. 반면에 나 자신을 위하여 나는 기꺼이 동의한다. 발전하는 경향은 적어도 찬성하거나 반대하지 않는 선에서 관리되어야 하고, 이러한 조건은 엄밀히 해석되어야 하는 첫 번째 계약이다. 개인적 또는 공동체적 외형이 나타날 때까지, 권위 있는 후견이 지속될지 모르며, 정부 자신은 그러한 시대를 지속시켜야만 한다. 중요한 것은 항상 심미적 관점뿐만 아니라, 고고한 정신적 목적을 위한 매력이 없다는 것이다. 보통의 야망은 특권이 주어지고 배타적인 무엇이 되기 위하여 약간 높은 곳을 팽팽히 유지한다. 민주주의의 주인은 민중 속에서 위대성과 건강성을 바라본다. 공통의 입장만큼 잘 이행되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여러분은 이렇게 신성하고 막대하고 보편적인 원리를 가지고 있습니까? 가지고 있다면 그 속에 여러분 자신을 몰입시키십시오.

그리고 모든 것들의 위에 있는 민주주의는 가장 매력적인 기념물이며, 모든 인류와 다양하고 멀리 떨어져 있는 영토를 형제관계로 한 가족으로 유일하게 묶을 수 있고 또 지금까지 묶어왔다. 민주주의는 가장 나이를 많이 먹거나 가장 젊은것을 초월하여 아직도 지구상에서 현실적인 꿈을 간직하고 있는, 그가 좋아하는 철학자이자 시인이며 원로이다. 민주주의는 결코 개성을 절반으로 분리시키지 않는다. 또 다른 반쪽은 부착력과 사랑이 강력하고 모든 것을 녹이며 끈으로 묶고 집합시키고 인류를 동지로 만들고 모든 것들을 형제와 같이 친하게 사귄다. 그렇게 포용된 것들은 신앙심에 의해 생명이 주어진다. 인류와 국가에 있어서 유일하게 최고 가치가 있는 승강기로서의 민주주의는 긍지와 육체와 생명체의 활력으로 숨을 쉰다. 왜냐하면 내가 언급하고 있는 민주주의의 핵은 결국 신성한 원리이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찬란한 아름다움과 전망으로 옷 입혀진 민주주의의 체제는 한 걸음씩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고 가장 우수하고 가장 늦게 맺히는 과일 즉 정신으로 충만 되어 출현될 것이다.  

우리는 민주주의의 일부를 유럽 쪽, 특히 우리나라보다 영국에서 그 일부를 참고하여 기술할는지도 모르는데, 그 이유는 우리 미국인에게는 전적으로 영국의 민주주의가 필요하지 않을지도 모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의문은 앞뒤가 들어맞고, 모든 국민을 단단히 얽어매고 연결시킨다. 오늘날의 자유주의자들은 구시대 또는 중세를 뛰어넘는 이러한 이점을 가지고 있다. 이 원리는 개별화뿐만 아니라 보편화를 추구한다. 이 위대한 언어 ‘은둔자(민주주의)’는 소생되었다. 우리 시대에 상존하는 국가의 모든 위험은 긴장된 출발점의 안정으로부터 출발하는 국민의 확실한 상속 재산인 민주주의보다 더 많을 수 없다. 그 위험은 다른 어떤 것처럼 특권이 주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그 지위가 떨어지게 되고 자존심이 상하게 되고 가치가 없게 만들어진다. 물론 민주주의의 일면일지라도 많은 엉터리 치료법이 있다. 그러나 아직 그것들은 민주주의의 전체의 특성에 실질적으로 영향을 끼치지는 못한다. 만약에 그 엉터리 치료법을 민주주의 안에 섞어 넣고 우상 다시 말해서 민주주의의 신성한 집합체인 국민을 정당화해도 좋다면(또는 진짜 뿔과 꼬리가 달린 악마인 민주주의의 집합체를 만약 강력히 주장한다면) 나는 바로 이것이 민주주의라고 언급한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우리나라 아메리카를 의미한다고 또다시 언급한다. 만약 언급하지 못한다면, 못하였다면? 만약 그렇게 언급하지 못한다면 민주주의는 더 이상 아무 것도 의미하지 못하고, 그러므로 그 광대무변한 가치에 의해, 썩지 않는 권력이라고 할 수 있는 자연의 기운이 항상 발생하는 질병원인 물질을 소화시킬 뿐만 아니라 회피하지도 않고 진실로 멀리 있는 것을 직관적으로 끌어당기기도 하지만 가장 고고한 관습과 삶을 위하여 자양분으로 기여 변화하기도 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미국의 민주주의다. 오늘날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이러한 경험은 서쪽 산들바람을 타고 유럽대륙으로까지 전파시킨다.

그리고 진실로 무엇이든지 어느 문명국가에서든지 폭넓은 민주화의 설립이론에 찬성하거나 반대하기 위하여 요약된 논쟁의 방식으로 언급될지도 모른다. 많은 고통이 이 명백한 사실에 의해 전 유럽대륙에 축적될는지도 모른다. (이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이러한 민주화의 몇몇 형식은 현재 남아있는 유일한 자원이다. 왕조에 대한 불만, 머지않아 그리고 상냥하고 부드럽고 가장 순조롭게 필연적으로 도래할 수밖에 없는 중대 고비와 그로 인하여 발생되는 충격과 왕조의 몰락이 있을 때까지 해마다 그 불만의 목소리가 점점 더 높아진다. 구시대의 세계에서 정치적 수완이라고 불려지고 있는 것들이 진보된 학생들과 숙련공들과 수재들 사이에서 오늘날 토론 없이 군주국화를 계속 시도하고 있거나 민주화를 고대하고 있지만, 그러나 어떠한 방법으로 그리고 어느 계층과 어느 정당에서 가장 신중하게 민주화를 고대하고 있는가 나는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미연방에서의 자유주의의 진정한 위력은 일반 부동산과 일반적 펑온, 막대하게 얽혀 있는 부의 망상조직인 그 재산의 소유권을 더 많이 확보하게 만들 것이다. 사실, 인간의 구조로서 이 다양한 인간 세계 안에 있는 어떠한 대상이라도 스스로 갖고 있는 응집력의 순수한 경이와 필요성과 능력을 향상시키기 위한 실행과 유익성에 의해 함께 최적하게 지켜진다. 그러므로 훌륭하고 다양한 그리고 수백만 마일을 점령하고 있는 국민성은 보통의 재산 소유자들이 모여있는 전체의 안전과 인내심의 원리에 의해 단단히 붙잡히고 결합되게 만들어진다. 문학도 마찬가지로 어떤 열망과 함께 잘 보존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다행히 그 씨앗은 이미 잘 뿌려져있고, 이제는 잘라낼 수 없는 뿌리로 깊이 자랐다.    

아직 미국은 윤리적으로 예술적으로 창조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미국은 인물과 저서와 관습 등의 모델을 유별나게 모르고 있는 듯하다. 현재 미국이 처해있는 상황과 유럽 대륙을 위하여 충당되는 것은 오직 추방과 이국적이라는 것뿐이다. 미국 사회가 권위적이라고 일컬어지게 된 표면 위에 비추어진 현재의 미국인은 사회적 또는 탐미적 민주주의를 받아들이거나 그 상황에 빠져들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모든 경향은 바로 그 반대의 상황에 처해있다. 구세계에서의 외관과 양상은 순전히 비정신적이고, 전적으로 세습 계급의 관념 위에 그리고 단지 껍질로만 획득된(결코 유창하지 못하고 경쟁적이지 못한) 그것들이 오늘날 미연방공화국의 표면에 현존하고 있는 것보다 더 높이 표본으로 우두머리로 치켜 올려져 있었다. 현대인의 담화는 이러한 목소리를 들려주고 있으며 이러한 것이 바로 문화적 담화이다.

우리는 의외로 적과 함께 숙영하고 있음을 발견한다. 이러한 담화문화, 또는 대비와 모든 주제들에 의해 포함되고 상징되어온 것들은 사실 약속되도록 재촉하는 동기였다. 어떤 문제들이 떠오른다. 거만한 이교도의 계층을 서둘러 창조하는 문화의 과정은 교육되거나 수용되거나 실행되지 않는다. 누가 믿지 못하는가? 무수히 많은 민중 속에서 한 인간은 자기 자신을 잊어버리고 말 것인가, 그리고 이에 관련되어 그의 모습이 만들어질 것인가, 한편 단순히 훌륭하고 건강하고 용감한 인간으로서의 일부분이 삭감되고 잘려 나가고 말 것인가, 마치 마당 한 구석에 방치된 궤짝처럼. 당신은 옥수수와 장미를 재배하고 과수를 기를 수 있다. 그러나 누가 산의 정상과 바다와 구름의 멋진 조화를 연출할 수 있을 것인가? 끝으로 쉽사리 얻어진 대답은 그 담화문화가 국민을 조직화하고 돕기 위하여 애를 써야만 하고 기본적으로 성장시키려는 능력과 단호한 반응과 태도를 보아야 한다는 것인가?

나는 그 명칭 그 담화에 전적으로 반대하지 않는다. 그러나 앞서가려고 하는 계층 안에, 급진적 변화의 범주 안에 처해있는 이 나라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하여 분명히 역설하여야만 한다. 나는 일부 계급을 위하여 또는 응접실과 강의실을 위하여 요구하지 않고 선택된, 그러나 실생활에 있어서의 안목과 함께 서부의 노동자 농업노동자와 기술자, 폭넓은 여성계층 또는 중간계급과 노동자계급, 그리고 완벽한 여성 평등과 위대하고 강력한 애국심(모성애)을 비교 검토하여 문화의 프로그램을 요구하여야만 한다. 나는 가장 폭넓은 인간 영역을 일반적으로 충분히 포함시킨 범위로서의 이 프로그램과 이론을 요구하여야만 한다. 형식적 개성의 형성은 인간의 상위 수준의 관습에 적합한 중심적 의미를 가지고 있어야만 한다. 그리고 민중에 부적합한 조건에 의해 제한되어서는 안 된다.

물론 미국에서 모든 국민을 위하여, 우리는 동양적이며 봉건적이며 고대 아테네의 시민 회의적인 세계가 우리에게 유산으로 물려준 것으로부터 고도의 개성 존중의 형식을 전적으로 다시 고쳐 만들어야만 한다. 그리고 아직 심사숙고할 만한 가치가 없는 것이 아닌 영상적이고 멜로 드라마적이며 상상적이며 심미적인 미국에 있어서의 모든 분야를 포용하여야만 한다. 그러나 그러한 분야들은 서글픈 일을 만들어내고 이상한 시대착오가 우리 주위를 절박한 위기의 상황으로 빠져들게 한다. 물론 그 낡고 죽지 않는 원리들은 살아남는다. 과제는 오늘날 그 낡은 원리들을 성공적으로 새로운 결합에 적응하도록 하여야만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터무니없는 것이 아니다. 나는 오늘 여기에 잡음 없이 충분한 스케일과 완전한 개성의 바탕 위에 하나의 공동체를 구상할 수 있다. 즉, 일반 서민 계급의 수많은 선남선녀들 한 쌍이 천재성과 부의 여유도 없고 오직 덕망만 가지고 있고 정숙하고 부지런하고 상냥하고 단호하고 친절하고 독실함만으로 팽팽히 서로 끌어당기며 엉켜 있는, 그런 운수소관의 어느 활발한 서부 이주민 또는 도시를 말한다. 나는 현행 법률과 현명하게 선출된 권력 속에서 조직된 공동체를 상상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농업과 건축과 무역과 법정, 우체국, 학교, 선거 등 모두가 참여하는 대표를 뜻한다. 그리고 나서 여생의 중요한 것은 각자 개인적으로 자유롭게 가지를 뻗고 꽃을 피우고 황금 열매를 맺는 것이다. 젊은 세대와 기성세대 그리고 그 후세의 모든 사람들을, 몸과 마음과 정신 속에 균형 있게 단련된 게다가 성숙된 그야말로 진실한 개성을 볼 수 있다. 나는 이러한 것들이 필연적으로 희귀하거나 어렵지 않고 오직 우리 세대의 시민적 그리고 일반적 필요 속에 낙천적으로 조화될 수 있는 경우를 상상할 수 있다. 그리고 나는 역사 또는 시처럼 아름다운 것들의 어느 상투적인 성공보다 더 훌륭한 성공의 절정을 실현시킬 수 있다. 어쩌면 노래 불려지지 않고 극화되지 않고 평론이나 전기 속에도 들어있지 않은, 어쩌면 기존의 오하이오, 일리노이, 미조리, 또 어느 곳의 공동체보다도 실제적으로 실속이 있는, 이제까지 모든 것들이 머릿속에서만 모습을 보여왔던 가장 값싸고 상스러운 삶보다도 더 훌륭한 성공의 절정을….

여전히 수준 높은 문학 작품의 생산을 위하여 또 다른 기준과 암시가 존재한다. 사회적 그리고 정치적인 세계를 실제로 균형 잡히게 하고 유지시키게 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마음속에 잠재되어 영속하고 있는 직관적 판단력과 인간성과 공정성과 용감성과 예의바름처럼 입법과 경찰력과 법규준수 의무와 형벌로 두려움을 갖게 하는 것이 많다고 해서 지나친 것은 아니다. 사실 이렇게 지속적인 조정과 통제와 스스로 부족 되는 것을 보충하는 단속은 민주주의의 필요조건이다. 그리고 가장 고결하고 폭넓은 민주문예의 목표는 그 필요조건의 싹을 잘 틔우고 길러 민주주의의 튼튼한 기둥이 되도록 만들 것이며 개인과 사회 속에서 이러한 판단력을 강화시킬 것이다. 우수한 개체에 의해 지배되는 일반적인 하급 개체의 강력한 지위는 간접적으로 도움을 받게 되며 튼튼해지고 그러나 개체 또는 집합 민주주의를 위하여 문학 작품의 형체 안에, 확실히 위대하고 열정적인 육체 안에 서로 어우러져 그러한 것들은 하나의 위대하고 자랑스러운 정신으로 조화된다. 

여전히 그러한 상황에 대비하면서, 나는 그러한 사실 다시 말해서 강력한 자연철학자와 웅변가와 시인과 이 연방이 요구하는 필요성에 어쩔 수 없이 직면한다. 위험한 그리고 폐허와 이반을 넘겨받은 이 시대에 다가올 재결속의 구심점으로서. 왜냐하면 역사는 영구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러한 진술의 결합을 변통하고 되돌려 생각함으로써, 미국의 장래 문제는 어두운 만큼 믿을 수 있는 존경심 또한 거대하다는 것을 내포한다. 자존심, 경쟁, 분열, 부도덕한 고집, 전형에 위배되는 허가와 같은 것들이 한 배의 병아리들처럼 이미 우리에게 안겨져 있다. 이렇게 다루기 어렵고 광대한 것들을, 성서 욥기에 나오는 그 거수와 같이 강력한 힘을 누가 붙잡아 둘 수 있겠는가? 성서에 나오는 거대한 바다 동물 레비아단과 같이 거대한 힘을 누가 속박시킬 수 있겠는가? 거대하면서도 불안정한 직조기의 직조과정에서 실이 옆으로 벗어난 것과 같이 정도에 어긋난, 무섭고 위험스러운 것들을 골라내어 밖으로 드러내 보여야만 한다. 그것을 부정하는 것은 무익하다. 민주주의는 가장 두껍고 위해하고 가장 치명적인 식물과 설상가상으로 침입자들을 불러들이는, 좀더 새롭고 크고 강하고 예리한 다시 말해서 어느 기관의 결함을 보충하는 또 다른 기관과 강제자를 필요로 하는, 이러한 것들의 결실을 무성히 자라게 한다.  

사실 전체를 포옹하는, 거부할 것이 아무 것도 없는 그 많은 것을 포옹하고 있는 우리나라는 국가 자체를 불사르는 그야말로 전체를 불사르는 열정을 가슴속에 품고 있다. 우리나라의 역사가 짧은데도 불구하고 이미 멸망과 타락이 밀려 닥쳤다. 그리고 만약 그러한 것들을 피한다 할지라도 틀림없이 다시 밀려닥칠 것이다. 닥쳐올 그 시기가 언제인지 모르지만, 최근 남북전쟁 동안에 무수히 많은 위기를 아슬아슬하게, 그래서 최선의 삶, 끝까지 버리지 않는 모든 희망과 가치에 의지하는, 폭풍 속의 배처럼 최선을 다하여 우리나라는 그 위기를 목숨을 잃은 사람들에 의해 어떻게 극복될 수 있었는지 나는 안다. 아 슬프다! 그들을 생각하면. 그들이 고통과 피와 피비린내를 생각하면. 그들의 비참하고 통렬하고 끝에 매달린 위기를 생각하면.

오늘날까지도 이러한 악순환은 계속되어, 도무지 믿어지지 않는 경박함과 정당들의 맹목적인 격분, 불신, 상층계급의 지도자들의 결점은 많은 열등심과 겉치레적인 민중의 천박함(그러한 노동의 문제는 매년 급속하게 마치 입을 크게 벌리고 있는 항만처럼 간격이 벌어지고 있는)을 가지고 우리는 무엇을 전망하겠는가? 우리는 격랑의 위험한 바다를 항해하고, 해류와 그 소용돌이(아무도 경험하지 못했던 시련)를 헤치고 나와 어디로 갈 것인가? 고난을 극복한 이 절대적인 힘은 이 나라의 눈앞에 장엄한 마치 태양처럼 빛나는 운명의 모습을 펼쳐 보여준다. 그러나 아직 깊은 내적 고난과 부패한 결점을 가지고 있는 인간의 무리가 있다. 말하라, 자, 앞날의 진로와 발전계획과 오래되고 다양한 그리고 고통스런 실책과 분노의 북받침을. 당신은 당신의 마음속 깊이 있는 말을 하고, 나는 과거와 현재 등 모든 어두운 그늘을 넘어, 구왕조 시대의 역사를 내려놓고, 나를 극복하고, 그러한 것들이 마치 아무 가치도 없는 것처럼(새로운 민주주의의 역사를 만들고, 구시대의 역사는 난쟁이로 만들고) 절대 권력의 절대 권력이 될 것이다. 나는 혼자서 웅대하면서 최고 절정인 시대를 열어 나갈 것이다. 만약 이 나라, 오, 아메리카라고 하는 이 나라가 진실로 영광을 얻게 된다면, 당신의 영혼도 영광을 얻게 될 것이다. 그러나 아직 희생이 있고, 이미 희생의 표본이 있다. 당신은 배처럼 무르익었으며  웅대하다고 생각하는가? 만약 당신이 웅대하다고 믿는다면, 시대와 세기를 뛰어넘어 희생을 극복하여야만 한다는 것을 알아라. 희생에 비례하는 대가를 치러야만 한다. 왜냐하면, 당신 역시 다른 모든 나라들과 마찬가지로 투쟁자, 배반자, 업무에 있어서 간교한 사람, 연주창처럼 썩어 고름이 나는 富, 포만한 성공, 악마적인 탐욕, 격정의 지옥, 신뢰의 쇠퇴, 오래도록 뒤로 미루기, 화석과 같은 무기력, 끊임없는 혁명의 필요성, 예언, 폭풍우, 죽음, 탄생, 새로운 기획과 사람과 이념에 대한 격려를 하여야 하기 때문이다. 

이제 이러한 민주주의를 전망하기 위하여 최고의 정점에 도착하였다. 나는 대표로서의 한 계급의 설립 속에 公表된 확신이(새롭고 보다 위대한 문예작품, 그 가능성, 아니 확실성은 전적으로 이들의 심사숙고 하에 있다) 있다는 것을 고백한다. 그리고 그 나머지, 다른 정당들, 상부구조와 같은 것들은 모두 그 속에서 발견된다. 그것은 나에게 실제로 국가의 현황과 장래와 민주주의의 발전뿐만 아니라 영속적인 것으로 보인다. 현대문명의 예술적 물질적 기반 속에 삶의 교감과 영위방식, 지식의 강력한 주입, 가난과 마찬가지로 부유가 만들어내는 부패의 영향력, 개성 속에 잠재한 최상 이념의 不在(시대의 경향과 현상의 오랜 연속, 충분한 저항력은 거의 없고, 이제 빠른 증기기관과 함께 어느 곳에서나 철 주물의 양식 같은 인간성의 시대를 만들어내고 있는), 봉건시대와 비교되는 모든 것들을, 아직 우리에게는 최고의 것으로 만들고 받아들일 수 있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은 아무 것도 없고, 그리고 대양처럼 실제적이고 장엄하며 끊임없고 수없이 많은 민중의 융합을 전적으로 환영한다. 나는 먼 미래 속에 도착하거나 축적된 선견지명으로서의 결과와 함께 미연방 속의 현재의 삶을 감내하는 단독의 물질적 모든 이 엄청나게 크고 유력한 역할에 대하여 언급한다. 그들은 적어도 정신적인 의의를 부여하는 것과 같은 목적을 위해, 깨끗한 양심을 위해, 순수한 탐미를 위해, 절대적이고 근원적인 남성다움과 여성다움을 위해, 또는 공허 속에 움트고 있는 현대문명 즉 모든 진보를 위해, 희귀하고 엄청나게 큰 역동성이 주입되고 있는 시대에 직면하고 있음이 틀림없다.

성공의 시대가 오기를 기대하며, 그리고 그 속의 새로운 목록(사람과 마찬가지로 국가 안의 끊임없는 실천, 발전, 얽힌 일이 잘 풀려나감)으로서의 삶은, 우리가 목적하는 강력한 암시, 목표가 설정된 기대와 희망, 언급되거나 언어로 기록된 새롭고 강력한 법률을(단지 교육적 형식, 正丁, 균형, 전통의 고수, 비 예의적인 사건, 좋은 일, 명확히 언급된 사상뿐만 아니다) 위하여 존재한다. 그러나 언어는 자연의 숨결로 자연스럽게 이루어진다. 언어는 사람을 비약시키고, 대부분 반동력의 효과를 위해 고무시켜 식물처럼 무성히 자라게 하는 무엇을(삶과 개성의 부신[符信], 그리고 그것을 암시하고 필연적이게 하는 것보다 더 드물게 언급된다) 위해 유념한다. 사실, 최상층 계급의 상상력을 위해, 특히 최고 수준의 시를 위해 쓰여진 문학작품의 새로운 이론은 이 국가에 개방되어 있는 유일한 과정이다. 독서의 과정은 비몽사몽과 같은 상태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가정 하에, 저서의 발간이 요청되고 보급된다. 그러나 독서는 고도의 정서 속에서 이루어지는 하나의 실천이며 정신적 단련의 투쟁과정이다. 독자는 자신을 위하여 독서를 하는 것이며, 독서는 신중히 이루어져야만 하고, 사실 사람들 자신은 시와 논조와 역사와 형이상학적 비평 즉 텍스트가 암시와 그 실마리와 작품의 발단 또는 줄거리를 제공하는 것으로 조직하여야만 한다. 저서는 완벽한 것이 되어야 할 필요는 없으나, 저서를 읽는 독자는 완벽해야만 한다. 그렇게 하는 것만이 유연하고 강건한, 잘 단련된, 직관적인, 자기 자신에 의지하는 정신의 국가를 만드는 것이며, 또 그러한 작가의 무리가 거의 없는 것도 아니다.  

여기서 조사해 보면,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도서관 안에 우리는 수없이 많은 책과 기록 등 가지고 있는 것이 적지 않다. 그러나 전적으로 그것에만 의존하면 직접 간접으로 피가 흐르지 않는 핏줄, 힘이 없는 팔, 좋지 않은 적응처럼 그 위험이 얼마나 심각한가. 우리 국민의 관심은 신학, 역사, 시, 정치, 그리고 과거의 개인적 양식이(예를 들면, 영국의 깊고 오랜 과거) 우리 자신 또는 우리의 문학과 함께 어우러져 형성될 필요가 없다고 보는 데 있다. 그러나 보다 더 명확한 비교, 충고, 그리고 우리 자신의 먼 미래의 웅대함, 차이, 미래의 역사, 종교, 사회적 관습 등 능숙하게 마무리하는 기능공이 되어야 한다. 우리는 거의 모든 것이 봉건적 동양적 제도, 종교 아래 인간성에 대한 언급과 함께 쓰이고 노래 불려지고 진술되고 고착되었음을 본다. 다른 한편, 이 연방의 제도와 함께 양립하는 양식 속에서 다시 쓰이고 다시 노래 불려지고 다시 진술될 필요가 있다. 그리고 그 한계가 다가오고 그들과 동질성에 순응한다.

물질적 코스모스의 세계에서처럼 우리는 기상학적 동식물적 자연의 교환 뒤에 인간이 탄생되고 흥기되고, 그 세계를 증명하고 집중시키고 그 세계를 경이와 사랑으로 향하게 하는 것을(세계를 관조하고 세계를 장식하고 보다 우수한 영역으로 운반하는) 본다. 그래서 옛날의 낡은 사회적 정치적 세계는 밖으로 끌어내고, 이제 이 연방을 일으켜 세운다. 우리는 많은 것들이 확립되고 완성되는 것을 상상하는 동안, 실제적으로 가장 웅대한 것들이 항상 남아 있음을 바라본다. 그리고 신세계의 사업은 끝이 없고 오직 공정하게 시작되고 있을 뿐이다.

우리는 우리나라 아메리카의 문학과 탐미 등을 바라본다. 마찬가지로, 실제적으로 형식, 발산과 진술, 가장 깊고 기본적인 기초와 가장 고귀한 마지막 의미, 역사와 인간의 형식 속에서 얻게 되는 것, 묘사되는 것, 불변의 원칙과 미의 조건 아래에 있는 우리 자신의 외관, 주체적 결속과 대상의 표현, 우리 자신의 결합, 영속, 관점으로서, 그리고 가장 많이 축적되고 기록된 국가적 정신활동, 개성, 호소력, 용맹, 전쟁, 그리고 문학까지 바라본다. 이 모든 것은 국가적 문학과 예술적 명확한 진술 속에서 영속되고 절정에 이른다. 그리고 그것은 국가적으로 제1신분의 공식화가 아니고, 절정에 오른 위의 모든 것들은 몸부림치며 전진하고, 한편 강요하고, 고귀한 신분, 단지 희미한 불빛의 스침을 증명할 뿐이다. 그러나 진실로 그것을 갖게 됨으로써, 절정에 이른 것들은 스스로 이해될 것이며, 고귀하게 공헌하며 살고, 퍼져나가고, 진행되며, 스스로 안전하게 균형을 유지하게 되고, 조명을 밝히고 밝혀지며, 형식적으로 완성된 세계, 물질적 뿐만 아니라 정신적 세계까지도 신성한 모국이 될 것이다. 모든 시대의 끊임없는 성공 속에서. 이 중요한 것들은 보편적으로, 피가 흐르는 육신과 구체성과 민주주의적이고 인기가 높은 것으로서, 이 미래의 모든 상부구조는 영원히 안주할 것이다.           


 

각주
1) Encyclopaedia Britannica, 1996 ed., s. v. "John Stuart Mill." 영국의 역사학자, 경제학자, 철학자(1806~1873). 19세기 영국 경험론의 대표적 철학자로서 귀납법을 대성. 영국의 사회주의 이론의 아버지라고 불리어지는 한편, 자유주의 경제학의 최후의 자리를 지킴. 저서로는 “경제학 원리”, “자유론”, “부인론”등이 있고, 그리고 그는 논리학을 점유하고 있던 폭넓은 철학적 문제에 대하여 썼으며, 1865년에 그는 “William Hamilton 경의 철학에 대한 검토”와 “Auguste Comte와 실증철학”을 출간했으나, 두 저서의 저술 동기는 다분히 정치적이다. 그것은 그가 영국에서 굳건한 요새로 일컬어지고 있는 직관철학을 William Hamilton의 저술 및 언급과 관련시켰기 때문이다. Auguste Comte와 견해를 달리하여, 그는 일찍이 Auguste Comte가 주장했던 실증철학의 이념과 또 나중에 언급한 인류종교를 날카롭게 비판했다. 그러나 Auguste Comte의 이념에 대해서는 전에 자주 했던 것처럼 칭찬했다. 왜냐하면, 그 이론이 George Berkeley와 David Hume의 견해인 “진화”와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그가 인류종교를 공격한 이유는, 단지 인류의 고통을 신성한 교권제도로 속이려는 또 다른 시도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 언급되고 있는 그의 주장은 어려서부터 가지고 있던 Jeremy Bentham과 James Mill의 주장에 많이 근접해 있는 것으로 주목될 만하다. 그리고 1869년에 그의 부친이 출간했던 “사람 마음의 현상”에 추가 예제와 각주를 달아주는 효행으로서 나타났다. 

James Mill(1773~1836) : 영국의 경제학자, 철학자, 대표적 자유주의자로 당시의 벤담주의, 공리주의의 보급에 공헌하였다. John Stuart Mill의 부친.

Jeremy Bentham(1748~1832) : 영국의 철학자, 법률학자, 경제학자. Adam Smith에 사숙. 공리가 모든 행위의 궁극의 원칙이며,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 인생의 목적이라고 주장. 법학자로는 자연법 사상에 반대하고, 경제학자로는 철저한 자유방임논자임. 저서로는 “도덕 및 입법의 원리” 등이 있음.

William Hamilton(1788~1856) : 영국의 철학자. 스코트랜드 상식학파의 최후의 대표자로 불림. Reid 등의 심리주의를 칸트 철학에 의해 수정함. 그의 논리학에서는 판단론을 두 개의 집합 사이의 양적 관계의 이론으로 다루어 뒷날의 기호 논리학으로의 방향을 제시하였음. 저서로는 “형이상학·논리학 강의” 등이 있음.

 

 


휘트먼(Walt Whitman, 1819~1892)

 

미국 뉴욕주 롱아일랜드 출생. 아버지는 목수였는데, T. 페인(1737∼1809)의 인권사상 등에 심취하였고, 어머니는 네덜란드 이민 출신으로 자유롭고 민주적인 기풍을 지녔다. 4세 때 브루클린으로 이주, 가정사정으로 초등학교를 중퇴하여 인쇄소 직공으로 있으면서 독학으로 교양을 쌓았다. 1835년 고향에 돌아가 초등학교 교사, 신문 편집 등에 종사하였다. 그 후 뉴욕으로 옮겨 저널리스트로 활동하기 시작하여, 1846년에는 브루클린의 미국 민주당계 일간지 「이글(Eagle)」의 편집자가 되었다. 그러나 1848년 “프리 소일(free soil) 운동”을 지지하는 그의 논설이 민주당 보수파의 분노를 사게 되어 사임, 전부터의 염원이던 프리 소일파의 주간신문 「자유민(Freeman)」을 창간하여 그 주필로 활약하였다. 그러나 또다시 민주당 보수파의 공격을 받고 겨우 1년 만에 사임하였다.

1850년대에 들어서자, 그는 합승마차의 마부석 옆에 앉거나 나룻배에 타거나 하여 민중의 생태를 관찰하고, 또는 아버지의 목수 일을 도우며 많은 시간을 독서와 사색으로 보냈다. 이 내부침잠(內部沈潛)의 시기를 거쳐서 그의 시인으로의 전신(轉身)이 이루어졌다. 1855년 시집 「풀잎(Leaves of Grass)」을 자비 출판하였는데, 이것은 종래의 전통적 시형(詩型)을 크게 벗어나 미국의 적나라한 모습을 고스란히 받아들여 찬미한 것이었다. 그러나 제3판(1860)에 이르자, 새로 수록된 「카라마스」 등의 시군(詩群)을 통해서 사랑과 연대(連帶)라고 하는 일정한 주장이 표면화하기 시작하여, 이른바 ‘예언자 시인’으로의 변모를 드러냈다. 논문 「민주주의의 전망(Democratic Vistas, 1871)」에서도 미국사회의 물질주의적인 경향을 비판하고, ‘인격주의’의 필요성을 주장하였다.

1862년 겨울, 남북전쟁에 종군 중이던 동생 조지가 부상당한 것이 계기가 되어, 1863년 이후는 관청에 근무하면서 워싱턴의 병원에서 부상병을 간호하기도 하였다. 어떻든 남북전쟁을 극복하고 통일을 지킬 수 있었다는 것은 그에게는 커다란 기쁨이었으며, 자신의 고통과 죽음을 견디는 젊은 병사들의 모습을 직접 목격한 경험은 그의 마음속에 미국의 미래에 대한 희망을 불러일으켰다. 1865년, 남북전쟁을 소재로 하는 72페이지의 작은 시집 「북소리(Drum-Taps)」를 출판하고, 이듬해 링컨 대통령에 대한 추도시(追悼詩) 「앞뜰에 라일락이 피었을 때(When Lilacs Last in the Dooryard Bloom’d)」를 포함한 24페이지의 「속편(續編)」을 출판해서 곧 「풀잎(4판, 1867)」에 재록(再錄)하였다.

1873년에 중풍의 발작이 있었으나 요양에 전념, 1879년에는 서부 여행, 1880년에는 캐나다 여행도 할 수 있을 만큼 회복되었다. 1882년에는 산문집 「자선일기(自選日記) 기타」를 출판, 문명(文名)도 높아졌다. 1884년에는 「풀잎」의 인세(印稅)로 세운 뉴저지주 캠던의 미클가(街) 자택에는 내외의 방문자가 빈번히 드나들었다. 그러나 체력도 약해졌지만 그 자신은 점차 염세주의로 기울었으며, 1888년 재차 중풍이 발작한 후, 1892년 폐렴(肺炎)으로 세상을 떠났다.

 

 

김형원의 "민주문예소론"과 비교해 보기 바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