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현대시사에 대한 철학적 고찰의 빛나는 성과(장수익, 한남대학교 교수)

                 

 

 

주근옥

                                                                            
  책머리에

 본고를 준비하면서 생각한 것은 문학연구도 어차피 과학이라면, Thomas S. Kuhn이 주장하는 패러다임을 수용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었다. 그렇다고 한다면 오성의 범주 안에서 나는 필연성의 꼭두각시놀음을 해야 한단 말인가. 아니면 마치 "제로 섬 게임(zero-sum game)"을 즐기는 사람처럼 그 게임에 중독이 되어 미궁 속으로 빠져들고 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으로 머릿속이 꽉 메워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문학작품 속에는 오성의 범주를 초월하는 그 무엇이 들어있음을 부정하지 못한다. 이 초월의 문제에 부딪쳐 마침내 나는 과학의 상위어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상위어는 도량형의 原器처럼 모든 문학이론과 문학작품을 재고 달아보는 표준이 될 수는 없는 것인가 하는 생각에 머물게 되었던 것이다. 굳이 따지고 든다면 패러다임을 뛰어넘는 패러다임으로서의 어휘장, 다시 말해서 언어적 계열구조(paradigmatic structure)를 떠올리고 있었던 것이다. 이렇듯 구차하게 언급하고 있지만 실은 인식론을 언급하고 있는 것이며, 그 가운데 I. Kant의 비판론을 떠올리고 있는 것이다. 코페르니쿠스의 전회로 일컬어지고 있는 I. Kant의 이 비판론을 비판하며, 신은 객관으로서의 물자체가 아니라 타자와 대자가 변증법적 운동을 하는 가운데 상호 인정하는 순간에 강림하는 것이며 이것이 바로 절대지라는 것이 G. W. F. Hegel의 주장이다. 이 절대지를 J. Habermas는 모더니티라고 하며, 문학에서 처음 이 모더니티가 출현한 것은 C. Baudelaire의 시라고 주장한다. 본고의 논지는 이 이론에 근거하고 있음을 솔직하게 밝히는 바이다. 그러나 문학작품의 안에 깊이 숨어있는 이 이성의 세계를 포착해낸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작품 해석의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다양한 이론이 등장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이 다양한 이론들, 다시 말해서 F. W. Nietzsche, M. Heidegger, M. Foucault, J. Derrida, 그리고 G. Luk cs, M. M. Bakhtin 등의 이론들도 실은 비판론과 정신현상학의 오성 또는 범주를 해체하거나 이들을 상호 인정하는 차이의 정도에서 출발하고 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본다. 그리고 이 이론들은 각기 그 색깔의 선명도와 날카로움을 앞세우고 있지만 작품 안에 숨어있는 자유로서의 이성을 탐색하는 방법론에 있어서는 만족할 만한 것을 갖고 있지 못하다 것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본고에서는 Roland Barthes와 A. J. Greimas의 기호학을 그 방법론으로 적극 수용하고자 하였다. 왜냐하면 이들의 기호학은 진리의 의미나 진리의 기준을 제시하는 학문이라기보다 이것 특히 은거하고 있는 자유로서의 모더니티를 탐색하는 도구로서 적합하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이러한 철학과 방법론을 원기로 삼아 한국시의 변동과정부터 상징주의 내지는 자유시론이 들어오기까지의 시론과 시를 재어보고 달아본 결과 적지 않은 차이가 있음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것은 신체시의 기점은 崔南善의 "海에게서 少年에게"가 아니라 이승만의 "고목가"가 만들진 시기로 앞당겨져야 한다는 것을 비롯하여 자유시가 현대시라고 하는 통설 내지는 정설이 수정됨과 동시에 정형시 또한 현대시가 될 수 있다는 결과로 나타났다. 이러한 결론은 물론 원기로서의 형이상학과 기호학을 얼마나 정확하게 필자가 인식하고 기술하였는가에 따라 편차가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지 않을 수 없음을 밝히지 않을 수 없다. 워낙 淺學菲才한 필자로서는 피할 수 없는 일이다.

끝으로 본고가 나오기까지 심사를 하며 잘못된 곳을 지적하고 이끌어 주신 문덕수 박사님을 비롯하여 한상수, 최원규, 민찬, 송기한 교수님께 진심으로 감사한 마음을 전하고 싶다. 아울러 뒤에서 격려하며 지켜봐 주신 김영진, 김정아, 박명용, 이진우, 김용재, 한진석 교수님, 그리고 졸고의 출판을 기꺼이 허락해 주신 시문학사의 김규화 선생님께도 머리 숙여 감사한 마음을 전하고 싶다.

2001년 3월
남쪽의 꽃 소식을 기다리며
삼가 선고의 영전에 무릎을 꿇고
저자

차 례

Ⅰ. 서론 3
1. 문제의 제기 3
2. 연구사 검토 5
3. 연구 방법론 25

Ⅱ. 한국시의 변동에 대한 문화학적 조명 27
1. 문학진화론의 반성 27
2. 이식문학사론의 반성 62
3. 마르크시즘에서 일탈한 이식문학사론 70
4. 한국시의 문화변동론적 접근 83

Ⅲ. 모더니티에 대한 에포케와 탐색 94
1. 제약의 객관적 세계관 94
2. 무제약으로 진보한 세계관 113
3. 모더니티 탐색 도구로서의 기호학 165
가. Roland Barthes의 신화 165
나. A. J. Greimas의 심층구조 175
1) 기호학적 강제의 상호작용 175
2) 설화문법의 기초 188

Ⅳ. 시에 있어서의 모더니티 204
1. C. Baudelaire의 深淵 213
2. Correspondances(相應)의 구조 225

Ⅴ. 한국시 변동과정의 모더니티 229
1. 진화시의 구조 229
2. 전파시의 형성과정 234
가. 찬송가의 수용적 성격 234
1) 전파의 경로 234
2) 찬송가의 번역과 창작 237
나. 창가의 문화접변적 성격 243
1) 서양악곡에 첨가된 창가 245
2) 일본 창가를 모방한 창가 246
3) 先詞後曲의 순수 창작 창가 250
다. 신체시의 문화접변적 성격 259
1) 영시의 영향 259
가) 영어교육과정의 수용 259
나) 찬송가 영향의 표층구조 261
다) 모더니티 함축의 심층구조 272
2) 일본 신타이시(新體詩)의 영향 280
가) 일본의 H. Spencer 이론의 왜곡 수용 280
나) 신타이시(新體詩)의 영향 288

Ⅵ. 현대시 형성과정의 모더니티 305
1. 모더니티의 탐색을 향한 微動 318
2. 자유운율 속의 모더니티 324
3. 정형운율 속의 모더니티 354

Ⅶ. 결론 387

참고문헌 391
자료(챵가집) 406

Ⅰ. 서론

1. 문제의 제기


   한국시의 변동과정에 나타난 진화시인 사설시조의 경우에 운율의 파격현상을 볼 수 있고, 특히 朴喆熙의 말처럼 自說性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他說性이 랑그 차원의 보편적·사전적 의미인데 반하여 자설성이란 파롤 차원의 개별적 의미로서, 사설시조뿐만 아니라 일부 평시조에도 나타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자설성이 아니라 심층의미라는 것을 미처 파악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우리는 이 심층의미의 모더니티를 자설성(개별성)과 연관하여 살피고 변별해내는 것을 하나의 문제로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개화시와 개화가사의 경우 그 의미가 표층으로 표출되어 있는 단층구조로서 오히려 "홀거사"와 같은 일부 사설시조의 중층구조보다 퇴행한 수준이라는 것을 문제로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찬송가가 한국시에 미친 영향에 대해서 일부 학자들에 의해 제기되고는 있지만, 그다지 큰 관심을 갖고 있지 못한 것이 현실이다. 그러나 찬송가의 원문은 전형적인 영시의 형태로서, 번역을 통하여 또는 창작을 통하여 한국시에 끼친 영향은 결코 낮게 평가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영어와 한국어는 언어구조가 다르기 때문에 원시를 번역하는데 그 운율을 그대로 따를 수는 없지만, 어느 정도 비슷하게 Metre나 Stanza는 모방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런 구조를 모방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찬송가에는 곡이 붙어있어, 번역할 때에는 그 곡에 음절을 맞추지 않을 수 없으며, 악절은 시에 있어서의 한 행과 같고 한 소절(마디)은 시의 Metre와 같은 것이기 때문에, 자연히 영시의 형태가 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게다가 7편의 창작 찬송가가 있다는 것은, 찬송가를 그냥 간과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찬송가를 한국 시문학사에 편입시키지 않을 수 없다는 문제가 제기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창가는 기본적으로 개화시유형에서 분화한 것으로 보이며, 그러나 개화시가 2행연으로 자체 진화한 것과 비교하여, 창가는 찬송가의 영향을 받아 4행연으로 변화한 것이 특징이다. 한편 개화시의 4·4조의 음수율이 7·5, 8·5, 6·5조로 진화하여 창가에 수용되고 여기에 악보가 수반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 악보는 물론 서양 음악에 근거를 두고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주조를 이루고 있는 7·8·6조의 음수율은 엄밀하게 말해서 3·4, 4·4, 3·3조의 合音數가 거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창가도 찬송가와 마찬가지로 先曲後詞의 방식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전통 운율을 염두에 두고 창작할 여유가 없었다는 것이 필자의 기본입장이며, 그후에 先詞後曲의 창가에서도 서양악곡의 형식을 따르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에 전통 운율보다는 서양악곡의 Metre(小節) 형식을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이 문제로 제기된다.

신체시의 형태는 "舊作三篇"이나 "海에게서 少年에게"에서 보는 바와 같이 분연 단위의 정형성이 있다고 하지만 그렇다고 엄격한 율문이나 정형으로 보기에는 파격적인 자유가 너무 강하고 완전한 산문이라고 보기에는 율문적인 정형성이 청산되지 못한 반율문적·반산문적인 과도적 성격을 보여주고 있다고 하는 宋敏鎬·金春燮의 견해가 있다. 그리고 「大韓學會月報」 제3호(1908. 4)에 실린 崔南善의 "나는 가오"도 신체시의 범주 안에 포함된다고 주장하지만, 그러면서도 신체시의 여러 특징들을 소박하게 갖추고 있는 "나는 가오"는 「少年」 창간호(1908. 11)에 실린 "海에게서 少年에게"같은 신체시의 형태를 형성하는 과정에서 생겨난, 신체시의 바로 전 단계에 해당하는 작품이라고 하면서 자신의 판단에 대해 주저하는 태도를 나타내는 權五滿의 견해도 있다. 그러면서 그는 崔南善이 신체시의 형태를 만들어낸 경유를 기독교 찬송가·창가·일본의 신타이시(新體詩)의 영향이 아닐까 하는 견해를 제시하면서 특히 찬송가의 영향에 대해서 깊은 관심을 보이고 있다. 그렇다고 한다면, 이렇게 막연하게 기술하기보다 문화변동의 전파론적 입장에서 관찰하는 것이 좀더 합리적인 접근방법이 아닐까 하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즉, 기독교 선교사들에 의해 추진된 찬송가 번역사업과 신교육의 영향에 대하여 좀더 심도 있게 다루어야 할 것이며, 이에 근거하면 시기적으로 앞서 「협셩회보」(1898. 3. 5)에 실린 이승만의 "고목가(1898. 3. 5. 협셩회보)"가 신체시의 효시라고 판단된다는 것을 문제로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한편 "海에게서 少年에게"에서 보이는 바다 이미지는 물론 G. G. Byron의 시 "Adieu, Adieu! My Native Shore"와 "The Ocean"에서 비롯된 것이기는 하지만, 이것은 일본이 H. Spencer의 사회적 진화론의 모델인 산업형 사회를 배격하고 군사형 사회를 왜곡 수용하면서 만들어낸 제국주의·팽창주의 이미지를 崔南善이 비판 없이 받아들였다고 하는 것 또한 문제로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자유시론의 수용은 상징주의가 수용되면서 시작된 것이 통설로 되어있지만, 그 이전 崔南善의 「少年」에 번역시가 소개되면서 이론보다 자유시가 먼저 수용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G. G. Byron의 "The Ocean"을 번역한 "大洋"의 경우, 원시는 자유시가 아니라 영시의 전형적인 9행연(Spenserian Stanza)의 정형시이다. 이 형식은 Edmund Spencer이후 별로 쓰이지 않다가 18세기 중엽에 그에 대한 재평가와 함께 부활되어 여러 시인들이 즐겨 사용했다. 그 중의 한 사람이 G. G. Byron이며, 그 시가 "Childe Harold's Pilgrimage"인데 그 안에 "The Ocean"이 들어있고, 崔南善은 이것을 번역한 것이다. 물론 번역시만을 본다면 틀림없이 자유시의 형태를 가지고 있지만, 이 시의 원문은 전형적인 정형시이다. 어쨌든 崔南善이 이 시와 몇몇 번역시들이 정형시라는 것을 알았거나 몰랐거나가 문제가 아니라, 이 번역의 태도를 그의 창작 시로 이어갔다는 데에 문제가 있으며, 이것을 기점으로 하여 이후 상징주의가 수용되면서, 본격적으로 자유시론이 수용되고 있는데, 학자들은 黃錫禹의 자유시론에 대한 이해가 비교적 정확했던 것으로 기술하고 있다. 그러나 그가 자유시론의 방법으로 알고 있는 '안쟌부 '은 'enjambement'로서 오래 전부터 서구 정형시의 변형에 허용되고 있던 일종의 기법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金億 또한 자유시론을 수용하고 있지만, 그는 전자와는 달리 "자유시=현대시"라고 하는 등식을 고집하지 않고, 정형시도 현대시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주장하며 '格調詩形論'을 주장한다. 많은 학자들이 이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태도를 보여주고 있는 데 반하여, 趙東一(전통 운율을 수용하되 그대로가 아니라 변형시켜 독창적인 율격을 만들어내야 한다고 주장)·成基玉 등 일련의 학자들은 부분적으로 옹호론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은 그러한 주장에 대한 명쾌한 근거를 제시하고 있지 못하다는 데 문제가 있다.

이러한 한계를 감안하여 본 연구는 현대시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자유, 즉 모더니티에 대하여 고찰하여 보면, 많은 학자들이 객관적 관점의 제약이라고 할 수 있는 悟性에 초점을 맞추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러나 필자의 견해는 그들과 달리 무제약의 理性이 모더니티라는 것을 전제로, 이것이 사설시조·개화시·개화가사 등의 진화시로부터 찬송가·창가·신체시 등의 전파시, 그리고 상징주의 수용과 더불어 함께 들어온 자유시와 정형시 속에 어떻게 출몰하며, 그 가운데 나타난 여러 학자들의 견해에 대한 문제점에 대하여 재검토하고 분석하고자 한다.

2. 연구사 검토

   조선 후기부터 변화의 조짐을 보이기 시작하던 시조·가사 등 전통시가 갑오경장을 계기로 드디어 본격적인 변화의 단계에 들어선다. 이러한 변화는 두 갈래의 방향에서 일어나는데, 그 하나는 진화론적 입장의 신시의 형태이고, 다른 하나는 전파론적 입장의 신시의 형태이다. 전자로는 사설시조, 개화시와 개화가사를 들 수 있고 후자로는 찬송가·창가와 신체시를 들 수 있다. 진화시의 일종인 사설시조를 李秉岐와 趙潤濟 등은 시조의 파생적 형태로 파악하고 있으나, 李能雨, 黃浿江 등은 독자적으로 형성된 시가 양식으로 파악한다. 이에 더 나아가 김제현은 그 연원이 고려후기의 속요라고 밝히면서, 향유계층과 곡조뿐만 아니라 語辭의 내용 그리고 소재의 표현법에 이르기까지 평시조와는 전혀 다르게 독자적으로 발생하여 진화한 시가형태라고 주장한다. 한편 朴喆熙는 조선시대의 시조를 他說時調와 自說時調로 구분하고, 전자는 관습적이며 선험적인 삶의 표현으로서 유학자들의 시가 그러하고, 후자는 자기 경험에 의한 감동의 표현이 구체적이어서 현장성을 획득한 것으로서 기녀들의 시가 좋은 예라고 한다. 이러한 맥락에서의 自說性은 평시조와 사설시조 두 방향에서 모두 발견되는 현상이기는 하지만, 특히 그는 근대 이후 자유시는 사설시조와는 표면상으로는 전혀 다른 형식인 것으로 보이지만, 詩想이 부여되어야만 틀이 이루어진다는 이유로 이미 정해진 운율과 형의 구조를 거부한다는 점에선 근대 이후의 시와 사설시조는 결국 동일한 형식체험으로 귀착된다고 하면서 사설시조를 마침내 자유시라는 결론까지 내린다.

개화시는 갑오경장 이후에 활발해지기 시작한 근대화 과정에 나타난 새로운 장르라고 볼 수 있다. 문명과 문화의 유입에 직면하면서, 정치·경제·사회·교육 등 광범위한 분야에 걸쳐 각성을 촉구하며, 자주독립, 민권 등의 문제를 주제로 삼고있지만, 그 형식에 있어서는 가사 등 전대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자수율은 기본적으로 4·4조이며, 독립신문에 실린 32편 가운데 몇 편을 제외하고는 모두 分聯 되었을 뿐 아니라 2행연으로 그 길이가 대체적으로 짧은 것이 특색이다. 물론 4∼49연까지도 발견되지만 대체로 10연 전후가 많다. 그 2행연은 주로 對句形式으로 이루어지며, 앞의 2행과 뒤의 2행의 순서로 읽어야만 한다. 즉, "셔울 슌쳥골 최돈셩의 글"에서처럼 "대죠션국건양원년/ 쥬독립깃버셰"가 1행연이 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전통 운율을 그대로 蹈襲하는 방식이 아니고 좀더 진화된 모습의 새로운 시의 형태라는 것을 간과하지 못한다. 개화가사가 발표된 것은 개화시(1896)보다 9년 정도 늦은 1905년 「大韓每日申報」의 "社會燈" 난을 통해서인데, 그 필진은 주로 신문사 측의 논설진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개화가사는 형식면에서 개화시보다 퇴행하여 조선조의 전통 가사나 시조 또는 민요의 형태를 그대로 도습하여, 4·4조를 엄격하게 유지하는 경향을 볼 수 있으며, 그렇다고 해서 이것으로 그친 것이 아니고, 조선조의 전통 가사와 변별성이 있는 것은 연이 구분되어 있다는 것이며, 개화시가 2행연 대구의 짧은 분연형식임에 반하여 개화가사는 전통적 율조를 취하되 보다 장형화한 분연을 감행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경향의 대두는 하고 싶은 말들을 담기에 개화시의 형식이 너무 작았고, 그렇기 때문에 장형화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으며 마침내 시 전체의 길이도 자연히 늘어나게 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대개 6행연에서 20행연까지 이르고 있으나 10행연을 전후한 것들이 거의 대부분이다. 전파시의 효시가 되는 최초의 찬송가는 북감리교 선교부가 번역하여 수형본으로 간행(G. H. Jones와 L. C. Rothweiler 편찬)한 「찬미가」(1892)인데, 처음부터 운율과 관용어의 사용이 문제가 되어서, 1895년에 그 개정판을 내게 되었다. 이 개정판에도 역시 선교사들은 불만이 많았으며, 그리하여 찬송가는 한국인으로서의 그대로 솟구치는 가락으로 노래할 그들 자신의 서정시인이 나올 때까지의 교량 역할에 불과하다는 입장을 계속 밝혔다. 이 개정판에는 총 81편의 찬송가가 들어있었는데, 곡에는 대개 미국 북감리교회의 것들을 많이 사용하였다. 이에 반하여 한국 최초의 규모를 갖춘 찬송가는 L. H. Underwood 간행의 「찬양가」(1894)이다. 이것은 총 117장으로 악보가 가사와 함께 인쇄되어 있어서, 제법 형식을 갖춘 찬송가였다. 그런데 이 「찬양가」는 L. H. Underwood 단독의 편찬이라는 것이다. 결국 반발에 부딪쳐 연합 찬송가가 간행될 때까지만이라도 일부지역에서 사용한다는 조건으로 간행되었던 것이다. 여기서 특기할 만한 것은 이 「찬양가」 안에는 한국인의 작사가 들어 있다는 것이다. L. H. Underwood의 서문에 의하면, 제4장, 제29장, 제38장, 제61장, 제93장, 제113장, 제115장 등 모두 7편이라고 한다. 다같이 가창을 전제로 했지만 개화시나 개화가사는 詞에 치중을 하고 창가는 唱에 치중했으며, 그리고 그 곡이 찬송가 조에서 벗어나 일반적인 서양악곡으로 점점 확대되어가고 있다는 데에서 전자와의 변별성이 생기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찬송가의 先曲後詞 방식에서 벗어나 先詞後曲의 정상적인 창작행위도 산발적으로 이루어지기 시작하고 있었다. 따라서 시적 기교의 성숙성도 보이기 시작하고, 전 단계의 시가보다 대중에게 보급되는 폭도 넓어졌다. 마침내 개화기의 각종 잡지를 통하여 전파되는 한편 학교 창가는 근대식 학교의 교과목으로서 방방곡곡으로 퍼져나가 민족의 정서적 교육에 공헌한 바가 컸으며, 민요, 시조, 4·4조 가사 등의 전통 운율의 영양을 받아 작사되고, 이것을 서양악곡에 맞추었으며, 후에는 7·5조, 8·5조, 6·5조의 가사도 생겨났다는 것이다. 이 말은 다시 말해서 찬송가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先曲後詞의 방식이 아직도 행해지고 있었다는 것을 말한다. 신체시의 효시는 崔南善의 작품으로 추정되고 있는 "海에게서 少年에게"(1908. 11. 1., 「少年」 창간호)가 정설로 거의 굳어져 있다. 이에 대해서 이의를 제기하고 나온 것은 趙芝薰이다. 그는 1909년 4월 「少年」에 실린 崔南善의 "舊作三篇"이 작자 자신의 후기에 의하여 1907년의 작품임이 밝혀진 이상 이것을 신체시의 효시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金允植도 「近代韓國文學硏究」(一志社, 1973)에서 趙芝薰의 주장에 동의한다. 그에 의하면, 崔南善이 "海에게서 少年에게"를 자신의 작품으로 자처한 적도 없고 다만 권두시로 제시하고 있을 뿐인데 신체시의 효시로 보는 것은 잘못이라는 것이다. 더욱이 이 시가 G. G. Byron(1788∼1850)의 시 "The Ocean"을 번안한 것이라는 근거에서 이론의 제기에 무게 중심을 더해주고 있다. 이렇게 시의 외형 분석에 중점을 두고 부가적으로 그 내용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논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먼저 趙演鉉을 들 수 있다. 그는 신체시의 출현은 한국시가사상에 있어서 처음 보는 가장 중대한 혁명의 하나였다고 전제하고, 그 이유를 형태의 산문성에 두고 있다. 그 산문성이 지극히 모호하고 불안정한 것이었지만, 이러한 불안정성은 한국의 초기 신체시가 정형적인 요소와 산문적인 요소의 혼합 위에서 성립된 것임을 반증해 주는 것이라고 한다. 다시 말해서 엄격한 율문이나 정형으로 보기에는 파격적인 자유가 너무 강하며, 완전한 산문으로 보기에는 율문적인 정형성이 아직도 청산되지 못한 채 있었다는 것이다. 그의 논리를 따라가다가 보면, 전통시 가운데 사람으로 말할 것 같으면 境界人처럼 신체시가 있고 그 대립항에 산문시가 있게 된다. 다음으로 權五滿은 신체시(그는 신시라고 호칭한다)의 형태상의 특징을 "海에게서 少年에게" 이전에 발표된 "나는 가오"(「大韓學會月報」 제3호, 1908. 4)를 예로 들면서, 신시의 각 연만을 전체 작품에서 떼어 내 보면 고정된 율격을 벗어나 자유시의 형태를 띠고 있다는 점이 그 하나요, 각 연의 율격을 대비해서 보면 각 연 대응 행에서 같은 자수율을 지키고 있다는 점이 또 하나이며, 이밖에 신체시의 형태적 특징으로는 첩연 형식을 취하고 있다는 점, 후렴에 가까운 반복구가 덧붙는다는 점이라고 지적한다. 이 시에도 "海에게서 少年에게"가 가진 내용과 형태상의 구조적인 크기에 비할 수도 없을 만큼 소박한 작품이면서도 위의 시가 지닌 신체시 형태상의 특징들을 고루 갖추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의 논리에 따르다가 보면 드러내 놓고 언급은 않고 있지만 신체시의 효시로 "나는 가오"를 내세우고 있다. 그리고 金容稷도 權五滿과 마찬가지로 전통시의 대립항으로 자유시를 제시하면서 신체시의 형태적 특성을 새 시대와 새 사회의 분위기를 수용함으로써 이루어진 문체인 時文體라는 말로 요약하고 있다. 그러나 그에게서 정작 주목할 만한 대목은 넓은 의미에서 시와 문학의 양식 전개가 문화의 표정 가운데 하나라는 관점이다. 그리고 문화는 생리적으로 남의 것을 수용, 포괄하는 가운데 그 형태를 이루어 가는 적층적 구조물이며, 신체시에 나타난 해외문학의 수용 역시 그런 문맥에서 파악되어야 한다는 관점이다. 상징주의 시대는 「創造」 창간호(1919. 2)에서 막이 열리고 「廢墟」(1920. 7∼1921. 1), 「薔薇村」(1921. 5), 「白潮」(1922. 1∼1922. 9)를 통해 절정을 이루었으며 그 여운은 「金星」(1921. 11∼1924. 1)에까지 미친다. 이와 같이 상징주의의 한 시대가 열린 구체적 계기는 「泰西文藝新報」에 의거했던 金億과 白大鎭, 그리고 黃錫禹에 의해 마련된 것이다. 白大鎭의 상징주의와 자유시론에 대한 이해 정도가 미천한데 비하여 黃錫禹의 이해 정도는 보다 높은 것이라고 韓啓傳은 피력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상징주의 자유시론의 유입은 유럽으로부터의 직수입이 아니라 일본 문단을 중개지로 한 간접 수입이었음은 소설 분야에서의 자연주의 도입과 경로가 비슷하다고 金恩典은 주장한다. 金億이 유학생으로 가 있던 당시의 일본 시단은 상징주의 일색으로 칠해져 있었으며, 그 흐름에 최절정기를 이룩했던 키타하라 하쿠슈우(北原白秋, 1885∼1942)의 시대도 가고, 이제는 그의 제자들이 활약하고 있던 때였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한국 유학생들이 이미 난숙할 대로 난숙한 상징주의 시에 심취했고, 급기야는 그 원고장인 프랑스의 상징주의에 눈을 돌렸음은 자연스러운 귀추였을 것이다. 金億의 프랑스 상징주의 도입 및 역시 작업은 「學之光」(1916. 9. 4)으로부터 「泰西文藝新報」제10호(1918. 12. 7), 제11호(동년 12. 4) 「廢墟」에 실린 글로 일단락 되겠는데, 그의 프랑스 상징주의에 대한 이해의 각도와 수준이 문제이다. 그는 상징주의를 세기말의 토양에서 일어나, 자유시 운동으로 수렴된다는 도식으로 이해하고 있다. 金億에게서 특히 주목되는 것은 "格調詩形論小考"인데, 吳世榮에 의하면, 그는 자유시를 부정하지는 않으면서도 자유시에 있어서의 내재율(자유율)이란 근대시 형성에 있어서 과도기적 존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라고 한다. 따라서 어디까지나 음악적 규칙성에 입각한 정형율을 지녀야만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내재율 혹은 자유시형을 매도한 金億은 음악적 규칙성에 입각한 격조시의 창안을 제창한다고 한다고 하면서, 매우 부정적인 견해를 피력하고 있다. 그러나 金素月, 梁柱東, 金基鎭 등은 金億의 견해에 동조하는 쪽에 있고, 오늘날에 와서는 趙東一, 成基玉, 강홍기 등이 여기에 가세하고 있다. 이들의 공통적인 견해는 시에 있어서의 정형운율이나 자유운율이 문제가 아니라, 즉 어떠한 운율이든지 상관없이, 시의 표층의 보편성 내지는 개별성 이외의 심층에 새로운 의미(암시, 가상세계, 이성, 자유, 모더니티)가 형성될 때, 현대시로서의 모습이 갖춰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연구는, 자유 그 자체의 연구에 천착하기보다는 오히려 외형운율의 연구에 그치고 마는 경향의 한계를 보여주고 있다. 영어 'modernity'를 한국시의 경우 '근대성' 또는 '현대성'의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영어에서는 이러한 변별이 없다). 그러니까 신체시의 출현으로부터 소위 자유시가 출현하기 이전까지의 시를 근대성이 있는 시라 하고 그 이후의 시를 현대성이 있는 시라고 한다. 이것은 다시 '계몽'이라는 말과 30년대의 'modernism'과 맞물려 그 의미가 더욱 혼란스럽게 느껴지기도 하는데, 한편으로는 서구의 합리주의적 사고방식에 뿌리를 박고 있는 근대성 또는 현대성의 의미를 의심 없이 확정된 것으로 받아들이고 그것이 출현한 시기와 그 확정된 의미를 제대로 해석하고 소화하고 있는가 아닌가의 정도에 따라 근대성과 현대성을 구분하기도 한다. 林和의 경우, 한국의 근대화 과정을 셋으로 나누고 있는데, 제1과정은 봉건적 유대의 잔재인 중국과의 관계로 보고 있다. 중종 15년(1502) 사신으로 갔던 李碩의 프랑스에 관한 보고서와 「芝峰類說」의 저자 李 光의 서양사정 소개를 위시로 하여 북경 가는 사신의 손으로 입수된 천주교와 西學의 전파가 그것이다. 먼저 선조 36년(1603)에 李光庭이 구라파지도를 가져오고, 인조 9년(1631) 鄭斗源이 서양총, 천리경, 자명종, 焰硝花 등 무기, 도구와 천문서, 천문도 등 다수의 책을 가져왔고, 효종 40년(1653)에 인조 때 중국에 갔던 金堉이 가져온 時憲歷法을 시행하고, 정종 15년(1703)에 李承薰이 「天主實義」와 「幾何原本」, 「數理精蘊」, 「地坪表」 등의 서적을 가져왔다. 근대화의 제2과정은 서구 제국과의 직접적인 관계인데, 선조 초 전라도 흥양에 표류하여 왔던 이양선이 그것이다. 그 다음에는 선조 때(1582) 제주도에 표류해온 국적 미상의 서양인, 그리고 인조 6년(1628)에 표류하였다가 조선에 귀화하여 조선인 부인을 얻어 자녀까지 낳고 통역까지 하던 화란인 Jan Janse Weltevree(朴燕. 仁. 淵, 또는 胡呑萬)외 3인, 효종 4년(1653)에 표착하여 유명한 「표류기」와 「朝鮮國記」를 서양에 전파시킨 화란인 Hendrik Hamel과 선원 35인으로부터 조선은 비로소 미지의 서방세계에 대한 지식을 얻었을 것이라고 하며, 그 이후로 여러 사건을 거쳐 고종 2년(1865) 미국의 제너럴 셔먼호 사건, 병인양요, 신미양요 등을 거치는 동안 조선의 대 서양관계에 있어 상업적 정치적 혹은 군사적인 침범시대였다고 한다. 제3과정은 현해탄을 건너 서구 자본주의가 조선에 들어온 길로 고종 13년(1876) 2월 강화도에서 구로다 키요타카(黑田淸隆), 이노우에 카오루(井上馨)와 申櫶, 尹滋承 간에 체결된 수호조약이래 조선 근대화의 대동맥이 된 노선이다. 이와 같이 林和의 언급은 근대성의 의미에 대한 것보다는 그 근대성이 들어오게 된 경로에 대해서 이다. 이는 근대성의 의미를 비판 없이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과 다름 아니며, 이러한 사정은 다른 사람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鄭漢模의 경우, 시대로서의 현대라는 개념도 다양한 진폭을 가지고 있으며, 넓게는 20세기에 들어와서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를 총괄하는가 하면, 좁게는 우리가 살고 있는 당대(contemporary)만을 지칭하기도 한다고 한다. 또한 시간적 구획으로서가 아니라 정치, 경제, 사회적 여러 여건과 현상으로 미루어 근대적인 것과 현대를 구획하기도 한다고 한다. 진정한 근대를 거칠 사이도 없이 20세기를 맞이한 한국의 경우는 근대 혹은 현대의 개념은 더욱 애매할 수밖에 없고, 특히 한국적 시대환경 속에서 싹트고 자라온 모든 문화현상이 한 마디로 그 특질을 추출하고 이를 유별할 수 없을 만큼 혼돈된 다양성을 띠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한다. 이어서 그는 현대시의 개념을, 첫째, 시간적 구획으로 당대를 살고 있는 시인들에 의하여 쓰여지고 있는 시, 둘째, 현대시로서의 제 특질을 갖추고 나타난 시기부터 현대까지의 시, 셋째, 자유시가 나타난 시기부터 현대까지의 시, 넷째, 새로운 문화가 수입되고 생성되던 개화초기부터 현대까지의 시라고 한다. 이와 같이 그는 일반적인 통념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金允植의 경우, 근대와 전근대란 세계를 인식하는 틀의 변화에 의한 구별에 해당하는 것이며, 그러나 이러한 세계인식을 가능케 한 힘을 문제삼는다면 사정이 크게 달라지는데, 만일 근대라는 것이 발명과 함께 기관총, 대포, 비행기를 만들어내는 힘에 근거를 둔 것이라면, 이 힘의 적용 범위에서는 그렇지 않은 어떤 세계인식 방법보다 우위에 놓이는 것이라고 한다. 물론 이러한 힘이란 이성 중심주의적인 범주, 곧 계몽주의라는 틀에서 나온 것이고 그 통제 아래 놓인 것을 가리킴이며, 이런 점에서 근대 또는 근대성이란 전근대성과는 뚜렷이 구분될 뿐 아니라 나아가 보다 우월한 인간 이성의 방향성으로 정립된다고 한다. 이와 같이 그는林和와 거의 견해의 일치를 보이고 있는데, 그러나 그들은 이성과 계몽이라는 용어의 사용에 정확을 기하고 있는가, 되묻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계몽과 이성의 의미를 객관적·과학적 사고로만 해석한다는 것은 무리라고 생각되기 때문이며, 그리고 I. Kant(1724∼1804)의 이성과 G. W. F. Hegel(1770∼1831)의 이성(cf : 오성과 이성), K. Marx(1818∼1883)의 이성이 서로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또 林和와 金允植의 이성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이에 입각한 시작이 이루어질 경우의 근대시 또는 현대시의 모습은 어떤 것으로 나타날까? 논리 정연한 내용의 자유시여야 할 것임에 틀림없다. 자유시의 개념이 배제한 운율을 받아들인다 해도 "아름다운 운율을 지니고 있고 논리 정연한 내용이 있는 자유시"여야 할 것이 아닌가? 吳世榮의 경우, 그는 한국 신문학사에서 시대를 지칭하는 용어만큼 혼란을 야기시키는 것도 없었다고 전제하고, 그 대표적인 것이 '근대'와 '현대'라는 용어라고 한다. 이 두 단어가 신문학사에 대한 논의에서 사용된 경우를, "① '근대'와 '현대'는 같은 말이다. 즉 동의어이다. ② '근대'와 '현대'는 전적으로 구분되는 말이다. ③ '근대'와 '현대'는 집합개념으로 상호 포괄하는 의미의 영역을 지니고 있다."라고 요약하고, 그는 ③의 견해를 수용코자 한다고 한다. 즉 근대와 현대는 동일한 개념이나 전적으로 구분되는 개념이 아니라 부분적으로 중복되는 개념이라는 것이다. 근대(Modern)가 고대(Ancient), 중세(Middle)와 구분하는 3분단법의 하나로 지칭될 경우 그것은 넓은 의미의 용법이며, 현대까지를 포함한다고 한다. 그러나 근대와 현대를 구분하는 별개의 용어로 사용하고자 한다면, 근대는 좁은 의미로 사용되는 것이라고 한다. 예를 들어, 李箱과 金素月의 시는 모두 근대시라고 할 경우에 근대는 넓은 의미이고, 그런데 李箱은 현대시인 이지만 金素月은 현대시인이 아니고 근대시인이라고 할 경우에는 좁은 의미로 사용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원 모더니즘(Proto Modernism)이라고 부르는 것은 1909년 이전의 초기 자본주의에, 일반적으로 모더니즘 혹은 구 모더니즘(Paleo Modernism)이라 부르는 것은 1909년 이후의 독점 자본주의에, 그리고 신, 반 또는 후기 모더니즘(Neo, Anti, or Post Modernism)이라 부르는 것은 50년대 자본주의 산업사회 후기를 문학적으로 반영한 것이며, 여기서 소위 원 모더니즘은 19세기말에서 20세기에 걸쳐 대두된 상징주의 데카당스 그리고 유미주의를 지칭하는 것인데, 여기에 로맨티시즘 문학을 포함하여 근대문학이라 부를 때에는 넓은 의미이며, 로맨티시즘 문학을 제외하고 현대문학이라고 부를 때에는 좁은 의미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한국의 근대문학의 경우, 사설시조나 10년대 자유시 혹은 金素月, 朱耀翰의 시들이 비록 근대시라고는 하나 최소한 그것은 李箱의 시가 지닌 성격과는 본질적으로 같지는 아니하므로 현대시, 현대성을 구분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 그의 견해이다. 이어서 그는 좁은 의미에서의 근대문학과 현대문학의 차이를 해명하기 위해서 먼저 근대성에 대해서 "① 정치-민주주의와 민중주의(인민주의), ② 경제-자본주의, ③ 윤리-휴머니즘, ④ 세계관-계몽주의(과학적 세계관), ⑤ 삶의 양식-개인주의 자아발견"이라고 정리하고 있다. 오늘의 민주주의의 근간을 이룬 프랑스 혁명이 시민혁명이고 이 시기에 대두한 시민계급이 후에 부르주아 계급과 프티부르주아 계급으로 분화된 자본주의 경제의 주역들이라고 한다. 다시 말해서 오늘의 민주주의는 시민계급이 자본주의의 발전을 위해 마련한 정치제도이며, 민주주의 최고의 덕목으로 내세운 자유 역시 자본주의 경제의 자유시장경제원리와 다름이 아닌 것이라고 한다. 휴머니즘 역시 선악(神性) 대신에 합리성과 비합리성(인간성)에 토대하고 있으며 따라서 자본주의는 휴머니즘에 토대한 경제원리에 지배된다고 볼 수 있고, 계몽주의 혹은 과학주의 세계관 역시 자본주의와 표리관계를 지니고 있는데, 자본주의 경제제도는 필연적으로 산업발전의 힘이라 할 수 있는 과학기술의 진보와 과학적 세계관의 확립이 전제되어야 한다. 그런데 근대과학의 발전 혹은 과학적 세계관의 확립은 인간이 神中心의 세계관에서 벗어나 인간과 세계를 그 자체로서 바라보는 계몽주의 혹은 휴머니즘에서 비롯하는 까닭에 자본주의는 휴머니즘과 계몽주의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고 한다. 근대인의 삶의 양식은 흔히 개인주의 혹은 자아주의로 특징 지워지며, 아울러 자본주의 인간상의 본질이기도 한데, 그것은 개인주의 옹호 없이 자본주의의 성립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자본주의 경제의 기초인 자유시장경제원리는 개인의 자유와 창의력의 개발 및 능력의 발양을 보장하지 않고서는 실현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의 견해는 한 마디로 말해서, 근대성이란 자본주의 경제의 토대 위에서 형성된 것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근대문학 혹은 근대시란 바로 이와 같은 시대적 이념이 그 형식이나 기법이나 내용 면에서 그대로 반영된 문학 혹은 시라고 정의될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근대의 성격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으며, 그 까닭은 근대의 토대가 되는 자본주의 자체가 시대에 따라 변혁을 거듭하며 그로 인해서 근대인의 삶에도 많은 변화를 야기시키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 변화는 1900∼1910년 이후에 일어나는데, 삶의 물화, 물신숭배, 교환가치의 지배, 자아 혹은 인간의 해체, 문명사에 대한 종말론적 의식 등과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 제시된 제 가치들이 그 특징을 이루고 있다고 한다. 이러한 특징들을 현대성이라 규정하고, 따라서 현대시가 바로 이와 같은 현대인의 삶이 반영된 것을 가리키는 것이라면 서구의 현대문학은 영미의 경우 1908년에 등장한 이미지즘, 대륙의 경우 일차대전 전후에 일어난 다다이즘, 입체파 등 이후의 문학을 가리키는 것이 일반적이며, 한국 문학의 경우 18세기에서부터 1920년대 초에 이르는 시작품은 좁은 의미에서 근대시로, 1920년대 중엽 이후의 시작품은 현대시로 분류하여야 한다고 한다. 그리고 근대성, 현대성 및 탈현대성의 본질을 다음과 같이 정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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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경제

세계관

윤리관

삶의 양식

근대

민주주의
민족주의

시장경제
자본주의

계몽주의
과학주의
(이성)

휴머니즘

개인주의

현대

민족주의
제국주의
(국가사회주의)
(인민민주주의)

제국주의

계몽주의
과학주의
(도구화된 이성)

물화된 휴머니즘
(대응:반휴머니즘)

개인주의
(자아의 해체, 주체의 분열)

탈현대

민주주의
세계주의

다국적 자본주의

계몽주의
과학주의
(도구화된 이성)

물화된 휴머니즘
(대응:반휴머니즘)

개인주의의 소멸
(개인, 주체의 소멸)


林和와 金允植의 경우와는 달리 吳世榮의 경우는 다소 복잡한 양상을 띠고 있다. 그 복잡한 양상이라고 하는 것은 다름이 아니라 근대성과 현대성을 양손에 쥐고 결코 놓지 않으려 하는 모습을 말한다. 그러나 그가 처음에 근대와 현대는 동의어라고 기술했던 것처럼 영어에는 근본적으로 이러한 변별 없이 "modernity"라고 하는 단어 하나로 사용되고 있다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해 보아야 할 것이다. 여하튼 그 역시 객관적 이성에 좀더 중심을 두고 있음이 분명하다. 이러한 그의 견해에 입각해서 시작이 이루어질 때 근대시 또는 현대시의 모습은 어떤 것일까? 그것은 전자와는 약간 다르게 "논리 정연한 내용과 비논리적인 내용이 섞여 있는 자유시"이어야만 할 것이다. 그렇다면, 현대시의 예로 제시한 李箱의 시가 여기에 적합할까? 오히려 비논리적인 내용이 더 많지 않은가? 다음은 하정일의 경우이다. 그는 근대와 자본주의를 동일시하는 것에 지극히 회의적이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근대는 자본의 논리를 관철시키기 위한 일직선적인 과정에 불과할 것이지만, 실제는 그렇지 않고 그 내적 과정은 자본의 본래의 의도와는 다른 굴절을 보여준다고 한다. 그 원인은 비자본주의(사회주의, 여성주의, 생태주의 등)의 저항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본주의와 비자본주의 사이의 치열한 경쟁의 역사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게다가 "근대=자본주의"의 논법 배후에 숨어있는 서구중심주의의 이데올로기가 보편적 법칙으로 강력하게 작동하고 있기 때문에 이 논법은 근대에 대한 주체적 인식을 어렵게 한다는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그는 근대를 이성중심주의에서 찾고자 한다. 그에 의하면, 이성중심주의란 이성을 인식과 판단의 절대적 준거로 특권화하면서 이성의 타자들, 가령 감성·욕망·직관 같은 것들을 배제시켜 버리는 편견을 뜻한다고 한다. 역사적으로 이런 편향이 강력하게 존재했던 것은 분명하지만, 곧이어 자기 반성적 비판이 일어나게 되고, 이 비판은 근대에 대한 극단적 부정으로 나타난다고 한다. 이 비판이 탈근대론과 결합하는 경우가 그것인데 (F. Nietzsche, G. Deleuze), 이 비판은 이성 대신에 욕망을 대안으로 내세운다고 한다. 욕망 또한 내적 속성 가운데 하나라는 점에서 시비를 걸 필요는 없지만, 이러한 이분법 또한 일면적(zero-sum game과 같은) 근대관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욕망이 이성의 타자임에는 틀림없지만, 그렇다고 둘의 관계가 대립적이어야 하는 것은 아니며, J. Habermas(1929∼)는 포괄적 이성이라는 개념을 통해 이성과 욕망이 보다 확장된 이성 범주 속에서 소통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한 바 있다고 한다. 포괄적 이성은 창안된 개념이 아니라 이성의 본모습이며, 이것 또한 자본주의에 의해 왜곡되면서 나타난 편향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포괄적 이성의 구현은 이성의 본모습으로의 회귀이며. 배타적 다양성을 단순화한 이성중심주의의 逆相(욕망중심주의)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갑자기 비약하여 이성중심주의가 정신과 육체를 분리시키면서 전인적 총체성을 훼손한 것은 부정할 수 없으나, 다른 한편으로 I. Kant가 이성을 통하여 인간의 주체성에 대한 자각을 가능케 해주었으니, 그렇게 보면 인간의 역사는 이성의 발전과 함께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한다. 그리고 다시 이성은 해방적 기능과 억압적 기능을 한 몸에 품고 있는 양면적 존재라고 한다. 전자의 기능에만 주목하는 것도 후자에만 주목하는 것도 모두 단순 사고이며, 따라서 이성의 양면성을 동시에 조망하면서 이성과 욕망 사이의 소통 가능성을 극대화시켜 가는 자세가 이성중심주의에 대한 올바른 비판법이라고 한다. 그러나 근대에 대한 단순 논리가 광범위하게 유포되어 있어, 그러한 장님 코끼리 만지는 식으로만 일관한다면 결코 근대의 실체를 바라볼 수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근대란 해방과 억압, 밝음과 어둠, 선과 악 등 상호 대립적인 것들이 중첩되어 있는 역사적 총체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는 이것을 "근대의 복합성"이라 명명하고, 20세기 한국문학의 최선의 전통은 바로 이러한 근대의 복합성을 포착하려는 노력의 산물이라고 한다. 이 논리에 따라 金洙暎의 시를 예로 든다.


    욕망의 입이여 입을 열어라 그 속에서
    사랑을 발견하겠다 도시의 끝에
    사그러져가는 라디오의 재갈거리는 소리가
    사랑처럼 들리고 그 소리가 지워지는
    강이 흐르고 그 강 건너에
    사랑하는
    암흑이 있고 3월을 바라보는 마른나무들이
    사랑의 봉오리를 준비하고 그 봉오리의
    속삭임이 안개처럼 이는 저쪽에 쪽빛
    산이
    사랑의 기차가 지나갈 때마다 우리들의
    슬픔처럼 자라나고 도야지우리의 밥찌기
    같은 서울의 등불을 무시한다.
                     ―"사랑의 변주곡" 중에서(金洙暎)

하정일에 의하면, 金洙暎에 있어서 '사랑'이란 실천적 이성의 표상이며 최고의 형식이라고 한다. 金洙暎은 사랑이라는 보다 확장된 이성 범주 속에서 이성과 욕망이 만나게 되고, 이러한 이성과 욕망의 소통 가능성에 대한 그의 깨달음은 이성 대 욕망의 이분법을 훌쩍 뛰어넘어 이성의 본모습에 다다른 놀라운 시적 통찰력이 아닐 수 없다고 한다. 그가 20세기 한국문학의 최선의 전통에 속하는 것도 이 때문이거니와 그가 근대의 복합성을 깊이 인식하고 있었음을 방증해주는 결정적 사례라고 한다. 결론적으로 그는, 근대를 복합체로 바라본다는 것은 근대를 다양한 근대 기획들의 상호 경쟁의 장으로 이해한다는 뜻이고, 그러한 근대는 내부의 경쟁을 통해 끊임없이 스스로를 변화시켜 가는 역동적 운동이라고 한다. 그런 점에서 한국문학의 최선의 전통은 여기에서 찾아야 할 것으로 밝히며 주장한다. 선행 논자들에 비하여 상당히 진전되고 세련된 논리를 전개하고 있다. 그리고 근대의 복합성 개념을 이끌어냈다는 데 대하여도 높이 평가하고 싶다. 그러나 그에게 있어서 결정적 오류가 발견된다. 즉, 그는 이성과 오성의 구분을 올바르게 제시하고 있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성의 타자들, 가령, 감성·욕망·직관 같은 것을 배제시켜 버려"의 언급이 바로 그것인데, I. Kant에 의하면 이성의 타자는 "감성·욕망·직관"이 아니라, 이러한 직관을 포함한 현상계(+감성+오성)이다. 지금 하정일이 언급하고 있는 이성은 오히려 이성이 아니라 오성인 것으로 생각되는데, 이 오성이 명제로서의 제약임에 반하여 이성은 무제약으로서의 자유이며 二律背反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이성은 확실성이 아니라 불확실성으로서 오락가락 하는 한마디로 헷갈리는 것으로 파악되어야 할 것이다. 이성이 헷갈린다는 것에 대해서는 G. W. F. Hegel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이러한 관점에 서서 하정일이 "정신과 육체의 분리"의 대목에서 논급을 유보한 부분에 대하여 결론부터 말하자면, 정신과 육체, 즉 이성과 대상은 서로 고착되어 분리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물론 이성은 대상을 직접 소유하지는 못한다. 이성은 항상 타자라고 하는 또 다른 자기를 시켜 그의 욕망을 달성하는 것이지만 어쨌든 소유는 소유이며, 또 가장 중요한 것은 이성 자신의 모습은 결단코 어떠한 형태로든 직접적으로 나타내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성은 불가사의이다. 그러나 오성은 중력의 법칙이나 피타고라스의 원리와 같이 그 모습을 드러내며, 아니면 사물의 개념으로 나타난다. 아니면 "A=B"라고 하는 메타포의 형식으로 나타나기도 하는데, 이때는 오성이 아니라 독단이며 자유라는 명목 하에 자행되는 폭력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이것은 진리라고 인정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메타포가 왜 진리가 아니냐, 그럼 직접적으로 메타포가 표현되고 있는 현대시는 시가 아니냐, 등등의 힐책 섞인 반문이 쏟아지겠지만, 필자의 대답은 단적으로 '그렇다'이다. 왜냐하면 메타포는 허상만 있을 뿐 실체가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하정일의 언급에 의해 극찬되고 있는 金洙暎의 시에 있어서의 "A=B"라는 식의 메타포들도 답답하겠지만 마찬가지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정일의 명제인 근대의 복합성은 이성과 욕망의 소통 가능성으로서의 복합성이 아니라 오성과 욕망의 소통 가능성으로 보아야 마땅할 것이다. 최원식의 경우에는 K. Marx의 "포이에르바하에 관한 테제(1845)"의 서두를 인용하면서 여기에 근대성(모더니티)의 근거를 두고 있다. 즉 "포이에르바하를 포함하여 지금까지의 모든 유물론의 주된 결함은 대상Gegenstand·현실·감성이 다만 객체 또는 관조의 형식으로서만 파악되었을 뿐, 감성적·인간적 활동, 실천으로서, 주체적으로 파악되지 않았다는 점"이라고 한 언급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 말은 토대로서의 하부구조가 상부구조를 결정한다고 하는 K. Marx의 견해가 어느 정도 누그러져 상부구조를 인정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이러한 생각은 후기까지 이어졌던 것인데, 그렇다고 할지라도 이 감성이라고 하는 말에 현혹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이때의 감성이라고 하는 것은 단순히 이성(I. Kant 또는 G. W. F. Hegel의 이성이 아니다)의 대립항으로서의 감성이 아니라 경험된 것으로서의 또는 귀납으로서의 이성을 말하는 것으로서, I. Kant 또는 G. W. F. Hegel의 경우에는 오성에 해당하는 말인 것이다. K. Marx는 감성뿐만 아니라 오성을 초월한 二律背反이며 가상의 세계인 이성계를 부정하고 있기 때문인데, 이때의 주체라고 하는 것은 곧 이 오성(감성)을 가리키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렇다고 한다면, 결국은 이러한 관점 또한 객관적 세계관이 아니겠는가? 이 논리에 충실히 따른 시라면, 가장 완벽한 논리적 주장이어야 할 것이며, 이러한 방식으로 만들어졌던 시들이 문학성을 인정받지 못했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바이다. 물론 마르크스주의자들 가운데 문학성이 있는 시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이 문제는 별도로 다루어져야 할 문제라고 생각한다. 최원식의 경우에는 모더니티를 잘 알려진 마르크시즘에 근거를 두고 있으므로 더 이상의 언급이 필요 없을 것이다. 文德守의 경우, 모더니티가 무엇이냐 하는 문제는 연대보다 그 고유의 특성이 문제가 된다고 한다. 이 점에 대해 그는 G. S. Fraser(1854∼1942)의 견해를 인용하여, 우리가 한 작품에 대하여 현대시라고 말할 때 그 특성이 무엇인가에 대하여 분명하지 않다 하더라도, 우리는 그것에 어떤 고유한 특성을 부여하는 것이라고 한다. 이리하여 연대의 문제는 일어나지 않는다고 한다. 이런 의견에 동의하면, 그리스 작품이나 조선시대의 시조에도 모더니티가 있을 수 있고, 현대의 작품에서도 모더니티가 없을 수 있다는 것이다. G. S. Fraser가 말하는 현대시의 현대성은 곧 과거에 대한 흥미, 시의 복합성, 암시성, 반어성 및 모호성을 의미한다고 한다. 간략하지만 정곡을 찌르는 언급을 하고 있다. 시간적 맥락에서가 아니라 시 자체의 구조적 특성에서 모더니티를 찾고 있는 것이다. 과거에 대한 흥미가 언어의 관습적·보편적·사전적 의미와 다르지 않은 것이라고 한다면, 시의 복합성이란 언어의 표층의 보편적 의미와 암시적으로나 반어적으로 또는 모호하게 작용하는 심층의 의미가 함께 공존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조망할 때 그가 제시한 "그리스 작품이나 이조시대의 시조에도 모더니티가 있을 수 있고, 현대의 작품에서도 모더니티가 없을 수 있다"고 한 명제가 자명해진다. 그렇다. 그리스나 조선이 아니라 백제시대에도 개별적 산발적으로 현대적 세계관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이 없었다고는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한 세계관이 어느 시대에 집중적으로 나타났을 때 비로소 우리는 시간적 맥락에서 그것을 '운동'이나 '주의'로도 생각할 수 있는 것이다. 그의 경우, 모더니티를 구조적 특성에서 찾아 마침내 시를 표층의미와 심층의미의 복합성으로 파악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끝으로 송기한의 경우, 모더니즘이라고 하는 것은 어느 시기에 어느 집단만이 가지고 있는 어떤 고유의 성질(폐쇄성·종파성)을 일컬음에 반하여, 모더니티는 어느 특정 시기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거의 전 시기에 걸쳐 나타나는 것으로서의 새로운 것, 전위적인 것, 진보적인 것을 일컫는다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동일한 것의 단순한 반복이 아니라 각각의 시대마다 차별성을 가지면서 나타난다고 한다. 각각의 시대마다 나타나는 모더니티는 모더니즘과 마찬가지로 절대성을 갖는 것이지만, 후자에 비해 상대적이라는 데에서 변별성을 갖는다고 한다. 일반적으로 모더니티란 R. Descartes(1598∼1650)적인 자아관에 입각한 주체의 동일성과 언어의 동일성, 계몽적 오성에 의한 세계의 획일적 지배에의 기도라고 하고 있지만, 근대는 방향을 설정하는 자신의 척도를 더 이상 다른 시대의 모범들로부터 차용하지 않으며, 자신의 규범성을 자신으로부터 스스로 창조해야만 하는 역사적 임무를 담당하여야 하는데, 그 이유는 신화적이고 반복되는 원형에 따라 자신의 시간(역사철학적 시간의식이 과거에서 미래로 흐르는 직선적인 무한의 전진의식·객관적 의식임에 반하여 주관적인) 범주들을 조직하는 그러한 사회에서 일반적 모더니티(근대성)는 관념상 무의미하기 때문이라는 것을 M. Calinescu의 말을 인용하여 언급하고 있다. 이처럼 근대에 대한 비판적 성찰로서 모더니티의 시간의식은 역사적·객관적인 시간의식에 대한 부정, 그리고 그에 따른 주관적인 시간의식으로 특징 지워지며 철저하게 과거, 현재. 미래라고 하는 계기적 순차성이 부정되고, 오직 작가의 현재의 주관 속에서 과거와 미래가 구성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주관적 시간의식은 객관적인 역사발전의 신념을 거부하고 사회의 제반 현상과 우주를 인간 의식의 주관적 범주로 끌어들임으로써 근대를 시련의 장으로 끌어들이게 되고, 의미 공유의 능력을 전복시켜 현재를 불확정의 보편편재의 시대로 인식하도록 강요한다고 한다. 이러한 지적 도발행위들은 인간들에게 끊임없이 회의하도록 하고 끊임없이 비극적 자기인식의 문제를 대두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인간들의 비극은 세계에 대한 기술적 지배가 주는 위대성과 형이상학적인 영원성 관념의 결핍이 가져오는 비참함 사이에서 오는 것으로서, 이 위대성과 비참함의 괴리가 주는 비극적 인식에서 변화된 시간의식에 의해 조정되는 모더니티에 대한 비판 성찰로서의 질서의식과 유토피아의식이 탄생되고, 유토피아의식은 기독교의 붕괴와 현 상태에 있어 세계의 불완전함에 대한 극심한 혐오로부터 싹튼 미래지향적인 의식이라는 것이다. 즉 끊임없이 전진하는 시간(역사적 객관적 시간)에 대한 미래의 지각 실패와 파편화된 시간의식(주관적 시간의식)에서 배태된 근대에 대한 위기의 관념이 새로운 질서와 유토피아 지향성으로 나타났다는 것이다. 이 유토피아 지향성은 두 개의 방향으로 나타나는데, 첫째는 모더니티가 과거의 것에 비해 다른 모습을 갖기 위해서는 전시대와 구별되는 새로운 면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전적으로 다른 사고방식, 독특한 문화, 특이한 미래를 창출해 내기 위해 현실체계로부터 도피하여 극단적인 실험성으로 가는 것이 가장 위험한 전통에의 복귀로 귀결되었다고 한다. 이 사실은 실험성의 극단화에서 오는 미학상의 한계 때문인데, 그리하여 인식 주체들은 주관화된(파편화된) 현실 속에서 통일성의 염원에 대한 욕망만을 충동적으로 갈망하게 되었으며, 유토피아적 사유의 근원으로서의 과거의 전범들이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라는 것이다, 둘째는 신화의 영역을 들 수 있는데, 신화 역시 과거의 경우처럼 시간의 압박과 지배를 받지 않으며, 시작과 끝이라고 하는 관념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다. 경험된 내용의 형식과 질이 시간적 수축과 팽창을 하지 않고 인식 주체의 체험된 심리 속에 고스란히 보존된다고 한다. 신화는 직선적인 역사철학적 시간의식이 단절될 때 등장하는, 곧 시간적 연속성이 파괴되는 순간에 나타나는 의식체험의 하나라는 것이다. 그에게서 주목되는 것은 모더니티의 유토피아 지향성 가운데 신화의 영역이다. 그에 의하면, 신화 역시 과거의 경우처럼 시간의 압박과 지배를 받지 않고, 시작과 끝이라고 하는 관념이 존재하지 않으며, 또한 경험된 내용이 시간적 수축과 팽창을 하지 않고 인식 주체의 체험된 심리 속에 온전히 보존되기 때문에 신화는 직선적인 역사철학적 시간의식이 단절될 때 등장하는, 곧 시간적 연속성이 파괴되는 순간에 나타나는 의식체험의 하나라는 것인데, 이러한 통찰은 매우 날카로운 것으로서, I. Kant의 가상세계(이성, 자유의지의 세계, 초월적 세계)와 다르지 않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는 모더니티의 개념에 대해 본격적으로 거론하고 수용하였던 金起林을 되돌아보지 않을 수 없다. 그에 의하면, 시는 어떠한 시간과 공간도 함께 공존할 수 있는 無我境(ecstasy)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전제로, 추상화한 주관으로서의 감정을 표현하는 로맨티시즘의 시와 표현주의의 시를 비판한다. 인생의 구체적인 현실과 어떻게 관련이 있는가 알 수 없는 다시 말해서 감정을 그대로 노출시킨 시는 독자와 아무런 교감도 성립될 수 없으며, 우리가 그러한 시를 읽고 울 수는 있으나 그것은 억울한 "눈물의 강요"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시인은 엑스터시가 어떠한 인생의 時空的 사건과 관련하고 있는가 보여주어야 하는 卽物主義者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타성적인 감성에 강아지처럼 충실하다고 하는 것은 과거의 지식의 되풀이에 불과하며, 이러한 비속주의의 말 다시 말해서 스테레오타입으로서의 의미에 귀를 기울이지 말고, 근원(primitive)적이며 새로운 관념(인류의 財貨)을 찾아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 만약 감정이 시의 본질이라고 생각한다면 우는 얼굴과 노한 목소리가 제일 시적일 것이라고 한다. 소재에 불과한 감정을 구축하고, 또 인위적이고 외면적이며 부자연스러운 리듬에 관심을 두지 않고 오직 자연스러운 언어의 구체적인 상태에서 시적 관계를 발견할 때 비로소 내면적인 본질인 리듬을 담게 될 것이라고 한다. 많은 어휘 속에서 엑스터시를 불러 일으킨 이미지에 가장 유일한 단어를 선택하여 그 이미지를 대표하게 할 수 있는 그러한 지적 태도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A. Pope(1688∼1744)의 말을 인용한다. 즉 "말은 양식으로서 같은 법칙을 지킬 것이다. 너무 새롭거나 너무 낡은 것은 狂想的으로 보일 것이다. 그의 손으로 새로운 것이 실험되는 그러한 사람이 되지 말아라. 그리고 옛것을 정리하는 최후의 사람이 되지 말아라"고 한다. 그러나 이와 같이 법칙을 지키라고 하는 것은 선명한 원색이라든지 또는 통속성만을 주장하는 "소박한 사실주의"를 따르라는 것이 아니라 다시 말해서 사물의 표면에 흐르는 원색이 아니라 "빛과 그늘의 밸류(value)," 즉 심층의 의미를 찾아서 따르라는 것이다. 그래서 한 편의 시는 그 자체가 한 개의 통일된 세계여야 하며, 그것은 어느 한 시인의 개성(혹은 시풍)이 아니고 한 시편으로서의 독자성에 의하여 독자를 붙잡아야 하며, 그래서 항상 청신한 시각으로 문명을 비판하고 인생과 깊은 관련을 갖는 시는 한낱 장식물에 그치지 아니하고 적극적으로 인생을 향하여 움직이는 힘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시에 나타나는 현실은 단순한 단편이 아니라 의미가 있는 현실이라는 것이다. 그 현실이 시공적으로 파악되어 언어로 표현된 것이 시라고 할 수 있는데, 여기서 의미가 있는 현실이라는 것은 현실의 본질적 부분을 가리키는 말이며, 그것은 현실의 한 단면이면서도 그것이 상관하는 현실 전부를 대표하는 부분이라고 한다. 매우 날카롭고 정확하게 모더니티의 개념을 포착하고 있음을 우리는 간과하지 못한다. 현실을 표층의미만 가지고 있는 현실이 아니라 그 보편성 이외에 심층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중층구조의 현실이어야 한다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는 것은 우리가 그의 견해에 대하여 다시 한번 심각하게 반추해보아야 한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라고 생각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에게는 이러한 모더니티의 관점뿐만 아니라 또 다른 관점이 있음을 간과하지 못한다.

 

    「스윗타스」는 말하였다.
    『무슨 까닭에 우리들의 기계는 아름다운가. 그것은 그들은 일하고 움직이는 까닭이다. 무슨 까닭에 우리들의 집은 아름답지 아니한가. 그것은 그들은 아무 일도 하지 아니하고 멍하니 서있는 까닭이다』. 그는 이 짧은 말 가운데 현대시에 대한 매우 중대한 세 개의 명제를 포함시켰다.
    첫째 우리들의 시는 기계에 대한 열렬한 美感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 「운동과 생명의 구체화」(페르낭·레제)로서의 기계의 미를 인정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내일의 사회질서와 인간생활에 있어서 새로운 기조가 될 것이다.
    둘째 정지 대신에 동하는 미.
    그것은 미학에 있어서의 새 영역이며, 시에 있어서의 새 역학의 존중이다. 행동의 가치에 대한 새 발견이다.
    셋째 일하는 일의 미.
    다시 말하면 노동의 미다. 움직이지 않는 것은 「죽음」이다. 움직이지 않는 신, 움직이지 않는 天國, 涅槃은 「죽음」의 상태가 아니고 무엇일까. 활동은 생명이다. 진보다. 그것은 그 자체가 미다.(밑줄 필자)

 

그의 시론 "시의 「모더니티」"의 중간에 삽입되어 있는 위의 인용에서 보는 바와 같이 그는 기계 예찬의 시론(cf : 林和와 金允植의 "근대는 기관총, 대포, 비행기를 만들어내는 힘")을 펼치고 있다. 앞에서 매우 날카롭고 정확하게 모더니티를 포착했던 것과는 대조적인 것으로서 어찌 보면 상호 이질적인 것 같은 이 시론은 그 나름대로의 계산과 이유를 밑바탕에 깔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운동,' 즉 심층의미의 역동성을 기계의 운동과 같은 맥락에서 파악하려고 했던 것이 아닌가 한다. 그러나 심층의미의 역동성은 객관으로서의 기계운동이 아니라, 자기 자신 안에서 이루어지는 운동이라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즉, 타자로서의 표층의미와 대자로서의 심층의미가 목숨을 걸고 벌이는 변증법적 운동이라는 것을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도 모더니티를 에워싼 의문은 풀리지 않고 여전히 남아 있다. 우리는 이러한 의문에 대해 반드시 근본부터 되물어야 하며, 그 시점부터 다시 하나씩 들춰내어 면밀히 검토해 보아야 한다고 본다. 근본부터 되묻고 검토한다는 것은 學(科學)의 관점에서 벗어나 철학의 관점으로 한 단계 올라감을 뜻한다. 이것이 과학과 철학의 차이인데, 그 차이를 구체적으로는 세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먼저 철학은 존재를 전체로서 다룬다. 가령 물리학은 물리 현상을 다루고 경제학은 경제 현상을 다루며 문학은 문학 현상을 다루듯이 각기 존재의 특수분야를 연구의 대상으로 삼는데 반하여, 철학은 처음부터 어느 한 분야에 국한하지 않고 대상 또는 존재라고 할 수 있는 것을 전체로서 다룬다. 두 번째로 철학은 주체를 주체적으로 파악하려고 한다는 점에서 과학과 다르다. 과학은 각기 특수한 대상을 연구 대상으로 삼기 때문에 연구의 시점은 오로지 대상으로만 쏠린다. 이것을 연구하는 주체 자체는 연구하지 않는다. 심리학은 주체를 다루는 것이 아니냐고 반문하겠지만, 심리학이 다루는 것은 어디까지나 대상으로서 객관화된 심적 작용이지 이런 작용을 하는 주체는 아니다. 이 주체를 주체 스스로가 파악하는 것이 자각이며, 이 자각을 통한 주체의 파악을 추구하는 것이 바로 철학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세 번째로 철학은 여러 과학의 기초를 비판한다. 과학은 모두 일정한 전제 위에 구축되어 있다. 이 전제는 기하학에서의 공리와 같이 자명한 것이며, 이 자명한 것조차 철학은 비판하고 음미한다. 이와 같이 철학은 인간의 모든 지적 활동 자체와 그 결과를 끊임없이 비판해왔다. 과연 어떤 지식이 참된 지식인가? 진리란 무엇인가? 또는 인간의 인식 능력은 어디까지 미칠 수 있는가? 등등의 문제를 다루는 것을 認識論이라고 한다. 우리의 일상생활은 인식을 전제로 한다. 길을 걷는데도 이것이 차도가 아니라 인도임을 알고 신호등을 식별하고 사람이나 차를 피하고 또 지금 걷는 이 길이 어디로 가는가를 알고 있다. 이런 여러 인식이 전제되지 않고는 단 한 가지 행동도 할 수 없다. 그러나 이러한 인식에는 아는 자와 알려지는 것이 있게 마련이다. 다시 말해서 인식에는 인식의 주관과 객관이라고 하는 두 가지 요소가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인식한다는 것은 주관이 객관 즉 대상을 인식하는 것을 말하며, 이때 우리의 관심은 대상을 향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 관점을 대상으로부터 인식 자체로 옮길 수도 있다. 이러한 인식론은 전통적으로 다음과 같이 대별한다.

그러므로 근대성, 현대성, 또는 계몽이라는 용어로 혼란스럽게 사용되고 있는 모더니티의 문제를 이러한 맥락에서 천착해 본다면, 쉽게 그 매듭이 풀리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3. 연구 방법론

林和에 의하면, 갑오이후에 전개되는 개화의 과정은 오로지 구미문화의 일방적인 이식과 모방의 과정이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우리가 가장 주목해야 할 점의 하나는 이러한 일방적인 신문화의 이식과 모방에서도 고유문화는 전통이 되어 새 문화 형성에 무형으로 작용함은 사실인데, 우리에게 있어서 전통은 새 문화의 순수한 수입과 건설을 저해하였으면 하였지 그것을 배양하고 그것이 창조될 토양이 되지는 못했다고 한다. 이러한 불행은 결코 한국의 문화전통이나 유산이 저질이기 때문이 아니며, 단지 근대문화의 성립에 있어 그것으로 새 문화 형성에 도움이 되도록 개조하고 변혁해 놓지 못했기 때문이며, 한국의 자주정신이 미약하고 철저하지 못했기 때문이며, 그렇기 때문에 신문화의 형성자들은 구문화를 변혁하여 새 문화 형성에 사용하는 대신 왕왕 그것과 타협함에 이르렀다고 한다. 이러한 林和의 문화에 대한 주장은 일견 탁견이라고 아니할 수 없지만, 文化移植에 대해 검증된 학설의 근거 없이 개인적 일방적 견해에 그치고 있음을 볼 수 있었다. 이에 본고에서는 그의 견해를 보완하고 발전시켜, 한국문화의 변동의 연구가 문화인류학 내지는 문화학의 입장에서 학파의 대별에 따라 한국문화의 변동과정을 진화론적 관점, 전파론적 관점, 구조기능주의적 관점에서 고찰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믿고, 앞으로 이러한 관점에서 논지를 펴나갈 생각이다. 그리고 'modernity'를 한국시의 경우 '근대성' 또는 '현대성'의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 그러니까 신체시의 출현으로부터 소위 자유시가 출현하기 이전까지의 시를 근대성이 있는 시라 하고 그 이후의 시를 현대성이 있는 시라고 한다. 이것은 다시 '계몽'이라는 말과 30년대의 'modernism'과 맞물려 그 의미가 더욱 혼란스럽게 느껴지기도 하는데, 한편으로는 서구의 합리주의적 사고방식에 뿌리를 박고 있는 근대성 또는 현대성의 의미를 의심 없이 확정된 것으로 받아들이고 그것이 출현한 시기와 그 확정된 의미를 제대로 해석하고 소화하고 있는가 아닌가의 정도에 따라 근대성과 현대성을 구분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 문제에 대하여 우리는 반드시 근본부터 되물어야 하며, 근본부터 되묻고 검토한다는 것은 學(科學)의 관점에서 벗어나 철학의 관점으로 한 단계 올라감을 뜻한다. 철학은 인간의 모든 지적 활동 자체와 그 결과를 끊임없이 비판해왔다. 과연 어떤 지식이 참된 지식인가? 진리란 무엇인가? 또는 인간의 인식 능력은 어디까지 미칠 수 있는가? 등등의 문제를 다루는 것을 철학 가운데 인식론이라고 한다. 이러한 선험적인 이론적 인식에서 실천적 인식으로의 이행, 즉 제약(悟性)에서 무제약(理性)으로 넘어가는 진보의 단계를 두 번째 단계의 초월철학(형이상학)이라고 하며, 이것이 모더니티의 문제를 푸는데 적합한 방법론이 될 수 있다고 믿는다. 이렇게 우리 앞에 나타난 사회적 문화적인 문제와 텍스트를 분석하는 데에는 Roland Barthes와 A. J. Greimas의 기호학이 동원될 것이며 상세한 것은 다음 장에서 언급될 것이다.

  각주

  1. 김병선, "한국 개화기 창가 연구"(문학박사학위논문, 전남대학교 대학원, 1990), pp. 32∼39. 金 東은 27편을 주장하고 있으나, 김병선에 의해 32편으로 확인되었다. 추가된 시가는 다음과 같다.
작품명 작가 직업·주소 게재일자·호수
군가 시위대병뎡 시위대 1897. 6. 11(2-68)
애국가 찬양회부인회 1897. 10. 18(3-167)
새군가 윤철규 시위대2대대쟝 1898. 11. 21(3-195)
교가 경셩학당 1899. 6. 16(4-135)
무궁화노래 배재학당 1899. 6. 29(4-146)
  2. 宋敏鎬·金春燮, 「開化期文學論」(서울 : 한국방송통신대학교 출판부, 1988), pp. 169∼174.
  3. 閔庚培, 「韓國敎會讚頌歌史」(서울 : 연세대학교 출판부, 1997), pp. 15∼68 이후 초기의 찬송가가 다음과 같이 간행되었다. 「찬셩시」(1895)-北長老敎 宣敎部 그레함 리와 기포드 부인 編輯 刊行
「셩회숑가」(聖會頌歌)(1903)-大英國宗古聖公會 刊行
「복음가」(1907)-東洋宣敎會 編
「구세군가」(1908)-호가드(許嘉斗) 編
「예수 강림찬미가」(1911)-第7日 安息敎, 田時說 發行
「죠션어셩가」(1924)-뮈델 編輯 刊行
  4. 宋敏鎬·金春燮, op. cit., pp. 233∼234.
  5. 趙演鉉, 「韓國現代文學史」(서울 : 성문각, 1982), pp. 116∼120.
  6. 權五滿, 「開化期詩歌硏究」(서울 : 새문사, 1989), pp. 206∼207.
  7. 宋敏鎬·金春燮, op. cit., pp. 162∼164.
金宗澤·南星祐, 「國語意味論」(서울 : 한국방송통신대학교 출판부, 1989), pp. 24∼25. Donald Keene, 德岡孝夫 역, 「日本文學の 歷史」, 10, 近代·現代篇 1 (東京 : 中央公論社, 1995), p. 264.
임지룡, op. cit., pp. 151∼152.
Encyclopaedia Britannica, 1996 ed, s. v. "Korzybski, Alfred." 폴란드 출신 미국의 과학자. 철학자. 1차 대전 중 러시아 군 지식분야의 일반참모로 고용된 그는 1915년 군사사절로 미국과 캐나다로 파견되었다. 1917년 짜르 정권이 무너지자, 그는 프랑스·폴란드 군사사절의 비서로 고용되어 미국에 체류했다. 그후 미국 시민이 되었다. 그는 언어에 대한 작용과 반작용의 개선과 연구를 통하여 세대와 세대간에 이념을 전달하는 인간의 능력(그는 인간의 "time-binding capacity," 즉 "시간을 묶는 능력"이라고 한다)을 발전시키고자하는 언어철학의 체계인 일반의미론의 창시자이다. 잘 알려진 저서는 "Science and Sanity : An Introduction to Non-Aristotelian System and General Semantics(1933)"로서, 언어에 대한 전통적 주장에 대해 비판하고 있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명칭의 문제인데, 진화시와 전파시라는 새로운 명칭의 사용에 대해서는 앞에서 언급한 문화학의 연구관점을 인정한다면 충분히 이해될 것으로 생각된다. 중요한 것은 신시와 신체시의 호칭 문제이다. 그 명칭은 崔南善 자신도 혼용하고 있는 터인데, 1910∼1930년대에 걸쳐 간혹 신문이나 잡지에서도 이들 용어가 혼용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러한 명칭 가운데 '신시'는 주로 趙潤濟, 鄭漢模, 金基鉉 등이, '신체시'란 명칭은 白鐵, 趙演鉉, 趙芝薰, 金東旭, 金 東 등이 사용하고 있다. 이들 가운데 鄭漢模만이 용어에 대한 확정의도를 강렬히 들어내고 있을 뿐 다른 분들은 이들 용어에 대한 반성이나 검토 없이 단순히 '새로운'의 범칭적 용어로 사용해왔을 뿐이다. 특히 鄭漢模는 '신시'로 확정 사용할 것을 주장하면서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이유를 들고 있다. 첫째, 六堂의 신시와 일본의 신타이시(新體詩) 사이에는 유사한 점도 있지만 그에 못지 않게 그들의 차이점도 크다. 오히려 六堂의 신시가 일본의 신타이시(新體詩)보다 내적으로 다양한 면이 있다는 것이다. 둘째, 六堂의 "舊作三篇"의 창작 동기를 말한 '後記'에서 작가 자신이 이런 일련의 시를 '신시'로 규정하고 있는 사실을 근거로 하여 '신시'로 하는 것이 타당하다는 것이다. 셋째, '신체시'는 일본의 명칭을 그대로 차용한 것이므로 그것과 구별하기 위하여도 '신시'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이 훨씬 낫다는 것이다. 그의 논리를 따라가다가 보면 감히 이의를 제기하기가 어려운 것만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러한 일반론의 입장에서 잠시 벗어나 학문이라는 특별한 논리의 입장에 서서 보면 조금은 관점의 차이가 있음을 간과하지 못한다. 다시 말해서 언어학적 입장 또는 의미론적 입장에서는 그의 견해와 다를 수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동물'이라는 의미는 '야생동물'과 '가축'을 포함하고 가축은 다시 '소'와 '양'을 포함하며 소는 다시 '황소'와 '암소'를 포함한다. 이것을 그림으로 나타내면 다음과 같다.

               동물
                ∧
            가축 야생동물
             ∧
           소 양
           ∧
        황소 암소

  여기서 가축과 야생동물은 동물의 직접 하위성분이 되고 소와 양은 가축의 하위성분이 된다. 언어의 기능을 추상기능에 중심을 두고 설명하는 것도 이와 같이 어휘체계에는 상위개념과 하위개념간에 유기적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최하위의 단계까지 내려가면 언어는 없어지고 사물 혹은 사실만 남게 된다. 이러한 의미의 계층적 대립관계를 A. Korzybski(1879∼1950)는 추상의 사닥다리(abstract ladder)로 나타내고, 의미를 설명하는 경우에는 되도록 추상의 단계를 한 단계씩 낮추어 줄 것을 말하고 있다. 이와 같은 유기적 관계를 상하관계(hyponymy)라고 하며, 이는 어휘소의 의미에 대한 계층적 구조로서 한 쪽이 의미상 다른 한 쪽을 포섭하거나 포섭되는 관계를 말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신시'와 '신체시'의 성분을 분석해보면 다음과 같은 결과가 나온다.

  新詩 [+시간][+내포성][+상위][-공간]
  新體詩 [+시간][+외연성][+하위][+공간]

  상하관계는 함의(entailment)와 밀접한 연관을 가지고 있다. 곧 '신체시'는 '신시'를 의미적으로 함의한다. 그러나 그 역인 '신시'는 '신체시'를 함의하지는 않는다. 이를 그림으로 나타내면 다음과 같은 일방함의(unilaterall entailment)의 관계가 성립됨을 알 수 있다.

  (新體詩) 하위어 → 상위어 (新詩)

  곧 하위어(subordinate)는 상위어(superordinate)를 함의하지만 역으로 상위어는 함의하지 않는다. 이를 의미성분과 관련지으면 상위어는 하위어보다 의미성분이 적음을 알 수 있다.

  新詩의 의미성분 [+시간][+내포성][+상위][-공간] → 3개
  新體詩의 의미성분 [+시간][+외연성][+하위][+공간] → 4개

  신체시는 신시에 없는 음절 '體'가 하나 더 있을 뿐 아니라 의미의 성분으로는 [+공간]을 가지게 된다. 아무튼 의미성분의 수가 적은 쪽이 상위가 되고, 많은 쪽이 하위어가 된다. 또한 의미성분의 수가 같은 경우는 [공-하위어]가 된다. 결국 의미성분의 수가 많은 하위어는 구체적 특수적이며, 의미성분의 수가 적은 상위어는 추상적 일반적이므로, 구체적이고 특수한 사항이 추상적이고 일반적인 사항을 함의하게 되는 것이다.
의미성분을 분석해 본 결과 '신시'와 '신체시'의 변별성이 분명히 드러났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신시'를 장르의 명칭으로 사용하자고 주장하는 분들의 논리에도 일면 타당성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상식적이고 일반론적인 관점보다는 냉철하고 이성적인 학문의 관점에서 '신체시'를 사용하는 것이 좀더 일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일본에서 토야마 마사카즈(外山正一), 야타베 료우키치(矢田部良吉), 이노우에 테츠지로우(井上哲次郞)가 "신타이시쇼우(新體詩抄, 明治 15=1882)"라는 타이틀로 서구시를 소개한 경우를 상기하면, 어쩐지 개운치 않은 것은 사실이지만 어차피 서구시의 직접 수용이 아니고 일본을 통해서 간접 수용이 이루어진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입장이고 보면 학문적인 논리를 따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굳이 신체시라는 명칭을 일본과 동일하게 사용하기 싫다면, 일본의 경우에는 원음 그대로 신타이시(しんたいし,新體詩)라 호칭하고, 한국의 경우에는 신체시로 발음하면 그만이다.
  8. 金容稷, 「韓國近代詩史」, 上, (서울 : 學硏社, 1994), pp. 89∼110.
  9, 金恩典, "象徵主義 受容과 그 展開," 「文藝思潮」(서울 : 문학과 지성사, 1987), p. 431.
  10. 吳世榮, 「韓國浪漫主義詩硏究」(서울 : 일지사, 1980), pp. 252∼255.
  11. 임규찬·한진일,「林和 新文學史」, 한길문학총서, 9, (서울 : 한길사, 1993), p. 29. 12. Ibid., 32∼37.
  13. Ibid., p. 37.
  14. 鄭漢模, 「韓國現代詩의 現場」(서울 : 박영사, 1983), pp. 173∼174.
  15. 金允植, 「韓國文學의 近代性批判」(서울 : 문예출판사, 1993), p. 11.
  16. 吳世榮, "근대시의 형성과 그 시론," 「한국현대시론사」, 한국의 현대문학·2, (서울 : 한국현대문학연구회, 1992), pp. 9∼13. 이밖에 근대성에 대한 견해를 참조할 수 있는 자료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구모룡, 「문학과 근대성의 경험」(서울 : 좋은날, 1998)
  권영민, 「서사양식과 담론의 근대성」(서울 : 서울대학교 출판부, 1999)
  김경복 외, 「서정시의 본질과 근대성 비판」(서울 : 다운샘, 1999)
  김복순, 「1910년대 한국문학과 근대성」(서울 : 소명출판, 1999)
  김사엽, 「국문학사」(서울 : 정음사, 1954)
  金容稷, "한국근대문학의 기점문제," 「근대문학의 형성과정」(서울 : 문학과 지성사, 1983)
  金允植·김현, 「한국문학사」(서울 : 민음사, 1973)
  나병철, 「근대성과 근대문학」(서울 : 문예출판사, 1995)
  나병철, 「한국문학의 근대성과 탈근대성」(서울 : 문예출판사, 1996)
  문학사와 비평연구회, 「한국 현대문학의 근대성 탐구」(서울 : 새미, 2000)
  상허문학회, 「1930년대 후반문학의 근대성과 자기성찰」(서울 : 깊은샘, 1998)
  상허학회, 「1920년대 동인지문학과 근대성연구」(서울 : 깊은샘, 2000)
  이명찬, 「1930년대 한국시의 근대성」(서울 : 소명출판, 2000)
  趙東一, "한국근대문학 형성과정론사," 「근대문학의 형성과정」(서울 : 문학과 지성사, 1983)
  하정일, 「20세기 한국문학과 근대성의 변증법」(서울 : 소명출판, 2000)
  黃浿江, "한국문학사의 근대," 「근대문학의 형성과정」(서울 : 문학과 지성사, 1983)

17. Ibid., pp. 14∼17.
  18. 吳世榮, 「한국 근대문학론과 근대시」(서울 : 민음사, 1996), pp. 358∼365.
  19. 하정일, "근대와 자본주의 동질성 여부를 둘러싼 논쟁 : 근대(近代)와 자본주의를 동일시하는 것은 과연 합당한가," 「문학사상」, 통권 제322호(1999. 8), pp. 71∼83.
  20. 대응설에 있어서의 이성을 지칭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더욱 미궁 속으로 빠져드는 것이 되고 말 것이다. 왜냐하면 모더니티는 그 이성을 근본으로 삼고 있는 세계관의 부정으로부터 시작되기 때문이다.
21. 최원식, "한국 문학의 근대성을 다시 생각한다," 민족문학사연구소 편, 「민족문학과 근대성」(서울 : 문학과 지성사, 1995), pp. 37∼40.
  22. 文德守, 「韓國 모더니즘詩 硏究」(서울 : 詩文學社, 1981), pp. 42∼43.
  23. 송기한, 「한국 전후시와 시간의식」(서울 : 태학사, 1996), pp. 38∼55.
  24. 金起林, 「詩論」, 金起林 全集, 2, (서울 : 심설당, 1988), pp. 80∼85.
  25. 金麗壽·車仁錫·韓筌淑, 「哲學槪論」(서울 : 한국방송통신대학교 출판부, 1985), pp. 5∼13. 이밖에 인식론에 대한 참조할 수 있는 자료는 다음과 같다.
  金樹澈, 「哲學의 理解」(서울 : (株)敎文社, 1992)
  朴鍾鴻, 「哲學槪說」(서울 : 박영사, 1964)
  孫明鉉, 「哲學論攷」(서울 : 고려대학교 출판부, 1955)
  李壽允, 「哲學槪論」(서울 : 法文社, 1996)
  韓國社會科學硏究所 편, 「社會科學의 哲學」(서울 : 1980)
  M. Cornforth, 이보임 역, 「認識論」(서울 : 동녘, 1984)
  N. Hartmann, 강성위 역, 「철학의 흐름과 문제들」(서울 : 서광사, 198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