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개와 장미꽃(주근옥)

소절집(주근옥의 제3시집, 새미, 1998. 04. 30)

시문학 연재

통권 제288호(1995, 7. 1), 통권 제289호(1995, 8. 1), 통권 제290호(1995, 9. 1), 통권 제291호(1995, 10. 1), 통권 제292호(1995, 11. 1), 통권 제293호(1995, 12. 1), 통권 제294호(1996, 1. 1),

소절(素節)에 대하여

비둘기

시위 군중을

베란다 끝에 앉아

비둘기가 바라보네

同行

어둠 속에서

앞차를 따라가다가

함께 빠진 바다여라

송홧가루

송홧가루 쌓인 뜰에서

고개 들어 바라보는

앞산 먼산 하늘

오징어

가을비 그치니까

파리가 앉아 흘레하는

오징어 위에도 햇살

돌계단

사람들이 단풍을 보러

오른다 했더니 내려가네

여울물 속의 돌계단

꽁치

석쇠 위에서

꽁치가 익는 동안

밖은 눈과 기적소리

낮술

취해 비틀거리며

백일홍 꽃에 오줌누네

놀라 뛰는 개구리

저물녘

주인은 취해 눕고

손이 와서 팔고 있는

저물녘 생선 가게

벚꽃

관촉사 벚꽃 속에서

문상 못 한 친구 만나

흠칫 놀라다

깜부기

깜부기 물고

풀밭에 누워 보면

뱃속도 하늘인가

鐵路

햇살 받으며

서울행 철로 위를

까치가 걷는구나

나리꽃

청문회가 시작되자

수상기 옆에 앉아

나리꽃도 엿들어

수수모가지

참새가 앉으니까

비닐로 덮어씌우는

수수모가지라냐

찌러기

검정찌러기가

길을 막고 투그리자

등에 쌓이는 살구꽃

기차와 민들레

소나기 속으로

기차가 달려가는

철로 밑 민들레

밤비

소리로만 들리다가

번갯불로 떨어진다

그 순간은 장미꽃인가

구봉산

단풍놀이 가서 보니

구봉산은 자취도 없고

얼굴만 물들어 돌아옵니다

요기

꾀꼬리 한나절

소나무 그늘에 누워

나는 가래로 요기하네

연못

빗방울이 떨어지면

동그라미가 모여서

연꽃을 피우는가

파

돌각담 너머로

뛰노는 아이 불러

파뿌리 다듬어라 하네

靑銅佛

청동불은 말이 없고

속이 꽉 찬 벚꽃은

자꾸 벙글고

풀물

꼴을 베니까

낫날에 손바닥에

풀물이 배어드느니

황소바람

무릎을 오그릴수록

뼛속으로 파고드는

황소바람입니다

햄버거

입이 찢어져라

어미는 상치를 먹고

딸은 햄버거를 먹고

배동

저수지가 터져

휩쓴 마을 염소도

보리도 배동 서네

미나리

양은솥 끓는 물에

미나리 우겨 넣고

뚜껑을 덮네

수레와 싸리꽃

덤프 트럭까지

끄는 고물 수레 위에

싸리꽃도 한 다발

맨드라미꽃

최루탄을 쏘아도

길가에 서서 피는

맨드라미꽃

百濟便器

밖은 배롱나무꽃

진열장의 변기가

날 들여다보네

돌

배꽃 속에서는

넘어졌다가도 일어나

돌에게 절하게 되더라

서리

시장의 쓰레기통

배추이파리에도

서리가 내려

불강아지

이슬을 맞으며

상치밭에 똥누는

아랫집 불강아지

콩나물국

돈 잃고 날 새자

목로에 앉아 우리는

콩나물국을 마십니다

굴뚝

감자밭에서

공장 굴뚝에 오르면

사람도 하늘인가

醉氣

외상을 갚고

빈손으로 돌아와 눕는

방은 취기로 데워지고

落花

후루루 후루루

벚꽃그늘 아래서

마시는 개장국물

기러기

어스름 여울 가에서

장국이랑 밥을 지을 때

산 위로 기러기가 넘네

草千里

풀로만 덮여있는

산과 들을 자세히 보니

교미하는 말이로구나

첫눈

첫눈이 내린 새벽

문을 여는 생선장수에게

생강차도 공으로 주고

밥을 앙구며

하늘은 눈보라

이불을 둘러쓰고

품속에 밥을 앙궈

물 한 모금

품속에서 나와

저수지 물 한 모금 물고

하늘을 바라보는 병아리

감나무

감나무 심어놓고

되돌아와 죽었는지

껍질을 까보네

고드름

솔잎 끝에서

자라는 고드름도

너는 깨물어 먹는구나

누에

고치짓기로부터

나방까지 누에는 입으로

끝내고 파르르 떠네

선짓국

느티나무 이파리

쏟아지는 마을 어귀에

선지국 끓는 냄새 그리워라

손가락

싸리 울타리 밖

양지꽃을 꺾어 보는

손가락이로구나

항아리

마지막으로 배추김치

꺼내고 뚜껑을 덮자

테 두른 항아리

부루기

어미를 놓치고

제 똥에 미끄러져

길길이 뛰는 부루기

옥화란

옥화란 꽃대궁에

청개구리도 매달려

입을 벌려 보는 저녁

까투리

발목에 감긴 줄 풀려고

쪼다가 닳아버린 주둥부리

이제 몸뚱어리만 남았습니다

아궁이

아궁이 앞에 앉으면

솔솔 새어드는 종소리도

감자 굽는 냄새

사과

다시 불러도

기척 없는 방안에

사과라도 쏟아놓자

문지방

살구꽃 구경왔다가

문지방을 베고 누워

친구는 코를 곱니다

친구

초파일 햇살 속에서

만난 친구 반갑다고

팔목을 비틉니다

옷을 꿰매며

뜰에는 매화

무릎과 팔 깁다가

마음까지 누비느니

함박눈

뜰에 나온 아기

아랫도리 목까지

함박눈이 차 오르네

문고리

서리 밟으며

집에 돌아와 잡자

쩍 붙는 문고린가

배

볏단을 나르며

괼타릴 자꾸 올려도

배가 껄끄러워

소댕

두렁길 달려와

소댕을 열면 맹물

얼굴만 떠오르네

회초리

싸리나무 회초리로

끝내 종아리 때리고

아려오는 손바닥

아침에 깨어

꾀꼬리 소리에 깨어

머릿속이 맑은 것도

근심이라 하네

감귤

벗기며 쪼개며

한 쪽씩 입에 넣고

진저리치네

볼

오디에 볼이 젖어

안다가 도로 미는

아가의 눈이런가

국물

꽃게 한 마리 지져

애들은 살만 빼어먹고

나는 국물만 떠먹는다

도꼬마리

꼼지락거릴수록

속살로 달겨붙는

근심은 도꼬마린가

臥雲里

층층나무 가지 사이로

계곡 물은 쏟아지고

나는 거슬러 오르고

샛길

낙숫물 때문에

다툰 사람 만나면

돌아가는 샛길입니다

바다

수평선 아래로

노을빛 사라지면

바다도 비릊는가

망초꽃

망초꽃 속에서

어미 잃은 고양이

암캐가 젖을 물린다

바가지

바가지 안에

나싱개랑 눈물도 넣고

아내는 버무리네

잠자리

밖은 눈보라

잠시 눴다가 나오는

아들의 잠자리

샘물

진흙 속에서

치며 뒹굴며 싸운 뒤

벗고 붇는 샘물이어라

산등성이

이슬비 젖으니

연둣빛 오리나무

그리고 산등성이

가을밤

미내다리 밑에서

주워왔다는 말이

진실로 들리는 가을밤

폭풍우

아침에 따려고

자두를 세는 밤에

몰아치는 폭풍우

장터에서

순대랑 고추랑

새우젓 먹는 얼굴

아들이 바라보네

상엿집

허물어진 상엿집도

앞산에 가서 보면

살구꽃밭

숟가락

명태 한 마리

올라온 저녁 밥상은

숟가락으로 붐빕니다

고샅에서

뒷고샅에서

부는 바람 안으며

가슴을 풀어헤칩니다

개평

장바닥에 앉아

개평으로 얻어먹는

참외랑 개떡이랑

장날

개나리꽃 피는 장터

장바닥에 강아지 놓고

앉았다가 도로 안고 갑니다

달걀

햇달걀 꺼내

시렁에 숨겨놓고

아끼다가 곯는구나

동백꽃

겹겹 파도소리

감싸안은 동백꽃

벙그려고 그느네

수화기

수화기 속에서

이슬비 소리가 들린다

솔솔 풀 향기가 난다

地獄에서

지옥에 가서 보니

사람도 살고 원숭이도 살고

고향으로 가는 길도 보이네

湖水

이슬비와 나란히

대청호를 한 바퀴 돌고도

다시 안고 도는 마음인가

외나무다리

눈 녹아 흐르니까

외나무다리 건너고

자랑스런 세살 입니다

분꽃

눈뜨자마자

두부 사러 나간 아이

분꽃 물고 돌아온다야

식칼

식칼도 품으면

체온이 스며들어

미운 정 고운 정 다 듭니다

柳等川

발목에 걸린 수면 위로

뛰어오르는 송사리 떼

그 눈 속에 뜨는 초생달

서정 단시의 아름다운 여운

―주근옥 시집 「번개와 장미꽃」(박명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