츠베탕 토도로프(Tzvetan Todorov) / 최 현무 역

 

⑴ 정의

본질적으로 언술은 다른 언술들과 연관성 없이는 존재하지 않는다. 바흐친에게서 언술에 대한 일반적인 이론은 그 방면의 연구를 위한 피할 수 없는 일종의 간접 수단일 뿐이다. 개개의 언술이 다른 언술들과 갖는 관계를 지칭하기 위해 그가 사용하는 용어는 대화이론(le dialogisme)이다. 그러나 이 핵심 용어는 우리가 예상하는 것처럼 때로는 당황스러운 의미의 다가성(多價性)을 지니고 있다. 내가 ‘초언어학’을 “초월적 언어학”으로 전치시켰던 것처럼 나는 여기서 되도록, 좀 더 함축적인 의미를 위하여 줄리아 크리스테바가 바흐친의 소개에서 도입한 상호 텍스트성(l'intertextualite)이라는 용어를 사용할 것이다. 대화적이라는 명명은 교환 혹은 바흐친이 고안한 인간성의 개념 같은 특수한 경우를 위해서 남겨 둘 것이다. 게다가 바흐친 자신도 다음과 같은 언급에서 이 같은 용어상의 차이를 우리에게 보여준다.

 

(타자의 담론과 나의 담론 사이의) 관계는 한 대화에서의 응답 사이의 관계와 (물론 동일하지는 않으나) 유사하다.

 

가장 기본적인 수준에서 두 개의 언술 사이의 모든 관계는 상호 텍스트적이다.

 

언어적인 두 작품, 중첩된 두 개의 언술은 우리가 대화적이라 부를 수 있는 의미론적인 관계의 특수한 유형을 형성한다. 대화적 관계들은 언어적 의사소통의 모든 언술들 사이의 (의미론적인) 관계들이다.

 

상호 텍스트성은 랑그가 아니라, 담론에 속하며 결과적으로 언어학이 아니라 초월적 언어학에 의지하고 있다. 그러나 언술들 사이의 모든 관계가 꼭 상호 텍스트적인 것은 아니다. 논리적인 관계들(예를 들면 부정, 귀납 등)은 그 자체가(상호 텍스트성에 관련될 수 있으나) 상호 텍스트성을 함축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대화이론에서 제외해야 한다. 역시 같은 방식으로 어구반복, 대구법 등의 좁은 의미에서의 순수하게 언어학적 혹은 형식적인 관계들도 대화이론에서 제외해야 한다.

 

이들 (대화적인) 관계들은 완벽히 특수한 것들이며, 논리적인 관계, 언어학적인 관계, 심리학적이거나 기계적인 관계 혹은 또 다른 종류의 자연적인 관계로 귀결될 수 없다. 이는 의미론적인 관계의 특수한 유형이며, 그 구성 요소들은 단지 완전한(혹은 완전하다고 고려되는 혹은 잠정적으로 완전한) 언술들이며, 이 언술의 배후에는(혹은 내부에는) 실재적 혹은 잠정적인 파롤의 주체들, 언술의 저자들이 위치하고 있다.

 

위 문장의 끝부분은 매우 중요하다. 상호 텍스트적 관계에서 언술은 마치 주체를 증명하는 것처럼 고려되어 있기 때문이다.

 

대화적이 되기 위해서 논리적인 관계 그리고 주체나 객체간의 의미론적인 관계들이 현현되어야만 한다. 이미 우리가 언급했듯이 이 관계들은 또 다른 존재의 영역에 들어가야 한다. 그것들은 담론, 다시 말하면 언술이 되어야 하며, 하나의 저자 말하자면 이 언술의 창조자(그의 위치는 역으로 언술이 표현해 주고 있다)를 인정해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모든 언술의 내부에서 우리는 창조자로서의 저자를 파악한다. (…) 대화적인 반응은 그것에 반응을 보이는 언술을 인격화시킨다.

 

알다시피 언술이 그의 저자의 모방할 수 없는 개인성을 표현한다는 것으로 위의 언급을 이해해서는 안 된다. 현재 여기 있는 언술은 하나의 세계관의 표명처럼 인식되며 여기에 없는 언술은 또 다른 세계관의 표명이다. 실제로 대화가 성립되는 것은 이들 세계관의 상이한 표현 사이에서이다. 예를 들면

 

문학창조의 과정에서 모국어와 외국어의(한 작품이 외국어를 사용할 때) 상호적인 조명은 한 언어나 다른 언어의 ‘세계관’의 측면, 그들의 내적인 형식, 그들의 언어에 고유한 가치론적 체계를 강조해 주며, 바로 그런 것들을 객관화한다. 문학작품을 창조하는 의식에서 외국어의 조명이 드러내주는 것은 모국어의 음운론적인 체계, 형태론적인 특수성, 추상적인 어휘들이 아니다. 그것은 구체적이며 번역될 수 없는 세계관으로 랑그를 인식하게 하는 것이다. 더 자세히 말하면 바로 총체성으로서의 랑그의 문체가 드러난다.

 

언어의 모든 재현은 그 언어의 발화자와 접촉할 수 있게 한다. 우리로 하여금 랑그가 무엇인지를 ‘인식하게’ 해주는 것은 그 랑그 속에서 누가 말하고 있는지를 식별하게 해준다. 이 ‘인격체’는 언어적 집단 전체(프랑스어의 사용은 “프랑스적인 것”의 주체성을 함축하고 있다)에서 시작해, 다양한 방언들과 문체들에서 파악되는 주체와 표현의 개인적인 형식들에서 드러나는 주체까지를 포함한다. 그러나 이 마지막 형식들은 언어의 개인적인 사용에 한정되어 있다. 문학적인 재현은 문학이 연출해내는 인격들과 우리 사이에 맺어지는 친밀성에 기댈 수 없기 때문에, 단지 언술의 집단적인 주체들만을 인식할 수 있을 뿐이다.

 

(비문학적인) 모든 형식들은 비록 그들이 가장 문학적 재현에 근접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인의 언술로 향해 있다. (…) 진정한 소설 속의 모든 언술에서 우리는 내적 논리와 필연성을 지닌 사회적 언어들의 본성을 느끼게 된다. (…) 소설 속의 이 같은 언어의 영상은 그 소설의 담론과 언어에 용해되어 있는 사회적 지평의 영상, 사회적 이념소의 영상이다.

 

텍스트 사이의 상호 연관적인 차원에서 제외된 언술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볼로쉬노프/바흐친은 초기 저서들 중의 하나에서 이미 모든 담론은 최소한 두 개의 주체들을 포함하고 있고, 그러므로 잠정적인 대화를 상정하고 있음을 언급했다.

 

“문체는 인간이다.” 그러나 우리는 문체란 최소한 두 사람, 더 정확하게는, 한 인간과 그의 내적, 외적 담론에 영속적으로 참여하며 사회집단이 자신에게 행사하는 권위를 구현시키는 작가에 의해 대표되는 한 사회집단이다.

 

그 후의 글에서 바흐친은 특별히 또 다른 명백한 사실을 강조한다. 그것은 파롤의 대상이 무엇이건 간에 그 대상은 어떤 방식으로든지 이미 한 번쯤은 대상이 되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 대상에 대해 이미 이루어진 이전의 담론들과의 만남은 불가피한 것이다.

 

대화적인 성향은 물론 모든 담론의 특징적인 현상이다. 이는 생생한 모든 담론의 자연스런 목표이다. 담론은 담론의 대상과 관계된 모든 면에서 타자의 담론을 만난다. 그리고 이 타자의 담론과의 생생하고 강력한 상호작용을 피할 수가 없다. 단지 신화적인 아담만이 그의 첫 담론으로 아직 처녀지이며 한 번도 언급되지 않은 세계에서 접근하며, 고독한 아담만이 진정으로 그의 담론의 대상에 대해 이루어진 타자의 담론과의 상호적인 유도에서 완벽하게 제외될 수 있었다.

 

그러므로 단어들은 늘 이미 사용되었을 뿐만 아니라, 내부에 이미 사용된 흔적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사물들” 또한 상태는 전과 같다고 해도, 다른 담론들이 이미 건드렸으며 이 다른 담론들과 만나지 않을 수 없다. 이에 관한 한 단 하나의 차이점을 정립할 수 있다면, 이 차이점은 상호 텍스트적인 차원을 지니는 담론들과 그렇지 않은 담론들을 구별시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두 개의 기능의 차이, 즉 상호 텍스트성이 강하게 작용하는 담론과 약하게 작용하는 담론의 두 가지 역할 사이에 있다. 이렇게 해서 바흐친은 상호 텍스트적 관계가 본질적으로 드러나는 담론의 모든 유형의 목록을 만든다. 그것은 일상회화, 법, 종교, 인문과학(바흐친에게서 인문과학의 변별적 특성은 인문과학이 텍스트를 다루며 그럼으로써 인문과학은 연구대상이 된 텍스트들과 대화관계를 형성한다는 점에 있음을 상기할 수 있다), 정치적 담론과 같은 수사학적 장르이다. 반면 자연과학에서 상호 텍스트성의 역할은 미소하다. 자연과학에서 나타나는 타자의 담론은 대개 인용부호 속에 갇혀 있다.

 

⑵ 상호 텍스트성의 부재

바흐친은 이처럼 상호 텍스트적인 차원이 보편적임을 완벽히 인식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때때로 그는 “상호 텍스트적인” 언술과 그렇지 않은 언술 사이의 단순한 대립에 상호 텍스트성의 차원을 포함시키려 하기도 한다. 이 같은 시도 및 시도의(상대적인) 실패는 교훈적이다.

 

① 대화적인 것과 독백적인 것

‘대화’에 대립되는 것으로 제일 처음 머리에 떠오르는 첫 번째 용어는 당연히 ‘독백’이다. 그러나 이미 우리가 보았듯이, 바흐친은 “대화적인 것” 혹은 “대화이론”을 매우 광범한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 그에 의하면 독백 또한 대화적이다(다시 말하면 독백도 상호 텍스트적인 차원을 지니고 있다). 이에 관해 의미심장한 것은 톨스토이의 글에 그 이론을 적용할 때 드러나는 바흐친의 불분명한 수식이다. 1929년에 톨스토이의 문체는 독백적이라고 언명되었으며, 이 단언은 도스토예프스키에 대한 저서의 제2판(1963)에서는 더 확대되어 재언급된다.

 

톨스토이의 세계는 한결같이 독백적이다.(…) 그의 세계에서, 작가의 목소리 옆에는 또 다른 이차적인 목소리가 존재하지 않는다. 바로 이런 이유로 목소리들의 배합의 문제나, 작가의 관점의 특수한 지위에 대한 문제가 생겨나지 않는다.

 

그러나 바흐친은 1934~1935년 사이에 그리고 1975년에 다시 아래와 같은 정반대되는 견해를 편다.

 

톨스토이에게 담론은 하나의 명백한 내적 대화이론으로 구별된다. 이는 대상뿐만 아니라 독자의 측면에서도 그러하다. 톨스토이는 대화이론의 의미론적이며 표현적인 특수성들을 통찰력 있게 인식하고 있다.

 

실상 대화적인 것과 독백적인 것 사이의 대립은 대화의 분열로 대치되며 이 분열은 다양한 형태를 취한다(이것이 대화이론의 특수한 예로서의 도스토예프스키에게 예외적인 위치를 부여하게 한다).

 

도스토프스키 이후, 다성화음(多聲和音)은 강력하게 세계의 모든 문학에 도입된다.(…) 대화이론(등장인물들의 상호간의 주관성)에서 도스토예프스키는 일종의 한계를 초월하며 그의 대화이론은 (보다 높은) 새로운 자질을 획득한다.

 

② 산문과 시

도스토예프스키에 대한 저서의 초판 및 특히 논문 “소설 속의 담론”에서부터 상호 텍스트적인 성격을 지닌 산문은 그런 성격이 없는 시와 대립된다. 시적인 복합성이 담론과 세계 사이에 위치한다면, 산문적인 복합성은 담론과 그 담론의 발화자들 사이에 위치한다고 바흐친은 말할 것이다.

 

(비 적인 영상으로서의) 협의의 시적인 영상에서 모든 작용(이 영상의 역동성)은 단어(의 모든 국면)와 대상(의 모든 복합성) 사이에서 이루어진다. 시에서 단어는 대상 자체의 고갈되지 않는 풍부함 속에, 대상의 모순적인 다양성 속에 그리고 그 “순결한” 그리고 아직 “명명되지 않은” 본질 속에 잠겨 있다. 바로 이 때문에 시의 단어는 그의 맥락의 범위 밖에 있는(물론 이 범위 속에 랑그 자체가 소장하고 있는 보고[寶庫]들이 첨가되지만) 다른 어느 것도 상정하고 있지 않다. 시의 언어는 대상의 모순적인 의식화의 역사나 이 의식이 현재 이질론적임을 망각한다. 반면에 산문 예술가에게서 대상은 무엇보다도 그 대상의 이름, 정의, 가치평가가 지니는 사회적이며 이질론적인 다양성을 나타내고 있다.

 

이것이 담론의 재현이나 그에 따른 발화자의 재현이 시에서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이 재현은 시에서는 산문에서와는 달리 미학적인 가치가 있는 것으로 고려되지 않는다.

 

대부분의 협의의 시적인 장르에서 담론의 내적 대화이론은 예술적으로 개발되어 있지 않으며, 작품의 “미적 대상”에 포함되지도 않는다. 그것은 시적 담론에서는 관례적으로 소멸되어 있다. 반대로 소설 속에서 대화이론은 산문적인 문체의 가장 본질적인 국면들 중의 하나가 되며, 특수한 예술적인 완성을 이룬다.

 

만약 시가 대화이론을 활용한다면, 단번에 소설 쪽으로 기울어질 것이다. 게다가 푸슈킨의 운문소설인 “예프게니 오네긴”은 바흐친이 끊임없이 시로서가 아니라 소설의 예로서 인용하게 된다. 혹은 만약 시가 담론을 재현한다면 조금은 과학적인 방식으로, 뚜렷하고 간결한 형식 속에서 인용문과 같은 등장인물의 직접화법의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반면 산문은 “이중의 목소리가 어우러지는” 담론이나 혼종 언어적인 담론처럼 좀 더 미묘한 형식들에 가치를 부여한다. 시에서 “의심에 관한 담론은 의심할 여지없는 담론이 되어야 한다”고 바흐친은 말할 것이다. 시의 복합성은 대상의 복합성일 뿐 담론 자체는 투명하게 남아 있다.

이 같은 대립의 이유를 우리는 아마도 시는 발화의 상태임에 반해서 소설은 발화를 재현한다는 사실에서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시인의 언어는 시인에게 속해 있는 언어이다. 시인은 그 언어 속에 완벽하게 존재하며, 개개의 형식, 단어, 표현을 그들의 직접적인 목적에 따라 사용하며 말하자면 시인의 의도의 순수하고 직접적인 표현처럼 사용하면서 이 요소들을 개인적인 것으로 만든다. 개개의 단어는 즉각적이고 직접적으로 시인의 의도를 표현해야 한다. 시인과 그의 담론 사이에는 어떤 거리도 존재해서는 안 된다. (반면에 산문가는) 랑그를 그대로 말하지 않으며, 거기에서 다소간 거리를 취하고 있다. 오히려 그는 랑그를 통과하면서 말하며, 이때 랑그는 다소간 농밀해지며 객관화되고 그의 입과 거리를 취하게 된다.

시인은 그의 언어표현 행위를 전달하는데 이는 일차적인 차원의 발화이며 인용부호가 없는, 재현되지 않는 발화이다. 산문가는 언어를 재현하며 그 자신과 담론 사이에 거리를 만든다. 그의 발화는 이중적이다(이 같은 대립에서 우리는 20년 후에 캐테 함부르거가 「담론의 논리」에서 전개할 사고들을 예고하고 있는 것을 느낄 수 있다).

 

③ 소설과 다른 장르들

바흐친에게서 소설은 산문의 최고의 형식이다. 그러므로 소설 속에서 상호 텍스트성이 가장 강력하게 표출된다.

 

내적 대화이론 현상은 우리가 이미 본 바와 같이 생생한 담론의 모든 영역에 다소간 존재한다. 그러나 비문학적인(일상적, 수사학적, 과학적인) 산문에서 대화이론은 대체적으로 분리된 특수한 한 행위에 한정되며 직접적인 대화를 통해서나 구성에서 명백히 드러나는 다른 형식들(타자의 담론을 구분해주고 타자와의 논쟁을 가능하게 하는 형식들) 속에서 성립되는 반면 문학적인 산문, 특히 소설에서의 대화이론은 내면에서부터, 담론이 대상을 관념화하는 방식에서부터 표현에 이르기까지 생생하게 느끼게 해준다. 그럼으로써 담론의 의미론과 통사적 구조를 변형시킨다. 상호적인 대화의 경향은 여기에서 담론의 사건처럼 되며, 이 경향이 담론에 생기를 부여하고 모든 국면에서 담론을 내면으로 역동화한다.

 

더 나아가 강력한 상호 텍스트성은 소설의 가장 특징적인 성격이다.

 

소설 장르의 근본적이고 특수한 대상으로, 소설의 문제적 독창성을 형성하는 것은 말하는 인간과 그의 담론이다. 소설 장르의 특징이 되는 것은 인간 자신의 모습이 아니라 바로 언어의 영상이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은 이 같은 대화이론의 정수중의 정수이며 소설은 이 같이 본질적인 경향의 가장 순수한 현현이다.

예술가들에게 대개 그렇듯이 도스토예프스키에게도 단지 담론의 재현적이고 표현적인 기능이나 등장인물들의 담론이 지닌 사회적이고 개인적인 특수성을 마치 하나의 사물처럼 재창조하는 기술이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그에 앞서 중요한 것은, 어떤 언어학적 특수성을 지니든 간에, 담론의 대화적인 상호작용이다. 도스토예프스키가 재현하고자 하는 일차적인 대상은 담론 그 자체이며 특히 풍부한 의미의 전달체인 담론이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들은 담론에 대한 담론, 담론에 제기된 담론이다.

소설은 무엇과 대립되는가? 이 경우 “직접적”이라고 평가되는 모든 장르들과 소설은 대립된다.

 

모든 소설은 약간의 차이는 있으나 ‘랑그,’ 문체, 언어의 구체적이고 불가분리적인 언어의식의 대화적인 체계이다. 소설의 언어는 재현하지만 않는다. 이 언어는 그 자체 재현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소설적 담론은 늘 자기 비판적이다. 바로 이 점에서 소설은 모든 직접적인 장르들-서사시, 서정시, 엄격한 극 등과 근본적으로 구별된다.

 

우리는 후에 장르에 대해 바흐친의 이론이 제기하는 문제들을 다룰 것이다. 여기서는 단지 바흐친이 다른 연구에서 언급한 소설과 신화 사이의 대립에 주목하자. 이 두 장르는 상호 텍스트적인 연속체의 두 개의 축처럼 제시된다. 신화는 언어의 투명성과 단어와 사물 사이의 일치를 내포하고 있는 반면 소설은 랑그, 담론, 목소리들의 복수성과 있는 그대로의 언어에 대한 불가피한 의식화로부터 시작한다. 이런 의미에서 소설은 철저하게 자기 반성적인 장르이다.

 

담론과 구체적이고 이데올로기적인 의미 사이의 절대적인 결합은 신화의 근본적인 구성요소 중의 하나이다. 바로 이 결합이 한편으로는 신화적 영상들을 전개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문체적인 배열, 언어학적인 의미작용 및 형식들의 특수한 지각을 결정한다.(…) 언어와 이데올로기가 분산되는 것은 한 국가의 문화가 폐쇄적인 체계와 자립을 인식했을 때에만 이루어질 것이다. 그때 이데올로기적인 의미와 랑그 사이의 완벽한 결합 위에 세워진 언어의 신화적 감성의 뿌리는 흔들릴 것이다.

 

④ 문학과 비문학

문학과 비문학의 대립은 원칙적으로 바흐친의 사고에서는 생소한 것이다. 우리는 바흐친이 “시적 언어”를 부당하게 격상시킨 형식주의자들을 비난했음을 보았다. 이에 관해서, 이미 발표된 바흐친의 초기의 논문 중의 하나에 “생활 속의 담론과 시 속의 담론”이라는 제목이 붙여졌음에도, 바흐친이 논문에서 어떤 강한 대립도 상정하지 않았음은 아주 의미심장한 일이다. 눈에 띠는 단 하나의 차이점은 문학적 의사소통의(즉자적인 맥락이 문학에서는 형성될 수 없기 때문에) 더욱 명백한 성격과 관계된다. 그리고 바로 이에 관해 바흐친은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미래의 예술적 형식의 기반과 잠재성은 일상적 담론 속에서 이미 제기되어 있다.

 

혹은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우리는 문학적 언술의 언어학적 구조를 이해하기 위한 열쇠를 가장 단순한 언술들 속에서 발견할 수 있을 뿐이다.

 

바흐친은 그의 초기의 작업에서만 명백하게 문학/비문학의 이분법을 친숙하며 동시에 난해한 용어들로 표현한다. 문학은 통합적인 언어이며, 랑그의 모든 잠재성들의 집적이다.

 

시(여기서는 문학)는 랑그 전체를 요구하며 랑그의 모든 국면과 요소들을 필요로 하고 언어학적인 모든 뉘앙스에 무관심하지 않다. 시를 제외한 어떤 문화의 영역은 총체성으로서의 랑그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랑그는 시 속에서의 모든 가능성을 드러낸다. 왜냐하면 랑그에 대한 요구들이 시에서는 최고에 달하기 때문이다.

 

혹은 문학이란 언어 속에 있으면서 언어를 초월하는 것이다.

 

질료에 따라 정의된 예술적 창조란 그 질료를 초월하는 데 있다. 예술가는 언어학적인 목적의 랑그에서 해방되는데, 이는 랑그를 부정함으로써가 아니라 랑그의 내재적인 완성을 꾀하면서이다.(…) 내재적인 초월은 예술가와 질료에 대한 관계의 형식적인 정의를 제공하며, 이는 단지 시에서 뿐만이 아니라 모든 예술에도 적용된다.

 

그리고 최근의 한 연구에서 바흐친은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예술가는 랑그를 공들여 다듬는데, 이는 랑그 그 자체를 다듬는 것이 아니다. 있는 그대로의 랑그를 그는 초월한다.(…) (우리는 단어를 단어로 인정하기를 멈춰야 한다)(…) 우리는 예술가의 근본적인 의도를 질료를 초월하고자 하는 노력으로 표현할 수 있다.

 

바흐친은 이후 이 같은 낭만주의적인 구별을 거부한다. 그러나 말년의 텍스트 중의 하나에서 그는 독단적이지 않고자 하면서 문학과, 언어의 재현으로서의 상호 텍스트성 사이의 등가성을 정립한다.

 

어떤 조건하에서 순수하게 일원적인 목소리만 지닌 채, 주체와 객체 사이의 관계에서 완벽하게 제외된 담론이 문학에서 가능한 것일까? 작가가 타자의 담론을 듣지 않는 담론, 단지 작자 자신만이 완벽하게 존재하는 담론이 문학작품의 일차적 질료가 될 수 있는가? 주체와 타자와의 다소간의 관계는 모든 문체의 필요한 조건이 아닐까? 주체와 타자와의 다소간의 관계는 모든 문체의 필요한 조건이 아닐까? 작가는 늘 문학작품의 질료로서의 언어 밖에 위치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모든 작가는(순수한 서정시인이라 할지라도) 작가의 모습(그리고 작가의 다른 가면들)과 함께 자신 이외의 다른 목소리를 그가 쓰는 모든 담론에 부여한다는 점에서 늘 연극적이 아니던가? 아마도 한 가지 목소리로 되어 있는 담론, 주체-객체의 관계를 고려하지 않는 모든 담론은 어리석고 진정한 창조에 적합하지 않을 것이다. 진정하게 창조적인 목소리는 담론에서 늘 이차적인 목소리로 남아 있을 수 있을 뿐이다. 작가는 진행되는 언어 외곽에 그 자신을 위치시키면서 언어를 세공할 줄 아는 자이고 간접적으로 말할 줄 아는 재능을 소유한 자이다.

 

진정한 목소리는 이 이차적인 목소리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 내용은 명백하게 바흐친이 그 자신에게 던지는 내적인 대화를 따르고 있다. 여기서는 과거의 산문과 시의 구분이 없어진다. 가장 순수한 서정시일지라도, 그가 사용하는 언어의 재현적인 성격을 더 이상 피할 수 없다. 상호 텍스트성은 결코 부재할 수 없는 것이다. 이 상호 텍스트성의 여러 형식 중의 하나가 부재할 수 있을 뿐이다.

 

⑶ 형학

여기서 나는 간단하게 담론의 내부에서 이루어지는 담론의 재현의 분석에 기반해 바흐친이 해내는 상이한 유형학들을 요약하고자 한다. 「마르크스주의와 언어철학」이 쓰인 시기에 이 문제는 비교적 간단하게 나타난다. 볼로쉬노프/바흐친은 이 책에서 재현의 형식들 중의 하나인 인용된 담론만을 하고 있다. 그리고 그는 인용하는 담론과 인용된 담론 사이에 성립하는 관계를 기술하는 데 주력한다. 그것을 위해서 뵐플린이 회화(繪畵)의 유형학을 위해 공식화한 대립적 개념에 도움을 청한다. 이 대립은 선인 것과 회화적인 것의 “근본적인 개념들”이다. 먼저 뵐플린의 정의를 살펴보자.

 

선적으로 본다는 것은 사물들의 의미와 아름다움을 먼저 그들의 윤곽들(내면의 모양들 또한 윤곽을 가지고 있다)에서 찾아내는 것이고 이때의 시선은 때로는 대상들의 경계 부분에 향하고 있거나 주변에서부터 대상을 파악하게 된다. 반면에 덩어리별로 본다는 것은 주의를 경계 부분에서부터 다른 곳으로 돌리는 일이며 윤곽에는 점점 다소간 무관심하게 되며, 대상들은 이때 인상의 일차적인 요소를 형성하는 점들처럼 나타난다.(…) 한편으로 단순하고 명백한 선은 구분하는 데 그 기능이 있다면 다른 한편으로 흐릿해진 경계들은 형식들 사이의 관계를 조장한다.

 

뵐플린은 이 범주를 “고전적인” 것과 “바로크적인” 것을 대립시키는 데 사용한다. 여기서 그의 대립의 낭만적인 동기가 잘 드러난다. 반대적인 것들이 화합되어 있는지 혹은 분리되어 있는지에 따라 역사의 중요한 시기들을 구분하는 데 만족했던 것은 실상 낭만주의자들이다. 이런 구분의 대표적인 예가 “고전적인” 것과 “낭만적인” 것 사이의 대립이다. 우리는 만약 이 대립을, 인용하는 담론과 인용된 담론 사이의 관계에 적용할 경우 어떤 결과에 도달할지를 상상할 수 있다.

 

작가의 담론과 타자의 담론 사이의 상호 연관 역학을 어떤 방향으로 발전시킬 수 있는가? 이 역학에서 우리는 두 개의 중요한 방향을 발견한다. 첫째로 타자의 담론에 대한 능동적인 반작용의 경향은 주체의 총체성과 그 자신에 고유한 정당성을 고수하는 데 있다. 랑그는 타자의 담론에 명백하고 안정된 한계를 부여하는 경향이 있다. 이 경우, 상투어와 상투어의 변형태들은 더 엄격하고 더 분명하게 타자의 담론을 분리하고, 작가의 어조들을 제거하는 데 사용되며 개인적인 언어학적 특수성들을 요약하고 발전시키는 데 사용한다.(…) 예술사에서 뵐플린이 사용한 용어를 이용해서 우리는 작가의 담론과 타자의 담론 사이의 언어적 상호 연관의 역학이 가지는 이 첫 번째 방향을 타자의 담론을 전달하는 선적인 문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이 문체의 주된 경향은 타자의 담론에 외면적으로 명백한 윤곽을 만들어주는 데 있는데, 이때 타자의 담론은 다소간 내적으로부터 개인화 되어 있다.

 

이에 정반대되는 극에서 우리는 “회화적” 문체를 발견한다.

 

작가의 맥락은 타자의 담론의 농밀하고 폐쇄적인 성격을 용해하고 타자의 담론을 다시 흡수하고 그것이 만드는 경계를 지우려고노력한다. 타자의 담론을 전달하는 이 같은 문체를 우리는 회화적이라고 부를 수 있다. 이 경향은 타자의 담론의 윤곽의 뚜렷한 성격을 지우는 데 있다. 이 경우 담론 자체는 좀 더 강하게 개인적인 성격을 지닌다. 타자의 언술의 상이한 국면들은 다듬어지고 뉘앙스를 띠게 된다. 우리는 단지 언술 혹은 그 담론이 지니는 주장의 개관적인 의미만을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그 담론의 언어적 실현의 모든 특수성까지를 감지하게 된다.

 

이 같은 문체에서는 한 목소리가 다른 목소리에 비해 주도적일 수 있으며 그것이 후에 하부 분류를 가능하게 한다.

이 시기의 또 다른 연구에서 볼로쉬노프/바흐친은 내적 대화의 형식들을 연구한다. 다양화의 원칙이 여기서는 전과 다르다. 여기서 문제되는 것은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이야기할 때, 이차적인 목소리가 해내는 역할에 관한 것이다. 가장 공통적인 경우에, 이 이차적인 목소리는 우리가 속해 있는 사회집단의 전형적인 대변자의 목소리이며 이 둘 사이의 갈등은 한 개인이 이 사회집단의 규범과 직면하면서 생기는 갈등이다. 두 번째의 경우는 이 두 목소리 사이에 일종의 동등한 관계가 정립되는 경우이다. 이 상황은 우리가 동시에 두 개의 사회집단에 속해 있다고 느끼는 것을 의미하며, 여기서의 갈등은 아직 역사 속에 명백히 드러나 있지 않다. 만약 끝으로(이것이 세 번째 경우인데) 이차적인 목소리가 아무런 안정된 위치를 차지하고 있지는 않지만 순간의 단순한 정황이 만들어내는 일련의 통일성이 없는 반작용으로 이루어져 있다면, 이는 인간이 그의 환경에 다름 아닌 한정된 집단에서 소속을 잃었기 때문이며, 이때 그는 이성을 잃을 위험이 있다.

 

특별히 불리한 사회적 조건들 속에서 한 인격과 그를 배양하는 이데올로기적 환경과의 이 같은 분리는 결국 의식의 완벽한붕괴, 광기 혹은 정신적 착란으로까지 갈 수 있다.

 

담론이 재현될 수 있는 상이한 방식들에 대한 전면적인 유형화를 바흐친이 제시하는 것은 도스토예프스키에 대한 그의 저서의 초판에서이며, 이 유형화는 그 책의 재판에서 약간 수정될 뿐이다. 조금 단순화시켜 우리는 그것을 다음과 같은 도식으로 요약할 수 있다(각 유형의 가장 공통적인 예는 괄호 안에 제시했다).

   

   

일원적인 목소리의 담론에 대한 논의에서 바흐친은 그가 이미 다른 문제들을 다시금 언급한다. 그러나 그는 전에 「마르크스주의와 언어철학」에서 이미 시도한 유형학을 다시 되풀이하지는 않는다.

 

인물의 재현된 담론과 타자 사이의 상대성(相對性)의 정도는 다양할 수 있다. 그 정도를 보기 위해서는 예를 들면, 톨스토이의 안드레이 왕자의 담화와 고골리의 아카키 아카키예비치 같은 인물들의 담화를 비교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인물들이 대상을 향하는 직접적인 방향이 강화됨에 따라, 그리고 상대적으로 객체와의 대상성이 줄어듬에 따라 서술자의 담론과 등장인물의 담론 사이의 관계는 한 대화의 질문과 답변 사이에 성립되는 관계와 가까워지기 시작한다.

 

이중적인 혹은 두 개의 목소리를 지닌 담론은 단지 그 담론이 재현되었다는 사실에서 뿐만이 아니라, 동시에 두 개의 발화의 맥락에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로 특징지어진다. 여기서 다음과 같은 사실이 언급될 수 있다.

 

이미 담론의 고유한 방향을 지니고, 그것을 유지하고 있는 하나의 담론에 타자의 담론이 새로운 의미론적 방향을 부가할 수 있게끔, 작가는 타자의 담론을 그의 순수한 목적을 위해 사용할 수 있다. 이 같은 담론은 원칙적으로는 타자의 담론으로 인식되어야 한다. 이때 나의 담론은 두 개의 의미론적 방향, 두 개의 목소리를 지니고 있다.

 

능동적인 담론과 수동적인 담론 사이의 차이는 이전의(혹은 더 일반적으로 말해 다른) 발화의 역할에 달려 있다.

 

패러디에서와 마찬가지로 양식화에서도, 작가는 타자의 담론을 그 자신의 방향을 표현하기 위해 사용한다. 능동적인 담론에서 타자의 담론은 작가의 담론의 외곽에 남아 있다. 그러나 작가의 담론은 이 타자의 담론을 인식하고 있으며 그것과 관계를 맺고 있다. 여기서 타자의 담론은 새로운 해석으로 재축조되지는 않았으나, 작가의 담론 밖에 남아 있으면서 어떤 방식으로든지 작가의 담론에 작용을 가하고 영향을 주며 그 담론을 결정한다.

 

이 같이 정의된 각각의 범주들이 다시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에서 유도된 예들에서처럼 세분된다. 담론의 재현이 제기하는 상이한 문제들은 실제로 도스토예프스키에 대한 연구서보다 약 오 년 후에 쓰인 “소설 속의 담론”의 중심 주제이다. 좀 전에 제시한 유형화와 비교해 볼 때 나타나는 큰 차이점은 바흐친이 여기서는 더 이상 재현의 모든 형식들을 하나의 공식 속에 단일화하자 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반면에 각자 완전히 독립적인 세 가지의 국면을 상정한다.

첫째는 장소이다. 타자의 담론을 “만나는” 장소는 다양할 수 있다. 그것은 사람들이 말하는 대상 혹은 그 말이 전달되는 수신자일 것이다(이는 앞에 제시한 도표 속의 “능동적 형태”와 “수동적 형태” 사이의 대립과 조금 비슷하다). 바흐친에 의하면 이전의 모든 명명에서 제외된 때묻지 않은 대상은 없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무한한 대상의 순수한 완전 무결성 대신에, 산문가는 사회적인 의식이 이 대상에 남긴 수많은 노선, 길, 소로들을 발견한다. 대상 자체에 존재하는 모순들 외에도 산문가는 또한 그 대상 주위의 사회적인 이질성과 랑그들의 혼란한 뒤섞임을 발견한다. 대상과의 대화는 대상 주위에서 이루어지는 사회적 대화와 서로 얽힌다. 산문가에게서 대상은 이질적인 목소리들의 집중이며, 이 목소리들 중에서 그의 목소리 또한 울려나온다. 이 목소리들이 그 자신의 목소리에 필요한 기반을 만들며, 이 기반 없이는 그의 문학적 뉘앙스들은 파악할 수 없는 것으로 남아있고 “공명하지”않는다.

 

타자의 담론과의 충돌은 여기서 계사적(paradigmatique)이다. 그것은 동일한 대상에 부여할 수 있는 서로 교환 가능한 여러 명명들 사이의 갈등과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통사적으로 새로운 통사적인 상황 주위에서 대화자의 잠정적인 담론과 만날 수 있는 또 다른 가능성이 존재한다. 이때 타자의 담론은 과거보다는 미래에 속하게 된다.

 

발화자는 타자, 즉 담론을 이해하는 자의 지평을 고려하면서 그의 담론의 방향을 정하려 하고, 이때 이 이차적인 지평의 몇몇 국면들과 대화관계에 들어간다.(…) 아주 자주 특히 수사학적인 형식에서 청취자를 조준하는 일, 즉 청취자에게 상응하는 담론의 내적인 대화는 간단히 대상을 숨긴다. 구체적인 한 청취자를 설득하는 것은 그 자체가 문제가 되고, 대상에 대한 모든 창조적인 작업에서 담론을 벗어나게 한다.

 

두 번째로 특히 소설에서 그런데, 타자의 담론을 상기하는 것은 여러 가지 상이한 형태를 띨 수 있다. 바흐친은 그것을 다음과 같이 열거하고 있다. 첫째는 구체적인 서술자가 담당하고 있지 않은 타자의 담론(이것은 W. 부스의 용어로는 “연결 가능하지 않은 것”이다), 둘째는 구술 혹은 쓰인 형태로 서술자가 타자의 담론을 재현하는 경우, 세 번째는 직접화법과 “등장인물들의 영역,” 마지막으로 타자의 담론이 삽입된 장르들이 그것이다. 이들 범주들 중의 첫 번째는 패러디, 양식화 혹은 아이러니들(이것은 여기서 이중적인 발화를 가지고 있는 담론의 한 변형태로 제시되고 있다)로 세분된다. “등장인물들의 영역”이라는 용어는 아래와 같은 문장 속에서 처음으로 등장한다.

 

이질론은 작가의 등장인물들에 대한 담론에서도 역시 산발적으로 퍼져 있는데, 그것이 특수한 “등장인물들의 영역”을 만들어낸다. 이 영역은 등장인물들의 완전하지 않은 담론이나 타자의 담론이 몰래 전달되는 상이한 형식들이나 이 담론 내부에 흩어져 있는 단어와 표현들에 의해서, 그리고 작가의 담론의 외적인 요소들(생략부호, 의문부호, 감탄부호)에 의해서 형성된다. 이 영역은 어떤 방식으로든지 작가의 목소리와 혼합되어 있는 등장인물들의 목소리의 영향권이다.

 

세 번째로 타자의 담론이 개입되는 정도가 다양하게 변화될 수 있다. 바흐친은 여기서 세 가지를 제시하고 있다. 첫째는 타자의 담론이 전적으로 존재하는 경우로, 명백한 대화의 경우라고 하겠다. 둘째는 정반대의 경우로 타자의 담론이 어떤 종류의 물질적인 징표로 확인되어 있지 않고 단지 상기되어 있을 뿐인 경우이다. 그것은 이 타자의 담론이 한정된 사회집단의 집단적인 기억 속에 남아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패러디, 양식화 그리고 바흐친이 “변형태”라고 부르는 또 다른 유형의 상기(想起)이다.

 

여기서는 단 하나의 언어만이 언술 속에 실제적으로 나타나 있는데 그것은 또 다른 언어의 조명 하에서만 나타난다. 이 두 번째의 언어는 실현되어 있지 않고 언술의 외곽에 남아 있다.

 

이 두 유형의 정도 사이에 세 번째의 것이 놓이는데, 이것은 바흐친에게는 아마도 가장 흥미로운 것으로 그는 “혼종형성(混種形成)”이라는 이름으로 부르고 있다. 그것은 자유간접화법의 일반화이다.

 

우리는 혼합적 축조라는 말로 문법적(통사적)이고 구성적인 특징들에서 한 발화자에게 속해 있는 언술을 지칭하는데 이 언술 속에는 실제로 두 개의 언술, 두 종류의 말하는 방법, 두 가지의 화법과 두 개의 ‘언어’ 그리고 두 개의 의미론적이고 가치평가적인 지평이 혼합되어 있다.

 

바흐친은 이 두 가지 목소리가 개인적이 아니라 사회적일 수밖에 없음을 상기시키고 있다.

바흐친은 “텍스트의 문제”라는 연구에서 마지막으로 이에 관해 언급한다. 그러나 체계적인 어떤 유형화도 발견되지 않고, 오히려 변형이 가능한 대화이론의 여러 국면에 대해 환기시킬 뿐이다. 예를 들면 그것은 공공연한 대화에서 가장 미세한 암시에 이르기까지 대화의 명백하게 드러나는 정도는 변화되며 타자의 담론에 대한 가치평가 또한 긍정적일 수도 혹은 부정적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토론, 논쟁, 패러디 같은 대화이론의 협소한 해석이 있다. 이들은 가장 명백한 형식들이나 또한 가장 조잡한 형식들이다. 타자의 담론에 대한 신뢰, 가장 충실한 수용(권위적인 담론), 깊은 의미의 (강요된) 추종, 연구, 추출, 여러 단계와, 무한한 뉘앙스를 지니는 의견일치, 한 의미에 다른 의미가 중첩되는 것, 한 목소리가 다른 목소리에 중첩되는 것, (동일화되지 않는) 혼합에 의한 의견강화, 여러 가지 목소리의 배합(목소리의 여고), 보충을 하면서 이해하는 것, 이해의 한계를 넘어선 형식 등이다.

 

또한 상호 텍스트적인 대화에서 의도적인 형식과 그렇지 않은 것을 구별할 수 있다.

 

두 개의 언술(대상으로서도 아니고 언어적인 예로서도 아닌)은 의미론적 지평에서 중첩되었을 때, 대화적인 관계에 놓인다. 그러나 이것은 비의도적인 대화이론의 특수한 형태이다(예를 들면 동일한 문제에 대한 상이한 학자와 현인들의 언술, 그에 대해 이루어진 여러 시대의 다양한 언술들의 경우가 그러하다).

 

마지막으로 작가의 목소리와 타자의 목소리 사이의 거리가 변화될 수 있다.

 

인용부호 안에 사용된 단어, 말하자면 타자의 것으로 인정되고 사용된 단어와, 인용부호 없이 사용된 단어(혹은 다른 단어). 단어들 사이의 생소함(혹은 자기 것으로 하는 성향)의 정도와 그들이 발화자와 취하는 거리의 정도는 무한하게 변한다. 단어들은 작가의 단어들의 측면에서 볼 때, 상이한 거리를 취하고 또한 상이한 국면에 위치한다. 자유 간접적인 담론뿐만 아니라 타자의 담론이 완전히 숨겨져 있거나 반만 숨겨져 있거나 혹은 산재해 있는, 상이한 형식들이 있을 수 있다.

 

이들 문제 전반에 대한 가장 깊고 체계적인 제시는 역시 “소설 속의 담론”에서 한 제시이다. 그것은 바흐친의 “초월적 언어학”에 대한 사고의 귀착점이다.

 

각주

1) Tzvetan Todorov, 최현무 역, 「바흐친: 문학사회학과 대화이론」(서울: 도서출판 까치, 1987), pp. 93~110. "intertextuality(間텍스트성, 相互텍스트성)"는 "intersubjective(相互主觀的, 間主觀的)"과도 매우 관련이 깊은 용어다. Tzvetan Todorov는 이 용어를 M. M. Bakhtin의 ‘대화이론’과 같은 의미로 사용하고 있으며, 그에 의하면 중첩된 두 개의 언술은 우리가 대화적이라고 부를 수 있는 의미론적인 관계의 특수한 유형을 형성한다고 한다. 그리고 이들 관계들은 논리적인 관계, 언어학적인 관계, 심리학적이거나 기계적인 혹은 또 다른 종류의 자연적인 관계로 귀결될 수 없다고 한다. 그 구성 요소들은 완전한 혹은 잠정적으로 완전한 언술들이며, 이 언술의 배후에는(내부에는) 실재적 혹은 잠정적인 파롤의 주체들, 언술의 저자들이 위치하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언술이 그 저자의 모방할 수 없는 개인성을 표현한다는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현재 여기에 있는 언술은 하나의 세계관의 표명처럼 인식되며 여기에 없는 언술은 또 다른 언술의 표명이다. 실제로 대화가 성립되는 것은 이들 세계관의 상이한 표현 사이에서이다. 이 ‘대화’에 대립되는 것으로 먼저 머리에 떠오르는 용어는 ‘독백’으로서, 톨스토이의 세계는 한결같이 독백적이라고 한다. 그의 세계에는 작가의 목소리 이외의 또 다른 이차적인 목소리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며, 도스토예프스키 이후, 多聲和音은 강력하게 세계의 모든 문학에 도입되며, 대화이론(등장인물들 상호간의 주관성)에서 도스토예프스키는 일종의 한계를 초월하며 그의 대화이론은 보다 높고 새로운 자질을 획득한다고 한다. 이 말은 원래 경험론에서 나온 것으로, 경험론에 의하면 지식은 후천적인 감각 경험에서 얻어진 것이므로 객관적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 의미는 첫째 개인적 주관에만 타당한 것이 아니라 어떠한 주관에도 타당하다는 것과, 둘째 대상 즉 사실의 세계에 부합한다는 것을 포함한다. 이때 첫째를 “상호주관적”이라 하고 둘째를 “실질적”이라 하는 것인데, 그러나 M. M. Bakhtin의 경우는 G. W. F. Hegel의 자기 자신 안에서 끊임없이 변증법적 운동을 하는(대화를 하는) 타자와 대자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2) 바흐친(Mikhail Mikhailovich Bakhtin 1895∼1975): 소련의 인문학자, 철학자. 사적인 서클에서 강의를 하다가 나중에 모르드바교육대학의 교수가 되었다. 도스토예프스키나 라블레의 작품을 통하여 작가가 타자(他者)의 언어에 파고들어 타자와 완결하지 않는 대화관계를 가진다든지, 소설의 철학적 극치로 카니발의 의의를 논했다. 주된 저서에 도스토예프스키 시학의 여러 문제」 「프랑소와 라블레의 작품과 중세 르네상스의 민중문화등이 있다. 소설 속의 작중인물(他者)이 작가로부터 독립하여 움직이면서 양자가 대화적 관계에 들어가는 것은 타자가 작가=자기 속에 살기 때문이며, 자기 속에는 무수한 타자의 소리가 늘 울려 퍼지고 있다. 또한 자기는 타자를 늘 포함하면서도 세계에 대해서는 바깥에 위치하고, 타자와의 대화에서 자타의 범위는 어긋나면서 상궤를 일탈하여 고상하고 외설이 뒤섞인 카니발적(카니발레스크) 세계 속으로 무화(無化)되어 간다는 것이다. 바흐친의 프랑소와 라블레의 작품과 중세르네상스의 민중문화도스토예프스키론에서 전개하는 카니발론(論)은 생사의 경계를 웃음으로 돌파하는 민주문화의 존재와 다이나미즘(dynamism;역동주의), 그리고 이 민중문화의 분류를 도입하는 작가의 문장을 연구함으로써 폐쇄되어가는 이 시대의 문화 및 문학 상황에 영향을 미치고자하는 것이 그 목적이었다. (편주)

3) Aleksandr Sergeevich Pushkin(1799~1837): 러시아의 시인․소설가․극작가. 러시아의 국민문학과 현대 문장어의 확립자. 젊었을 때, 그 혁명적인 시 때문에 流刑(1820)되었으며 평생토록 정부의 압박을 받음. 결투로 죽었음. 시극 “보리스 고두노프,” 운문소설 “예프게니 오네긴(Евгений Онегин),” “대위의 딸” 등이 있음. 역자 최현무는 “유제니 오네긴”으로 표기하고 있으나 원음을 살려 “예프게니 오네긴(Евгений Онегин)”으로 바로 잡았음. (편주)

4) M. M. Bakhtin은 산문과 시를 대립적으로 기술하고 있다. 즉, 산문은 ① 상호 텍스트적인 성격이 있고 ② 언어의 이질적 다양성을 표현하고 ③ 대화이론(이중의 목소리)을 인정하며 ④ 발화의 재현(動的)이며 ⑤ 언어(랑그)를 간접적으로(거리를 두고) 또 보편적으로 표현한다고 하는 반면, 시는 ① 상호 텍스트성이 없고 ② 언어의 이질적인 다양성을 망각하고 ③ 대화이론(이중의 목소리)를 부정하고 ④ 발화의 상태(靜的)이며 ⑤ 언어(랑그)를 직접적이며 개별적으로 표현한다고 한다. 다시 말해서 감정을 직접적으로 표현하거나 메타포나 패러독스와 같은 수사법을 동원하여 개별적 의미를 만들어내는 시를 지칭하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현대 시론가들은 이렇게 감정을 직접 표현한 시를 낮게 평가하고 있음은 물론 메타포나 패러독스로 표현한 시도 좋은 시의 반열에 올려놓는 것을 재고하고 있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See. T. S. Eliot의 “전통과 개인의 재능”과 Cleanth Brooks의 “해석의 이단,” R. Jakbson의 “시란 무엇인가,” Benjamin Hrushovski의 “현대시의 자유율” 등). 그리고 시에 있어서도 多聲性, 상호 텍스트성, 언어의 이질적 다양성, 발화의 동적인 재현이 있을 때 높이 평가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예를 들면, 아이러니가 있다고 하는 林悌의 시조와 金明秀의 “下級班 敎科書” 이외에, 金光圭의, “학생들의 교복이/자율화된 시대/운전기사 강씨네는/차고에 딸린 두 칸 짜리/연탄 방에서 산다/마누라는 안집의 빨래를 해주지만/밥은 따로 해먹는다/미스터 강은 레코드로얄을 끈다(“二代” 중에서).” 그리고, 申庚林의, “비료값도 안나오는 농사 따위야/아예 여편네에게 맡겨 두고/쇠전을 거쳐 도수장 앞에 와 돌 때/우리는 점점 신명이 난다/한 다리를 들고 날나리를 불꺼나/고갯짓을 하고 어깨를 흔들꺼나(“農舞” 중에서),” 마 오 바쇼오(松尾芭蕉)의, “한밤에 남몰래/벌레는 달빛 아래/밤을 갉는다(夜ル竊ニ虫は月下の栗を穿つ)”와 같은 하이쿠(俳句)가 그러한 것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편주)

5) M. M. Bakhtin․V. N. Vološnov, 송기한 역, 「마르크스주의와 언어철학」(서울: 겨레, 1988), M. M. Bakhtin․V. N. Vološnov, 송기한 역, 「바흐친이 말하는 새로운 프로이트」 참조. (편주)

6) Heinrich von Wölfflin(1864~1945): 스위스의 미술사가. 브르크하르트의 문화적 기술의 입장을 극복하고 樣式史로서의 미술사를 제창하고, 근대문화의 다섯 對槪念에 의한 문화양식의 법칙 발견으로 미술사학에 철학적 기초를 주었음. 주저는 「미술사의 기초개념」. Jacob Burckhardt(1818~1897): 스위스의 역사가․미 사가. 미적 입장에서 이탈리아의 르네상스 문화를 연구하여 르네상스의 본질을 “인간과 세계의 발견”이라고 요약하고 르네상스의 근대적 개념을 확립함. 저서는 「그리스 문화사」,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문화」, 「세계사적 고찰」등이 있음. (편주)

7) 임지룡, 「국어 의미론」(서울: 탑출판사, 1992), pp. 76~87. E. Coseriu에 의하면, 어휘장은 구조적 관점에서 어휘의 계열관계이며, 이 계열관계는 어휘적 내용 연속체가 언어 가운데 낱말의 단위로 분할됨으로써 형성된다. 결합관계는 언어기호 내용간의 관계를 의미하는데, W. Porzig는 이것을 의미장이라고 한다. 한국어로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언어의 상하관계(hyponymy)와 어휘장(lexical field)․의미장(semantic field)의 개념

 

색깔 → 上位語(superordinate)

      ∧

푸른 꽃 붉은 꽃 → 下位語(subordinate)

         ∧

붉은 사과 붉은 피

 

“푸른 꽃,” “붉은 꽃”의 관계는 계열관계(paradigmatic relation)→어휘장(수식, 전개, 합성)

“푸른 꽃,” “붉은 피”의 관계는 결합관계(syntagmatic relation)→의미장(類緣, 선택, 포함) (편주)

 

참고자료

러시아 형식주의의 기본개념들-빅토르 어얼리치(Victor Erlich) / 박거용 역

기술(技術)로서의 예술-빅토르 슈클로프스키(Victor Shklovsky) / 문학과 사회연구소 역

게오르르 루카치: 총체성의 개념-파스칼( Roy Pascal) / 김대웅 역

형식주의 문학논쟁-우스이 요시미(臼井吉見) / 주근옥 역